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안)
예천교회100주년기념비
을사조약으로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고 비분강개하던 시절, 용문에 우국지사들이 모여 나라를 걱정하던 때이다.
예천읍 우계리에서 용문에 있는 금곡교회를 다니시던 권수도(權守道)님께서 예천에 교회가 있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전도하시다가 1911년 2월 26일 예천읍 노하리 교동댁 아래채에서 김분이 김조균 최악이 교동댁과 함께 첫 예배를 드렸다.
이듬해 평북노회 소속 김상익 전도인이 부임하고 그 후 오월번 (아더 웰본)선교사님지원으로 부지를 구입하여 목조 6간의 교회당을 세웠다. 권수도 님은 1929년에 예천교회 초대 장로로 취임하고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되었고 6, 25 전쟁 때는 공산주의자에 의해 연행 감금되어 주민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났다.
예천교회는 2011년 100주년이 되었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믿음을 지키며 교회다운 교회, 사랑의 교회로써 사명을 감당하여 왔다.
이에, 그 역사를 기리며 여기 기념비를 세운다.
2018. 2. 26.
대한예수교장로회 예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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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안)
1911년에 세운
예 천 교 회
을사조약으로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고 비분강개하던 시절, 용문에 우국지사들이 모여 나라를 걱정하던 때입니다.
예천읍 우계리에서 용문에 있는 금곡교회를 다니시던 권수도(權守道)님께서 예천에 교회가 있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전도하시다가 1911년 2월 26일 예천읍 노하리 교동댁 아래채에서 김분이 김조균 최악이 교동댁과 함께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듬해 평북노회 소속 김상익 전도인이 부임하고 그 후 오월번 (아더 웰본)선교사님 지원으로 부지를 구입하여 목조 6간의 교회당을 세웠습니다. 권수도 님은 1929년에 예천교회 초대 장로로 취임하고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되었고 6, 25 전쟁 때는 공산주의자에 의해 연행 감금되어 주민의 구명 운동으로 풀려났습니다.
예천교회는 2011년이 100주년이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믿음을 지키며 교회다운 교회, 사랑의 교회로써 사명을 감당하여 왔습니다.
이에, 그 역사를 기리며 여기 기념비를 세웁니다.
2018. 2. 26.
대한예수교장로회 예천교회


이 사진은 미 선교사 손녀가 보내온 자료입니다. 왼쪽에서 3번째 서 있는 분이 권수도장로님입니다.
다른 분을 아시는 분은 연락주시길 바랍니다. (010-7749-3091 한결)
첫댓글 1911 예천교회는 자연석 돌에 크게 새기고
설립 내용은 동판으로 만들어 동판의 크기에 맞게 돌을 파내고 넣을려고 합니다.
비문의 내용과 의견 있으면 댓글로 알려주시면 협의하여 수정합니다.
나진우 장로님을 비롯하여 메일로 격려와 의견을 주신 분들 감사드립니다.
수정하였습니다. 댓글로 의견 주셔도 좋아요. 계속 의견 부탁드립니다.
100주년 기념비를 비롯하여 교회 설립기념비는 여러개 있지만 비문이 있는 설립비는 드뭅니다.
예천교회 설립기념비는 교회설립기념비의 효시가 될 것입니다. 그 만큼 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저는 열린 생각으로 모두의 의견을 종합코자 합니다.
설립비문을 동판으로 만들려던 것을 오석(검은 돌)에 새겨 비석돌에 파고 넣어 만듭니다.
2월 26일(첫예배 날자)까지 세우려고 하다가 사정상 3월로 미루게 되었습니다.
계속 의견을 주시길 바랍니다.
교회를 처음 세우는 일은 창립이냐, 설립이냐의 의견도 있습니다. 교회의 창립은 초대교회이며 다른 지역에 교회를 처음 세우는 일은 설립으로 합니다. 개혁적인 첫 교회를 세우는 일은 창립이 될 수 있습니다만 우리말로 '1911년에 세운'으로 하고자 합니다.
이유인님 이름을 뺍니다. 이유인님은 기독교인이 아니며 그의 동생 교동으로 불리는 이유직님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교동댁에서 예배를 드린 까닭이 선명하게 들어나는 정보입니다. 양주대감 이유인님이 우리나라 국호 대한을 지은 사실은 분명하게 보이나 정사에 기록이 없습니다. 1897년 조선은 국운이 다했으니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고치자는 건의를 당시 실권자인 민비에게 간청하여 고종 칙령으로 국호를 발표하였으며 임시정부시절 언론인 출신 독립운동가 송진우의 건의로 상해입시정부 시절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설립기념비는 지난해 정기당회에서 제가 위임을 받고 추진했으나 2013년 3월 3일 정기당회에서 시무장로님들의 이견이 있어 제작에서 저는 물러납니다. 교회 간판과 비문이 함께 들어가는 양식이었습니다.
그 동안 여러분들의 격려에 감사드리며 공부 많이 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또한 감사드립니다.
단 당회의 결의로 추진하던 일이었는데 석재 공장에 계약 위반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비문이 길다는 의견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비문이 있는 여러 교회의 비문을 보았지만 다른 곳에 비하여 오히려 짧습니다.
주관을 없애고 사실에 입각한 객관화한 문장입니다.
아래 도원우 교수가 수정해 주신 비문과 비교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