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서예포럼/한국서예가협회
한국서예가협회
평론주간 / 송민 이주형
한국서예가협회 역대 회장단은 1964년 창립 이후 배길기 김충현 민태식 유희강 이기우 정하건 박영진 정해천 선주선 황성현 최민렬 박동규, 송종관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서예가협회는 우리나라의 순수한 서예단체 중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64년 시암 배길기 교수를 중심으로 서울 종로구 관수동에 검여 유희강, 일중 김충현 선생등이 처음 만나 의견을 나누고, 이듬해인 1965년 4월에 배길기 유희강 김충현 민태식 원충희 김응현 홍진표 조영준 박세림 김용제 박병규 배종승 장인식 유인식 강창원 등이 발기인 대회를 열어 명칭을 <한국서예가협회>로 하여 탄생된 단체이다.
한국서예가협회가 이렇게 선배제현들에 의하여 근본에 힘쓰고 현실을 타개하고자 하는 무본구실(務本求實)의 정신으로 태동되어 유지되고 있는 만큼 여전히 한국 서예의 맥이 살아있음을 인정할 수 있고 일체의 공모전을 배제하여 순수 서예단체를 지향하면서 서예의 정체성을 지켜왔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서예가협회의 태동기 예술사회
서화협회(1918-1936)
개화기 이후 가장 먼저 서예단체가 만들어진 것은 <서화협회>이다. 1918년 화가 趙小琳(錫晋), 安心田(中植)과 서예가 丁又香(大有), 吳葦滄(世昌)등이 주축이 되어 결성되었지만 1936년까지 18년 동안 밖에 유지되지 못하였다. 당시까지 우리나라에는 협회라는 명칭이 사용된 적도 없었는데 서양에서 클럽 등이 일본에 먼저 소개되고 일본에서 사용되던 명칭인 ‘협회’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서화협회의 활동은 일제강점기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오세창, 최린 등의 회원들이 독립운동으로 투옥되고, 협회장이던 안중식이 숙환으로 별세, 1920년 다시 선출된 2대 협회장 조석진 졸거, 협회 회원들의 분열, 조선총독부의 서화협회 활동 정지령을 내려 강제로 해체하였다. 또 협회가 활동을 하고 있는 기간에 일제는 대한제국의 문화를 말살하고 합병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동경 제국미술원 전람회를 모방한 조선미술전람회를 개최(1922-1944)하여 순수한 서화 단체 활동을 조직적으로 방해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한국인들에게 우리민족예술인 서예를 지키고자 하는 결기를 다져주는 계기로 작용 하였다.
한국 서예가협회 태동
1945년 8·15해방을 맞이하면서 순수한 대한민국정부는 문교부(지금의 교육부) 고시 제1호에 의해 기존에 조선총독부가 주관했던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의 규약을 모태로 국전제도인 “대한민국미술전람회”를 규정했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는 1949년에 창설되어 1981년까지 존속, 30회전이라는 국내 최고기록으로 신진작가를 많이 배출해 최고의 권위와 영예를 누린 관전(官展)으로 한국미술계의 역사와 영욕을 같이했다.
하지만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이념 아래 민족미술을 널리 알리고 능력있는 신인을 발굴한다는 취지 아래 실시된 국전은 파벌이 생기고, 입선 특선의 국전경력은 학력에 관계없이 대학교수나 교사 임용의 자격으로서 문교부가 보장하는 등 관전체제가 갖는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무관하지 않았고, 한편으로는 성공적 작품과 미술전람회 등용이 출세의 기회로 인식되면서 변화를 요구받았다.
서예계에서는 시암 배길기 교수를 중심으로 1964년 서울 종로구 관수동에 모였다. 서예가 검여 유희강, 일중 김충현선생등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도 관심이 집중되는 국가에서 운영되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대한 관심이 집중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는 그동안 공모전에 대한 구항(衢巷)의 여론을 반영하여 동호인 협회의 필요성이 인식되고 결국 협회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운영과 심사에 대한 여론을 묵시적 반영과 조율이라는 역할을 담당하는 창구로 작용했으리라 짐작된다.
한국서예가협회 탄생(1965)
이듬해인 1965년 4월에 명칭을 한국서예가협회라 하고 규약을 만들어 친목도모와 함께 서단 발전을 위한 노력을 하고자 결성 하였다.
초대 대표위원: 시암 배길기
고문: 김용진
상임위원: 민태식 박세림 김용제 원충희 조영준 이기우 유희강 김윤중 김충현.
사무위원: 배종승 김응현.
감사: 장인식 박병규
위원: 홍진표 오제봉 현중화 박 심 서동균 최현주 강창원 류인식 김효수 정소연.
발기인: 배길기 유희강 김충현 민태식 원충희 김응현 홍진표 조영준 박세림 김용제 박병규 배종승 장인식 유인식 강창원.
간략한 정관에 만들어진 설립목적은 “친목을 도모하며 서예의 발전을 위하여”라고 하고, 초대 대표위원을 맡은 시암 배길기 선생은 “한국서예의 오늘의 침체를 지양하고 그 발전과 향상을 도모하며 아울러 서예인의 우의를 돈독케 하기 위하여 이에 한국서예가협회를 발족하온 바 별첨규약을 참조하시고 본회의 취지와 규약에 찬동하시와 입회하여 주시기 앙망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살펴보면, 목적과 우려는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 당시에도 서예가 침체의 일로를 가고 있는 것을 우려하고, 서예인들끼리 단합하여 발전시키는데 동참할 것을 호소한 것이다. 이러한 한국서예가협회의 우려는 당시 국가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운영과 심사에 대한 여론을 반영하고 이 단체에서 조율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순탄한 길만을 걸어온 것은 아니다. 1990년대를 전후한 한국서단의 분열은 곧 한국서예가협회에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한국서예가협회의 위기와 재기
1990년대 한국서예가협회에 위기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협회는 한국서예의 큰 줄기로 공모전 없이 순수하고 왕성하게 정통성을 유지하면서 주로 전시활동을 통해 한국서예발전을 꾀하여 갔다. 그러나 1982년부터 대한민국미술전람회를 대신한 한국미술협회의 대한민국미술대전이 1990년대 ‘서예대전’의 대분열 과 함께 뿔뿔히 흩어지게 되었고 위기를 맞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서예단체 회원들은 공모전에 따라 움직일 수 밖에 없으며, 분열은 반목과 대결로 이어지고 결국 이 분야는 쇠락의 길로 점차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말로는 ‘서단의 확장’이었다. ‘다양성’을 말하지만 궤변이다. 서단의 분열이 한국서예가협회의 분열과 서예인들을 갈라놓았다.
이로써 한국서예가협회는 24회부터 일부 계열만이 참여하여 뜻있는 몇 사람들에 의하여 쪼그라진 채 불씨를 살리는 마음으로 전시를 이어가는 신세가 됐다. 그 후로 집행부는 어려운 여건과 상황을 타개하면서 송천 정하건 회장이 맡아 16년 동안 전시회를 개최하면서 40회전까지 이르게 되었다.
40회 회장을 맡은 것은 경기대학교 서예문자예술학과 일도 박영진교수였다. 심기일전하기 위해 추대된 박영진 회장은 경기대학교에 교수로 재직하면서 대학원과 학부에 서예학과를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고 있을 때이다. “그동안 서단의 각 단체를 통합하기 위하여 소원했던 문하들의 중진서예가들을 만나고, 신입회원을 확장하여 다시 한국서단의 순수한 협회로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하고 원광대 조수현 선주선, 계명대 김광욱, 대전대 전윤성, 경기대 박영진, 전북대 김병기 교수로 추진위원단을 구성하여 그동안 서단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작가군들을 초대하고, 학교에서 배출한 석박사와 교강사등 40여명을 영입하여 모두 78명이 제40회 기념 韓國書藝家協會展을 개최하여 다시 추동의 힘을 받아 올해 53회전에 이르게 되었다. 한국서예가협회 역대 회장단은 배길기 김충현 민태식 유희강 이기우 정하건 박영진 정해천 선주선 황성현 최민렬 박동규, 송종관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은 서단 분열의 상처가 아물어가고 간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주변에는 크고 작은 서예단체들은 일반인들이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유사한 명칭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거기에는 ‘한국’과 ‘서예’, ‘서화’, ‘서’라는 고유명사를 넣지 않고는 사람들에게 어필하기 여렵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서예협회, 한국서예가협회, 한국서예인협회, 한국서가협회, 한국서도협회, 한국서화협회 ……. 서단에 어지간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걸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는가. 군웅축록(群雄逐鹿)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한국서예가협회를 중심으로 모두 단결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