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의 어제와 오늘
청계천 8가
파란불도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사람들
물샐틈없는 인파로 가득찬
땀냄새 가득한 거리여
어느새 정든 추억의 거리여
어느 핏발 서린 리어카꾼의 험상궂은 욕설도
어느 맹인부부 가수의 노래도
희미한 백열등 밑으로 어느새 물든 노을의 거리여
뿌연 헤드라이트 불빛에 덮쳐오는 가난의 풍경
술렁이던 한낮의 뜨겁던 흔적도 어느새 텅빈 거리여
칠흑 같은 밤 쓸쓸한 청계천 8가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비참한 우리 가난한 사랑을 위하여
끈질긴 우리의 삶을 위하여
끈질긴 우리의 삶을 위하여
몇 년 전이었을까. 왁자지껄한 어느 술자리에서 사회학과 92학번이던 이동준씨는 걸쭉한 입담으로 분위기를 한껏 띄우고 있었다. 노래 잘하기로 유명했던 이씨. 사람들은 자연스레 그에게 ‘한곡만!’을 외쳐댔다. 신나는 대중가요가 흘러나올 것이라는 예상을 엎고 그는 “대학생이라면 이런 노래를 알아야 한다”는 말과 함께 천천히 노래를 시작했다. “파란 불도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사람들…” 바로 ‘청계천 8가였다. 후에 이씨는 ‘이적’이라는 예명으로 가수가 된다.
보통 우리는 ‘민중가요’하면 투쟁조의 가사나 군가풍의 곡조 등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청계천 8가는 일상적인 노랫말과 함께 록 발라드 풍의 선율로 민중가요계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땀 냄새 가득한 거리, 맹인 부부 가수의 노래, 리어카꾼의 욕설…. 노래를 가만히 듣다 보면,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청계천 8가가 머릿속에 수채화처럼 그려진다. 그룹 ‘천지인’으로 활동하면서 ‘청계천 8갗를 작사, 작곡했던 김성민씨(문화기획사 ‘까치호랑이’대표)를 만나 이십여년 전의 청계천 8가로 시간여행을 떠났다.
팍팍하고 숨막히던 고3 시절, 청계천은 김씨에게 유일한 해방구였다. 방황과 혼란이 거듭될 때마다 그는 청계천 8가에 갔다. “검열이 엄격했던 때라 금지곡들이 참 많았어요. ‘빽판’이라고 하는 불법복제 LP판을 통해서만 금지곡들을 들을 수 있었죠. 정규 음반은 3천원인데, 빽판은 3백원이었어요.” 김씨가 용돈을 아껴 가며 수집한 ‘빽판’이 이제 천여장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금지곡이 록이었기 때문에 김씨는 록 음악에 푹 빠지게 된다.
‘청계천 평화시장 앞,/ 지천으로 깔린 평화,/ 철지나 시세 잃은 평화,/ 전 품목 바겐세일 80%!/ 아직은,/ 공(空)이 아니다/ …/ 아가씨, 평화 백원어치만 줘 봐요.’
이준후의 시 ‘아우라지, 추억에 대하여’(1999년)의 이 구절은 김씨가 자연스레 익숙해진 청계천의 풍경을 담고 있다. 가난하지만 끈질기고 위대한 삶의 모습들. ‘청소부 김씨 그를 만날 때’, ‘우리들의 외식’, ‘내가 커서 어른이 되면’ 등 그가 만든 노래들은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십년 뒤에 다시 청계천 8가를 찾게 됐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청계천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더군요. 황학동 벼룩시장도, 빽판도 그대로였죠.” 1993년, 완전히 첨단 도시로 탈바꿈한 서울의 한복판, 청계천변의 시간만 십년 동안 멈추어 있었던 것일까. 김씨는 십년의 세월을 묶어 ‘청계천 8가를 탄생시켰고, 이 노래는 그룹 ‘천지인’ 1집에 실려 빛을 보게 된다.
‘꽃다지’의 멤버였던 김씨는 1993년 ‘천지인’을 결성해 ‘새로운 민중가요’에 도전했다. “시대가 흐르면서 노래의 유행도 바뀌죠. 꽃다지 활동을 하면서 ‘정말 노동자의 노래는 무엇일까?’하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민중’가요라고 하지만, 실제 노동자들에게는 집회나 시위 때만 불려지니까요.” 대학생들이 민중가요를 부르면 ‘배부른 특권층이니까 그런 노래를 부르지’라는 냉소마저 있었다고 한다.
민중가요의 일상화가 절실하다고 느꼈던 김씨가 택한 것은 ‘익숙함의 대중성’. 진정으로 대중에게 다가가는 것은 결국 익숙한 것이라고 여겼던 그는 젊음의 상징인 ‘록’을 선택했다. 일렉트릭 기타의 도입, 가슴을 저리게 만드는 노랫말, 귀에 감겨오는 록발라드의 선율에 대중들은 열광했다. 천지인 1집이 5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릴 정도로, 록과 민중가요의 접목은 성공적이었다.
1일(토) 청계천은 2년 3개월의 공사 끝에 완전히 복원됐다. 시끌벅적하게 기념 행사가 벌어지는 가운데, 청계천에 애틋한 추억이 있는 김씨는 조심스레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낸다.
“가슴이 아팠어요. 개발이 필요한 것은 알지만, 소중한 전통은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외국 관광객들도 이렇게 솔직담백한 과거의 모습을 보고 싶어하지 않을까요? 그늘진 곳이라고 해서 덮고 숨기는 것보다,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청계천은 새로운 물길을 찾았지만, ‘청계천 8가에 서린 서민들의 눈물과 애환은 무관심 속에 복개되고 말았다.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보여준 ‘청계천 8가는 이제 노래로만 남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