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영은이 가장 쓰기 쉬우면서도 동시에 가장 어려운 이야기였을 것이다. 어찌 보면 여자로서 그리 떳떳한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 또한 자전적 이야기는 가족이나 지인 등의 이야기가 들어가기 때문에 때론 이에 따른 명예훼손 등 분쟁이 휘말리기도 한다. 사실 김동리 사후 서영은은 그의 자녀들과 긴 유산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제가 걸어온 삶의 자취고, 이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그것을 책임지겠다는 각오에서 시작했어요. 어떤 편견이나 자기 식의 고정관념 등으로 인해 제게 돌을 던진다면 맞겠습니다. 그러나 아들들에 관계된 이야기는 없어요. 절대(사랑)를 추구했던 현실적 대상(김동리)이 사라졌을 때 그걸 혼자 감당해내는 시간과 삶에 대한 이야기일 뿐, 그 부분(사후 이야기)을 실제 사건에서 취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소설의 줄거리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두 사람의 이야기지만, 서영은은 “사랑을 주제로 쓴 건 전혀 아니다”라면서, “사랑의 끝까지 치열하게 가봤다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아름답고 설레고 그리운 시절을 지나서 굉장히 고통스럽고 슬프고 사무치는 존재 자체에 대한 한계죠. 인간과 인생의 깊이를 다루고 싶은 생각이었고, 이 때문에 이 소설만큼은 시간이 필요했어요. 살아내는 시간, 사랑도 그냥 사랑이 아닌 ‘살아낸 사랑’이에요. 처음 시작할 때와 시간이 흐르면서 시련, 아픔, 기타 등등이 스며들면서 그것을 끌어안지 않고서는 한 발 내디딜 수 없는 이야기죠.”
이 책의 제목이 <꽃들은 어디로 갔나>가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랑의 기쁨은 어느새 사라지고…’라는 노랫말을 떠올리게 한다.
“꽃이란 보기에는 아름다움의 절정이지만 식물에게는 하나의 상처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꽃으로 나타난 상처는 그것이 끝이 아니고 쓰러질 때 열매로 변환되고, 열매로 변환된 것은 씨앗으로 돌아가서 다시 꽃으로 순환하는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도 순환의 구조를 피할 수 없지요.”
세 번째 만남에서 느낀 낯익음
서영은이 김동리를 알게 된 건 사범학교 1학년 때였다. 사범학교는 당시 그 지역 수재들만 갈 수 있었던, 지금으로 말하면 ‘특목고’에 해당하는 교육기관. 그러나 그 분위기가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던 그녀는 수업 시간 중 서랍 속에 몰래 책을 숨겨두고 읽곤 했다.
“큰오빠가 구독했던 <사상계>(고 장준하 선생이 발행하던 월간 잡지)를 통해 ‘등신불’을 봤어요. 그 소설을 읽고 가슴이 쿵했죠. (그렇다고) 그 세계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신비롭지만 (어딘가)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느낌이었어요. 토속적인 작품 분위기가 저와는 잘 안 맞았으니까요.”
두 사람의 실제 만남은 이후 박경리의 주선을 통해 이뤄졌다. 서영은의 소설을 본 박경리는 “이건 충분히 추천감이다. 쪽지를 써줄 테니 김동리 선생에게 가서 보여라”라고 당부했다. 당시 소설가로 등단하기 위해서는 문단의 힘 있는 작가의 추천이 필요했다. 그런 박경리에게 서영은은 이렇게 말했다.
“저, 이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요…?”
두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랑에 빠졌다고 알려졌지만, 서영은은 “그건 아니다”라고 말한다. 첫 만남은 짧았다. 서영은은 김동리에게 자신의 작품과 박경리의 쪽지를 건네고 내준 차를 마셨는데, 다 마시고 나니 김동리가 “나중에 전화하라”고 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서영은이 김동리에게 전화를 걸어 두 번째 약속을 잡았고, 이 자리에서 김동리는 짧은 말로 평을 끝냈다.
“선생님은 딱 한 마디 하셨어요. ‘너무 수필적이다.’ 어떤 사람의 지도도 받은 적이 없고 혼자 세계 걸작을 읽으며 공부해왔으니, 그게 나쁜 소리인지조차 몰랐어요. 원고지를 넘기는 두 번째 페이지에 어떤 표시를 해주셨는데,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지금도 몰라요. 이후 <사상계>에서 신인상 작품 공모가 있어서 나름대로 손봐서 투고했는데, 그게 제 데뷔작이 됐어요.”
당시 함께 입선한 사람은 최인호, 당선은 강은교였다. 서영은은 시상식에서 심사 위원을 만나게 됐다. 황순원, 안수길, 그리고 김동리였다.
“김동리 선생님이 제 당선을 반대한 것 같아요.(웃음) 제가 당선되지 못한 게 선생님 탓일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죠.”
혹시 나중에 두 사람이 편해졌을 때, “그때 나를 당선되게 하지 못한 게 당신?”이라는 질문은 “감히” 하지 못했다.
책에는 두 사람이 연인이 된 과정이 나온다. 세 번째 만남에서였다. 두 사람은 통금으로 발이 묶이게 됐고, 인근 절에서 밤을 지새우게 됐다. 그녀의 책에 따르면 당시 김동리는 ‘윗목에서 자기의 두툼한 외투를 베개 삼아 비스듬히 누워, 청순하고 가련한 양을 밤으로부터 지켜주는 목동처럼 미동하지 않았다’고 하고, 그녀는 그런 그에게서 ‘이 남자는 다른 사람이랑 다르다’는 경외감을 품었다고 고백한다. 이것도 잠시. 김동리는 “여자는 자기 사랑하는 사람에게 몸도 마음도 다 주는 거라는데”라는 말로 속내를 보이고, 서영은은 ‘세 번 만난 사람을 사랑하다니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가까이 다가온 그가 아저씨처럼 낯익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사랑은 목숨 같은 것
서영은은 20년간 숨겨진 연인으로 살았다. 김동리는 아내 손소희가 있는 상태였다. 서영은은 이에 대해 “만일 손소희 선생이 만나지 말라고 했다면 끝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두 여자의 인연도 각별하다. 손소희 역시 소설가였다. 그녀는 서영은을 딸처럼 아꼈다. 물론 남편의 내연녀라는 사실을 몰랐을 때까지였다. 남편을 통해 서영은을 알게 된 후 서영은의 ‘차분한 성격, 어리숙한 용모에 예의 바른 몸가짐’에 호감을 가져 자신의 잡지사에 취직시켰다. 이미 두 사람의 관계가 3년으로 접어들었을 무렵이었다. 가시방석 같은 상황이지만, 거절할 수 없는 입장이었으므로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미안한 마음을 대신했다. 무보수로 일하면서 열과 성을 다했으니, 손소희로서는 그녀가 더욱 맘에 들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불안한 숨바꼭질이 들통 난 건 연인이 은밀히 다녀온 해수욕 때문이었다. 손소희는 선명하게 햇볕에 그을린 남편의 몸과 딸처럼 아끼던 여직원의 얼굴이 검게 탄 모습을 보고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너 해수욕 누구와 갔었니?” 이후 그녀는 일을 정리하고 회사를 그만뒀다.
그러나 손소희의 행동은 예상을 비껴갔다. 머리채를 잡거나 헤어지라고 하는 대신, 남편의 여자를 인정하는 쪽을 택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쩌겠어. 그 사람도 불쌍한 사람이야. 잘 지켜줘.”
본처에게 인정받았다고 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멀리 도망쳐보기도 했지만,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도전이 되는 것들이 내면에서 수없이 일어나고, 외적으로도 이별로 갈 수 있는 요소가 많았음에도 끝까지 갈 수 있었던 건 김동리 선생이었어요.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죠. ‘사랑은 목숨 같은 거야, 목숨을 지키려면 의지를 가져야 해.’ 그리고 ‘당신을 사랑합니다. 맹세합니다’를 시키셨어요.”
그렇다고 강요는 아니었다.
“그런 말씀에 좌우된 것은 아니에요. 이분 이외에는 제 삶의 의미가 확인이 안 되었으니까요. 선생님 이후에도 다른 사랑은 없었어요. 선생님이 제게 워낙 강한 화인을 찍어놓아서 다른 남자에 대해 생각할 수 없었죠. (제게 관심을 보이는 남자가 있더라도)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어요.”
소설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과 비로소 함께 살게 되었을 때 느끼는 실망감과 인간의 한계에 대한 내용으로 이어진다. 김동리의 평소 모습도 마찬가지다. 부와 명예를 누렸지만, 자신의 부를 지키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노력하고, 그래서 남에게 인색한 모습도 종종 드러냈다. 그러나 애지중지했던 골동품은 80% 정도가 가짜였다.
“인생과 사람에 대해서 우리 시대가 피상적으로 알고, 그런 데서 오는 착오나 반목, 불필요한 대립이 심한 것 같아요. 사람을 좀 알자, 인생을 알자는 생각에서 썼어요. 시간이 지나면 당사자 이외는 모르니까요.”
소설은 김동리가 쓰러지던 날에서 멈춘다. 결말에 이르자 3인칭 시점으로 거리감을 유지하던 작가의 시선을 버리고, ‘나’가 화자로 등장한다.
“이 작품은 끝나지 않았어요. 꽃이 져서 열매가 되는 과정이 필요해요. 다음 책에서는 그 열매가 다시 씨앗으로 돌아가는 썩은 밀알이 되는 과정을 담으려고 합니다. 제가 눈이 아파서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건강이 허락한다면 꽃으로 상징되는 구도의 시작과 끝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