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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토리문학 9월호 원고- 권혁모 관념 새롭게 하기 권 혁 모 “탁거구견(濯去舊見)이요 이래신의(以來新意)”라 하였다. 예전의 생각을 씻어버려 새로운 생각을 부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평생 동안 의식적이든 무의적이든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간다는 자체가 바로 이미 검증된 관념 덩어리로 학습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콩을 콩이라 하며, 팥을 팥이라고 온전하게 대처하는 과정에서 생물학적 용어인 ‘조건반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 사회는 이미 굳어진 예전의 생각에서 조금씩 이탈하는 가운데 발전이 진행되고 있다. 생물의 진화 역시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새로움을 위한 몸부림으로 가속화되고 있다. 종의 특징을 알리는 DNA는 계속적인 반복의 과정을 이탈하는 가운데 염기서열을 바꾸어 종의 분화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인류 문화가 시작된 이래 이러한 관념의 학습과 이를 탈피하려는 몸부림이야말로, 장구한 역사를 지속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사물이 갖는 기존의 관념에 부합되는 시는 감탄은 줄 수 있으나 감동에 이르기에는 부족하다. 어떤 새로운 대자연 앞에서 쏟아지는 정감을 주체할 수 없을 때에는 감탄이 따른다. 그러나 감탄은 꼭 그와 같은 상황이 전개되는 입장에 있지 않으면 쉽게 전달되기 어렵다. 그렇지만, 감동을 줄 수 있는 요체는 기존의 질서를 파기한 가운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미 학습되어 습득된 관념화를 벗어나 현상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였을 때의 놀라움이 바로 감동에 이르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온전한 시는 창작자가 먼저 감탄을 하여, 독자에게 공감해 줄 것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 사물과 현상에 내재된 관념의 껍질을 벗겨 거기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의도적인 과정이 없이는 신선한 감동을 얻어내지 못할 것이다.
신필영의 <하현달>은 이러한 관념 새롭게 하기의 성공작이다. 자칫 진부하거나,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은 소재에, 이렇듯 명징한 이미지를 연결하고 단정한 생각을 갖게 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정물(靜物) 소재의 작품이야말로 흔히 현대시조의 아킬레스건이라 할 수 있는 ‘음풍농월’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있다. 누구든 제목만 보아서는 또 한 편의 옛시조라는 편견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신필영은 접근이 어려울 것 같은 <하현달>로 이렇듯 속 시원한 드라마틱 한 편을 완성하였다. 뱃길 없는 강물 벗은 발로 건너와서 쪽문 밖 서성이다 화들짝 숨어버리고 야위어 반으로 와도 알아볼 수 있겠지요 서라벌 어느 봄밤 잠 못 드는 기와장이 민망스레 새겨 올린 추녀 끝 얼굴 하나 그 막새 남은 미소로 하늘가를 오갑니다 새벽이 가까울수록 이끌리듯 더딘 발길 멀리 감빛 창문 겉불로나 따스한데 한 생각 가리지도 못해 옷자락이 젖습니다. - 신필영의 <하현달>, ‘시조세계 2009 봄호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하여 뱃길 없는 그윽한 강물에 맨발로 건너오는 달을 프롤로그로 설정하였다. 이미 생명을 얻은(의인화 된) 그 달은 수줍음에 쪽문 밖에서 엿보다 놀라 숨어버리게 된다. 그 그리움으로 야윈 자신의 모습(하현달)을 상대는 알아볼 수 있을지 걱정하고 있는 첫수는, 사랑의 병을 앓는 모노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 같다. 둘째 수에서 하현달이 막새의 남은 미소로 하늘을 오간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막새는 서라벌 어느 봄밤에 그리움으로 잠 못드는 기와장이가 추녀 끝에 민망스럽게 올린 얼굴(자신의 분신)이라 하였다. 여기서 추녀 끝에 있는 반쪽 얼굴의 미소는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다 담아내고 있다. 높은 곳에서 숨어 사랑하는 사람을 엿본다는 의미와 사랑을 앓다가 반쪽이 된 얼굴, 기와장이의 분신 등으로 의미의 확장을 시키고 있다. 셋째 수에서는 이런 엘레지의 막을 내리는 에필로그 부분이다.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아쉬움은 발걸음을 더디게 하였다. 이제 저만치 멀어져 간 연인의 집 감빛 창문은 온전히 가슴을 따뜻하게 하지 못하고, 없는 것 보다는 낳은 겉불로나 따뜻하다 하였다. 그리하여 생각을 제대로 가리지 못한 화자 역시 이러한 연정(戀情)에 옷자락이 젖고 있는 것이다. “거울 속의 꽃을 집으며, 물 속의 달을 잡는다(鏡裏拈花 水中捉月)”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이 심금을 울리게 하였다면, 이는 신필영의 <하현달>을 두고 하는 말일까? 사랑을 앓다 야윈 얼굴로 돌아왔고, 그리움에 잠 못드는 기와장이 올린 막새의 남은 미소와 그리고 별리의 안타까운 발길이며 겉불로 위안을 삼는 것은, 성공적인 사랑보다 더욱 큰 공감을 불러 독자의 갈채를 받게 하였는지 모른다. 이동백은 제주 서귀포의 성산 일출봉을 오르며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고 있다. 그동안 일구어 낸 삶의 여정을 생각하고,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려 하고 있다. 어차피 인생은 자연의 일부분으로,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가야 하는 숙명이고 보면, 차라리 큰 가슴으로 순응하는 것이 더욱 인간적일지 모른다. 이제껏 자신의 채취가 벤 삶의 자리가 마치 모천(母川)이라도 되는 듯, 그리로 회귀하고 싶은 속내를 담담하게 풀어가고 있다. 성산 일출봉 오르며 내가 가볍다는 생각을 하고 집에 돌아와 밥 뚱뚱이 먹고 체중계에 몸을 올렸다. 반백 년 살고도 풀잎보다 저 가벼운 내 눈금. 몸부림치고 살아낸 삶 풀잎보다 가벼움에 저 하늘 둥둥 떠가는 구름이 서러워도 헐렁한 삶 가방에 넣고 그 성산으로 다시 가고 싶다. - 이동백의 <성산 일출봉>, ‘스토리문학’ 2009년 7월호 성산 일출봉은 그리 높지 않지만 경사가 급하다. 보통 사람들은 숨이 턱까지 차오르겠지만 이동백은 그렇지 않았던가? 그래서 집에 돌아와 밥을 뚱뚱이(모습까지 담은 재미있는 표현) 먹고 체중계에 몸을 올린 것이다. 거기서 오르기 전의 기대에 비하여 풀잎보다 가벼운 눈금은 절망 쪽이었나 보다. 그래서 풀잎보다 가벼운 눈금이지만, 몸부림치며 살아온 삶이었기에 저 하늘 흐르는 구름이 서럽다 하였다. 또한 눈물을 삼키며 억척스레 살지 않았던 그 순하디순한 모습이 되어 성산 일출봉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한다. 이동백 스타일의 뜨거운 삶(자신은 그렇지 않았다고 하겠지만)을 긍정하며 살아가겠다는 소박한 심정을 아프게 대비시키고 있다. <성산 일출봉>은 일출봉을 오르며 느꼈던 자신의 가벼운 몸무게에 대한 비감(悲感)이었지만, 본질은 살아온 세월에 대한 아쉬움과 삶의 방식에 대한 귀소 본능으로 외연(外延)을 확장하고 있다. 이동백은 때로는 지극히 시조적(엄격한 음수와 음보율에서)인 율격을 벗어나 비교적 자유로운 내재율로 시조를 창작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강점은 관념의 탈피를 견지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시적 성공을 거두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다만, 자유시적 언어의 운용은 때로는 시원시원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밑줄 그은 “~ 내가 가볍다는 생각을 하고 / 집에 돌아와 밥 뚱뚱이 먹고 ~” 에 해당하는 초장 후구와 중장 전구는 허용 범위인 6~9의 음수율이나 가장 안정적인 운율의 기본인 음보율에서 조금 벗어난 아쉬움이 없지 않다. 이 역시 작자의 의도성이 개입되었다고 본다.
문무학의 <낱말 새로 읽기 26, -서울>은 낱말을 소재로 새로운 언어의 질서를 구축하려는 시도이다. 무릇 오백 년 넘는 역사를 통하여 이루어진 한글의 자모(字母)와 낱말을 통하여 이렇듯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다분히 언어의 조탁 능력이 돋보인 그의 역량이라 할 것이다. 서울에선 울지 말아야 해 서러워도 울면 안돼 서먹하고 울적해도 서울에선 울면 안돼 서슬을 돋우고 돋워 울분 삭혀 서야 해. - <낱말 새로 읽기 26, -서울>, 문무학의 시집 ‘낱말’ 중에서 서울, 오천만 민족의 뜨거운 심장부! 그 엄청난 역동성의 도시 서울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 헤아릴 수 없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다 모여 있고, 그들끼리 서로 만나 역사를 창조하고 있으며, 생존의 본능을 향하여 저마다 땀 흘리며, 무한한 가능성과 절망이 공존하는 곳이다. 그 오만 가지를 다 감싸고, 아우르며, 투쟁하며, 노래하며, 이야기하며, 나누며, 생존해야 할 서울의 명칭이 반복적으로 운(韻)을 던진다. “서울-울다-서럽다-서먹하다-울적하다-서슬 돋우다-울분 삭히다”는 ‘서’와 ‘울’의 반복적인 운으로 연상되어지는 낱말의 연결은 단순히 두운(頭韻)을 살린 글자놀이가 아니라, 원관념을 포함하고 있는 서울의 의미를 해체하려는 의도였는지 모른다. 이에 그치지 않고 서울에서 살아가는 지혜와, 이를 통하여 무수한 너와 나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진솔한 의미를 엮어내고 있다. 기존의 국어사전이 지금까지의 통상적인 관념을 알기 쉽게 설명한 것이라 한다면, 문무학의 ‘낱말’은 이렇게 재창조된 새 생명의 언어 사전이라도 되는 것일까? 문무학의 ‘낱말’은 기존의 자모를 퍼즐 맞추기식으로 풀었다 해체하는 놀이가 아닌, 그 자모를 재조합한 새로운 질서의 창작이다. 그래서 <낱말 새로 읽기>를 대할 때 시선을 오래 붙잡는 끌림이 생기는 것이다. 국어사전에 있는 낱말은, 일단 그에게 걸리면 속박을 풀고 비상의 나래를 펼쳐 푸른 하늘을 훨훨 날아가게 한다. 이것이 ‘관념 새롭게 하기’이며, 무한한 역동성을 지닌 언어의 탄생이다. - 끝 - |
첫댓글 3편의 시 즐감했습니다. 이동백 선생님의 <성산 일출봉>은 선생님한테 속한 것만도 아니고 모두의 인생을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싶습니다. 시는 다만 시일 뿐이고... 시가 시인을 찾는 것도, 삶을 찾는 것도 아닌 시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점에서 이 시는 해부해 볼 수 있는 의지가 다분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
김명희 시인님의 예리한 시선에, 제가 쓴 글을 다시 읽고 또 읽어보았습니다. 읽어주시고 또한 소견을 주시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