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조 학사집(鶴沙集)
의인 선성 김씨 묘갈명 병서(宜人宣城金氏墓碣銘 幷序)
죽은 진사(進士) 조관(趙貫) 공(公)은 어진 아내가 있었으니 선성 김씨(宣城金氏)이다. 선성 김씨의 5세조 김담(金淡)은 세종 때의 명신으로 관직이 이조 판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김담이 김만칭(金萬秤)을 낳아 좌통례(左通禮)에 추증되었고, 김만칭이 김좌(金佐)를 낳아 충순위(忠順衛)를 지냈고, 김좌가 김택민(金澤民)을 낳아 사섬시 첨정(司贍寺僉正)을 지냈고, 김택민이 김윤성(金允誠)을 낳아 종사랑(從仕郞)을 지냈는데, 의인(宜人)에게 고조ㆍ증조ㆍ조부ㆍ부친이 된다.
모친 함양 박씨(咸陽朴氏)는 참봉 박환(朴桓)의 따님으로 만력 을해년(乙亥年, 1575, 선조 8)에 의인(宜人)을 낳았다. 정유년(丁酉年, 1657, 효종 8)에 죽어 안동부(安東府) 북쪽 직동(直洞) 신향(辛向) 언덕에 장사 지냈다.
아, 의인은 성품이 순수하고 온화하여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17세에 시집와서 남편을 공경하고 제사를 정성스럽게 받들며 종족(宗族)에게 마땅하지 않음이 없었다. 시기와 질투는 부인들이 가지고 있는 통상적인 감정이지만 의인(宜人)은 여기에 대처할 때 담박하였다.
진사공(進士公 남편 조관)이 손님을 좋아하여 반드시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대접하였는데, 의인은 매번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음식을 마련함에 곤란한 낯빛이 없었다. 평소에 다른 사람과 서로 비교하는 일이 없어 이웃과 마을에서 칭찬을 그치지 않았다. 병이 들자 미리 옷을 빨게 하고 깨끗이 몸을 씻고서 죽음을 기다렸으니, 의인은 정신이 이처럼 어지럽지 않았다.
아들은 둘을 낳았다. 첫째 승한(承漢)은 3남 4녀를 두었고 둘째 명한(鳴漢)은 진사(進士)로 4남 1녀를 두었다. 두 딸 중에 장녀는 전유일(全有一)에게 시집갔으나 후손이 없고 차녀는 권우손(權遇巽)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두었다.
진사군(進士君 아들 조명한)은 부모를 섬길 때에 효를 다하였는데, 지금 만 겹 산중에서 여묘(廬墓)살이를 하느라 몸이 야위어 애처롭다. 의인의 정령(精靈)이 안다면 생각건대 반드시 땅속에서 눈물을 훔칠 것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아, 의인은 자질이 순수하고 맑으며 / 於惟宜人之質粹而淑
의인은 행실이 곧고도 삼갔네 / 宜人之行貞而愨
자식들이 어질고도 효성스러우니 / 宜其子賢且孝
응당 남은 경사가 드러난 것이네 / 以膺餘慶之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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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조관(趙貫) :
1573~1648.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여일(汝一), 호는 회계(檜溪)이다. 아버지는 조광선(趙光先)이고 안동(安東)에 거주하였다. 1606년 식년시(式年試) 3등으로 진사에 입격하였으나 병자호란 때에 남한산성의 치욕이 있은 뒤 출세를 단념하고 감천 산골에 은둔
하며 시(詩)와 술로 세월을 보내 숭정 처사(崇楨處事)로 불렸다. 저서로 《회계집(檜溪集)》이 전한다.
[주02] 명한(鳴漢) :
조명한(趙鳴漢, 1615~1666)으로.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문원(聞遠), 호는 죽림(竹林)이다. 1652년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
29위로 입격하였다. 저서로《죽림집》이 전한다.
ⓒ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 권영락 (역) |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