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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련사> 白蓮寺 정토왕생을 위한 염불수행을 도모하기 위하여 조직된 신행결사(新行結社). 중국 동진(東晉) 때의 고승 혜원(慧遠)이 동림사(東林寺)에서 염불왕생을 결사하고 백련사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 한국에서는 신라시대에 보(寶)를 통하여 정토왕생과 관음신앙 등을 실천하는 각종 결사가 있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오대산 백련사에서 이러한 운동이 행해졌는데, 중국의 백련사가 《법화경》을 중시한 반면 이곳에서는 《열반경》을 중시하였다.
창건은 대웅보전에 있는 중수기 현판에 의하면 통일신라 시대생왕(文聖王,재위 839~856) 때 무염(無染,801~888) 스님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전한다.
절은 그 뒤 고려시대인 1211년(회종7)에 원묘국사(圖妙國師) 요세(了世)에 의해 중창되면서 사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요세는 이보다 앞서 월출산 약사난야(藥師蘭若)에 거주했는데, 이 지방의 독실한 불교 신자인 최표(崔應) · 최홍(崔弘) 형제와 이인천(李仁鬪) 등의 요청으로 만덕산에 옮겨와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제자 원영(元營) · 지담(之灌) · 법안(法安) 등으로 하여금 건물 80여 칸을 짓게 하고 1216년(고종3)에 낙성법회를 열었다.
그 뒤 요세 스님은 1221년에 남원 태수 복장한(卜章漢)의 청으로 관내에 제2의 백련사를 설치하고 몇 년을 그 곳에서 머무르다가 1223년 최표의 간청으로 다시 백련사에 돌아와 도량을 크게 넓히고 법석을 마련했다. 요세의 입적 이후 절은 천인 ·원환 · 천책 등으로 이어지면서 법맥을 이어나갔다.
고려 말조선 초에 이르러서 절은 왜구의 노략질로 폐사가 되다시피 했다. 조선 초기에 들어와서는 1407년(태종7) 12월의 나라에서 실시한 2차 사찰정리기에 조계종 자복사(資福寺) 24개 사찰 중에 소속되고 있어, 비록 고려 말에 왜구의 침략으로 사찰이 많이 훼손되기는 하였으나 그 명맥은 계속 유지해 갔다. 절은 그 뒤 1426년(세종8)에 천태종 승려 행호(行秊) 스님이 크게 중창하였다. 천태종의 영수이며 도대선사(都大禪師)의 칭호를 갖고 있던 행호 스님은 임금의 장수와 국가의 복락을 비는 서원(誓願)을 하면서 제자 신담(信繼)등으로 하여금 여러 단월에게 시주를 권유하도록 했다.
한편으로는 효녕대군(孝寧大君)에게 편지를 보내 대공덕주가 되어 줄 것을 청했고, 효녕대군은 기쁜 미음으로 시주하고 힘을 더해 주었다. 그러자 여러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모여들었는데, 특히 조수(曺隨)와 강습(姜濕)이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이 중창 불사는 1430년에 시작하여 1436년에 준공되었는데, 이로써 불전과 승료가 옛 모습을 회복하게 되었다. 효녕대군은 왕위를 세종 임금에게 양보하고 사찰을 유람할 때 백련사에 8년 동안 머물렀는데, 이때 맡 54두 2승락을 기부하기도 하였다. 그 뒤 1621년(광해군13)~1627년(인조5) 사이에 취여삼우(醉如三愚) 스님이 법회를 열며 옛날 모습을 되찾았다.
취여는 청허 휴정의 제자인 소요 태능(適遙太能)의 제자로서 백련사의 맹주가 된 것이다. 조선 후기에도 만덕사는 몇 차례 중수되었다 1650년(효종1)~1659년(효종10) 사이에는 현오(玄悟) 스님이 서원(西院)의 건물을 중수하였다.
또한 이 무렵에 절의 란기(適寄) 스님이 본사치 사적이 오래되어 없어져 버릴 것을 염려하여 조종저(趙宗著)에게 글을 청해 <백련사사적비>를 1681년(숙종7)에 세웠다. 1760년(영조 36) 2월에는 큰불이 일어나 대부분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절의 여러 스님이 중건을 서원하고는 각자 분담해서 시주를 모아 이듬해 4월8일 불사를 시작, 1762년 4월 13일 대법당의 중건을 마무리했다. 이 같은 사실은 대웅보전에 걸려 있는 중수기 현판을 통해 알 수 있다.
서울 출발 → 서해안 고속도로 이용(목표T.G에서 영암, 강진 방면 40분 소요, 총5시간 소요) 부산 출발 → 남해 고속도로 이용(순천 T.G에서 벌교, 보성, 장흥을 경유 1시간 20분 소요, 총 5시간) 광주 출발 → 나주, 영산포, 강진 방면 1시간 20분 소요 목포 출발 → 40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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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련사는 경사가 급한 곳에 자리 잡고 있어 계단식 석축이 많다.
중심 구역의 가장 뒤에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36호인 대웅보전이 있고, 대웅보전 양옆으로 칠성각과 명부전이 있다. 대웅전 앞에는 만경루(萬景樓)가 있고, 명부전 서쪽에 응진당 및 그 앞 넓은 공간에 보물 1374호 사적비가 서있다. 또 만경루 좌우로 요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육화당(六和堂)'으로 불린다. 육화당은 본래 있던 요사를 1995년 확장 중수하였다. 만경루 옆에는 새로 지은 종각이 있다. 본래 종각은 칠성각과 대웅보전 사이에 있었으나 1991년 현위치로 옮겼다 가람 배치상 현재는 만경루가 가장 앞에 있지만 기록에 의하면 예전에는 그 앞에 해탈문이 있었다. 만경루에서 바라보는 강진만은 그야말로 빼어난 절경이다, 그리고 강진만을건너 바라다 보이는 곳이 고려청자의 생산지로 유명한 강진 사당리이다. 백련결사 운동이 절정에 이르는 13세기 후반에 사당리의 사기장(砂器匠)들도 결사에 참여하여 그릇을 시주했는지, 아니면 어떤 사람이 백련사에 시주할 그릇을 사당리의 사기장에게 주문하였는지 그릇 바닥 안에 '만덕(万德)'이란 글씨가 상감된 13세기 후반의 청자조각이 사당리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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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화당
육화당은 'ㄴ'자의 전각으로 본래 있던 요사를 1995년 확장 중수한 것으로서 1층은 식당이고 2층은 객실로 사용된다.
육화당 편액 육화란 부처님께서 교단의 화합을 위하고 대중이 수행하는데 필요한 자세를 일깨우고자 여섯 가지 화합하는 법을 말씀하셨는데, 그 여섯 가지 발원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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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덕선원
응진전(나한전)에서 산길로 5분 거리에 위치한 무문관 만덕선원은 조용하면서도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지난 2002년 4월 처음 입제 방부를 받기 시작한 무문관은 전 주지 혜일 스님이 1억5000만원의 예산을 들여 만든 것으로 건평 40평에 5개의 방이 갖추어져 있으며, 욕실과 방음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무문관은 말 그대로 밖에서 열쇠를 채우고 일정기간 동안 그곳에서 절대 나오지 않겠다는 각오로 용맹정진 하는 곳으로, 계룡산 대자암(93년), 제주 남국선원(94년), 인제 백담사(98년)에 이어 백련사가 4번째다. 하루 한번 제공되는 식사를 하며 외부와 완전히 끊긴 절대고독 속에서 화두를 꿰뚫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 그 힘겨움이야 그 어디에 비할까만 그만큼 수행의 진전도 보다 깊어진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 것이다.
이러다보니 해제를 한 뒤에 방부신청을 받는 일반 선방과는 달리 이곳은 결제 중에도 다음 결제 때 이곳에서 꼭 수행하고 싶다는 납자들의 요청이 끊이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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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보전
대웅보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이며 1702년에 중건되었다. 현판의 '대웅보전'글씨는 원교(員崎) 이광사(李匿師, 1705~1777)의 글씨로써,1755년 진도로 유배된 이후 어느 때인가 이곳에 들러 쓴 듯하다. 건축 양식을 보면, 기단을 높이 쌓아 경사면을 고르고 건물을 안치했는데 건물의 뒷부분에도 3단으로 높은 축대를 쌓았다 공포는 다포식이고, 천정은 우물천정인데 중앙 부분을 한 단 높게 처리하여 내부 공간을 크게 활용하고 있다. 앞면 중앙 기둥머리에는 용머리를 장식해 놓아 단청과 함께 전체적으로 화려한 느낌을 준다.
한편 안에는 전각의 중수사실을 알려주는 중수기 현판2매가 걸려 있어 참고가 된다. 하나는 <백련사대법당중수기>로서, 대웅보전의 중건 배경과 연도및 불사에 참여한 스님들의 이름을 알 수 있다. 내용을 보면 1760년(영조36)2월에 큰불이 일어나 대부분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왈찰(日制) ·지정(智正)혜철(惠哲) · 태화(太和) · 신징(愼證) · 규연(圭演) · 찰연(奈演) · 윤철(閨哲) ·연징(蓮潑) ·붕관(鵬寬) 스님 등이 중건을 서원하고는 각자 분담해서 여러 곳에서 시주를 모아 이듬해 4월 8일 불사를 시작,1762년 4월 13일 대법당 등의 중건을 마무리했다고 한다. 이 중수기는 동강(桐問) 이의경(李載敬,1704~1778)을이 지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정설 지일(晶雪智逸) 스님이 지은 <해탈문중수기>인데, 1836년(헌종 2) 해탈문을 중수한 사실이 적혀 있다. 해탈문은 지금은 없지만 당시에는 만경루 아래에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 안에는 사자(飾子)를 조각해 법고를 받치도록 고안한 법고대(法鼓臺)와 반자(飯子)가 하나 있다. 법고대는 법고보다 오래된 것인데, 연잎 형태를 한 받침 부분의 지름으로 보아 본래의 법고는 현재 것보다 더 컸던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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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보전 수미단
대웅보전에는 석가·약사·아미타불의 삼세불좌상이 있다. 석가불은 현재불, 약사불은 과거불, 아미타불은 미래불을 상징한다. 높이가150cm인 본존불은 머리가 나발이며 머리 위에는 조그만 보주형 육계가 솟아있고 그 아래에 계주를 표시하였다. 두꺼운 느낌을 주는 옷자락이 양어깨를 감싸고 가슴에는 내의 자락이 표현된 항마촉지인을 한 오른손을 가부좌한 무릎 위에 놓았다. 양협시불은 본존불과 유사한 모습이지만 중품하생인을 하고 있는 손 모양이 다르다.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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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만덕사! 어머니의 품같고, 마음의 고향처럼 포근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얼까?
까마득한 유년시절 의 추억이 함축되어 흘러내리는 그곳~
그곳은 머어언남쪽나라 끝자락에 자리잡고서 언제나우리을향해 손짓하고있지.
고향과, 추억이라는 진한 향수를 뿜어내는 백련사! 또 한번 언제 다녀와야지!
국민학교때 맨날 소풍가던 백년사가 이렇게 아름다운줄은 미쳐몰랐었네.
새롭게 기억하게 해줘서 진짜 고맙네.......
국민학교때가 아니고 중핵계때여. 그때 그곳에서 황승식이가 기타치고 진관이가 발동기 원맨쇼하고, 나는 노래부르고.그때가 아 아아 옛날이여. 벌써 머리털 다빠지고 검정털이 흰털되고 인생도 개털이고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