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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탁돌이와 탁순이 원문보기 글쓴이: 아르스(ARS)
척신 세도를 거부했던 선조의 왕사 (미암 유희춘, 眉巖 柳希春)
역사의 어느 시기에서도 선구자적인 행동과 의식을 가졌던 호남인. 한국 근대 · 현대사에서 시기적절하게 드러난 <호남기질>은 우연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조선조 국가의 기강을 세우려던 때에는 정의를 숭상하고 불의를 미워하며 사리사욕을 버리고 공론을 앞세웠던 <도학정신>을 이 지역 선비들이 먼저 실천했고 가치있는 삶을 추구하며 덕성 을 맑히기 위해 인간의 본성과 우주의 이치를 연구하는 <성리학>도 이 고장 선인들이 먼저 논 의했던 학문이다.
뿐인가. 외세의 침략을 받아 국가가 풍전등화였던 최후의 순간에도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구국 의 의병활동을 전개한 것도 이 지역이 으뜸이었고, 근대적 자각과 국가 부흥의 이상으로 새로 운 세계를 건설하려는 <실학사상>도 이곳이 먼저이었다.
이 지역 선배 지식인들이 이룩했던 정신과 그 시대에 맞게 새로움을 잉태하고자 했던 사상적 의지, 국가적 어려움이 있을 때면 언제나 그 어려움을 스스로의 어려움으로 자임하며 일어섰 던 구국의 정열과 의리를 숭상하고 인도정신을 실현하려 했던 정신의 맥은 오늘 어디에 닿고 있는가.
이런 줄기를 한 흐름에 꿰어보면 ‘호남사상’의 맥락이 확연히 색을 드러내고 오늘과 이어지고 있음을 스스로 체감케 한다.
자료가 소실돼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국사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미암일기>의 저자 미암 유희춘(1513~1577)도 호남사상의 봇물을 터 준 큰 선비 중 한 사람이었다.
미암은 당파싸움으로 정치가 어지러웠던 중종 8년(1513) 12월 해남군 해남읍 해리에서 태어 났다. 지금도 해남을 든든하게 병풍치고 있는 미암산 바로 아래에 집터가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4백년이 넘었지만 전설처럼 할머니들이 대대로 들려준 <미암바위> 얘기를 기억하고 있다.
하루는 미암의 어머니가 낮잠을 자는데 짐승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형상을 한 이가 치마 속으 로 들어가더니 매일 찾아와 고민하다가 명주실을 발에다 묶어놨더니 그 괴이한 이는 뒷문을 통해 미암산 두 바위 사이로 사라지더라는 것.
그래서 잉태한 이가 유희춘인데 과연 미암산의 정기를 받은 탓인지 어려서부터 모든 면에서 출중했다는 얘기.
미암의 가계를 보면 고조부 문호(文浩)는 감포만호를, 증조부는 진사를 지냈으나 부친은 벼슬 에 뜻을 두지 않고 향리에서 독서에만 열중했으며 어머니는 김종직의 문인으로 무오사화 때 유배되고 갑자사화 때 처형을 당한 금남(錦南) 최부(崔溥)의 둘째딸이었다.
어려서는 아버지에게 수업하고 16세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최산두, 김안국에게 사사했다. 특히 김안국에게 큰 영향을 받고 그를 존경했는데 너무 영리했기 때문에 제자로 대하지 않고 동등하게 토론을 폈다고 전해진다.
미암은 성격이 매우 소탈해 집안 살림은 전혀 할 줄 몰랐다. 의관이나 수건, 버선 같은 것이 때가 묻고 헤어졌어도 개의치 않았고 거처하는 방도 책상 위에 책을 펴놓은 것 이외에는 아무 리 지저분하고 먼지가 쌓여도 소제할 줄 몰랐으나 학문에 대한 것이나 정치하는 도리에는 투 철한 소견과 해박한 지식으로 남들이 도저히 생각 못한 것을 토로해 주위를 놀라게 하곤 했다.
그는 중종 32년 생원시에 합격. 그 이듬해(1538년)에 별시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에 보임된 후 춘추관, 기사관 등을 거쳐 중종 37년에는 세자 강원설서에 임명돼 후에 선조 임금이 되는 동궁을 보도한 후 대사성ㆍ부제학ㆍ전라 관찰사ㆍ대사간, 이조 판서를 지냈다.
그는 동궁에게 성리학이 학문과 정치의 근본임을 훈도하여 당시 관료들에게 ‘동궁이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종사의 경사로 이는 유희춘의 공이다’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어머니가 갑자기 병이나 사직을 요청하자 중종은 특명을 내려 전라도 무장현감에 임명 했다. 전라도 <무장>(지금의 무주, 장수지역)은 당시로선 다스리기 어려운 지방으로 평을 받 았던 곳인데 탁월한 지도력으로 민중교화에 힘쓰고 폐단이 많은 요소를 제거해 지혜로운 현감 으로 존경을 받았다.
뒤에 무장현에 그를 봉축하는 서원이 세워진 것도 이때의 치적과 관련이 있다. 이후 인종 원년 송인수의 추천에 의해 입경, 사간원 정언으로 자리를 옮겼다.
곧 인종이 죽고 정치는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명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문정왕후가 수렴 청정을 해 세력을 얻게 된 윤원형 일파가 인종의 외숙인 윤임과 그 일파인 좌의정 유권, 이조 판서 유인숙 등을 제거하기 위해 교지를 내려 대간으로 하여금 탄핵케 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당시 대간을 구성하고 있던 송희규, 민기문, 유희춘 등은 이들의 교지가 ‘부정하다’하 여 발론할 것을 거부했다.
다음날. 윤원형은 같은 당파인 임백령, 허현 등과 짜고 위 세 사람의 죄를 고하고 이어 교지를 거부한 유희춘 등의 대간을 파직하고 저 유명한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이로 인해 미암은 파직당하고 <이리>(지금의 익산)에 칩거했다. 설상가상일까. 이듬해 9월 소 위 <양재벽서사건>이 일어났다.
전라도 양재역에서 ‘여자임금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은 아래에서 권력을 농락하고 있으 니 나라가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리는 격이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라는 벽서가 발견된 것.
이를 접한 문정왕후는 이는 죄인들을 가볍게 처벌한 것이 사건의 원인이라는 의견을 내 미암 을 제주도에 유배했다가 고향인 해남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조선 최북단 함경도 <종성>으로 이 배시켰다.
함경도 <종성>에서 미암은 장장 19년 동안이나 유배생활을 했다. 밤낮으로 깊은 사색에 잠겨 저술을 계속하고 교육에 힘을 기울여 변경지역 주민의 교화에 힘썼다.
달이 차면 기우는 법.
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 세력이 쇠퇴하자 을사파 죄인들의 사면복권 의견이 일어나 미암은 충청도 <은진>으로 이배되었다가 2년 후에 풀려났다.
곧 성균관 직강에 제수되고 홍문관 교리로 자리를 옮기더니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돼 두루 관 직을 거쳤다.
선조는 임금이 되기 전 세자 때 미암에게 배웠으므로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은 희춘에게 힘 입은 바가 많다’고 이르며 자신이 정확하고 해박한 것을 좋아하여 질문하면 미암은 곧 대답했 는데 반드시 옛날 사실들을 입증해가며 설명하여 명백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말하곤 했다.
미암이 왕에게 말을 올릴 땐 성리대전을 주로 인용했는데 책 한권을 전부 외웠다는 일화나 옛 날 사실을 정확하고 해박하게 인증하면서 설명하였다는 일 등은 그의 학문 넓이를 짐작하게 해주는 것이다.
미암은 많은 저술을 남겼다고 알려져 있으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문집 <국조 유선록><역대요 록>2편 <독몽구> <미암일기> 등 몇 가지 밖에 되지 않는다.
문집인 <미암집> 20권 발문에 따르면 유희춘의 시문은 상당히 많았는데 그의 사후 유실된 것 이 많다고 적혀있다.
<국조 유선록>은 선조 3년에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던 유희춘에게 조선 성리학의 시조라 할 만한 김굉필, 정여향, 조광조 등의 언행과 서술을 편찬하라는 선조의 명에 따라 홍문관의 관료 들과 함께 이들의 행장과 자료를 모아 편찬한 책.
또<독몽구>는 당나라 중기 이한이 지은 중국의 전설시대부터 남북조시대까지의 인물의 전기, 설화를 수록한 아동용 교과서인 ‘몽구’를 풀이한 책. 유배지인 종성에서 명종 13년에 편찬한 것으로 여러 사서를 편람하여 중국의 복희씨로부터 조선에 이르까지 교화에 도움이 될 인물들 의 전기, 설화를 수록한 것이다.
그러나 미암은 ‘의리의 탐색은 무궁한 것이다’하여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부인 송덕봉 여사도 당시 시문에 능숙한 유일한 여류문장가의 한사람으로 유명한데 오늘 날 전하지 않으나 시집 1권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정교하면서도 고아한 맛을 풍긴다는 평을 들었다.
미암이 종성으로 귀양살이를 떠났을 때 부인 혼자 수 천리를 걸어 남편을 좇아 마천령 고개를 넘으면서 지은 시가 현재 남아 있다.
가고 가다 드디어 마천령에 이르렀다. 동해는 끝이 없고 겨울의 얼굴 같구나! 만리의 길을 부인의 몸으로 어찌하여 왔는가? 삼종(三從)의 뜻 중한 줄만 알고 이 한 몸 돌아보지 않았네.
현재 미암을 모셔놓은 해남 탯자리 근처 <해촌사>
근처 해남 읍내 주민들을 선뜻 붙들고 미암을 아느냐고 물으면 대부분이 도대체 그가 누구냐 는 반응을 보일 정도로 우리는 쉽게 역사의 인물을 잊고 살고 있다.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는 형식 행사도 좋지만 고난의 시대를 살았던 지식인의 수난사와 민 족정신에 대해 우리는 얼마만큼의 이해의 폭을 가지고 있는가.
미암의 행적을 뒤쫓아 가는 해남 길엔 오랜 가뭄에 지친 농부의 깊은 주름살과 구리빛 얼굴이 논밭 사이사이에 박혀있고, 저 땅 끝에서 불어오는 해풍의 진득한 갯내음은 정직한 선비가 무 수히 다쳤던 16세기와 21세기를 바라보는 우리들을 나무라는 듯하다.
호남의 정신적 전통에 물꼬를 대준 조선 중기의 한 지식인이지만 일반인에게는 그다지 알려지 지 않았고 큰 뜻을 품고도 조용히 실천한 탓인지 ‘그릇’에 비해 후학들의 평가가 인색했던 인 물이다.
다만 한국역사에 인식된 것은 <미암일기>의 저자라는 사실만 크게 부각되어 있다. 왜냐하면 임진왜란으로 선조 초년의 기록이 많이 유실되어<선조실록>을 편찬할 때 그의 일기가 주요 자 료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인물보다는 그가 남겨 놓은 일기로 더 잘 알려진 셈이다.
자칫 업적이 숨겨질 뻔한 미암의 위치를 오늘에 드러낸 <미암일기>는 얼마나 의미가 있는 자 료인가. <미암일기>는 유희춘이 선조 즉위년인 1567년 10월1일 <은진>에 있던 때부터 시작 해 선조 10년 5월13일 그가 죽기 이틀 전까지 11년간의 일기다.
이 일기의 원본은 본래 14권이었다고 전해지나 분명치 않으며 21권이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신빙성이 없다. 아무튼 현존하는 것 일부는 미암의 문집인 <미암집>에 초록 기재되어 있고 약 자, 속자가 간혹 사영 되어 있고 오탈과 연문이 간혹 개재 돼 있으며 중간에는 파손, 마멸돼 자구가 약간 빠진 것도 있다.
내용은 무려 11년 동안 위로는 조정의 공적, 사적인 일부터 아래로는 미암 개인의 사생활에 이르기까지 매일매일의 일과 견문한 것 등을 빠짐없이 상세하고도 정확하게 기재해 놓았다.
또 명종 말 선조 초의 여러가지 사건, 관아의 기능, 관리들의 내면생활, 본인이 홍문관 전라도 감사 사헌부 관원 등을 역임하면서 겪은 사실들을 비롯해 당시의 정치, 사회, 경제 상태와 풍 속 등을 기록해 놓았다.
<미암일기>는 우리나라에서 유례를 볼 수 없는 귀중한 사료이며 조선시대의 개인 일기로는 가장 방대해 그 사료 가치가 매우 크다.
따라서 임진왜란으로 모든 기록이 불타버린 이후로 선조실록을 쓸 때 선조 초년부터 11년까지 의 사료는 이이의 <경연일기>와 기대승의 <논사록>과 함꼐 기사 사료로 사용됐는데 <미암일 기>가 가장 많이 참고가 됐다는 것이다.
특히, 동서분당 전의 정계의 동향과 사림의 동태, 감사의 직무수행, 경재소와 유향소의 조직과 운영, 중앙관료와 지방 관리와의 관계에 대해 자세히 써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또, 실록이 주로 정치에 관한 것만 언급하고 있는데 반해 <미암일기>에는 선조 초년의 조정에 대한 대소사와 일반 백성의 사회, 경제, 풍속, 습관, 문화 등을 면면이 적어 조선중기의 정치 사, 사회사, 경제사, 문화사를 이해하는데 필수자료라 할 수 있다.
이후 1936~1938년에 <조선 사료 총간>으로 5권에 두주, 방주를 곁들여 간행한 바 있으며 해 방후 국보 401호로 지정됐다가 1963년 보물206호 지정돼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모현관에 원 본이 소장되어 있다.
慕賢館’(모현관)이라는 글씨는 남종 문인화의 대가인 의재 허백련이 썼고 화순에서
화강암을 소달구지로 실어 왔고, 광주의 유명 석공들이 와서 돌을 다듬었다 한다.
<모현관>은 1959년 4월에 준공했는데 모현관이 건립되기 이전에는 미암의 14대손인 고 유대 수씨가 가보로 간직해왔다.
창평서 2Km쯤 가다보면 큰 나무들로 둘러싸인 <장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 미암의 후손 15 가구가 살고 있다. 미암은 해남출신이지만 담양의 송씨 집안으로 결혼한 후 이곳에 옮겨와 처 가살이를 한 셈이다.
연못 한가운데 자리 잡은 모현관은 붉은 기와와 돌집으로 되어있어 언뜻 별장 같은 느낌을 준 다. 2백여 년전 이 마을에 큰 불이 나서 미암의 유물 등 저서들이 많이 유실됐지만 3백60여년 전에 지어졌다는 고 유대수씨 집 뒤 사당에는 미암이 전라감사 때 타고 다녔다는 가마의 잔해 와 미암일기 중에 나오는 선조대왕의 어의가 보존되어 있다.
현재의 미암의 가계는 담양, 곡성, 전북 등에 1백50여 가구 정도가 살고 있으며 그의 처가인 송씨 집안은 장산리에 조금 떨어진 창평면 장화리에 30여 가구 쯤 살고 있다.
여러 분야에 박학다식한 것으로 알려진 미암을 이 시대에 구체적으로 이해하기에는 자료의 발 굴이 아직 미진한 단계지만 답답하고 정의와 진실이 실종된 당대를 묵묵하게 버티며 책 쓰는 일로 항변한 그의 족적은 선명하고도 붉고 확실하다.
을사사화로 정치는 극도로 혼란스러웠고 정치가 어지러웠던 틈을 타 경제가 균형을 이루지 못 해 못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백성이 늘어가더니 인심조차 흉흉해졌던 시대.
그 사회를 중간관리 입장에서 안타깝게 지켜본 미암이 19년 귀양살이 동안 써낸 일기는 조선 중기사회를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지식인의 최소 양심 표현이었던 것이다.
미암은 1577년 정2품 자헌대부로 승계한 5월 15일 서울에서 64세로 생(生)을 마감했다. 슬하에 1남1녀를 두었는데 후에 아들은 하서 김인후 선생의 사위가 됐다. 선조는 미암 사후 그를 의정부 좌찬상에 추증했고 인조는 ‘문절(文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들꽃 무성한 조선의 산하를 산책하며 수많은 시간들을 고뇌했을 호남선비 유희춘.
하얀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해남>, <담양> 땅을 흔적 없이 누비며 한 시대를 의롭게 살고도 빛을 못 본 그 어른은 여전히 말없이 땅속에 누워계신다.
☞ 참고 장소 및 문헌 0 <출생지> - 전남 해남군 해남읍 해리 0 <서 당> - 해촌사 0 <작 품> - <국조 유선록>,<역대요록>2편, <독몽구>, <미암집>, <미암일기> - 보물 206호 0 <기 타> -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모현관(미암일기 원본 보관) 0 <제 향> - 담양의 의암서원, 무장의 충현사, 종성의 종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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