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사랑이 얽힌 아차산 !!
한강과 함께 오랜 숨결로 광진의 대지에 숨을 불어 넣어주고 광진과 함께
살아온 산이 바로 아차산이다. 아차산은 광진의 푸르름을 더욱 맑은 빛으로
우리의 삶속에 녹아 있는 것이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치열한 다툼이 있던 장소로서, 아차산성이
있었고, 고려때에는 강호의 이상향으로서 멋진 강변의 풍경을 가져 여기에
쌍수정(雙樹亭)을 세워 광나루 강촌을 오르내리며 농로.어옹들과 인사를
나누고 시심(詩心)을 돋울 수 있어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았던 곳이다.
또한 불도를 닦기 위한 도량(道場)으로 은석사(銀石寺). 범굴사(梵窟寺)
영화사(永華寺)가 있었으며 강나루 쪽으로는 백중사(伯仲 寺)가 있기도 하였다.
아차산 자락인 용당산에는 양진사(楊津祠)가 있어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 뱃길과
어촌의 안녕을 빌기도 하였다.
지금은 많은 이들이 산책과 운동을 겸해 찾는 시민공원으로서 이용되고 있다.
특히 조선중기까지도 이 일대는 목장으로만 개발되었을 뿐 인가가 드물고 수풀이
무성 하였다. 이 시절에는 아차산, 용마산 일대에 호랑이, 늑대 같은 많은 야생
동물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임금이 사냥을 할 때 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또 아차산 앞쪽으로 자리잡고 있던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면서
아차산을 바라보던 광경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아서 많은 이들이 그 광경을 시로
읊기도 하였다. 그러던 것이 근현대 이후에 서울로 인구가 집중되면서 이곳까지
그 영향이 확대되자 아차산 기슭 중턱까지 주택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리고 1950년대까지도 한강변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소로 존재하였던 아차산
자락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있기도 하였다. 이렇게 아차산이 갖고 있는
매력과 쉐 라톤 워커힐호텔이 지어지면서 점차 이 일대에는 고급주택가가 형성
되어 주거환경이 각 시기마다 나름대로 변해왔던 것이다.
한달음에 아차산 정상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 양주(양주)일대의 광경과 망우동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 강남의 너른 벌판, 성남과 광주에 걸쳐있는 남한산이 시야에
잡히며, 가까이로는 도도히 흐르는 한강이 길게 누운 용처럼 희미한 안개 속에서
있다. 이렇게 정상의 시원함과, 막힘이 없이 탁 트여 보이는 사방의 정경을 그리
힘들지 않게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공원으로서의 아차산의 매력이 있는 것이다.
아차산 일대의 수목은 또한 지금은 주택개발로 인해 많이 없어졌지만 광진구의
녹지로서 또는 도시의 일상생활에 지친 이들이 찾는 쉼터를 만들어주고 있다.
더구나 곳곳에서 나오는 약수는 숨 가쁘게 오르던 이들에게 달콤함을 선사해
주기도 한다.
산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장점과 강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장점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 바로 이러한 아차산의 문화 인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아침 일찍 약수통과
수건을 들고 가볍게 아차산으로 오르고자 하며 매일 만나는 이들과 하룻동안의
일을 서로 이야기할 수 있어 좋다. 공기좋고 산좋고 사람좋고 하니
어찌 아니 찾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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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峨嵯山 285m) 용마산(龍馬山 348m) 망우산(忘憂山 281m)
보루(堡壘)
적이 침입하는 것을 막거나 몸을 보호하기 위한 요새... 최전방 진지라 할 수 있다.
아차산 용마산 망우산에 여러 보루들이 있으며 지금은 각 자차단체들이 발굴 조사 정비를 하고
있는 중이다. 발굴유물로 고구려의 보루라고 보는 것 같다. 한강은 삼국의 격전지였던 곳이다.
현재는 보루의 모양을 확실하게 확인하기는 어렵다. 산성이 아니기에. 그리고
아차산과 아차산성은 왜 한문이 다른것일까?
아차산(峨嵯山)
아차산성(阿且山城)
여러 설이 있나 보다.
아차성(阿且城)이 처음 문헌에 나타난 기록은 『삼국사기』 백제기 책계왕(責稽王) 즉위 원년에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아차성을 수리하고 蛇城(사성)을 정비하였다는 기사에서 나타난다.
『삼국사기』에 있어서도 아且(차)성은 개로왕 條(조)에, 아旦(단)성은 책계왕 조에 나타나고 있으며
근조선 때에 편찬된 『輿地圖書』(여지도서)에서는 단양군 영춘면에 소재한 溫達山城(온달산성)을 죽령 以西의 고구려의 옛 땅을 찾기 위하여 출정한 온달이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한 곳으로 비정하였다.
단양군 영춘면의 옛 지명은 『삼국사기』에서 「乙阿且縣(을아차현)」·「乙阿旦縣(을아단현)」으로 혼용하여 표기하고 있다.
이러한 판각상의 문제에 대하여 斗溪(두계) 선생은 한강하류에는 아旦(단)성이 있었고 남한강 상류에는 '웃(上)'의 뜻인 '乙'을 머리글로 하는 乙阿旦(단)城이 있었다고 하여 삼국시대 阿且(차)城은 판각상의 오류로 규정하였다.
다만 한강하류에 소재한 阿且(차)城은 원래 阿旦(단)城이었는데 태조 이성계의 후명인 「旦(단)」에 저촉되므로 이를 고쳐 阿且(차)城으로 불렀다고 하였다. 그러나 근래의 李道學(이도학)은 「여지도서」에서 乙阿旦(단)縣이 태조의 避諱(피휘)에 관계되어 乙阿朝縣으로 바뀐 사실을 단서로 아단성이 아차성으로 변하지 않았다고 단정하였다.
아차성이 「阿且(아차)」가 「峨嵯(아차)」로 표기가 변한 사실은 명확하다.
한강의 異名으로 郁利河(욱리하)가 있다. 郁利河의 「郁」은 음독하면 '욱'이다. 阿利水의 「아」를 음독하면 '옥'이다. 「郁」과 「阿」는 音似(음사-같은 음)로써 연결되고 있다. 阿利水를 '옥리수'로 부를 수 있는 여지가 엿보인다. 沃沮城(옥저성)에 玄 郡治(현토군치)가 있었다. 달리 東沃沮(동옥저)도 있었다. 옥저성의 「沃」은 아차성의 「阿」와 '옥'의 공동음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沮」와 「且」의 공동음도 '저'이다. 아차성을 '옥저성'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이다.
且(차)와 旦(단)의 판각상의 혼돈을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山(산)」변을 첨가할 수 있는 「嵯」를 「且(차)」대신에 사용하였다. 따라서 아차성은 옥저성과 같은 보통명사이며, 峨嵯城(山)은 잘못 전의된 것이다. 阿且(차)城의 바른 음독은 '옥저성'이며, 阿旦(단)城은 '옥단성'으로 불러져야 한다.
아차산은 백제의 개로왕이 죽은(참살? 당한) 곳이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3만 명의 군사을 이끌고 백제를 공략한다.
백제의 한성은 함락되고 백제 개로왕은 백제에서 고구려로 달아난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에 생포된다.
재증걸루는 개로왕에게 침을 세번 뱉고 그의 죄를 따졌다 한다.
아단성으로 끌러와 장수왕 앞으로 끌려가지 않았을까? 그리고 참살...
그 전 371년 고구려의 침입에 백제의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평양성 전투에서 조준하지
않은 화살에 전사한 것을 100 여년 뒤 백제의 개로왕이 "고국원왕의 목을 잘라 장대에 꽂았다"
하였으니 그 치욕을 장수왕이 모를 수 없다. 이런 역사적 현장을 지나며 무엇느끼나.
국경지대에 사는 백성들이 고생했겠다는 생각이다. 박쥐같은 삶이었을까?
용마산 한강 너머로 검단산 예봉산이 보이고 북한산 불암산이 보인다.
용마산은 망우산으로 가는 능선에서 왼쪽으로 간다. 태극기가 펼럭이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오르고 있다.
용마산 정상으로 가는 길에 용마산보루는 계속 이어진다. 시내 쪽 아래에 용마폭포가 있다.
채석장에 인공폭포를 만들고 공원을 조성한 곳이다.
용마산은 바위능선이 말 안장을 닮았다고 해서 예로부터 말마봉 또는 말마산이라 불리었고,
아기장수전설이 용마산도 가지고 있다.
옛날에 아차산 최고봉우리가 용마봉입니다.
옛날에는 장사가 났다고 하면 다 잡아 죽이던 시절인데, 장사가 났다니까 여기 어디서 난 사람이겠지요.
여기 산밑에 살던 어른이 한번은 아이를 나서 보니까 사내아인데, 첫국밥을 해서 먹고 잠깐 나갔다가 오니까, 아이가 갓난 애가 온데간데가 없더란 말입니다. 아이가 어디갔을까 참 이상하다 하고 어머니가 혼자 두런두런하고 방을 둘러보니까는 방안 선반에 어린애가 올라가서 놀고 있더란 말입니다.
참 이상하지요. 보니까는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렸더래요. 그래서 남편을 불러서 "애가 날아서 선반에 올라갔으니 이거 어쩐다지요?"
그러니 남편이 하는 소리가,
"이 애는 우리 집이 망할 징조요, 역적이 나면 죽을 것이니."
그리고 부부가 의논을 한 끝에 죽이자고 결판을 보고, 그 어린 것을 볏섬이라나 멧돌로다가 찍어 눌러서 죽였다는 겁니다.
이렇게 부모가 장사를 찍어 죽이고 나니
용마봉에서 용마가 나와 갖고 날라 갔다는 이야기다.
다시 오던 길을 가다 망우산으로 들어 선다.
망우리공동묘지로 유명한 곳.
망우리(忘憂里)의 유래에 대한 설은 여러가지 인데
많이 알려진 것이 조선 태조 이성계가 지금의 건원릉 자리에 자신의 능터를 정하고 돌아오다 이곳에서 "이제 시름을 잊겠다(於斯吾憂忘矣)"고 한데서 유래됐다는 것이고
그의아들 태종이 아버지를 함경도가 아닌 한양 근교인 건원릉에 모신 뒤 한시름 놓았다고 한데서 생 겨났다고도 한다.
태조의 묘소를 태종이 간택했을 것이니 태조의 전설은 설득력이 없다.
이곳에 공동묘지가 생긴 것은 1933년.
1912년 "묘지.화장장.매장 및 화장취체 규칙"을 제정,공동묘지를 만들기 시작한 일제가 기존의 미아리 수철리(금호동) 신사리(은평구)가 부족하자 이곳을 지정한 데서 비롯됐다.
최창조씨에 따르면 일제가 조선왕조의 맥을 끊고자 역대 임금의 능이 모인 동구 릉 발치를 골랐다는 것이다.
많은 유명인사들의 묘소가 있다.
첫댓글 더운날씨에 비까지 뿌려 산행에 어려움이 크셨겠습니다.게다가 이산그룹까지 생기셨다니,,, 화면을보니 산이 아름답고 길도 그리 험하지 않은것같아 선선한 계절 돌아오면 나 혼자서 천천히 한번 올라보아야 겠습니다.우리집에서 그리 멀지않은곳 이라서요.오랜만에 창렬이 얼굴보니 반갑군요.
예~ '보루'가 설치된 이유가 있었습니다. 산길 좌우로 훤히 내려다 보이는 경치가 비 때문에 볼수가 없었습니다.
산마루님 늦께까지 수고 많으셨습니다.역사자료까지 수집 편집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감사합니다.
'영둘'님의 사진 덕분에 슬라이드가 완성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무덥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씨에 꼭 그렇게 먼 산행을 했어야 하는지?
건강은 건강할때 지켜야지요
네~~"일기예보" 못 들으셨군요. "우천불구"에 '일기예보' 듣고 참석한 친구들은 즐거운산행이었다고 했습니다. 어제 산행에서 '흠'이라면 일행이 혜여지기 때문에 일송정님과 멀리 천안에서 참석한 김용명님, 인천에서 참석한 숙자남편님, 양평 서종면에서 참석한 '창렬'님과 함께 유명한 망우리 '막국수'를 같이 못 먹은 일입니다. 어제 막국수는 이경배회장이 개인부담하셨습니다.
비가 많이 와서 등산에 어려움이 많을텐데 고생들 많으셨겠습니다. 다음 기회에 쉬운 산행 길이라면 같이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산행중에는 약한 비가 내리다 말다해서 등산하기에 좋았습니다.
대단한 사람들 이란것을 다시알았구만요.
여기는 비가 많이와서 일찍들 올줄 알았는데 끝까지 산행을 다 하셨으니 대단이 건강한 친구들이야.
다음에는 좀힘이 적게들고 나도 갈만한데로 좀골라서 같이 같으면 좋겟 읍니다.
수고들 햇어요
산행을 마치고 하산하여 점심식사를 하고 있을 때 창밖을 보니 소나기성 비가 내리드니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까 또 그쳤지요. 산행중에도 중간중간 비가 멈춰주어 사진도 찍을 수 있었습니다. 산행을 마치고 난 기분 뿌듯했습니다
산행할때 선두구릅과 후미구릅이 생기는법 선두구릅은 항상 후미구릅보다 강자에 입장인데 먼저 "확" 가벼리면 곤란합니다.
아차산은 개인적으로 다시 가보고 싶은 산입니다. 서울 광진구에 있으니 지하철로 40분 거리로 가깝습니다. 나즈막한 산으로 맑고 쾌청한 날, "보루" 능산을 오르다보면 중간 중간 조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내려다보는 경치가 일품이겠습니다.
우중에 다녀오신 건강한 용돌이님들 마냥 부럽고.... ! ?
건강 하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