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삼척시 삼척항의 아름다운 풍경(2)
농업
해안과 하천 유역 평야에 주로 농경지가 분포되어 있으며,
쌀·보리·콩·감자가 많이 난다. 경지 면적 10,734.5㏊ 중
논 3,253.8㏊, 밭 8,480.7㏊로서 밭이 압도적으로 많고, 농가
가구 12,081가구 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콩·감자·누에고치·꿀 등이다.
광업
각종의 지하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으나 그 중
무연탄·철·석회석이 많이 나서 이 지방을 남한 굴지의
기간산업의 중심지로 만들어 놓았다. 무연탄은 평안계에
부존되어 있으며, 삼척탄전은 남부 태백산 지역의 매장량
(13억 4,000만t)의 33% 이상(4억t)을 차지하고 있다. 장성·
도계·황지를 중심한 대 탄전으로 괴탄(塊炭)으로 산출되며
열량 7,000cal로서 탄질도 극히 우수하다. 여기서 나는
석탄은 종래 묵호항을 거쳐 해상 수송을 했으나 영동선과
태백선이 개통된 후로는 주로 육운에 의존하며 또 삼척
화력발전소에 연료로 공급되고 있다. 장성·도계·황지 등은
탄광취락이다. 석회석은 삼척·영월·단양 일대에 60여
억t 넘게 매장되어 있다.임·수산업
임야면적 10만 7,431㏊ 중 입목지는 97%인 10만 846㏊에
해당한다. 비교적 육림(育林)이 잘 되어 있으며, 임산물은
목재가 도계읍·원덕읍, 갱목은 도계읍·하장읍, 굴참나무
수피(樹皮)는 하장면·도계읍이 중심이고, 재배 산삼인 장뇌가
노곡면 여삼리에서 재배되며 버섯류의 생산량도 많다. 수산업
가구수는 741, 수산업 인구는 2,276명(2001)이다. 삼척·호산·임원
·장호 등의 어항이 수산업 중심지이다. 어선은 634척인데
그 중 602척이 동력선이고 32척이 무동력선이며 5t 이상의
어선은 99척밖에 되지 않아 영세어업 내지 반농반어
(半農半漁)의 경영형태가 대부분이다. 어획물은
명태·꽁치·오징어·미역 등이다.
특산물
장뇌·왕마늘·토종꿀·고포미역·삼베·삼척불술·가시오가피 등이 유명하다.
철도
동해시에서 삼척선이 영동선에서 분기되어 삼척역으로 향하지만
무궁화호열차의 정기 운행은 없으며 바다열차가 강릉역에서
삼척역까지 운행한다. 강릉-영주간 영동선 철도가 태백시에서
도계읍을 지나 동해시로 향한다. 역은 삼척역, 삼척해변역
, 도계역, 신기역이 위치한다. 또한 삼척-포항간 철도가 건설중이므로
완공될 시에는 삼척시 철도교통이 향상될 것이다.
관광
관동팔경의 제일루(第一樓)인 죽서루와 삼척해수욕장
, 척주동해비가 있으며 동양 최대의 초당동굴과 연어·잉어장,
환선굴, 대금굴 대이리의 너와집·통방아·굴피집 등이 있다
. 그 밖에 후진·맹방·근덕해수욕장이 유명하다. 최근엔
삼척해양레일바이크가 인기를 끌고 있다.
공양왕릉
공양왕릉은 강원도 기념물 제71호. 삼척은 고려왕조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제34대, 재위기간 1389~1392)의
능묘이다. 공양왕은 왕조의 몰락과 함께 폐위되어 왕자
석(奭), 우(瑀)와 함께 원주와 간성을 거쳐 삼척에서 조선조
태조 3년(1394)에 교살되었다고 전한다.현재 우리나라에는
공양왕릉이 두 군데 있는데 삼척의 궁촌리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행정동은 원신동)에 남아 있다. 경기도에 있는
공양왕릉은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나 삼척의 공양왕릉은
민간에 오랫동안 구전되어 왔다. 현재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된 공양왕릉은 가장 규모가 크고 그 옆은 왕자,
나머지는 시녀 또는 왕이 타던 말무덤이라고 전한다.
준경묘
이 부분의 본문은 준경묘입니다. 강원도 기념물 제43호. 조선 태조의 5대조이며 목조의
아버지인 양무장군의 묘이다. 고종 광무 3년(1899)에 묘소를
수축하고 제각과 비각을 건축하였다. 이 일대는 울창한
송림으로 되어 있어 원시림의 경관을 구경할 수 있는
산자수려한 곳이다. 이 곳의 낙락장송인 황장목들은 경복궁
중수 때 자재로 쓰였다고 한다. 목조가 한 도승의 예언대로
백우금관으로 양친을 안장한 뒤, 5대에 이르러 조선을
창업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곳에서 4㎞ 떨어진 곳에
목조의 어머니 이씨의 묘인 영경묘(강원도 기념물 제43호)가 있다.
죽서루[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죽서루입니다. 보물 제213호. 창건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 때 학자인
이승휴가 고려 원종 7년(1266) 서루에 올라 시를 남겼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누
동쪽 죽림에 죽장사가 있어 죽서루라 이름하였다 하고, 또한
누 동쪽에 명기 죽죽선녀의 집이 있어 죽서루라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조선 태종 3년(1403) 삼척부사 김효손이 중창한 이래
10여 차례의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이 누의
남쪽에는 별관인 연근당이 있었다 한다. 오십천 층암절벽
위에 세운 이 누는 자연암반을 초석으로 삼고 암반 높이에
맞춰 길고 짧은 기둥을 세운 5량 구조의 팔작집으로
공포에서는 익공계수법과 다포계수법이 혼용되었다.
천장의 구조로 보아 맞배집이었을 가능성도 있어 조선 후기까지
여러 번의 수리로 많은 변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물
이 부분의 본문은 이사부입니다.(?~?) 신라의 장군. 성은
김씨이며 내물왕의 4대 손자이다. 512년 하슬라주(지금의 강릉)를
다스리면서, 우산국(지금의 울릉도)을 정벌할 때 나무로 만든
사자로 적을 위협하여 항복을 받았다. 541년 이찬이 되었고,
545년 국사 편찬의 필요성을 왕에게 건의하여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550년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싸워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가
, 고구려의 도살성과 백제의 금현성을 빼앗아 신라의 영토를
넓혔다. '삼국유사'에는 이름이 박이종으로 되어 있다.
이 부분의 본문은 자장입니다. (?~?) 신라의 고승, 성은 김(金), 이름은 선종(善宗)이다.
이려서 부모를 여윈 뒤 세상의 무상함을 깨닫고 절로
들어갔다. 선덕 여왕이 대보 벼슬을 내리려고 하였으나
응하지 않고 승려가 되었다. 636년 제자 10여 명과
함께 당의 우타이 산에 가서 기도하고 가사와 사리를
얻었으며, 643년 장경을 가지고 귀국, 분황사와 황룡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대승경률론」, 「보살계본」 등을
널리 폈다. 대국통이 되어 승려들을 통솔하고 통도사 등의
사찰과 불탑을 세워 불교를 중흥시켰다. 계율종의
시조로, 정암사에서 사망했다.
자료출처 : 위키백과사전
▼ 삼척민물고기전시관
↓어시장
삼척시의 가볼만한 관광명소
1.신리너와마을 2.환선굴 3.해신당공원 4.민물고기전시관
5.두타산(頭陀山) 6.청옥산(靑玉山) 7.쉰움산(五十井山)
8.천은사(天恩寺) 9.신흥사(新興寺) 10.준경묘(濬慶墓)
11.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12.삼척시립박물관
준경묘역의 금강송(숭례문건축용으로 20그루)를 베어갔다고 합니다
이양무장군(李陽茂將軍)
16세 인공의 아들로 이름은 양무이며, 벼슬은 장군(將軍)을 지냈다
. 배위는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이강제(李康濟)의 딸이다.
전주에 살다가 아들인 목조대왕(穆祖大王)의 삼척 이주(三陟移住)
때 삼척 활기리(活耆里)로 옮겨왔고, 거기에서 1231년(고려 고종18)
별세하여 현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노동(蘆洞)
신좌을향(辛坐乙向) 준경묘(濬慶墓)에 모셔져 있다.
배위 이씨도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동산리(東山里)
묘좌유향(卯坐酉向) 영경묘(永慶墓)에 모셔져 있다.
1899년(광무3) 4월 16일 고종황제가 준경묘?영경묘라고
묘소에 존호(尊號)를 올리고 양쪽에 묘비와 음기(陰記)를
고종황제가 친히 지었다. 그 내용은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조 개국 초에 삼척군을 삼척부로 승격시키고
금관(金冠)과 옥대(玉帶)를 삼척원에게 하사하고 도백(道伯)
에게 명하여 해마다 두 묘소를 보살피게 했으나 점점 폐허화되어
선조 때 정철(鄭澈 : 1536~1593)이 강원 감사로 있을 때
산소의 지도까지 그려 올려 수축하기를 요청한 일이 있다.
그 뒤 다시 수축하고 대대로 산소의 수호와 벌목의 금지
등 보호에 애써 왔다. 그러다가 1899년에 고종황제가 재상
리중하(李重夏)를 파견하여 묘소를 재정화하고 구역을
확정하고 비를 세우고 내력을 음기로 새기게 하였다.
이로 보면 1899년부터 준경묘?영경묘라 추존되고 대대적으로
수축해 오늘의 모습이 갖추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이 곳 사람들은 이 두 묘를 능이라고 부르며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곧 백우금관(白牛金棺) 설화다.
활기리에서 앞재를 넘어 준경묘에 이르면 두타산(頭陀山)
줄기에 신좌을향으로 양무장군의 묘가 모셔져 있는데,
안산을 바라보며 좌로 근산, 우로 대명산이 있고, 뒤로
방위산과 역마산이 있어 5봉으로 둘러싸여 있다. 산세를
보면 우백호는 우뚝하고 좌청룡이 미약하므로
전주리씨 후손은 장손들이 허약하다는 것이다.
조선 개국 160여 년 전에 양무장군께서 이곳에서 돌아가시자,
목조대왕께서는 선친의 묘 자리를 찾고 있었다. 마침 나무하러
두타산으로 올라갔던 집의 일꾼이 나무를 하다 쉬고 있는데,
근처에서 도승과 상좌승이 앉아 산맥을 보며, "저 곳에 묘를
쓰면 5대 후에 임금이 나겠다"는 도승의 말을 듣고,
나무하다 말고 뛰어 내려와 주인인 목조대왕에게 알렸다.
목조대왕은 급히 달려가 도승 일행을 만나 백방으로
간청하니, 그 도승이 그 자리를 가리켜 주는데, 대신 어려운
조건이 제시되었다. 곧 개토제(開土祭) 때 소 1백 마리를
잡아야 하고, 관은 금관을 써야 효험이 난다는 것이었다.
이에 목조대왕은 고민 끝에 편법을 쓰기로 하였다. 곧 처가에
마침 흰소가 한 마리 있어 백우(百牛)를 백우(白牛)로
대체하고, 금으로 관을 만들 형편이 못 되니 황금 빛깔의
밀짚(일설에는 귀리짚)으로 관을 씌워 금관에 대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백우금관설화가 탄생한 것이다.
↓13만 그루를 식재한 삼척장미원
동해의 꿈 노래/ 한승기우~~우~~우~~우~~~~~목마른 그대여 길을 떠나요
세상은 그댈 부르고 있어
메마르고 삭막한 도시에
바라는 건 무엇도 없소
가자 저 동해바다
푸른물결 넘어서
갈매기가 날던 꿈을 찾아서
우리의 길을 떠나자우~~우~~우~~우~~~~~
가~자 내님 찾아 대관령길 넘어서
동해바다 햇살 넘실거리는
정동진 옛 사랑을
가자 저 동해바다 푸른물결 넘어서
살아서 숨 쉬던 고래를 타고
그대여~길을 떠나자~~
우~~ 우~~ 우~~~~~~~~
2015-07-11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