▶ 문체반정이란?
- 중국에서 들어온 신문체(소설 또는 희곡등의 새로운 형식)는 쓰지말자.
- 전통적인 고문을 문장의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 고증학, 패관소설 등 명말청초의 문집등은 사상오염이다.
- 순정한 문체 (고전문체)로 돌아가자.
▶ 18세기 조선의 문화
명말청초시기에 유행하던 신문체, 서적, 문화등이 조선에 널리 회자되고 있었다. 당시 지배세력이었던 노론중신들이 신문체를 많이 쓰고 있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또한 신선하고 새로운 문체로 고전과는 다른모습이었다. 조정중신들까지도 신문체의 형식을 많이 따르고 있었으며 그들의 새로운 문화에 경도되었다고 정조는 생각했다. “우리나라에서 태어났으면 또한 우리채글 읽는 것이 마땅하다” (정조. 일득록) “성리학자를 자처하는 조선의 사대부가 어찌 북벌에 뜻을 두지 않고 청나라의
고증학에 경도되느냐~“ 특히 정조의 고증학 비판은 그 이단적 사유에 주안점을 둔 것이 아니라 만주족이 장악한 청나라 지식인들을 비판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현실과 무관한 고증학에 몰
두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 문체반정책
- 중국의 고증학과 관련된 모든 패관소설 및 서적 수입금지.
- 새로운 사유와 지식을 담은 서적은 금서로 묶어버림.
- 성균관 유생들중 문체가 불순한 자들은 과거에 응시 할 수 없음.
- 연암 박지원등 문체반정으로 색출된 노론중신들에게 자송문(반성문)을 쓰게함.
- 규장각의 기능을 강화시켜며 성리학의 주석적 기능만을 옹호하게 하여, 경전을 토론하고 인재를 양성함. 거기에서 간행한 책들을 정조 자신이 외우고 익혀 일세의 법도로 삼음.
▶정조는 왜 문체반정을 시행했을까?
정조에겍는 ‘개혁군주’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규장각을 설치해 문예부흥을 이끌고 서얼을 등용해 신분 차별의 완고한 벽을 허물기 시작했고, 시전상인들의 독점적 상업특권인 금난전권을 철폐하는등 기득권 세력과의 전쟁도 마다하지 않았던 정조는 왜 그의 행적과 들어맞지 않는 자기 모순적 정책을 하였는가?
▶ 정조의 숨은 의도
지배세력이던 노론을 잡문이라 하여 문체반정으로 색출하고 견제하였다. 또한 당시 천주교도들이 노론과 대립하던 남인들이 대부분이라 국가적 차원으로 시행하려던 천주교도 탄압을 문체반정을 이유로 정국의 물줄기를 돌렸다. 또한 그로인해 노론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정조의 깊은 노림수가 담긴 방책.
문체반정은 쇠락해가는 봉건왕족체제를 유지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책으로 택했던 정조의 계책.
▶ 문체반정의 결과
정조는 사후. 정순왕후에 의한 ‘사학종식’의 이유로 많은 실학자와 정조의 개혁세력을 탄압하는 빌미를 제공. ‘세도정치와 피의민란’이 정조의 책임론으로 평가. 조선은 정조 사후에 미래 ‣ 과거로 개방 ‣ 폐쇄로 소통 ‣ 단절로 돌아섰다는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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