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때 거란과 거리를 두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거란이 멸망시켰고,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고려는 북진 정책을 국시로 내걸었기 때문에 국경을 마주한 거란과는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거란 입장에서는 이러한 고려의 정책과 더불어 송나라와 고려가 연합할 경우, 고려가 자신들의 뒤를 칠 것을 우려하여 사전에 고려를 완전히 자신들의 속국 정도로 제압하든지 최소한 송나라와 거리를 두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거란은 고려를 3차례 침공하였다.
현종은 3번 침공때에 71세의 강감찬 장군을 상원수로 임명, 결전에 임하게 된다.
상황1 수공과 매복으로 적의 기세를 꺾다
강강찬 장군은 고려군 20만8천명을 압록강변에 배치하고 기다린다.
병법상 상식은 최북단 흥화진에서 최초의 전투가 벌어져야 했다.
그러나 거란군은 흥화진을 쳐다보지도 않고 우회하여 남진하는 것이 아닌가.
이미 이러한 거란군의 작전의도를 간파한 강감찬 장군이었다.
거란군의 도하지점을 예상하여 윗쪽에 쇠가죽으로 물을 막아 담수하고 있었고,
이들을 습격할 기마부대를 매복시켜 놓았었던 것이다.
거란군이 강을 건너기 시작하자 윗쪽의 물을 터 水攻을 하는 한편 거란군 진열이 흩으러지자
김종현이 이끄는 1만2천명의 기마병이 이들을 덮쳤다.
백전노장 소배압은 일부 손실을 입었으나 당황치 않고, 이를 수습하여 다시 개경을 향해 남진을 한다.
상황2 소배압의 거란군, 개경까지 진출하다.
강감찬 장군은 개경 수성을 돕기위해 김종현의 기마부대를 개경으로 급파하는 한편
강민첨의 기마부대로 하여금 거란군의 후미를 따라 붙으며 교란전을 전개, 간담을 서늘케 만든다.
차후의 결전에 필요한 것이었다.
소배압이 개경까지는 왔으나 고려 현종 또한 피하거나 성을 열지 않고 결사 항쟁을 선언한다.
고려군이 수성위주의 소극적 전법으로 대응할 것리라는 거란 황제 성종의 계산은 빗 나갔다.
3면이 포위된 소배압의 10만 대군은 이제 철수 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소배압이 후퇴를 하게 되는데...
상황3 거란군을 섬멸하다.
강감찬장군이 그들을 귀주벌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을 돌려보낼 순 없다. 차제에 화근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두 장수 모두 피할 수 없는 결전이 귀주벌판에서 벌어졌다.
승부가 나지 않고 길어질 때 김종현의 기마부대가 개경에서 달려와 합류하고,
때마침 남풍이 비바람과 함께 거란군의 정면을 드리치자 거란군에 동요가 일어나고,
고려군의 화살에 속도가 붙어 쏟아지니..거란군을 전멸시킨다.
"10만명 중 수천명만이 살이 도망갔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었다.
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1177
출처 네이버지식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