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노트
늦깎기 시인의 시작노트
김세영
시를 처음 접하고 습작을 시작한 것이 고등학교 2 학년 때이니 벌써 50년이 되었다. 바쁜 의사 생활 때문에 30년 가까이 시에서 멀어져 있었다. 개업 후 나이 50세가 되어서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하여 시인의 직함을 취득한지도 이제 10년이 되었다.
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를 청각장애자인 동갑내기 고종사촌이 주었다. 그는 정규교육을 받지도 못했지만 남다른 시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보여주는 습작 메모를 보며 나도 시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당시 학원이라는 학생잡지에 작품이 입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가 재능을 제대로 꽃 피워보지도 못하고 갓 스물의 나이에 사고로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나를 처음으로 시의 매혹에 빠지게 한 것은 순수 서정시인인 김영랑 시인의 시 중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라는 시구이다. 그 후 본격적으로 시의 세계로 인도한 것은 삶의 정한을 우리말의 가락과 형상으로 빚어낸 서정주 시인 의 시 「동천」과, 세계와 우주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서정적 이미지로 그려낸 한용운 시인의 시 「님의 침묵」이다.
롤 모델이 된 이들 시의 영향과 함께, 나의 시의 주제도 변하여 온 것 같다. 제 1 시집인 『강물은 속으로 흐른다』 는 그리움과 사랑 같은 서정을 섬세한 감성으로 그려낸 시들이 많았으며, 제 2 시집인 『물구나무서다 』 에서는 삶의 아름답고 슬픈 여러 모습 속에 내포된 의미를 찾으려한 시들이 많았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제 3 시집에는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주제를 사물화 시키고 이미지화 시킨 시들이 많이 수록될 것 같다. 이번 소시집의 시들도 몸과 정신 그리고 마음과 영혼의 관계에 대해서, 또 존재와 시간에 대해서 쓴 시편들이다. 나름대로 시적 표현으로 형상화 시키려고 노력한 결실이다.
이번 소시집의 시편들의 시작의 바탕이 되는, 몸과 마음에 대한 나의 개념을 개략적으로 정리해 본다. 이 세상에 지적 존재로 태어나서 세계와 우주에 대한 나름대로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히 시인에게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은 인간 존재의 기본 단위의 처소라고 본다. 몸은 근원적으로 물질세계에 연계되어 있으며, 의식의 집이다. 의식은 몸의 중추인 뇌의 작용현상이며 영혼의 수용체 즉 집이라고 생각한다. 영혼은 영적존재로의 기본 단위로서 의식의 수용체에 접속되어 할당된 우주의 섭리, 신성 또는 성령으로서, 그 본원인 영성세계와 연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은 몸과 의식의 연계 작용이라고 생각한다. 염통을 마음 心 자를 써서 심장이라고 표기한 것도 이런 연유이다. 또 의식과 영혼을 총칭해서 정신이라고 부른다. 시 특히 서정시와 관련된 마음의 한 형태가 정서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시는 몸에서 싹이 터서 땅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몇 단계의 가지를 거쳐 영혼과, 궁극적으로는 우듬지가 영성세계에까지 닿아있어, 시의 영역이 무한대로 확장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인간은 물질세계에 속하는 몸과 영성세계에 속하는 영혼의 일시적 결합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이란 의학적으로는 심장이 멎고 뇌기능이 정지된 상태, 즉 의식도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 개념과 같이, 몸은 땅으로 돌아가고 의식과의 수용체 결합이 풀린 영혼은 다시 영성세계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죽은 사람의 지상에서의 흔적은 기억으로 산 사람의 의식 속에 저장되거나 여러 매체에 저장될 것이다. 또한 그 기억은 압축 형태로 영혼 속에 보존 될 것으로 상상해 본다.
개체로서의 몸은 소멸하지만, 나의 존재는 유전자로서 또는 기억으로서, 인간세계가 완전 소멸하기까지는 자손들의 몸으로 재생성 되거나, 다른 개체의 의식 속으로 전파가 된다. 나의 영혼 또한 철이 되면 꽃이 다시 피듯이, 다른 새로운 몸의 수용체에 접속하여 환생할 수 있다고 믿고 싶다. 허공 속에 무로서 완전 소멸된다는 것보다, 이런 믿음은 현생을 아름답게 보게 하며, 또한 긍정적으로 사는데 도움이 되는 상상적 믿음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개념으로 쓴 시로는, 이번 소시집의 시편들 외에, 기 발표한 「너」, 「어둠의 결」, 「허공의 어부」, 「나비의 창세기」, 「강」, 「튀기」, 「각인」 등 일련의 시들을 예로 들 수 있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였다. 언어가 존재에 인식할 문패를 달아주고, 그 크기와 모양에 맞는 공간을 디자인해 주기 때문이다. 또한 시간은 존재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존재의 집은 이동식 주택인 것이다. 이러한 존재와 시간의 관계를 형상화한 시로서는 소시집의 시 「뭉치」 외, 기 발표한 시 중에는 시공에 집을 짓고 사는 거미를 상징적 메타포로 사용해서 형상화 시킨 시 「바람의 시제」가 대표적인 예이다.
시는 어떤 느낌이나 이야기를 설명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양과 움직임으로 보여주고 느끼게 해준다. 즉 언어로 형상화하여 보여주고 독자 나름대로 직감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지 작업이 중요하다 하겠다. 시의 언어는 형상화의 옷과 상상의 날개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정서나 관념을 연상적으로 잘 느끼게 할 수 있는 구체적 사물이나 메타포를 찾는데 고심하고 있다. 가끔 한가할 때는 조용한 공원의 벤치에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의 끈을 풀어놓고 구름이 떠가듯이 연상적 상상을 해보거나, 때로는 눈을 감고 안개 속을 헤매 듯 몽환적 상상, 즉 몽상에 빠져 보기도 한다. 그래서 시인을 몽상가라고 부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