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구의 연혁
삼국시대에는 백제·고구려를 거쳐 신라의 신주(新州)·북한산주(北漢山州)·남천주(南川州)·한산주(漢山州)에 속하였으며, 통일신라 시기인 757년(경덕왕 16)에 한산주가 한주(漢州)로 개편되고 한주에 속한 지금의 서울 지역에 한양군(漢陽郡)이 설치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과주(果州)에 속한 용산처(龍山處)였다가 1284년(충렬왕 10) 부원현(富原縣)으로 승격되었는데, 지금의 용산·마포 지역에 해당한다. 조선시대에는 수도인 한성부의 관할구역에 속하였는데, 한성부는 한양도성 안과 도성 밖의 10리를 포함하는 성저십리(城底十里)로 구분되었다. 한성부의 행정구역은 동부·서부·남부·북부·중부의 5부(部)와 52방(坊)으로 편제되었다가 영조 때 5부 46방으로 재편되면서 지금의 용산 지역에 해당하는 용산방(龍山坊)·한강방(漢江坊)·둔지방(屯芝坊) 등이 새로 편제되었다.
1910년 국권피탈과 함께 한성부는 경성부(京城府)로 개칭되어 경기도에 편입되었으며, 1911년 경성부의 행정구역이 5부 8면(용산면·서강면·숭신면·두모면·인창면·은평면·연희면·한지면)으로 재편되어 용산방이 용산면으로, 한강방과 둔지방이 한지면(漢芝面)으로 병합되었다. 1913년 용산면의 일부가 서부에 편입되었으며, 용산면의 나머지와 서강면이 용강면(龍江面)으로 합쳐져 한지면과 함께 경기도 고양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부·군·면 통폐합에 따라 5부 8면이 폐지되고 용산출장소가 설치되어 20개 정·통·동을 관할하였다. 1936년 경성부의 행정구역 확대에 따라 이태원리·한강리·보광리·주성리·동빙고리·서빙고리 등이 속한 한지면과 공덕리·신공덕리·하중리 등이 속한 용강면이 경성부에 편입되었으며, 1943년 경성부에 구제(區制)가 실시되어 용산출장소가 폐지되고 용산구(龍山區)가 설치되었다. 1944년에는 용산구의 도화정·마포정·율도정이 신설된 마포구에 편입되었다.
8·15광복 후, 1946년 일본식 명칭인 정(町)이 동(洞)으로 변경되면서 용산구는 35개 법정동(갈월동·남영동·도원동·동빙고동·문배동·보광동·산천동·서계동·서빙고동·신계동·신창동·용문동·용산동1~6가·원효로1~4가·이촌동·이태원동·주성동·청암동·청파동1~3가·한강로1~3가·한남동·효창동·후암동)으로 편제되었다. 1955년에는 35개 법정동을 관할하는 28개 행정동(갈월동·남영동·도원동·동빙고동·문계동·보광동·서계동·서빙고동·신흥동·심원동·용문동·원신동·원효로1~2가·이태원1~2동·청파동1~3가·한강로1가동·한강로2가1~2동·한강로3가동·한남동·해방동·효창동·후암1~2동)이 편제되었으며, 1959년 해방동이 용산동2가로 개칭되었다. 1970년 행정동이 21개 동으로 재편되었고, 1975년 중구의 동자동과 도동1~2가가 용산구에 편입되었다가 1985년 도동1가는 동자동에, 도동2가는 후암동에 각각 편입되었다. 이후 2008년 청파1~2동이 청파동으로, 한강로1~3동이 한강로동으로, 한남1~2동이 한남동으로 각각 통폐합되어 16개 행정동으로 정비되었다. 2020년을 기준하여 행정구역은 16행정동(남영동·보광동·서빙고동·용문동·용산2가동·원효로1~2동·이촌1~2동·이태원1~2동·청파동·한강로동·한남동·효창동·후암동) 36법정동(갈월동·남영동·도원동·동빙고동·동자동·문배동·보광동·산천동·서계동·서빙고동·신계동·신창동·용문동·용산동1~6가·원효로1~4가·이촌동·이태원동·주성동·청암동·청파동1~3가·한강로1~3가·한남동·효창동·후암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출처:(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2023-08-16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