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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동역자들
누가복음 8장1-3절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한 자리에 죄인인 여인이 들어와서 예수님의 발에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머리털로 씻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 일로 바리새인은 그의 마음속에 그 여인을 알아보지 못한 예수님을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빚을 많이 진 자와 빚을 적게 진자가 모두 그 빚을 탕감받으면 그들중에 누가 더 빚을 탕감해준 자를 사랑할지를 물으십니다. 바리새인은 더 많이 탕감받은 자가 더 사랑할 것이라 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바리새인보다 그 여인이 예수님을 더 사랑하였다 하시며, 그녀의 죄가 사함받았다고 선언하십니다.
1. 하나님 나라 복음의 선포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8:1)
‘그후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토카덱세스'는 '후에', '순서대로'(1:3), '뒤를 이어서' 등의 뜻이며 반드시 시간적인 의미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의 의미는 7:36-50의 사건이 있은 후라는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습니다(1절). 앞에서 시간에 관하여 정확하게 기술하지 않은 것처럼 장소에 관해서도 정확한 정보를 말해주지 않고 단지 '각 성과 마을'이라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지역들은 갈릴리지방에 있는 고을들이었을 것입니다. 혹자는 4:15와는 달리 본문에서 '회당'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지 않음을 들어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는 것을 금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마 12:9-14, 13:54-58; 요 18:20을 볼 때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도 가르침을 베풀 수 있었을 것이고 '각 성과 마을'이라는 축소(縮小)된 표현 속에는 '회당'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편 '두루 다니시며'(디오듀엔)는 누가만의 독톡한 언어로서 이곳과 행 17:1에만 나오며 '디오듀오'의 미완료 과거 능동태입니다. 이 단어가 미완료 능동태인 점과 또한 이 단어 속에는 '이리 저리 길을 만들다'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점은 예수님의 사역이 멈추지 않고 계속 진행(progress)되었으며, 성읍이나 마을, 또는 집이나 회당에서, 심지어는 노천이나 길 등에서든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셨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요약됩니다(4:43).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정의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께서 하였던 일들을 보건대(7:22,48) 죄의 결과로 인해 영적, 정신적, 육체적으로 왜곡된 인간의 모습이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을 포함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아울러 복음이란 바로 이런 일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현재에 실현되기 시작했으며 장차 완성될 것이라는 내용으로 요약됩니다(막 1:15 참조).
예수님이 사역하실 때 열 두 제자가 함께 하였습니다. 이들은 6:12-16에서 예수님의 정규 제자로 선택된 자들이었으며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선택함에 있어서 밤을 세우며 기도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이제 이들은 공적인 예수님의 수행원(隨行員)으로 언급되고 있는 바 이들은 예수님의 선교를 수행하면서 스승의 사역을 계승할 수 있는 진정한 사도로 설 수 있기 위하여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2. 예수님을 따르는 여인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8:2-3)
예수님을 수행하여 함께한 사람들 가운데는 열두 제자 외에도 다수의 여자들이 있었음을 말해줍니다(2절). 유대 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여자들은 남자와 동등한 지위를 갖지 못하고 온전한 인격으로 대우받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부터 몇몇 신실한 여인들을 전도 여행에 합류(合流)시킴으로써, 천국의 일꾼될 자격이 외적 조건에 달려있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주는 본서의 특성을 나타내기도 하며 과연 천국이 어떤 자들의 것인지에 관해서도 암시하고 있습니다. 곧, 천국은 자신의 죄성과 연약성을 시인하고서 주님의 은혜만을 겸손히 간구하는 자에게 활짝 열려 있는 것입니다(18:13,14).
여인들 중에는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마리아라는 이름은 매우 흔했으므로 이 특정한 마리아를 구별하기위해서 '막달라'라는 지명을 이름 앞에 붙였습니다. '막달라'는 '탑' 또는 '망루'라는 뜻의 지명으로 갈릴리 바다의 서해안 가버나움 남쪽에 위치한 작은 성읍입니다. 이 마리아를 특징 지워주는 또 하나의 사실은 그녀가 과거에는 일곱 귀신에 들려서 극심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당하였으나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 주어 지금은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일곱이라는 숫자가 완전수라는 점뿐만 아니라 일곱 귀신은 최악의 상태를 묘사하는데 사용되기도 했다는 점에서도(마 12:45) 이 여인에게 임한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큰 은총을 입었으므로 그녀가 예수님에게 전적인 헌신을 하였을 것은 당연한 일인 바 예수님을 따랐던 여성들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짐작됩니다. 그것은 그녀가 예수님의 수난사에서 독보적(獨步的)인 증인이 된 점에서 충분히 짐작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운명할 때 그 자리에 있었으며(마 27:55,56; 막 15:40; 요 19:25), 예수님의 시신이 매장되는 현장에도 있었고(마 27:61;막 15:47;눅 23:55), 주일날(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의 시신에 기름을 바르려고 무덤을 찾았고(마 28:1; 막 16:1; 눅 24:10),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한 자도 바로 그녀였습니다(막 16:9; 요 20:1-18).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하였습니다(3절). 요안나는 24:10에서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두 천사로부터 통고 받은 인물로 나오지만 그 이상은 알 수 없습니다. 본절에서 그녀는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라는 사람의 아내로 소개됩니다. 여기서 헤롯은 당시 갈릴리를 지배하던 헤롯 안티파스로 보이며 구사라는 이름은 이곳에서만 나오므로 그 인물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의 직업을 말해주는 청지기는 그 직책이 무엇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청지기'의 헬라어 '에피트로포스'가 '넘겨주다'는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재산을 넘겨받아 관리하는 재정 담당관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직책을 가진 구사의 아내 '요안나'는 매우 부유하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여자였음에 틀림없습니다. 고뎃(Godet)과 같은 학자는 '구사'라는 관리가 다름 아니라 그 아들을 예수님께서 낫게 하였던 요 4:46이하의 관리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는데, 만약 그럴 경우 그의 아내 요안나가 예수님을 따르며 섬겼던 이유는 각별(恪別)한 셈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를 대비하여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낮은 계층의 여성과 요안나와 같은 부유한 계층의 여성을 모두 제자로 받아들이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의 보편성(universality)을 보여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수산나라는 이름의 뜻은 '백합'인데, 그 이름대로 매우 친절한 여인이었을 것이라는 추측 외에는 그녀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가 없습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이름이 언급된 세 명의 여인들 외에도 수명의 여자들이 함께 하였다는 사실도 전하여 주는데,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여자들을 제자로 받아들임으로써, 여자들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으며 모든 면에서 여자를 남자들의 소유물 정도로 여겼던 유대인들 그리고 그것을 정당화해주었던 유대교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들에게서도 남자들에게서와 똑같이 구원의 가능성과 복음의 증언자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그 여인들은 함께하여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기었습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필요한 물질적 재원을 어떻게 얻었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답을 줄 수 있는 일부분의 자료가 된다는 점과 예수님의 선교 사역 배후에는 이와같은 여인들의 헌신적인 섬김이 있었음을 밝혀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요 13:29에 의하면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에게는 공동의 '돈 궤'가 있어서 그 돈으로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거나 가난한 자들을 도왔던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러한 돈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이와같이 예수님에게 은혜를 입은 여인들이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자신들의 소유를 헌금한 것에 의해 충당(充當)되었을 것입니다. 한편 고대의 순회 설교자들이 부유한 여인들로부터 재정적인 도움을 받은 경우는 혼히 있었던 일이나, 본문의 여인들이 예수님을 헌신적으로 섬긴 것은 그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이해되며 그들이 예수님과 참된 정신적 영적 만남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들의 행위를 묘사하는 동사 '섬기더라'이 해당하는 헬라어는 '디에코눈'이 '디아코네오'의 미완료 과거 능동태임을 감안할 때 여인들의 재정적인 섬김은 일회적이 아니라 연속적이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도움은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함께’라는 단어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마음이 하나가 된 것을 말합니다.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하면 함께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이 어릴 적에 운동회를 하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게임이 있습니다. 이인삼각 달리기입니다. 두 사람이 다리 하나씩을 자신의 짝의 다리에 묶어서 세 다리로 뛰는 것입니다. 이 경기에 승리하려면 힘이 좋은 것도 빨리 달리는 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호흡을 맞추어서 달리는 것뿐입니다. 교회공동체는 마치 이인삼각 달리기를 하듯이 서로가 마음을 같이 하여 호흡을 맞추어서 섬기는 것입니다. 누가 더 봉사를 잘한다고 해도 혼자만 잘해서는 소용이 없습니다. 공동체 전체가 한마음이 되어야합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도 빌립보교회에 편지하면서 무슨 일이든지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빌 2:2) 하라고 권면합니다.
‘함께’라는 말의 두 번째 의미는 힘을 합하여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속담에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작은 일 하나라도 힘을 합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공동체는 어느 몇 사람의 수고로만으로 움직여지질 않습니다. 소수의 인원이 수고해도 일시적으로는 움직여지겠지만 결국 무리가 오게 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음을 합하고 힘을 합할 때 주님이 그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합력하는 곳에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중에 있느니라”(마 18:20)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의 앞구절(19절)을 보면 “두 사람이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단지 두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15절이하의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처리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나온 말씀이므로 교회공동체가 힘을 합하여 일을 할 것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가 힘을 합치려면 결코 다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다툼이란 서로 경쟁의식을 가지고 상대방과 비교하며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공동체 안에서 문제는 서로 잘해보려고 하다가 다투는 것입니다. 다툼은 교회공동체의 힘을 합치는 데 방해가 되며 교회를 분열시키는 데까지 갑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빌립보교회에게 마음을 같이하여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빌 2:3)고 말씀합니다.
3.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성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승천하신 후 오순절 성령 강림과 함께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이 오시기를 기다리며 기도하던 곳은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알려진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입니다. 예수님은 이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드시면서 빵과 잔을 나누며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마리아의 헌신으로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복음전파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서 교회공동체를 위하여 수고하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처음 예루살렘교회에 사도들을 돕는 일군들이 일곱명 사도행전 6장에 등장한 이후 사도들을 돕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에서 언제나 소외를 당하던 여성들이 교회공동체를 위하여 수고하는 모습들도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16장12절 이하에서 바울 일행이 빌립보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할 때 루디아라는 여인이 자신의 집을 제공하여(행 16:15) 바울일행을 섬김으로 빌립보 교회의 태동을 이루게 됩니다(행 16:40). 또한 로마서 16장에 보면 사도바울을 도왔던 동역자들의 이름이 소개되는 가운데 여성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뵈뵈집사, 브리스가, 마리아 등의 이름이 나옵니다. 뵈뵈집사는 고린도지역의 겐그레아 교회의 집사로서 사도바울의 보호자라고 소개됩니다. 뵈뵈집사는 겐그레아 항구에 들어오는 여행자들의 보호자로서 헌신한 사람입니다. 브리스가는 사도바울이 아테네에서 전도를 성공적으로 하지 못하고 고린도지역으로 왔을 때 오갈 때 없는 바울에게 거처할 곳을 제공한 아굴라의 아내입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가는 바울의 전도사역에 동역자로서 수고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자신을 위해서 목을 내어놓을 정도라고 소개합니다(롬 16:4). 또한 그들은 자신의 집을 교회공동체의 모임 장소로 제공하였습니다(롬 16:5). 마리아는 로마교회를 위해 헌신한 여성으로서 다른 설명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 로마에 있는 사람은 그녀의 이름을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녀들은 다 사도를 도와서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수고한 자들로서 바울의 기억 속에 항상 남아있었기에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속에 그 이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여성들이 남자들 못지않게 얼마나 헌신적으로 수고하였는가를 보여줍니다. 사실 초기 한국교회도 여성분들의 희생이 많았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왔을 때도 전도부인이라는 명칭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분들은 예수님을 믿고 나서 선교사들을 도와서 복음을 전하는데 열심을 내었던 분들입니다. 그분들의 복음전도로 한국에 복음이 빨리 정착했던 것입니다.
적용: 교회공동체를 섬겨야할 이유
오늘날 우리들도 예수님을 만나기전의 삶은 죄로 말미암아 심히 고통당하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은혜가 감사하여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거창한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구원받은 은혜가 너무 귀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예수님이 너무 소중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때로는 예수님을 위해서 일한다고 한 것이 오히려 예수님의 일을 방해거리가 되어도 단지 예수님 곁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시간을 예수님과 함께 사용하는 것입니다. 여인들이 항상 예수님을 따라 섬겼던 것처럼 우리의 시간을 항상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주님과의 시간을 가지면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를 하고, 하루의 생활 속에서 모든 일에 주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매 시간마다 주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처음에는 어렵지만 계속하여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을 하면, 분명히 우리에게 성령께서 항상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기도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시간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성도들이 교회공동체를 섬기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이 예수님의 공동체를 섬기는 것과 동일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고전 12:27; 엡 4:12; 5:23). 그러므로 성도가 교회공동체를 위하여 자신의 재능과 소유로 섬기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부은 여인처럼 성도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소유를 사용하여 교회공동체를 섬기는 것은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을 교회공동체를 섬기기 위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예수님을 위하여 우리의 가진 것을 다 드려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몸인 교회공동체를 위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물질과 몸을 가지고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청지기와 같이 우리의 몸과 물질을 가지고 주님이 원하시는대로 교회공동체를 위해 섬겨야합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힘을 합하여 섬겨야할 것입니다. 또한 교회공동체의 지체인 형제자매를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예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렇게 교회공동체를 위하여 섬겨야할 이유는, 우리도 여인들처럼 각자 예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난 환경은 각각 다르지만 예수님을 만나고서 우리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세상을 향하여 죄의 속에서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어 예수님을 따르며 섬기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중심으로 봉사하며 서로 사랑하는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섬겨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같은 마음으로 함께 교회공동체를 섬겨나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주위 사람들에게 전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를 통하여 나타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