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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똑같은 얘기를 계속 반복하고 있어요, 그렇죠?
어떠한 상을 짓지 말라고 계속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거죠.
금강경은 사실 전부 그 얘기니까,
무엇으로 그것을 바꾸어서 어떻게 표현을 해도 결국은 그걸로 귀결이 되는 거예요.
보시를 아무리 많이 하고, 공덕을 아무리 많이 쌓아도,
공덕이라는 것이 공덕이 아니므로 공덕이라고 한다.
그 모든 어떤 갖고 있을 수 있는 어떠한 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깨주는 거예요.
처음에 3분 시작이 ‘보살은 이렇게 마음을 내야 된다.’ 하고 얘기했던 게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원을 세우고 깨달음을 원해서 길을 올 때,
그러한 ‘중생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보살이다’, 이렇게 얘기했어요.
그러니까 ‘중생이라는 것이 무엇이 중생인가, 중생이 있다는 것에서 벗어나라’는 거예요.
중생이라는 어떤 상에서 벗어나라는 거죠. 그게 사실은 이 금강경 전체의 핵심입니다.
거기에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나오고, 중생이 어떠한 범위인가 얘기가 나오죠.
그래서 태란습화, 태에서 나온 거, 알에서 나온 거, 습지에서 나온 거,
화현해서 나온 거, 그 다음에 형상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이렇게 나오죠.
그리고 생각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것, 이렇게 나오죠.
그 모든 것들이 중생의 범위죠.
그게 다 중생의 범위인데, 그 중생이 중생이 아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죠.
중생이라는 상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이라고 이름 한다.
그러한 상에 매여 있으면 아상이 일어나고, 중생상이 일어나고, 인상이 일어나고,
수자상이 일어난다, 그 얘기거든요.
중생의 범위를 일단 얘기를 하고,
그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 하더라도 구제받은 중생도 없다, 그 얘기를 하는 거죠.
중생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게 바로 윤회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윤회라고 얘기하는 것들이 그 중생 안에 다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실은 그게 지금 계속 나누어가지고 중생의 범위를 얘기했던 거를
지금 계속 나누어가지고 32분을 계속 얘기하고 있는 거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삼세를 얘기했죠. 과거, 현재, 미래, 이렇게 얘기했죠.
전생, 현생, 내생, 그것을 12연기를 가지고 그렇게 풀어놓았다.
그런데 그건 아니고,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괴로움의 작용이다’ 그 얘기를 했죠.
그런데 그것을 얘기한 삼계를 한 번 얘기한 적 있죠?
그러니까 우리가 중생이라고 얘기하는 범위, 그것도 결국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겪는 어떠한 작용’을 얘기하는 거예요.
그거에 대해서 한 번 더 짚으면, 지금 여기서 얘기하는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써 가득 채우고서 또 여래의 아라한정등각들께 보시를 한다 하면 그 공덕의 무더기를 쌓는 것이 그것은 공덕의 무더기가 아니다
라고 얘기하는 이유를 알고,
그 밑에 20분 보면
“색신을 구족하고 있기 때문에 여래라고 보아야 하는가.”
“참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색신을 구족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여래를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 색신이라는 말도.
그 다음에 ‘대인상, 어떠한 상, 그것이 여래의 어떤 상으로 보여지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그리고 나중에 ‘중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중생이라고 얘기한다’라는 말이 뒤에 나오죠.
그러한 것에 대한 풀이를 처음부터 차근차근하게 한 번 하면 더 와 닿습니다.
그냥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만, 상을 버리기 위해서 자꾸 되풀이되는
어떤 것을, 체계적으로 한 번 쫙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 어차피 불교에 대한 교리를 공부를 하면서
그것을 벗어나는 이야기를 하는 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 얘기하는 우주관, 윤회 굴레 안에 있는 우주관 그것을 한 번
짚어보면, 이 금강경이 무엇을 얘기하는지를 더 잘 알 수가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우주의 삼계라고 얘기하는 거를 제가 적어왔거든요.
지금까지 얘기했던 게 이 안에 다 들어있어요.
그래서 그거를 하나하나 짚어보겠습니다.
그러니까 “보살은 어떻게 마음을 내야 합니까?”
“보살은 이렇게 마음을 내야한다. 상구보리 하와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 이렇게 해서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마음을 내더라도 하나도 구제받은 중생이 없다고
그렇게 마음을 내야 된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중생은 무엇을 중생이라고 얘기한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 중생의 범위가 이거예요. 이게 다예요.
그러니까 아까 태에서 나온 거, 알에서 나온 거, 습지에서 나온 거, 화현해서 나온 거,
형상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것,
이렇게 쭉 얘기를 했죠?
보면은 삼계가 바로 중생이고, 윤회라고 얘기하는 윤회의 범위고, 그렇습니다.
욕계(慾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 이렇게 나뉘어 있죠?
욕계가 바로 지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
그러니까 이거를 공간적인 배경으로 지금 얘기했지만,
사실은 이것도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거예요.
우리가 삼세라고 얘기했지만, 그것도 괴로움을 겪는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는 12연기를
얘기했던 것처럼, 이것도 똑같은 거예요.
그런데 이것을 갖다가 이 사람들은 우주의 공간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 거죠.
초기경전에는 우리가 괴로움을 겪는 것을 얘기하기 위해서 인간·축생·아귀·지옥
여기까지 나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논서, 여러 가지 아비담마가 생기면서
그때 아수라·육욕천 이런 게 나옵니다.
그리고 그 위의 것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삼계라는 게 생기기 시작한 거예요.
그 전에는 이러한 범위가 없었습니다.
석가모니는 이 안에서 우주를 발하잖아. 이 안에서 길을 발하잖아.
인간 네가 가진 몸과 마음, 오온에서 지혜가 일어난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거기에서 탐진치(貪瞋痴)가 작용을 했을 때, 욕심과 화와 어리석음이 작용을 했을 때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 그것이 사실은 지옥·아귀·축생입니다.
그런데 이거를 갖다가 어떤 공간적인, 있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지옥이라는 것은 진이 많을 때, 표현을 그렇게 합니다.
화가 많을 때 지옥에 떨어진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지옥에서의 생활은 가만히 있어도 주위에서 자꾸 자기를 괴롭힌다는 거예요.
거기의 이야기는 지옥에 옥졸(獄卒)이라는 게 있는데, 가만히 있어도 옥졸이 나를 계속
괴롭히는 거야. 그게 지옥의 상태고, 그게 진이 있을 때, 화가 있을 때.
그래서 유식이십송(唯識二十頌)에 보면 그 말이 나온답니다.
“옥졸은 그러면 어디서 났습니까?” 이렇게 묻는답니다.
“지옥에서 괴롭히는 옥졸은 그건 있는 것이 아니다. 너 마음에서 일어나는 망상이다.”
이렇게 얘기한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화가 일어날 때 그 화에 휘둘리게 되면,
그 화로 인해서 우리는 계속 괴로움을 받는 거예요. 누가 괴롭히는 게 아니잖아.
그게 바로 지옥이다, 이렇게 표현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표현됐을 때는 초기경전에서는 그거를 얘기를 한 건데,
나중에 이것이 윤회의 공간으로 표현을 한 거예요.
지옥에 떨어진다, 이렇게 나중에 왜곡된 거예요.
아귀는 지난번에도 한 번 얘기했지만,
탐이 많은 그것을 표현할 때 ‘아귀에 태어난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아귀가 생긴 게 목구멍이 조그맣고 입이 조그매서 아무리 먹어도
그 큰 몸을 채우지를 못한대요.
그래서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채워도 채워도 만족이 없는,
그것이 먹는 것이든 물욕이든 무엇이든 만족할 수 없는 상태,
그것이 바로 괴로움이다, 그게 바로 아귀상태다, 이렇게 표현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치는 우리가 지혜롭다, 어리석다 할 때는
어떤 바른 견해가 없는 걸 얘기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치를 모르는 무지한 상태,
그로 인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괴로움을 겪는 게 바로 축생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동물처럼, 동물은 그러한 지혜가 없다 이렇게 표현을 해서
인간이 탐진치를 벗어나지 못할 때, 거기에 매일 때,
내가 낸 내 탐으로 인해서 거기에 매이고, 화도 또 그 화에 매이고,
또 그러한 어리석음에 매일 때 일어날 수 있는 어떤 상태,
그것을 지옥·아귀·축생 이렇게 설명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윤회로 얘기를 하면, ‘지금 이렇게 살면 내생에 축생으로 태어난다.
아귀·지옥으로 떨어진다‘ 이렇게 얘기를 해버리는 거죠?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거예요.
우리가 경험하잖아. 욕심이 너무 많으면 그 욕심이 채워지지 못해가지고
또 스스로 막 괴롭히고. 누가 괴롭히는 거 아니잖아.
또 화에 막 매이면, 그 화가 또 스스로를 괴롭히고, 그런 거죠.
그러한 이치를 모르면 또 그러한 이치를 모름에 막 스스로 괴롭힘을 당하게 되는 거죠.
그러한 스스로 일어나는 어떤 괴로움, 그런 연기의 이치를 모를 때 일어나는 괴로움이
바로 축생·아귀·지옥으로 지금 나타나있는데,
이것은 여기에서는 우주 공간적인 상태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수미산이 이렇게 있는 거죠.
거기에서 인간은 이 정도에 있고, 그 밑에 축생이 있고, 땅 밑에 아귀, 지옥이 있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죠.
그 위에 천신이 아수라, 육욕천이다.
그러니까 인간하고 축생은 눈에 보이는 세계이고,
아귀하고 지옥은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니다.
그리고 아수라하고 육욕천도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니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아수라하고 육욕천은 조라스트교에서 최고의 신이 아수라마스트인가 하는 신이 있대요.
그 신에서 가져온 거래요.
그런데 이게 너무 웃기는 게 육욕천이 디바라고 이름 하는 신이 있잖아요.
디바고 아수라인데, 조라스트교에서는 바뀌어 있대요.
아수라가 더 좋은 신이고, 디바는 나쁜 신이래요. 거기에서 왔는데 이건 뒤바뀐 거죠.
아수라가 오히려 천신 중에 전쟁만 일삼는 신이고,
디바가 오히려 더 위에 있는 신이다 이렇게 된 거죠.
욕계는 성이 있는, 남녀 구분이 있는, 욕심이 있는 세계입니다.
몸과 마음이 있고, 몸과 마음이 있는데 거기에 욕심이 함께 있는 세계다.
그래서 욕계입니다.
욕심이 있다 했을 때, 여기가 산스크리트어로 ‘까마’라고 표현을 한답니다.
그게 바로 성(性)을 얘기한답니다. 남녀 성.
그러니까 모든 욕심의 근원이 성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남녀가 있다, 성이 있다 했을 때 욕계세계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아수라가 계속 디바하고 싸운다고 그랬잖아요.
계속 전쟁을 일삼는 천신인데, 그 싸우는 이유가 천신인 디바가 아수라에 있는 천녀들을
다 데리고 갔답니다. 그래가지고 그 여자들을 데려오려고 계속 싸움을 한답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정당방위 하는 거예요.
내 여자를 데려갔으니까 싸워서 데리고 오겠다는 거죠. 그래서 계속 싸운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뜻이 그 모든 욕심, 그 모든 탐진치를 버렸다고 해도
결국은 걸리는 게 성의 문제다, 여기서는 그렇게 보는 거죠.
인간을 뛰어넘어서 어떤 천신이 된다 해도.
그래서 인간에서 잘 살아서 태어나는 곳이 육욕천입니다.
천신이 된다 해도 천신들도 계속 그 여자 때문에 싸우잖아요. 그래서 못 벗어난다.
그래서 모든 성직자들이 최고로 치는 게 성에서 벗어나는 거잖아.
남자들이 다 굶주렸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밥이 아니고, 여자라고 그러잖아요.
그렇답니다. 모든 에너지의 근원이 성이라는 거예요.
여기서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욕계에서는 우리가 착하게 살고, 보시를 많이 하고, 계율을 잘 지키고 했을 때
그 범위가 욕계 내에서 못 벗어난다 이겁니다. 아무리 그렇게 해도.
욕계 내에서 벗어나면 색계로 간다. 이게 뭐냐 하면 바로 명상을 하는 거예요.
‘아수라’라는 영화가 나오더라고요.
거기서 얘기를 하는데 보통 싸움은 선과 악의 싸움이잖아.
그런데 아수라는 악과 악의 싸움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끝이 없는 싸움이라는 거지.
여기서 지금 끝이 없는 싸움을 하는 이유가 바로 여자 때문이라는 거예요.
모든 욕심의 근원, 욕을 낼 수 있는 근원이 바로 성 에너지다, 그거예요.
그런 작용이 근원적인 것이다는 것을 이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거죠?
육욕천에 여섯 가지가 나오죠?
이야기적으로 알아놓는 게 왜 필요하냐면,
불교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나오니까 알아놓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요.
이 욕계는 지구에 존재하는 거죠.
그런데 아수라와 천신은 지구 가까이에 하늘에 있는 거죠.
욕계는 그 범위를 얘기하는 거예요.
질문자1 : 그리스로마신화도 다 욕계에 해당되는 거네요?
그렇죠. 제우스신. 천신인 거예요. 여기서 육욕천 속에 속하는 거예요.
거기서 가져온 것도 있고, 거기서 빌려간 것도 있고 그러면서 거기 다 남녀가 있잖아요.
천신도 아수라도 다 남녀가 있어요.
질문자1 :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성을 봤을 때 그냥 저도 엄마와 아빠의 사랑에 의해서 태어난 거잖아요. 어떻게 보면 그게 성이라고 얘기할 수 있지만, 어떻게 보면 본능, 내 삶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그렇죠. 거기에 따르는 게 최초의 에너지라고. 본능이죠.
질문자1 : 이거를 되게 추하다 이상하다 이런 거를 떠나서 성이라는 게 그냥 있는 그대로 나를 드러내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본능에 식욕, 수면욕, 명예욕, 물욕 모든 욕심이 있잖아.
이런 것들에 가장 근원이 되는 게 바로 이 성 에너지다 이런 거죠.
질문자1 : 그런데 요즘에 보면 성 하면 안 좋은 쪽으로 막 치우치잖아요.
네. 왜곡되어 있죠. 쾌락을 추구하니까.
감각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쪽으로 가버렸죠.
그렇게 갈 수밖에 없는 게, 그러한 감각적인 쾌락이 일어나게끔 만들어져있기 때문에.
질문자1 : 예를 들면 성이라는 것과 배고파서 먹는 것과 그게 과연 뭐가 그렇게 다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사람 인식이 왠지 성 하면 되게 안 좋은 쪽으로 가는 거 같아요. 배고파서 먹는 거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그렇죠. 그러니까 그것이 배고파서 먹는 것으로 끝나면 괜찮다는 거죠.
질문자1 : 네. 맞아요.
우리가 뭔가를 욕심을 낸다는 거는 더 무엇, 더 무엇, 욕심은 채워지지 않잖아.
그게 쫓아가다보면 그건 채워지지 않잖아.
먹는 것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입는 것도 마찬가지고, 사는 것도 마찬가지고,
가장 기본적인 것을 채워지는 거 이상으로, 항상 무엇을 원하게 되는 거죠.
그것이 성적인 것도 그렇게 간다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그게 뭐.
음욕이라는 것은 바로 다른 사람을 욕심내고 하는 거, 그런 거를 음욕이라고 얘기하잖아.
그랬을 때 마음이 과연 편안한가.
질문자2 : 다른 사람의 가정을 파괴한다든가 이런 식으로 발전이 되면 다른 사람한테 피해를 주는 결과가 생기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지계를 지켜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먹고 싶다고 무엇을 훔칠 수는 없잖아.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서 속여서 돈을 번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이 마음이 편하겠냐는 거지.
그런 것을 얘기하는 거예요.
그랬을 때 그 사람의 쾌락을 쫓고, 좋음을 쫓고, 욕망을 쫓는 것은 이게 끝이 없다.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끊기 어려운 게 바로 이 성이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을 뛰어넘은 천신도 남자여자 문제 때문에 싸운다는 거 아니에요.
그게 그래서 가장 근원적이다 이 말인 거예요.
나이가 들어도 못 먹어서 훔치지는 않더라도, 자기 여자 뺏기면 그 사람 죽이잖아.
요새 그런 거 많잖아요.
그러니까 그것은 가장 끊기 어려운 근본적인 욕망이다, 이거를 얘기하는 거예요.
좋다, 싫다 그 얘기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잘못된 욕구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 그거예요.
왜냐하면 가장 근원적인 에너지이기 때문에.
그 얘기를 지금 이걸 통해서 볼 수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육도윤회를 돈다고 불교에서는 얘기하죠?
그랬을 때 태어날 수 있는 곳이 천신이라고 얘기했을 때
그 천신도 결국은 성적인 남녀구분에 있어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 얘기를 하는 거는
그만큼 갈애, 석가모니가 괴로움의 원인이 사성제에서 갈애라고 처음에 얘기했습니다.
갈애를 끊는 게 힘들다, 집착을 끊는 게 힘들다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렇게 보면 됩니다.
밑에 사왕천이라는 거는 우리가 수미산 옆에 네 개의 바다,
거기를 다스리는 왕이 사천왕, 그러니까 가장 아래에 있는 그거겠죠?
그 다음에 도리천은 이게 범어에 그대로 음서로 따졌는데, 뜨리야천이랍니다.
그러니까 삼십삼천, 동서남북에 여덟 개의 하늘나라가 네 개씩 있대요. 그래서 32천이고.
그 중간에 가장 중심이 되는 신이 하나 있고, 하늘이 하나 있고,
그래서 합쳐서 33천이라고 합니다.
가장 중간에 있는 천주가 이름이 환인이랍니다.
우리 단군신화에 환웅이 있죠. 단군의 아버지가 환웅이고, 환웅의 아버지가 환인이죠.
거기에서 따온 거랍니다. 불교에서는 그렇게 얘기한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할 때 그 하나님은
그 천주를 얘기한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실은 그렇게 얽힐 수도 있죠.
그러니까 도리천에서 온 하나님,
도리천에서 온 천주가 우리가 얘기하는 단군의 할아버지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죠.
제석천왕이라는 얘기 많이 들었죠?
도리천에 사는 천주를 보고 제석천왕이라고 얘기를 하는데,
야미천은 염라대왕이 있는 하늘나라, 우리가 죽으면 염라대왕한테 간다고 그러잖아.
인도 경전에도 ‘마누’라고 최초의 인간이 나옵니다. 아담처럼.
마누하고 그 동생 야미가 있었는데, 야미가 마누보다 먼저 죽었대요.
그러니까 최초로 죽은 사람이 이 염라대왕인 거예요. 야미가 이름이 염라랍니다.
그러니까 인간 최초로 죽은 사람이 야미천에 있다는 염라대왕이에요.
그래서 염라대왕이 죽음의 길을 인도하는 거예요.
질문자1 : 이게 너무 웃긴 게 반지의 제왕을 쓴 사람이 호빗족 해가지고 되게 광범위하게 역사를 만들었거든요. 갑자기 생각났어요.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하나를 만들어버리니까 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도 죽으면 다 염라대왕한테 간다고 그러잖아.
그게 바로 염라대왕이 최초로 죽은 인간이다.
그래서 그가 죽음의 길을 인도하고 있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 다음에 도솔천은 미륵불이 사는 곳이 도솔천입니다.
도솔천 얘기 많이 들었죠? 미래에 오실 부처님이 사는 곳이 도솔천이다.
석가모니도 이 도솔천에 머물다가 마야부인의 태를 통해서 나와서 석가모니가 됐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앞으로 오실 미륵부처님이 여기서 살고 있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점점 올라가면서 단계가 높아지겠죠?
화락천은 스스로 즐겁게 살 수 있는 거예요, 스스로.
스스로 즐겁기 위해서 뭐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 거, 그게 화락천이랍니다.
그러니까 그 위에 타화자재천은 스스로 하는 것도 귀찮아가지고,
남한테 즐거운 것을 시키는 거예요. 그게 타화자재천이랍니다.
이게 다 불교에 있었던 거는 아니고, 인도 전통으로 내려왔던 설에 의해서
이렇게 만들어놓은 거예요.
얘기했죠? 석가모니 돌아가시고 나서 인도에서 구전되어 왔던 어떤 설화,
그런 전통적인 이야기들을 다 모아가지고 불교인 것처럼 만들어서
그게 탑을 도는 법사들한테 구전되어 왔다.
그래서 이렇게 만들어진 게 삼계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가 욕계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보시바라밀을 하고, 보시를 아무리 많이 해도 여기서 못 벗어납니다.
아무리 계를 잘 지켜도 여기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서 벗어나서 색계로 가려면 명상을 하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인도는 명상, 요가 이거를 최고로 쳤죠.
그 밑에 20분에 보면
“색신을 구족하기 때문에 여래라고 보아야 하는가?”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게 바로 색계를 얘기합니다.
색계는 욕심은 없어요. 성에 대한 그런 거는 전혀 없어요.
그런데 몸과 마음은 그대로 있는 거예요. 그게 색계입니다.
그러니까 무색계는 몸과 마음조차 없는 세계, 그게 무색계에요.
그러니까 “색신을 구족하기 때문에 여래라고 보아야 하는가?”
이게 바로 색계에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얘기하는 거는, 우리가 지금 깨달음을 얻는 단계,
인간의 육신을 받아가지고 있는 그대로 보고, 지혜에 눈을 뜨게 되는 단계가
이 색계단계입니다.
그래서 초선정, 제2선정, 제3선정, 제4선정 되어있는데,
선정을 닦으면 무상정등각을 얻는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제4선정까지 가면, 여기가 연기의 지혜를 볼 수 있는 바른 지혜가 열리는 곳이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색신을 구족하기 때문에 여래라고 보아야 하는가?” 이 말이 나오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여기에서는 보시, 지계, 이런 것으로 인한 공덕을 바라지 않는 그런 단계지만,
그러한 것도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색계가 있다는 거는, 몸과 마음이 있다는 거는 의식이 있다는 거거든요.
무색계가 되면 생각이 끊어지는 단계입니다.
우리가 깊은 삼매에 들어가면 몸과 마음이라는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죠.
몸과 마음이 없고, 미지의 어떤 세계 이런 것들이 펼쳐지는데,
그러한 것을 무색계라고 얘기합니다.
무색계의 공무변처(空無邊處)는 ‘허공이 하염없이 펼쳐져있다, 허공이 무한하다’라고
경험하는 것을 공무변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삼매상태를 얘기하는 거예요.
이거는 의식이 끊어진 상태를 얘기하는 거예요.
색계는 의식이 있는 상태.
그런데 무색계는 몸과 마음이 없는 세계니까 허공이 무한하다고 알고,
거기에 머무는 상태.
그 다음에 식무변처(識無邊處)는 식(識), 그러니까 마음이라고 표현하면,
마음이 무한하다고 경험하는 상태.
그러니까 공무변처라면 허공이니까 이건 객관적인 어떤 사고가 끊어진 상태,
이렇게 얘기하면 됩니다.
그 다음에 식무변처는 마음이 무한하다,
그러니까 주관적인 어떤 상태가 끊어졌다, 무한하다 이런 상태.
그 다음에 무소유처(無所有處)는 아무것도 없다 라는 것을 체험하는 상태.
비상비비상처(非相非非相處)는 상, 생각 이런 것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상태.
미세하게 뭔가가 남아 있는, 미세하게 뭔가가 있는 듯한 그러한 상태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무색계는 깊은 삼매에 들어갔을 때 느낄 수 있는 그런 상태를 얘기합니다.
무색계에 들어가면 몸과 마음이 없다 라고 얘기합니다.
몸과 마음을 느낄 수가 없는 거예요.
색계는 몸과 마음은 있지만 욕심이 없기 때문에 지구하고 다른, 어떤 다른 세계에 사는,
지금 공간적인 얘기를 합니다. 거기에 사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에 태어나면 그러한 곳에서 태어난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괄호에 처(處)자가 들어있죠?
다음에 태어나는 세계, 삼계를 지금 얘기할 때는 윤회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무변처 했을 때도 다음에 태어나는 세계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명상을 했을 때에 다다를 수 있는 어떤 세계 안에 머무는 게
무색계입니다.
‘야, 이게 진짜 공하구나, 무한하구나’ 이런 것을 체험하는 삼매상태.
그러한 데 머무는 세계.
그래서 무색계에서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왜, 거기가 편하기 때문에 나오지를 않는다는 거야.
지혜를 얻으려면 인간의 몸을 받아야 되는데, 여기서는 인간의 몸을 받을 수가 없다.
여기가 너무나 편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깨침을 얻을 수가 없다.
거기에 머물고자 하는 것 때문에.
이야기로써는 500억겁을 여기서 머문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 정도로 오히려 무지한 것보다 더 위험한 거죠.
여기서는 깨고자하는 욕구가 없어지는 거죠.
색계, 무색계 이 모든 과정들이 다 인도에서 요가 명상을 통해서 체험하는
체험을 얘기하는 거예요.
처음에 초선정만 되도 ‘나는 우주다, 내가 창조주다’ 이렇게 얘기한답니다.
그러고 나서 어떠한 경험들, 어떠한 체험들이 깊어지면,
결국은 마하리쉬가 공무변처 이 정도 되겠죠?
자기 몸과 마음을 못 느끼고 몇 날, 몇 개월을 있을 정도,
그렇게 된다면 거기에서 나올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사람은 지혜가 없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지혜는 어떠한 욕구가 떨어져나간 바른 알아차림을 통해서 지혜가 일어난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 금강경에서 얘기하는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라는 것.
그러니까 중생도 없다, 무소유처 얘기했죠?
그 다음에 중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얘기했죠.
비상비비상처를 얘기한 거예요. 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상이 없다 라고 얘기를 한 거예요.
그러면 금강경은 이 모든 일어날 수 있는 체험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라는 얘기에요.
그것을 사실은 체계적으로, 그때 그 용어를 빌어서 얘기를 한 거예요.
여기에서 벗어나라는 얘기에요. 중생의 범위를 얘기할 때.
태에서 나온 거, 알에서 나온 거, 습지에서 나온 거, 화현해서 나온 거를 얘기했잖아.
그것은 바로 이 욕계를 얘기하는 거예요.
화현해서 난다는 거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 아귀·지옥·아수라·천신을 얘기하는 거예요.
화현한다는 거는 있지도 않은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마음으로, 우리가 지은 생각으로 만들어내는 거죠.
우리가 인간·축생은 눈에 보이죠?
그러니까 태에서 나온 거, 알에서 나온 거, 습지에서 나온 거죠. 거기서 태어나죠.
그런데 화현은 보이지 않죠.
그게 바로 천신들·아수라·육욕천·아귀·중생·지옥을 얘기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욕계를 얘기하는 거고, 형상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나오죠?
그게 바로 색계와 무색계가 가려지는 거죠.
중생을 나눌 때 형상이 있는 것과 없는 것.
그래서 색이 있는 것과 색계와 무색계를 나누는 거예요.
그 다음에 인식작용이 있는 것, 인식작용이 없는 것,
인식작용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고,
그게 바로 무소유처, 비비상처까지 얘기를 한 거예요.
이 전체를 얘기를 한 거예요. 중생의 범위.
이 중생의 범위가 윤회를 얘기하는 윤회의 범위.
그 중생이라는 것에서 벗어나라는 거예요.
이 모든 것들을 구제했다 하더라도, 여기에 머무는 중생을 구제했다 하더라도,
구제받은 중생이 없다는 것은 그러한 것에 실체가 없다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러한 삼계에 실체가 없다, 여기에서 벗어나라.
결국은 윤회를 벗어나라, 중생을 벗어나라 그 얘기에요.
그것을 갖다가 계속 보시로 얘기하고, 인욕으로도 얘기를 하고.
그게 바로 보시, 인욕으로 욕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래서 명상을 하라.
명상을 해서 일어나는 무상정등각도 실체가 아니다.
거기에서도 벗어나라, 그 상에서도 머물지 마라.
내가 이렇게 얘기하는 이 법도 실체가 없다, 그 법에서도 벗어나라.
이 얘기를 계속 하는 거예요.
결국은 금강경은 이러한 우리가 머물 수 있는,
우리가 잡을 수 있는 어떤 상, 그것이 무엇이든.
내가 사람이다는 상, 내가 아트만이 있어서 브라만과 합일되면 또 어떤 세계로 간다,
우주적인 어떤 존재가 된다 라는 상,
영혼이 있어서 다시 태어난다 라는 상, 그것이 모두 이 범위 안에 있겠죠?
그리고 이 내가 아닌 어떤 무엇이 있어가지고
그것이 영원히 어떠한 것에 머문다 라는 그런 상,
그런 상이 다 이런 삼계안에 머문다는 거예요. 여기에서 벗어나라.
그러니까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는 것이 바로 보살이다. 그렇게 마음을 내라.
중생이 중생이 아님을, 실체가 없음을 보는 것이 바른 보살의 길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도 결국은 뭐예요?
우리가 가진 어떤 지각상태, 인식작용으로 인해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어떤 지금여기 상태를 얘기하는 거예요. 어떤 다른 공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무지로 인해서 어떤 탐욕에 그리고 무엇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것이 괴로움을 일으키게 되고,
그 무지가 또 다른 ‘무지를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으로 다른 무엇에 빠지면
거기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어떠한 무색계의 상태, 어떠한 색계의 상태일 때,
그것이 또 어떠한 상으로, 고정된 무엇으로, 어떠한 견해로 우리가 그것을 또 잡으면
그것 또한 괴로움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이 어떠한 상태든.
그것이 공무변처든 식무변처든 무소유처든 비상비비상처든.
그러니까 우리가 ‘없다’라는 것에도 머물지 말고,
‘없는 것이 아니다’는 것에도 머물지 말라. 지금 이 얘기에요.
결국은 어떠한 견해에도 머물지 말라는 거예요. 지금 그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게 어떠한 공간이 있어서, 어떠한 세계가 있어서 이렇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12연기에서 지금 일어날 수 있는 어떤 괴로움,
그것이 지금여기에서 경험되는 그것을 풀이했을 때 그것을 설명을 해주는 것처럼,
이것도 마찬가지다 그거예요.
내가 이렇게 앉아가지고 ‘어떠한 상태다’라고 하는 사람은
지금 그러한 것에 머물러 있는 거예요. 이 중에 하나에 머물러 있는 거예요.
‘나는 브라만이다’ 하는 것도 똑같은 거예요. 그러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나는 브라만이다’ 하는 것이
처음 욕계를 벗어난 상태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얘기하고,
어떤 사람은 식무변처인 상태다, 이렇게도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그것도 ‘어떠한 상태다’라는 거야.
그 궁극적인 무엇이 아니다, 거기에서 다 벗어나라,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 얘기를 계속 해주는 게, 그것이 궁극적인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라, 얘기를 해주는 거예요.
그렇게 알고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시각적인 공간적인 얘기에 대해서 다 벗어나는 거예요.
지금 여기에 경험하는 것을 이렇게 풀이해 놓은 것뿐이에요.
지금여기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인간세계에서 경험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지금 이렇게 다 풀어놓은 거예요.
그것을 앉아가지고 다른 공간을 만들어 놓은 거죠. 눈 깨면 또 이 공간이잖아.
그 사람들이 그런 데에 빠져 있다가 또 의식이 돌아오면, 또 어떤 세계가 되잖아.
그러니까 그 사람들한테는 여러 세계가 있는 거예요. 그렇게 만들어 놓은 거예요.
그래서 이러한 단계일 때, ‘다음에 태어나면 너는 이러한 단계로 태어난다’고
이렇게 또 이야기를 만들어 놓는 거죠.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다 벗어나라.
석가모니가 제일 윗 단계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가 아니다 라는 것을 알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거거든요.
인도의 요가명상의 가장 최고의 단계가 비상비비상처라는 거죠.
그것을 경험하고, 깨니까 아무것도 아닌 거야.
괴로움도 그대로 있고,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거예요.
‘이거조차도 그냥 일어났다 사라지는 하나의 상이구나’ 라는 것을
연기의 지혜로 본 거예요. 그 연기의 지혜가 이 모든 것을 깨게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보면 이게 22분까지 다 얘기를 한 거예요.
우리가 지난번에 21분 보면 나오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그들은 중생이 아니고 중생이 아님도 아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수보리여, ‘중생, 중생’이라 부르는 그들 모두는 중생이 아니라고 여래는 설하였나니 그래서 말하기를 중생이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이 중생이 아니고, 중생이 아님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거조차도 그냥 중생이라고 이름 하기 때문에
중생이라는 이름조차도 벗어나라는 거야.
중생이 아니기 때문에 중생이라고 이름 할 뿐이다.
그 산냐, 그 상에서 벗어나라.
지금 얘기한 게 우리가 얘기하는 중생의 범위입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그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재밌는 게 그거인 것 같아요.
무색계에 있으면, 삼매에 들면 거기가 너무 편안하기 때문에
거기서 못 벗어난다고 얘기합니다.
못 벗어나는 게 얼마만큼 못 벗어 나냐고 얘기 하냐하면 500억겁을 못 벗어난다고
얘기를 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지혜로울 수 없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건가.
그러니까 어떠한 상이든 자기가 머무는 상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까 어떠한 상이든 자기가 머물고 있는 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지혜로 가는 길이에요.
왜냐하면 지혜라고 하는 것은 그 모든 상에서 벗어난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틀이라고 얘기하면 틀이죠.
나라는 틀, 경험한 어떤 틀, 우주라는 틀, 뭐라는 틀, 틀을 계속 만들고 있는 거죠.
그 안에서 세계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후세계를 얘기하는 것도 이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