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의 생애
깡 껙 이우는 껌뽕 톰(Kampong Thom) 도, 스떠응(Stoeung) 군, 껌뽕 쩬(Kampong Chen) 면, 쪼야옷(Choyaot) 리에서 태어났다.(주3) 그의 가계는 화교계 크메르인 집안이다.(주4)(주5)
깡 껙 이우는 1961년 15세의 나이로 "상급중등과정[고교과정] 졸업시험"(Brevet d'Etudes Secondaire de Première)을 통과한 유명한 수재였다. 또한 1962년에는 시엠립 시내에 있는 "리셰 수랴와르만 2세"
(Lycée Suravarman II)에서 바칼로레아(Baccalaureate: 프랑스식 대학입학자격) 전반기를 끝마쳤고, 같은 해에 프놈펜에 있던 명문 "리셰 시소왓"(Lycée Sisowath) 입학 특전이 주어져, 그곳에서 수학을 전공하여 전국 2위의 석차로 바칼로레아 후반기를 통과했다.(주1)
2. 크메르루즈에의 가담
1964년, 깡 껙 이우는 "국립사범교육원"(Institut de Pédagogie)에서 자신이 좋아하던 과목인 수학 교사자격 획득을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주6) 이 학교는 훗날 "민주 캄푸치아" 국방부장관이자 깡 껙 이우의 직속 상관이 될 손 센(Son Sen)의 활동 요람이었다. 1966년 8월 28일 교사자격을 획득한 깡 껙 이우는 껌뽕 짜암(Kampong Cham) 도에 있는 조그마한 읍내인 스꼬운(Skon, Skoun)의 한 리셰로 교사 발령을 받았다. 당시 제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열성적이고 적극적인 좋은 교사였다.(주1)
1967년 그는 "캄푸치아공산당"(CPK)에 입당했다. 그 후 자신의 제자들 중 3명이 구속되자 그는 쩜까 르(Chamkar Leu) 군에 있던 크메르루즈 기지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CPK의 정 당원으로 승급되었다. 몇달 후 그는 공산주의 활동을 한 혐의로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시아누크) 휘하의 보안경찰에 체포되어,(주6) "쁘레이 사 교도소"(Prey Sar prison)에 수감된 후 취조와 고문을 당했다.(주1) 이후 그는 재판 없이 2년간 구금되어 있었다. 1970년 론 놀(Lon Nol) 장군이 쿱테타(쿠테타)를 일으켜 시하누크 공을 실각시킨 뒤 사면령을 내리면서 그는 풀려났다. 이후 그는 태국 국경 근처의 끄러완 산맥(=카르다몸 산맥) 속에 있던 크메르루즈 반군 기지로 합류했다.
(주6) Bizot, François; 프랑스어로부터의 번역은 Euan Cameron (2003). The Gate. Alfred A. Knoph. |
3. 반군활동
"크메르루즈"가 장악한 지역에서 활동하는 동안, 그는 "돗 동지"(Comrade Duch)란 별명을 얻었고 감옥의 관리자가 되었다. 그는 직속상관이던 원 웻(Vorn Vet)에 의해 "특수보안대"(Special Security)의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껌뽕 스쁘으(Kampong Speu) 도, 트뽕(Thpong) 군, 암리엉(Amleang) 면에 있는 숲 속에 자신의 최초 감옥을 설치했는데, 그곳의 암호명은 "M-13"이었다. 그는 2년 후에 역시 껌뽕 스쁘으 도의 아우랄(Aoral 혹은 Aural) 군 근처에 2번째 감옥을 설치하는데, 그 명칭은 "M-99"였다.
자신의 부관들이었던 "쩐 동지"(Comrade Chan)와 "뽄 동지"(Comrade Pon)의 조력을 받아, 깡 껙 이우는 크메르루즈 당내 인사들 중 반동분자로 판단된 인물들에 대한 취조와 숙청작업을 깔끔하게 완수해냈다. 당시의 죄수들은 대부분 크메르루즈 간부 출신들이었는데, 이 감옥에 들어오면 굶주리기는 물론 자백을 받기위한 고문도 다반사였다. 이 감옥들에서 생존한 죄수들은 거의 없었다.
반군활동 중에 돗은 근처 민가에 살던 재단사 침 소팔(Chhim Sophal: 별명은 "롬"[Rom])과 결혼했다.
4. 산떼발과 뚜올 슬렝의 지휘
1975년 크메르루즈가 내전에서 승리하자, 깡 껙 이우와 그 부하들은 악명높은 "뚜올 슬렝 교도소"(Tuol Sleng prison: S-21 보안감옥)을 비롯한 일련의 교도소들을 수도인 프놈펜에 건설했다. 돗은 1975년 5월에 정부 내 산업 관련 부서로 전근을 요청했지만,(주7) 이러한 요청은 거부되었다.(주6)
(사진) 돗의 행방을 좇아 10년 이상이나 헤맨
사진기자 닉 던롭이 항상 품고다녔던
돗의 젊은 시절 모습(좌측) 사진.
"뚜올 슬렝 교도소"는 처음에 "낫 동지"(Comrade Nath)란 별명을 가진 인 론(In Lon)이 소장을 맡았고, 돗은 부소장을 맡았었다.(주1) 이후 인 론이 전근을 가자, 돗이 소장으로 승진되었다.(주8) 1976년 5월, 프놈펜 내 모든 교도소들이 통합되어 "뚜올 슬렝"으로 귀속되었다. 교도소들은 "뚜올 슬렝"을 모델로 삼아 재구성되었고, "혁명의 적"으로 규정된 크메르루즈 당내 인사들을 청산하는 데 몰두했다. 돗은 자신의 일에서 상관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고, 그리하여 "민주 캄푸치아" 정권에서 공포의 "특수부서"로 굴림하던 "산떼발"(Santebal)의 수장으로도 임명되었다.
"민주 캄푸치아" 정권 말기로 갈수록 숙청의 광풍은 거세졌고, 더 많은 사람들이 돗의 교도소로 이송되어 왔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은 이전의 동료들이었고, 그 중에는 전임 교도소장인 인 론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기간 중에 돗은 증명사진과 자술서를 포함하여 엄청난 분량의 인적사항에 관한 문서들을 축적했다.
1979년 1월 7일 베트남 군대의 침공으로 프놈펜이 함락될 때, 돗은 프놈펜에서 마지막으로 철수한 크메르루즈 당원들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방대한 양의 문서들을 모두 파기시키진 못했지만, 도시를 탈출하기 직전 남아있는 죄수들 중 몇몇 생존자들의 처형을 지켜봤다.
5. 정권 붕괴 후
돗은 1979년 5월에 태국 국경 지방에 도착했다. 이 시기의 그에 관한 정보들은 대체로 스케치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그가 삼라웃(Samlaut: 밧덤벙 도)의 숲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가족과 재결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그는 "뚜올 슬렝"의 문서들을 완전히 폐기하지 못한 실책을 힐문받고, "브라더 넘버 투" 누온 찌어(Nuon Chea)에 의해 강등조치를 당했다. 이 국경지역에서 그는 태국어를 배우면서 영어도 독학했다. 이후 태국 영토 바로 안쪽인 보라이(Borai)에 있던 난민촌에서, 그는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다.(주1)
1986년에 돗은 크메르어 전문가로 중국에 파견되어, "베이징 외국어교육원"에서 크메르어를 가르쳤다. 1년 후 태국-캄보디아 국경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이름을 "헝 삔"(Hang Pin)이라 개명했다. 여기서 그는 캄보디아 영토 바로 안쪽에 있던 "505 캠프"(Camp 505)의 폴 포트(Pol Pot) 참모부에서 고위간부로 일했다.
1991년 10월 <파리평화협정>이 조인된 직후, 그는 자신의 가족들을 이끌고 태국 국경 근처에 있는 "프꼬암"(Phkoam)이란 작은 마을로 이주하여, 약간의 토지를 매입한 후 지역 학교를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곳에서 그는 조금 성미가 급하다는 것 말고는 좋은 선생으로 알려졌다.(주1)
(사진출처: www.camnews.org)
2009년 9월 15일, 크리스토퍼 라펠 목사가 "캄보디아 특별법정"에 출석해, 1996년 세례를 받은 후 돗은 완전히 새사람으로 거듭났다는 요지의 증언을 하고 있다.
1995년 그의 집이 습격을 당해 그녀의 아내가 사망했다. 그는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꼴레쥬 스와이 쩩"(Svay Chek College: 중학교)으로 이전한다는 보증을 한 후, 자신의 자녀들을 데리고 그곳을 떠났다.
아내가 사망한 직후부터, 돗은 "골든 웨스트 캄보디아 기독교단"(Golden West Cambodian Christian Church)에서 개최하는 기도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이 교회는 크메르계 미국인이자 복음주의자인 크리스토퍼 라펠(Christopher Lapel)이 밧덤벙(Battambang)에 설립한 교회다. 돗은 라펠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종국에는 전도사(lay pastor)에까지 이르렀다.(주1)
6. 재발견
10년 이상이나 돗의 행방을 찾아다니다,
1999년 최초로 돗을 발견해낸 사진기자 닉 던롭의 모습.
[사진출처: www.andybrouwer.co.uk]
자신의 신분을 감춘 돗은 삼라웃 군 장학관(교육관) 임명을 받아들였다. 1996년 크메르루즈가 분열하면서 전투가 발생하고, 1997년 노로돔 라나릿(Norodom Ranarridh) 왕자를 축출하기 위해 훈 센(Hun Sen) 총리 측이 일으킨 쿱테타가 발생하자, 그는 자신의 가족들을 이끌고 태국 영토 바로 안쪽에 설치된 "반 마 무앙"(Ban Ma Muang) 난민촌으로 피신했다. 이 난민촌에서 그는 공동체의 보건관리인으로 일했다. 이후 분쟁이 종식된 1998년 말에 그는 캄보디아로 돌아왔다. 그는 밧덤벙 도의 로따낙 몬돌(Rattanak Mondul) 군에 있는 안다오 헵(Andao Hep) 마을에 정착했고, 기독교 구호단체인 "월드비전"(World Vision)과 밀접하게 공조해 일했다.
사진기자인 닉 던롭(Nic Dunlop)은 돗의 자취를 더듬어 삼라웃까지 찾아왔다. 1999년, 폴 포트와 따 목(Ta Mok)을 인터뷰했던 경력을 가진 기자 내잇 태이어(Nate Thayer)와 사진기자 닉 던롭은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Far Eastern Economic Review) 지를 위해 돗을 인터뷰했다. 이 인터뷰가 발행되면서, 돗은 마침내 프놈펜 정부에 투항했다.(주9)
7. 재 판
2007년 7월 31일, 유엔(UN)이 후원하는 "캄보디아법원 특별법정"(ECCC)은 반-인도주의 범죄 혐의로 돗을 기소하면서 구속했다. 캄보디 변호사 까 사웃(Kar Savuth)과 프랑스인 변호사 프랑소와 루(Francois Roux)의 변호를 받는 돗은, "캄보디아 군사법원"에 의해 이미 8년간 구금되어 있는 상태에서 다시 "캄보디아 특별법정"이 잠정적인 구류상태 유지를 결정한 것에 대해 항변했다. 하지만 이러한 항변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고, 돗에 대한 조사가 완료된 후 2008년 8월 14일에 ECCC는 그에 대한 기소를 결정했다.(주10) 2008년 2월, 사법절차의 일환으로 돗은 자신의 범죄 장면들에 직면해야 했다. 그는 "용서를 구합니다..... 용서받을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선처를 바랍니다"라고 진술한 후 눈물을 흘렸다.(주11)
재판장에 앉아 경청 중인
깡 껙 이우의 모습.
[www.andybrouwer.co.uk]
2009년 2월 16일, 유엔이 관할하는 돗의 재판이 프놈펜의 법원에서 시작되었다. 돗에게 적용된 혐의는 "15,000명 이상의 죄수들에 대하여 체계적인 고문이 가해지는 것을 개인적으로 감독"한 것이다.(주2) 이 사건의 주심은 닐 논(Nil Nonn) 판사가 맡았다. 2003년에 캄보디아와 유엔이 합의한 사항에 따라, 돗에 대한 판결은 캄보디아인 판사 3인, 그리고 프랑스인과 뉴질랜드인 판사가 각각 1인씩 총 5인으로 구성된 재판부의 합의에 따르게 되어 있다.(주10)
2009년 3월 31일 캄보디아 특별법정 앞에서 발표된 성명서를 통해, 돗은 수천 명의 수감자들을 고문하고 처형한 일에 대해 자신의 책임을 인정했다. 그리고 자신의 범죄에 대해 "진심어린 비통함"을 표출한 후, 특별법정의 재판에 완전하게 협력하겠다고 맹세했다.(주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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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냥 여러 생각이 교차합니다. 인간이란 존재가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는지? 정권을 잡기 전엔 사상이 다른 이유로 탄압을 받고, 정권을 잡고 나서는 그 보다 더 잔인한 행동을 하니........씁쓸합니다.
상세한 소식에 감사드립니다,
크메르루즈 문제는 보면 볼수록 복잡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령 우리가 "돗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수용소장이었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명제에 대해, 긍정할 수 있을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