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현의합장묘(顯義合裝墓) 내력
전대미문의 비극 4,3은 기어이 이곳 한라산 남동쪽 자락에도 피바람을 몰고 왔다.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약300여명, 수망리 약100여명, 한남리 약100여 명, 등 수많은 인명이 사태 중에 희생되었고, 마을은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다. 그 와중에 80여명의 주민이 한꺼번에 학살되는 참사까지 발생했으니 참으로 비통한 일이었다.
의귀리, 수망리, 한남리에 대한 초토화 작전은 다른 지역보다도 열흘 쯤 앞선 1948년 11월 7일 부터 시작되었다. 토벌대는 이곳 중산간 지역에 집집마다 불을 지르면서 학살도 서슴지 않았다. 순식간에 삶터를 잃은 주민들은 불타버린 집 주변과 돌담 밑에서 기거하거나 산으로 숨어들었다. 당시 의귀초등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2연대 1대대 2중대(중대장:설재련)는 수색중에 발견되는 사람들을 마구 죽이는가 하면 일부는 학교 안에 임시로 수용했다. 토벌대는 수용된 주민들을 대상으로 무차별 고문을 가할 뿐만 아니라 학살도 일삼았다. 이에 무장대는 이들 주민의 안위를 도모함과 동시에 토벌대(군)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1949년 1월 12일(음력1948년 12월 14일) 새벽 의귀초등학교를 습격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미리 간파한 토벌대(군)의 화력에 밀린 무장대는 51명이 사망해 사실상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퇴각했다. 교전중 군인이 2명 사망했고 2명이 부상했으나 부상병도 몇일 후에 사망하였다.
이미 의귀초등학교에 80여명의 주민을 수용하고 있었는데 1월10일 일부 주민을 학살했고 1월12일 무장대와 내통했다는 구실을 삼아 나머지 주민들도 학교 동쪽 약 200m지점(의귀리 1506-6번지)의 밭으로 끌고가 학살했다. 학살 현장에는 죽은 어미의 젖을 빨다 지쳐 쓰러져간 갓난아기의 넋도 있었다. 시신들은 원만한 수습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일부는 유족이 거두어간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시신들은 흙만 대충 덮은 채로 방치되고 있었다. 썩어가던 시신들은 그 해 봄 의귀리, 수망리, 한남리 주민들이 의귀리 중심지에 성을 쌓게 되면서 한남리 민보단원들에 의해 '개탄물(의귀천)' 동쪽(의귀리765-7번지)으로 옮겨 세 개의 구덩이에 던져 '맬젓담듯' 매장했던 것이다.
사태가 끝나자 유족들은 인고의 세월을 견디며 점차 묘역을 가다듬어갔다. 1964년 12월에 부모형제가 묻힌 땅을 사들인 데 이어 1968년 봄에 봉분을 단장하고 산담을 쌓아 해마다 벌초와 제례를 행해왔으며 1983년 봄에는 의로운 넋들이 함께 묻혔다는 의미로 현의합장묘(顯義合裝墓)라는 이름의 묘비를 건립했다. 그런데 마을길을 몇 차례 넓히면서 묘역이 돌출되는 상황에 이르자 새로운 유택 조성이 필요하게 됐다. 이에 유족들은 2002년 6월 부터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모으고 관계기관에 간청한 끝에 수망리 '신산모루' 지경(893번지)에 새 묘역 부지 5722㎡를 마련해 이장케 됐다.
사건 발생 54년 만인 2003년 9월 16일 이장을 위해 유해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서쪽 봉분 17구, 가운데 봉분8구, 동쪽 봉분 14구, 총 39구(남15구, 여7구, 청소년추정 2구포함한 성별미상 17구)가 다수의 유물과 함께 확인됐다. 그러나 어린이의 유골을 비롯한 수많은 유골들은 이미 세월의 더께에 흙이 되어서 가뭇없이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유족들은 한 구 한 구의 유골로 나누지 못했지만 세 봉분의 흙 한 줌씩을 함께 옮겨 넣음으로써 흩어진 유골들을 대신했다. 통곡과 오열 속에 발굴된 유골들은 봉분별로 화장하여 양지바른 이 곳, 지세 좋은 자리에 고운 잔디 입혀 2003년 9월 20일 안장됐다.
-- 현의합장묘의 이전과 추모관 건립을 위해 유족대표 양봉천회장의 부단한 노고가 있었다고 한다.
영상1
영상2
비 문
유난히 매섭고 시렸던 무자, 기축년 그겨울
곰도 범도 무서워 잔뜩 웅크려 지내면서도
따뜻한 봄날 오려니 했더이다. 아-그랬는데...
거동 불편한 하르방 할망, 꽃다운 젊은이들
이름조차 호적부에 올리지 못한 물애기까지
악독한 총칼 앞에 원통하게 스러져 갔나이다.
허공 중에 흩어진 영혼, 짓이겨져 뒤엉킨 육신
제대로 감장하지 못한 불효 천년을 간다는데
무시로 도지는 설움 앞에 행여 누가 들을까
울음조차 속으로만 삼키던 무정한 세월이여-
'살암시난 살아져라' 위안 삼아 버틴 세월이여-
앙상한 어웍밭 방엣불 질러 죽이고 태웠어도
뿌리까지 다 태워 없애진 못하는 법 아닙니까
봄이면 희망처럼 삐죽이 새순 돋지 않던가요
참혹한 시절일랑 제발 다시 오지 말라 빌고 빌며
뒤틀린 모진 역사 부채로 물려줄 수는 없다며
봉분 다지고 잔디 입혀 해원의 빗돌 세우나니
여기 발걸음한 이들이여- 잠시 옷깃을 여미어
한 가닥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 보듬고 가신다면
헛된 죽음 아니라 부활하는 새 생명이겠나이다.
-음력 8월 24일
출처 "현의합장묘 4,3유족회"
잠깐 걸어 들어오면 정낭3개가 있는데 나무로 만든 정낭이 아니고
녹슬지 않은스텐레스로 3개를 만들어 놓았다. 늘 닫혀있다.
관리사무소를 지나면 묘역으로 접근하게 되고 너른 묘역은 제주잔디로
잘 단장되어 보기는 너무 좋다. 관리가 잘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묘들은 처음부터 여기에 있던 것은 아니고 의귀리 '개탄물' 동쪽에 있었다. 1949년 1월 10일 2중대 이덕구가 지휘하는 유격대를 전멸시킨다. 의구초등학교에 주민들을 집합시켰다. 의귀리,수망리 마을사람들이 잡혀왔다. 한남리, 수망리, 의귀리 세마을은 한 학구 구역으로 서로 형제같은 마을이었다. 학교로 잡혀 온 사람들은 운동장 동쪽 밭에 대려다 팡팡 하는 소리가 들렸고 마을은 침묵으로 흘렀다. 누가 한 사람 시체를 거둘 엄두도 못냈다. 살벌한 순간이다.
顯義合裝英靈 神位 추모비(현 수망리 현의합장묘역)
'개탄물'은 '서중천' 바로 곁에 있다. 1968년 봄 삼묘종친회가 결성되고 산터를 준비하였다. 학교 곁에서 시신을 수습하여 이곳으로 안장시키자는 의논을 하고 묘지를 조성한 것이다. 그리고 2003년 도로 확장으로 현재 장소로 이장해 왔지만 당초에 있던 장소를 가보면 너무나 좋게보였다. 작지만 아담한 장소였다. 학교 곁 밭에 있던 시신을 6개월이 지나 수습하고 '개탄물' 곁에 터를 준비하여 모신 것이다.
삼묘종친회로 이어져 벌초도 한날에 모다들엉 하다가 1983년 봄 의로운 넋들이 한데 있다하여
'현의합장묘'라고 비석을 세우고 친목회 명칭도 바뀌었다.
이 비석이 그때 만들어진 것이다.
2002년부터 침목회에서 십시일반 돈을 모아 시체 발굴작업을 하고 2003년 9월 16일
수망리로 모시게 된 것이다.
1949년 1월 10일과 12일 이틀간에 걸쳐 80여 명을 총살시킨 것이다. 이유는 무장대와 내통했다는 구실이다. 죽은 사람들 중 일부는 군경에게 뒷 돈을 주고 거둬 갔다고 진술한다. 80여 명 시체가 시체를 수습하러 갔을때(한남리 민보단원들에 의하여) 39구 밖에 없었다. 그래서 봉분 3개에 각각 나누어(17구. 8구, 14구) 합장했다.
지금 잠들어 있는 영령들이 아픔을 누가 알리마는 조금이라도 위로가 된다면 참배하러 가는
사람들 조금은 신중 할 필요가 있다.
분향도 하고 묵념도 올리고
경건하게 예를 다 지킨 다음 행동을 하여야 한다.
그러고는 영상물도 보고 묘역을 탐방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오늘 '현의합장'묘 탐방은 정말 의미있다.
이동하는 버스에서는 오승국 선생이 자세하게 설명하고
현장에서는 현의합장묘 양봉천 친목회장이 진행하였다. 손발이 맞았다.
묘역에 있는 비문도 읽어보고
양회장 이야기도 들어보고
침묵이 시간도 잠깐
참배를 마치고 영상실로
자리를 옮긴다.
사진출처 카페"사삼탐문회"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