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7. 3. 14. 10:36
■ 경주이씨 실전세계 고찰(失傳世系考察)
1.실전세계란?
우리 경주이씨의 시조는 양산 촌장이고, 휘는 알평(謁平)이요, 신라건국 당시 육촌장 회의를 주재하셨고, 유리왕 9년(서기32년)에 이씨 (李氏)를 사성(賜姓) 받은 사실은 삼국사기(三國 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 및 기타 여러 문헌에도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시조이후 원대손(遠代孫)의 소판공(蘇判公) 휘 거명(居明)까지, 대수(代數)는 물론 선대조(先代祖)의 휘자(諱字)도 알 길이 없으니 이
를 실전세계(失傳世系)라고 말한다.
2.오문(吾問)의 족보(族譜) 조선 중엽에 이르러 각 성씨들이 족보를 간행 하였는데, 우리 경주이씨도 1613년경 광양현감 종언(宗彦) 선
생께서 동종계(同宗契)를 창설하였는데, 백사(白沙)선생이 쓰신 서문만 전해올 뿐이며, 다음해 1614년에 서계(西溪)선생이 수초(手
抄)하였다는 단권보(單券譜)가 청주거주 종인(宗人)이 소장하고 있다고 하나 찾을 길이 없다.
그 후에 1684년에 발간된 갑자보(甲子譜)와 1748년 무진보(戊辰譜), 그리고 1814년 갑술보(甲戌譜)를 갑무갑(甲戊甲) 삼대보라 하
고, 우리 경주이씨의 근간보(根幹譜)가 되고 있다.
3. 28대의 실전세계 그후 19세기 말까지 어느 족보에도 실전세계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1868년 무진간(戊辰刊)
백사파보(白沙波派譜) 건곤 2권 중 곤권(坤券) 말에 귤산(橘山) 유원(裕元)선생이 쓰신 발문(跋文)에 『삼가 안찰 하건대 급량부대인
으로 부터 소판공에 이르기 까지 실전한지가 천년이 되었다.
그런데 서경(평양)에서 바르지 못한 상계 28대를 등초하여 왔는데, 관제가 삼한과 더불어 다름이 있으니 실적이 아님이 틀림 없다,
이것이 어찌 강우때 씨의 근본을 복고 한다고 마침내 어지럽게 한자와 다르리요. 유원은 기록한다.』(원문생략)라고 처음 언급 되었으나
전해지지 않다가 최근 발견되어 상찰(祥察)한 바,
◇신라 관직이 아닌 고려 또는 조선의 것이고
◇서문에는 동익이 소판공 30세손으로 되어 있는데, 범례에는 열헌공 22세손 이라 하여 7세손으로 차이가 나며
◇서문에는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5년 정축(丁丑)이라고 하여 1877년에 해당 하나, 범례에는 갑술보(甲戌譜, 1814년)이후 67년에
간행한다고 하였으니 1881년에 해당.
◇무인추(戊寅秋) 8월 풍덕 동 강진(개풍군 동남단)에서 건곤보 2권을 얻었다고 하였으니 1878년에 해당되나 서문에는 그보다 8년전인
1870년 경오파보 (庚午派譜)에 기록 했다고 되어 있는 등 그외 기타 여러가지 모순이 있다.
☞ 귤산공 유원(1814~1888)은 중시조, 34세요, 상서공의18세며, 백사공의 10세손으로 자는 경춘(景春), 호
는 귤산 또는 묵농, 시호는 충문(忠文)으로 1841년(헌종 7) 정시 문과에 급제, 의주부윤, 함경도 관찰사
를 역임하고 좌의정에 이르렀다.
흥성대원군이 집권하자 수원유수로 좌천되었다가 중추부영사로 전임되어 『대전회통』편찬 총재관이 되고,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영의
정에 올랐다. 1875년 주청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인천 개항을 주장 하였으나 수구파의 공격으로 중추부영사로 물러났다가 1880년 치
사(致仕)하고 봉조하가 되었다.
1882년 전권대신으로 일본의 변리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나와 제물포조약에 조인하였다.
저서에 <귤산문고> <가오고략> <임하필기> <해동악부> <경주이씨 금석록> 등이 있다.
4. 35대의 실전세계 19세기말 까지는 전혀 기록이 없다가
1) 광무8년(1904년) 경산군수 휘 계필(啓弼)이 재직중에 쓴 서문에 『후손 계필이 임인(1902년) 여름에 마침내 이 고을 군수로 왔는데 일
가사람 상준, 춘우가 옛날 간행본 한권을 받들고 와서 말하기를 "우리 시조 표암공 이하 소판공 이상 35대의 대계가 쓰 있는데 책이 헐
고 좀 벌레가 먹어 다시 간행 하지 않을수가 없다고 했으니, 그 주모함에 있어 어찌 성력을 다하지 않 으리오" 이에 수선하기로 합의하여
오래지 않아 완성되었다.
아! 갑술보도 이곳 고을에서 간행하고 이 족보 또한 이 고을에서 간행 하였으니, 한 고을에서 두번 발간함이 우연한 일이 아닌가 싶다.
드디어 삼가 서술한다.』라고 기록하고 있음.
2) 대전 보전출판사 발행본 경주이씨 무오보(1978년) 본문 5면에 『실전상계가 약 150년 전쯤 분적종인 합천이씨 가보에서 소판공의 상
계에 관한 기록이 발견됨으로서, 시조에서 중시조까지의 세계가 명백히 밝혀졌다.
이에 따르면 소판공은 시조로 부터 36세손이 된다고 하였고, 혹 경주이씨의 소극적인 파보나 지역적인 편보에도 성씨대관(姓氏大觀)과
같은 내용으로 기록된바 있다.
그리고 분적종 합천이씨 세보에는 진천에 살던 경주이씨 후(后) 이학영(李學榮)씨가 乙酉 7월에 주문사로 북경에 가다가 노변에서 경주
이씨의 비갈(碑碣)이 산방에서 있음을 보고 의아스러워 근처에 사는 동종인을 찾아가 물어 대답하기를 '본인도 조선국 익재공의 혈손으
로 귀국왕 말에 이 땅에 들어와 산다' 하기에 다시 묻기를 '보(譜)가 있느냐' 하였더니 '있다' 하여 5일간을 더 머무르며 선조(先祖)의 실
계(失系)를 찾아 당지판각(唐紙板刻)으로 된 보첩(譜牒) 1권을 받들고 본국에 돌아와 홍문관 도승지인 전주 후, 이인명(李仁明)에게 말
하였더니 이인명이 찬하여 진계(進啓)하니 왕이 윤허하기 를 "실전이 만성중(萬姓中)에 혹 많이 있으되 다행히 실계를 찾았으니 더욱
다행한 일이다.
다시 계보에 계승할 것이며, 입북(入北)한 이학영(李學榮)에게 별부직영(別副直營)하여 태릉에 학행(學行)할 것은 직부향사(直副向
事)케 하라" 하시었다. 합천이씨 壬申大譜(1932년) 시에 나열하여 편차(編次)한 고로 기록을 전한다, 라고 되어 있는데 살피근데 성씨
대관의 내용과 경주이씨 소극적인 파보 및 지역편 보의 내용이 상좌(相左)될 뿐 아니라 경주이씨에 진천 거주 이학영이란 사람과 전주인
이인명이란 사람이 이조사중(李朝史中) 국조방목, 사마 방목, 국조실록 등 여러 자료에도 고증이 없으므로 불가신(不可信) 불가의(不可
疑)라 별기(別記)하여 후일에 밝혀 주시기를 바란다.』라고 기록되어 있음.
◇합천이씨는 조선말까지 5회 족보를 발간하였으나 실전 선계(先系)를 등재한 사실이 없고, 1932년 壬申大譜시에 위와 같은 내용을 기
록하고 있고, 1968년에 戊申刊 강양 합천이씨 계보에 같은 내용을 기록하면서 1968년 대전 보전 출판소에서 익재공 파보와 평창이씨
세보에 의거한다고 되어 있다.
◇고려와 조선 때 사신으로는 정기적으로 동지사와 정조사를 보냈고, 정사는 삼공육경(三公六卿 : 삼공은 고려 때는 司馬. 司空. 司徒를
칭하고 조선 때는 삼정승을 말했으며, 육경은 육조의 판서를 말함)이 되었으며 부사와 서장관이 수행했다.
정기적으로 가는 사신 이외에 주 청사가 있는데 이조실록에 보면 주 청사가 10회 갔던 사실이 있으나 본문에 있는 주문사는 실록에 기록
이 없다.
◇홍문관에는 도승지가 없고 승정원에만 있다.
◇이인명은 이조실록 1750년부터 1770년 사이에 4회 나타나기는 하나 홍문관에 있지 않았고, 이학영 역시 진천에 살았던 것을 확인할 수
없으며, 사신역직을 하였다면 마땅히 입보(入譜) 하였을 것인데, 보첩에 기록이 없음.
◇관직이 신라시대 관직과 상이하다.
◇실전 세계가 처음으로 등재된 것이 1932년 대보였으니 대전서 간행된 경주이씨 무오보에 150여년전 합천이씨 가보에서 발견하였다는
것은 사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120년 전에 귤산공께서, 28대 실계를 명시하였음을 보면 그 당시에 35세 실전세계가 없었음을 알수 있으며, 고려 말에 요동반도
로 이거한 익재공 혈손이 실전세계를 소장하고 있었다면 본국 후 손이 모를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