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세월을 되새긴다는 것은 부질 없는 짓이라고 생각될 때도 있지만 옛 어른들의 온고이지신 철리가 아니더라도 가끔은 인간에게 달콤한 마음의 꿀맛을 느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설사 지나간 세월 그 때는 쓰라리고 혹독한 고통의 순간이었을지라도 말입니다-
산골 광산 마을의 세월도 여늬 도시의 세월과 마찬가지로 흘러 우리가 고학년으로 진학을 할 무렵 한국의 사정도 육이오 전쟁의 흔적을 많이 지우고 있었고 상동광업소 또한 지속적인 수요 증가에 따른 증산 일변도와 최신 설비가 속속 도입이 되어 왜정 때의 구식 설비를 대체하였고 미국 기술고문관이 텃골 관사의 테니스 장 옆에 있었는데 가끔 그림 같은 미제 승용차를 타고 시내를 지나가면 우리를 비롯하여 온 동네 강아지까지 차 뒤를 쫓아가곤 했고 노란 머리의 그 서양 부인은 외국사람을 접해 본적이 없는 동네 사람들의 며칠간씩 얘깃거리였습니다.
어느날 내 친구네 어린 강아지가 그만 고문관 부인이 운전하는 그 차에 치어서 비명 횡사했는데 내 친구나 그의 아버지 모두 그 고문관 부인에게 항의 한마디 못했었고 내 친구는 죽은 강아지를 품에 안고 굵은 눈물만 떨구었고 그의 아버지는 애써 모른 척하며 애꿎은 담배만 뻑뻑 피시던 기억이 납니다.
학생 수의 증가로 학교 증축이 불가피하여 새로이 뒷산을 절개하여 그 흙으로 운동장을 넓히고 그 위에 교사를 증축했는데 이번에는 골조는 목재지만 벽은 판자가 아니라 하얀 석회로 바른 이층 건물이어서 큰 건물을 생전 처음 보는 우리를 감격하게 했으며 니스 칠이 새로운 교실 바닥에서 황송하게 걸었고 공사 후 남은 모래는 (상동은 석회질의 수성암 지대라 공사용 양질의 모래를 구하려면 영월 쪽에서 그 험한 태백 산맥을 넘어서 운반해와야만 했다) 중석 퇴적물인 회색 개울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환상의 좋은 놀이터를 제공해줬다.
고학년이 되면서 우리는 도시락을 싸 와야만 했는데 이 것이 각 가정의 경제력을 나타내는 척도가 되어 본인만이 아니라 어머니들 까지도 고민스럽게 했었는데 상동광업소 종업원인 경우는 쌀밥이 보장되었지만 일부 상인들을 제외하고는 잡곡밥이 고작인 시절이라 아예 못 싸오는 아이들도 있었고 도시락 통이 없어서 그냥 밥 주발에 밥을 퍼서 작은 종지에 반찬을 담아 그 위에 박아 보자기로 불끈 묶어서 가져온 아이 미제 군용 반합에 싸온 아이, 어느 나라 군용 반합인지 모를 납작하고 둥그렇고 걸쇠가 건너지르는 반합에 싸온 아이, 그리고 제대로 된 알루미늄 도시락에 싸온 아이들… 담임 선생님은 점심시간에 이들 아이들이 마음 상하지 않고 밥을 먹도록 애를 썼는데 아무래도 신경이 여간 씌였던 것이 아니다.
하얀 쌀밥에 달걀부침을 반찬으로 해오는 최고의 도시락에서 노란 좁쌀 밥에 막 된장 한술이 깻잎에 쌓여 구석에 박혀있는 도시락, 보통 우리의 반찬은 여름철에는 고추장, 무 말랭이 조림, 장아찌, 멸치조림 겨울은 어김없이 김치였는데 기밀성이 좋지않던 그 무렵의 도시락은 학교에 도착하면 이미 김치나 반찬 국물이 스며 나와 책가방을 적시고 책까지 젖기 일쑤여서 항상 책가방은 퀴퀴하고 시큼한 냄새에 절어있었다.
겨울에는 도시락을 데우려고 난로에 벽돌 쌓듯이 올려놓으면 그 반찬 냄새가 교실을 진동하여 한창 식욕이 왕성한 우리를 공부보다는 도시락에 온통 신경을 쏟게 하였지요.
가끔 선생님들이 가정 방문을 나오셨는데 사실 손 바닥만한 산꼴짜기 동네의 살림이라 학부형이나 선생님이나 서로 안면이 있고 생활정도가 이미 다 파악되었겠지만 이 때는 학생이나 학부형이나 무척 긴장했던 기간이었던 생각이 나네요.
기다란 상동 동네 위에서 시작된 가정방문은 점심때 쯤이면 점심시간에 걸친 학부형들은 점심식사대접에 신경을 써서 냉면이나 우동 짜장을 배달 시켰는데 우리에게는 꿈 같은 음식이라 마주앉아 식사하시는 선생님이나 아버지의 젓가락에 분주히 눈길이 따라다니며 방문 밖에서 침을 삼키며 목젖을 굴렸었지요.
어떤 집에서는 그 무렵 무척이나 귀중품인 달걀을 삶아서 내놓는데 수북이 산처럼 쟁반 가득히 쌓아놓은 것이 보는 우리 눈에 무척 부러웠고 선생님이 그걸 모두 다 잡수셨는지는 아직도 모르지만 아마 선생님도 무척 곤혹스러웠거나 아니면 그날 뱃속이 불편하셨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국민학교 건너편 도로 확장 공사할 때였는데 요즘 처럼 안전제일이 아니라 공사우선 시대라서 산을 절개하면서 다이나마이트를 안전 보호망 없이 그냥 발파를 하다가 어느날 수업 중에 요란한 굉음과 함께 돌 벼락이 학교 건물에 날아와 유리창이 깨지고 교실 안으로 돌이 날아들어 왔건만 그 후에도 추가 안전 설비 없이 그냥 공사는 진행되고 다시 다이나마이트가 터져도 우리는 변함없이 수업을 진행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가 발전한 것이 경제 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 특히 안전의식 부문에서도 발전해온 것이 틀림없다.
산골이라 긴 겨울 후의 봄은 늦고 높은 산과 골짜기의 영향으로 등 하교 길의 우리는 제법 더워서 콧등에 땀이 송송 맺힐 즈음 진달래는 골짜기 바닥부터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하여 그 아름다운 불길의 띠는 매일 서서히 산 정상으로 번져가 온 산이 글자 그대로 만산홍엽이 되고 우리는 마땅한 놀이터가 없이 산이 놀이터요 마당인 시절에 그 진달래는 좀 쌉쌀했지만 달콤한 간식으로 훌륭하여 한 웅큼씩 따서 허기를 메우던 기억이 나네요.
만발한 진달래 꽃 띠가 산 정상으로 이동하면 그제야 바닥의 개울 가에서는 철쭉꽃이 피기 시작하고 이 시기에 우리는 봄 소풍을 갔지요. 치랭이 골은 선택의 여지 없었던 소풍 장소였는데 그 무렵의 그곳은 수량이 많아서 해마다 어린아이 들이 한 둘은 익사 사고로 희생이 되던 곳이라 어린 저학년 들에게는 좀 무서운 외 나무 다리를 대 여섯 개를 건너곤 했던 소풍 길이라 가끔은 고 학년들이 없어서 건너 주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가 고학년으로 진학을 할 무렵 한국의 정치계는 이 승만이 개헌을 통해 장기 집권을 도모하는 시기라 선거 운동용 확성기를 통해 “못 살겠다 갈아 보자”라는 자유당 소리와 “갈아 봤자 별 수 없다”는 민주당 소리는 그 좁은 상동 골짜기도 어김없이 정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했고 이탈 표를 막기위한 자유당의 “5 인조 투표”에 우리 부모와 앞집 두 부부가 한 조인데 순진하시게도 혹시 나올지도 모를 이탈 표에 대한 불이익을 걱정하며 노심 초사하시며 서로 도장 찍는 행위를 확인까지 하는 모습도,
그리고 선거 관리위원장 이셨던 국민학교 교장 선생님이 그 후 닥쳐온 4.19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곤욕을 치르던 그 장면도,
그 영원한 권력을 추구하던 이승만, 이기붕 그들과 함께 이제는 흘러간 옛 추억에 불과하게 되어 이즈음 텔레비전 연속극 “야인시대”에서 그 시절을 회상 해봅니다.
한국사회의 안정과 더불어 우리가 고학년으로 올라감에 따라 일부 교육열에 민감한 학부형들은 이미 서울을 위시한 도회지로 전학을 시키기 시작하여 텃골의 간부 사택에서 시작된 전학 바람은 우리 친구들 여럿이 서울로 전학가게 되었고 그 무렵 서울을 위시한 전국 각지에는 세칭 일류중학교가 있어서 전국의 수재들이 경쟁을 하였는데 전학간 우리친구 중에서도 제법 알려진 학교에 입학했다는 후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무렵 우리 친구들 대부분, 아니 우리 친구 부모들 까지도 자식의 학교 성적이나 도회지의 학교가 그의 자식 앞날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에 대해서는 무관심했고 알 필요도 없었고 아직도 그들의 마음에는 일제 해방과 육이오 같은 혼란이 부여한 충격이 아직 남아 있어서 백년대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십년 대계까지의 교육도 안중에 없어서 우리 대부분은 지나고 보니 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지만 그 극심했던 입시 지옥과는 무관하게 딴 세상에서 유년기와 사춘기 초입의 그 달콤한 시간을 산과 개울바닥에서 자연을 벗삼아 즐길 수 있어서 이렇게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그 옛날의 추억에 도취되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게 해주신 부모님의 선견지명에 감사를 드려야 마땅하지요.
방학이면 서울이나 도회지에 친척이 있는 아이들은 친척 방문을 하고 돌아와 도회지에 대한 설명을 개학이 되어도 끊임 없이 이어졌는데 아무 연고도 없어 방학 동안 한번도 상동을 벗어나 보지 못한 우리들은 도회지에 친척하나 없음을 부모에게 투정을 부리기도 하고 그 친구들을 부러워하며 침을 삼키며 재탕 삼탕 들은 얘기를 꿈속에서 그리기도 했지요, 종로, 전차, 남대문, 동대문, 화신백화점, 서울역, 한강……………..
고학년이 되면서 특별활동시간이 중요시 되어 붓글씨, 주산, 글짓기 등의 우수한 아이들은 군청소재지인 영월에 군 대표 선발대회에 나갔는데 대개는 군 대표로는 뽑히지 못하고 되돌아오곤 했다.
생산된 중석은 푸대에 담겨져 일제 이스즈 트럭 적재함 바닥에 죽 깔려 여러 대가 대오를 이루어 상동 시내를 관통하여 수라리재를 넘어 석항 역으로 가곤 했는데 구경거리가 없던 상동에서는 그 대오가 훌륭한 볼거리였고 그 무렵 각 트럭에는 조수가 반드시 한명씩 있었는데 이 때 조수들은 여름철에는 햇볕에 구리 빛으로 그으른 근육이 드러나 보이는 런닝샤쓰 바람의 적재함 뒤에 기대어 근사한 폼으로 시내를 지나 다녀 뭇 아가씨들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었고 우리에게는 근사한 우상으로 보였었지요.
그 무렵 상동의 교통 수단은 버스였는데 영월, 제천, 멀리 대구까지의 직행버스가 하루 한번씩 운행이 되었는데 외부와 연결되는 유일한 교통 수단이자 외부 세계와 문화연결의 고리 여서 방학 철이면 그 버스로 많은 유학생들이 오고 가고 하여 저녁 무렵 버스가 도착할 시간이면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들도 모두가 가슴을 설레며 기대를 하곤 했지요.
세월이 흘러 우리가 졸업반이 되어 어린이 학생회의 회장은 우리친구 H군이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선발되어 좋은 역량을 발휘했고 또 시간이 가서 진학을 결정해야 할 시기가 다가옴에 따라 약간을 술렁임이 있었는데 4 개반 졸업 생에서 집안 사정으로 중학진학이 가능한 아이들은 약 절반 정도였는데 그 중에는 공부를 곧 잘하는 친구들이 제 바닥 상동 중학교도 포기해야만 하는 안타까움에 모두들 가난이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섭섭한 분위기의 졸업식은 마땅한 강당도 없었던 우리는 학교가 아닌 극장에서 거행했었는데 학부형들이 조금 참석했었지만 대부분의 우리 부모들은 우리 아이가 그날 졸업식인지 아셨는지는 모르겠고 우리의 대표로 B 군이 최우수 상인 도지사 상을 수상하며 눈물을 곁들인 졸업의 노래 속에서 강원도 산골 광산촌에서 자란 우리들의 단 하나뿐인 국민학교 시절은 아쉽지만 주위의 무관심 속에 그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지나간 6년의 국민학교 생활은 나의 학교 생활에서 물리적이 아닌 감성적으로 가장 긴 학창 시절이고 오래 기억에 남는 시간입니다. 아마 유년기의 시간은 상대성 이론이 아니더라도 유년의 여린 감각으로 잰 척도이기에 무척이나 확장된 시간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