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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여섯 가지 계속해서 생각함(隨念) 7. Chaanussatiniddeso 1. Buddhānussatikathā
[* 淸淨道論 붓다고사 스님 지음, 대림 스님 옮김]
123. Asubhānantaraṃ uddiṭṭhāsu pana dasasu anussatīsu
1. 부정한 것 다음에 열 가지 계속해서 생각함을 설했다.
punappunaṃ uppajjanato satiyeva anussati,
거듭 거듭(punappunaṃ) 일어나기 때문에 마음챙김(sati)이 바로 '계속해서 생각함(anussati, 隨念)이다.
pavattitabbaṭṭhānamhiyeva vā pavattattā saddhāpabbajitassa kulaputtassa anurūpā satītipi anussati,
혹은 일어나야 할 곳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에
바른 믿음으로 출가한 선남자에게 어울리는(anurūpā) 마음챙김(sati)이 '계속해서 생각함(anussati)'이다.
buddhaṃ ārabbha uppannā anussati buddhānussati, buddhaguṇārammaṇāya satiyā etamadhivacanaṃ.
① 부처님에 대해서 일어난 계속해서 생각함(anussati, 隨念)이 부처님을 계속해서 생각함이다.
부처님의 공덕을 대상으로 한 마음챙김의 동의어이다.
Dhammaṃ ārabbha uppannā anussati dhammānussati,
svākkhātatādidhammaguṇārammaṇāya satiyā etamadhivacanaṃ.
② 법에 대해서 일어난 계속해서 생각함이 법을 계속해서 생각함이다.
잘 설해졌음 등의 법의 공덕을 대상으로 한 마음챙김의 동의어이다.
Saṅghaṃ ārabbha uppannā anussati saṅghānussati,
suppaṭipannatādisaṅghaguṇārammaṇāya satiyā etamadhivacanaṃ.
③ 승가에 대해서 일어난 계속해서 생각함이 승가를 계속해서 생각함이다.
좋은 길에 들어섬 등의 승가의 공덕을 대상으로 한 마음챙김의 동의어이다.
Sīlaṃ ārabbha uppannā anussati sīlānussati, akhaṇḍatādisīlaguṇārammaṇāya satiyā etamadhivacanaṃ.
④ 계에 대해서 일어난 계속해서 생각함이 계를 계속해서 생각함이다.
부서지지 않음 등의 계의 공덕을 대상으로 한 마음챙김의 동의어이다.
Cāgaṃ ārabbha uppannā anussati cāgānussati, muttacāgatādicāgaguṇārammaṇāya satiyā etamadhivacanaṃ.
⑤ 보시에 대해서 일어난 계속해서 생각함이 보시를 계속해서 생각함이다.
너그러이 보시함 등의 공덕을 대상으로 한 마음챙김의 동의어이다.
Devatā ārabbha uppannā anussati devatānussati,
devatā sakkhiṭṭhāne ṭhapetvā attano saddhādiguṇārammaṇāya satiyā etamadhivacanaṃ.
⑥ 신들에 대해서 일어난 계속해서 생각함이 신들을 계속해서 생각함이다.
신들의 증명의 자리에 두고 자기의 신심 등의 덕을 대상으로 한 마음챙김의 동의어이다.
Maraṇaṃ ārabbha uppannā anussati maraṇānussati, jīvitindriyupacchedārammaṇāya satiyā etamadhivacanaṃ.
⑦ 죽음에 대해서 일어난 계속해서 생각함이 죽음을 계속해서 생각함이다.
생명기능(命根)이 끊어짐을 대상으로 한 마음챙김의 동의어이다.
Kesādibhedaṃ rūpakāyaṃ gatā, kāye vā gatāti kāyagatā,
kāyagatā ca sā sati cāti kāyagatasatīti vattabbe rassaṃ akatvā kāyagatāsatīti vuttā,
kesādikāyakoṭṭhāsanimittārammaṇāya satiyā etamadhivacanaṃ.
⑧ 머리카락 등으로 분류되는 물질적인 몸에 속하기 때문에 '몸에 대한(kāya-gatā)'이다.
혹은 몸에 갔기 때문에 '몸에 대한'이다.
그것은 몸에 대한 것(kāyagatā)이고
또 그것은 마음챙김(sati)이기 때문에 몸에 대한 마음챙김(kāyagatasati)이다.
그러므로'kāyagatasati'라 말할만하지만 [gata라고] 단음으로 만들지 않고
[장음을 취하여 gatā로 만들어] 'kāyagatāsati'라고 했다.
머리카락 등 몸의 각 부분의 표상을 대상으로 한 마음챙김의 동의어이다.
Ānāpāne ārabbha uppannā sati ānāpānassati, assāsapassāsanimittārammaṇāya satiyā etamadhivacanaṃ.
⑨ 들숨날숨에 대해서 일어난 계속해서 생각함이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ānāpānassati, 出入息念)이다.
들숨과 날숨의 표상을 대상으로 한 마음챙김의 동의어이다.
Upasamaṃ ārabbha uppannā anussati upasamānussati,
sabbadukkhūpasamārammaṇāya satiyā etamadhivacanaṃ.
⑩ 고요함(upasama)에 대해서 일어난 계속해서 생각함이 고요함을 계속해서 생각함이다.
모든 괴로움이 고요하게 가라앉음을 대상으로 한 마음챙김의 동의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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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cafe.daum.net/pali-study/8Y0Y/33
佛. 法. 僧.. 施. 戒. 天. - 계속해서 생각함 경(A6:9/25), 깟짜나 경(A6:26)
마하나마 경(A6:10/A11:12) http://cafe.daum.net/pali-study/9akK/31
Yāvañcidaṃ tena bhagavatā jānatā passatā arahatā sammāsambuddhena sambādhe okāsādhigamo
anubuddho sattānaṃ visuddhiyā sokaparidevānaṃ samatikkamāya dukkhadomanassānaṃ atthaṅgamāya
ñāyassa adhigamāya nibbānassa sacchikiriyāya, yadidaṃ cha anussatiṭṭhānāni.
"아시는 분.보시는 분.그분.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는 재가의 삶 가운데서 기회 얻음을 깨달으셨습니다.
이것은 중생들을 청정하게 하고, 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게 하며,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옳은 방법을 터득하게 하고, 열반을 실현하게 하기 위한 것이니,
그것은 바로 여섯 가지 계속해서 생각함의 장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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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06. 20. 부기 ------------------------------------------------------------
계속해서 생각함[隨念, anussati]
[*대림스님.각묵스님 공동 번역 및 주해 아비담마 길라잡이 (하) 749-750쪽]
[해설] '계속해서 생각함'으로 옮긴 anussati는 anu(따라서) + √smṛ(to remember)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다.
'따라서 기억함'이라는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 '계속해서 생각함'으로 옮겼다.
경에서는 '기억'의 의미로 나타난다.
sati는 마음챙김으로 옮기고 있는데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기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수행용어로 정착되어 기억이라는 뜻만으로 sati를 이해하면
불교에서 쓰이는 수행의 중요한 측면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2장 §5 두 번째 해설 참조)
그러나 anussati는 사실 [이전에 있었던 것을] 따라서 기억하는 기억의 의미가 강하지만
여기서도 기억으로 옮겨 버리면 수행의 의미가 퇴색되므로
'계속해서 생각함'으로 옮긴다. 한문으로 요즘 隨念으로 옮기기도 한다.
(2장 §5 두 번째 해설 참조) [*아비담마 길라잡이 (상) 225-226쪽]
[청정도론 XIV. 141]:
Saranti tāya, sayaṃ vā sarati, saraṇamattameva vā esāti=sati.
Sā apilāpana lakkhaṇā, asammoharasā, ārakkhapaccupaṭṭhānā, visayabhimukhabhāva paccupaṭṭhānā vā,
thirasaññāpadaṭṭhānā, kāyādisatipaṭṭhāpadaṭṭhānā vā,
ārammaṇe daḷhapatiṭṭhitattā pana esikā viya cakkhudvārādirakkhaṇato dovāriko viya ca daṭṭhabbā.
"이것 때문에 기억(Saranti), 혹은 이것은 그 스스로 기억하고,
혹은 단지 기억하기 때문에 마음챙김이라 한다.
[대상에] 깊이 들어가는 것(apilāpana)을 특징으로 한다.
잊지 않는 것(asammosa)을 역할로 한다. 보호하는 것(ārakkha)으로 나타난다.
혹은 대상과 직면함(visayabhimukhabhāva)으로 나타난다.
강한 인식(thirasaññā)이 가까운 원인이다.
혹은 몸 등에 대해서 마음챙김을 확립함[念處, satipaṭṭhā]이 가까운 원인이다.
이것은 기둥처럼 대상에 든든하게 서 있기 때문에(patiṭṭhitattā),
혹은 눈 등의 문을 지키기 때문에(rakkhaṇato) 문지기처럼 보아야 한다."
하단 주) apilāpana(nt.)는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api + √lap(to prate, to speak)에서 파생된 명사로 간주하여 '헤아림, 반복함'의 뜻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마음챙김은 반복해서 거듭 챙기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는 말이겠다.
둘째는 a(부정어) + √plu(to float)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조롱박 등과 같이
[물위로] '둥둥 떠다니지 않는 것(DhsA.147)'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마음챙김은 대상의 주위로 맴돌지 않고 대상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는 말이다.
....
이것이 정통 상좌부 불교의 견해라서 역자들도 이 후자의 입장을 따랐다.
** 봄봄: Milandapanho『밀란다 팡하』에서는
13. Rājā āha ‘‘bhante nāgasena, kiṃlakkhaṇā satī’’ti?
왕은 물었다. 『존자여, 전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Apilāpanalakkhaṇā, mahārāja, sati, upaggaṇhanalakkhaṇā cā’’ti.
『대왕이여, 열거(列擧)와 집지(執持)입니다.』
apilāpana : [nt.] non-floating. [fr. api + lap] counting up, repetition 열거,암송(暗記)
Apilāpeti [api + lap] "to talk close by",
i. e. to count up, recite, or: talk idly, boast of Miln 37 (sāpatheyyaŋ).
Upagaṇhanā (f.) [abstr. of upa + gṛh] taking up, keeping up. meditating Miln 37.
* "이것(sati)은 들뜨지 않음을 특징으로 하고, 잊지 않는 것을 기능으로 한다."의 들뜨지 않음과
나선비구경의 "열거(列擧)"는 같은 apilāpana입니다.
밀란다 팡하에서의 열거는 (기억에 의한) 나열을 말합니다.
주석서의 정형구:
Yā sati anussati paṭissati sati saraṇatā dhāraṇatā apilāpanatā asammussanatā
sati satindriyaṃ satibalaṃ sammāsati satisambojjhaṅgo ekāyanamaggo, ayaṃ vuccati s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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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법(法)과 관련하여 ‘계(界), 처(處), 연기(緣起)’가 언급되고,
신(身, 까야)과 관련하여 ‘명(名)과 색(色), 니미따(相)’가 언급됩니다.
사띠가 ‘신(身)~~~법(法)’의 배열임을 염두에 두고서 생각해 볼 일입니다.
法과 상응하는 것이 心.意.識-- 또한 상응하는 것은 界.處.緣-- 여기까지...
여러 차례 지적해 주셨는데 아직 답을 찾지 못하고 있고 어디를 찾아 봐야 할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숙제로 남겨 둘 문제는 아닌 듯 한데... 계속 공부 해 가겠습니다. 금방은 되지 않을 듯..^^
[사띠에 대한 의견 10: 요리사 경]에서
7. "...그가 이처럼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 머물 때 마음은 삼매에 들고 오염원들은 제거된다.
그는 <표상>을 취한다.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 ......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 ......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그는 이처럼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머물 때 마음은 삼매에 들고 오염원들은 제거된다.
그는 그 <표상>을 취한다."---의 이 '니밋따'도 아위자 님의 지적과 연결되는 지요?
사념처와 니밋따의 관계가 나타나는 곳을 본 경 이외에서는 찾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니밋따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도 아직 感잡지 못하고 있지만...
아~~~ 그 점은...........
심의식이 오취온을 관찰할 때에
<심의식---법---오취온>에서 '오취온'을 '계, 처, 연기'와 관련하여 관찰하라는 <7처3관설>[=해당 설명이 주제별 토론방에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취온의 다른 이름이 '까야'입니다. 따라서 까야아누빠사나란 오취온을 아누빠사나 하라는 말임. 그러할 때, 계와 관련하여 관찰하고, 처(=육내입처와 육외입처)와 관련하여 관찰하고 거기에서 연기를 보라는 말임.
복잡해 보이지만, 부처님 가르침은 '오온'을 떠나서 설해지는 가르침이 단 하나도 없기에 <의문이 나면 무조건> '오온'에 관련하여 생각하시면 됩니다. 명색도, 니미따도, 사띠도.......그러합니다.
교설이 분리되어 있거나 단락지어져 있지 않다는 점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그만큼 치밀하고 자세하다는 장점도 있지요. 까야에 대한 사띠, 법에 대한 사띠가 모두 동일한 <오온에 대한 것들 임>을 염두에 두신다면 '사띠'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사띠에는 육근을 지키는 의미도 있는 이유가 '육육법의 흐름에서 오온이 연기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봄봄'님께서 보다 광범위하게 불교공부를 하신다면 보다 이해에 유리하시게 되십니다..
<법과 사띠와 오온>을 한 덩어리의 교설로 묶어서 보면 의외로 <'사띠'가 '올바른 기억'>이라는 의미가 다가오기에 요즈음 저는 '봄봄'님이 제시한 경문들을 보고 또 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전의 '봉행님의 도표'는 <오온을 '계, 처, 연기'>로 보고서 그린 도표입니다. 단지 그 도표가 경설에 입각한 도표라는 사실을 '봉행'님이 모르시는 것 뿐이고, 지적하여도 <왜 '오온'을 '계, 처, 연기'로 관찰하여야 하는가?>를 '봉행'님이 이해하시지 못하는 것 뿐 입니다.
'봉행'님에게 설명하려고 시도했다가.....ㅋㅋ.........그 설명을 듣는 도중에 '봉행'님이 성이나서 탈퇴를 하시는 바람에 ............ㅋㅋㅋㅋㅋㅋㅋㅋㅋ........저는 '봉행'님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어서 '도표'를 추가적으로 설명하려 했던 것 뿐인데..................ㅋㅋㅋ...ㅎㅎㅎㅎㅎㅎㅎ.
사띠든, 칠각지이든, 팔정도이든 간에 <오온을 떠나서 설해지는 경설이나 경설용어>는 없습니다. 단 하나도 없습니다. 오온의 다른 이름이 명색이고, 그 명색의 다른 이름이 까야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보고 계신 줄 몰랐네요..........ㅎㅎㅎㅎㅎㅎㅎㅎㅎ
고성제의 내용인 '오취온'이라는 것도 <오온을 죽기 아니면 살기로 부여잡은 상태>를 설명하는 것이고, 그 오취온의 다른이름이 유신(=지금 여기서의 현재의 까야)입니다. 모두 동일한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지요, '계, 처, 연기도 그러합니다. 다만 알아 듣기가 약간 어려울 뿐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휴가 이신가요?
고집멸도에서, 교=오취온, 집=오취온의 집(=팔사도), 멸=오취온의 멸(=팔정도), 도=중도(=대표적으로는 팔정도)입니다. 그 중도를 깨달은 연후에야 사마타와 위빠사나라고 경에 설해집니다. <중도에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로 넘어갈 때> '아빈냐'라고 부르는 '앎'이 있어야 하고요..................
부처님께서는 <사마타를 먼저 배우시고> 이어서 <중도를 깨달으셨고> 그 필정도의 <사선에서> 위빠사나하셨던 것이시지만, 우리의 경우는 꼭 그 순서를 지키켜야 하는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사성제, 즉 고집멸도라 하더라도 그 교설이 <오온이나 오취온에 대한 교설임>을 염두에 두셔야만 '집, 멸, 팔정도(=중도)'가 이해옵니다. 그 <사성제와 오취온을 역어서 설하는 경설이 '7처3관'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