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의 추방
배 화 열
우리는 일상생활 중에 자주 권태를 느낀다. 권태는 모레스(mores)와 가면(pesona)에서 생겨난 자식이다. 그런데 권태는 문학과 종교로 추방할 수 있다고 본다. 나는 대구에서 나서 대구라는 사회의 틀(규범)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은 사회적 관습(모레스)에 얽메이게 마련이다.
옛날 이야기 중에서 어느 부자가 군대에서 함께 생활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가 아들의 부하였다고 했다. 집에 돌아오면, 다시 아버지와 아들이 관계로 되돌아온다. 이 두 부자간의 이야기는 모레스의 극단적인 상황을 말해 주고 있다. 부자간의 군대 생활과 가정생활과의 역논리가 전개된 예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 더 살펴볼 것은, 페르소나(가면)의 문제가 등장한다. 군대와 가정생활 속에 두 부자의 모레스와 가면의 부조화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두 부자의 생활은 이중인격이라고 볼 수 있다. 군대와 가정생활 속의 가면은 아이러니하게 전개될 것이 분명하다. 나는 생활 중에 이러한 가면을 자주 접하게 된다. 예를 들면 가면에 충실한 관리는 분명 이중인격자이다. 이중인격자는 사회병리적인 현상인 소외된 인간이다.
미국 소설가 솔벨로우는 『훔볼트의 선물』에서 권태학이라는 용어를 쓴 바 있다. 권태학이란 권태가 인간에게 음모와 죄악의 씨앗을 뿌리게 되는 것은 확실하다. 나는 모레스와 페르소나(가면)에서 생겨난 권태를 어떻게 소멸할 수 있는 가를 이해하고자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문학은 권태를 전화(카타르시스)하고, 종교는 권태를 승화(sublime)시킨다.'고 가정해 본다. 문학과 종교는 모레스와 페르소나에 쌓인 한 지역의 문화를 정화하고 승화시킨다는 뜻이다. 나는 인생을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소시민의 꿈을 자주 꾼다.
나는 나의 인생을 권태롭게 살고 싶지 않다. 현대 철학자 마르쿠제는 『행복론』에서 건강이 행복의 기초라고 하면서, 욥의 이웃의 눈으로 보면 불행과 재난의 연속이었으나, 욥자신은 소외와 권태를 신앙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파브르라는 유명한 곤충학자는『곤충기』에서 벌과 거미와 개미에 대해서 재미난 이야기를해주고 있다. 그런데 '곤충기'를 쓰게 된 동기가 바로 교사생활의 권태에서 온 것이라고 연구동기를 밝혔다. 한편 욥의 이야기 외에 존 번연은『천로역정』에서 죄악의 시장인 <허영의 시장>을 주인공 크리스챤과 그의 아내 크리스티아나가 통과하도록 하였다. 신앙이란 허영이나 권태와는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나는 권태로울 때 가끔 영화관에 들르게 된다. 영화는 문화인이 되는 척도라고 격찬하는사람도 있다. 살인자를 개조시킨『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셰라쟈드는 문학으로써 살인왕의 타락한 천사(혹은 악마)가 베푸는 타락한 선(살인행위)을 고친다는, 지혜를 배울 수 있다.
또한『우신예찬』에서 바보여신 모리아(Moria.『유토피아』의 저자 토마스 모어에서, 모어를 흉내낸 말임)가 한 인간 속에 들어가서 바보짓을 하게 만든다. 이런 바보짓을 보고 다른 사람이 즐거움을 갖는다. 따라서 바보여신 모리아는 희랍의 다른 어떤 신보다 중요한 신이라고 격찬한 것이다.
그리고 권태 속에 빠지기 쉬운 인간의 나약함을, 바보여신 모리아가 인간에세 기쁨과 웃음을 주었다고 하면, 그것으로 예찬받아 마땅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문학은 이솝의 우화이거나 바보여신 모리아의 장난으로 볼 때, 교훈과 즐거움을 주고 있다.
악한은 바보여신의 장난치고는 잔인하다. 소위 마키아벨리즘(권모술수)의 화신들이 작품 속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한편 악한으로 등장하는 주인공은『리챠드3세』의 리챠드 3세,『도리안 그레이의 화상』에서 그레이,『어둠 속에 누워』의 롭티스,『연애대위법』의 윌터,『폭풍의 언덕』에서 히드클리프,『주홍글씨』의 칠링워스 그리고,『노틀담의 곱추』의 신부 등이다.
여기서 악한 못지 않게 악녀도 있다.『에덴의 동쪽』의 캐시,『허어조그』의 메델레인,『만딩고』의 블랜치,『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블랜치, 톨스토이의『안나 까레리나』에서의 안나까레리나 등이 있다. 또한 악한동물로는『검은 고양이』의 검은 고양이,『유토피아』의 양,『베오울프』의 그렌델, 『갈리버 여행기』의 야후 등이다.
덧붙여서, 선한 여인들에 대한 작품으로는,『춘향전』의 성춘향,『죄와 벌』의 소냐,『리어왕』의 코오딜리,『무정』의 여주인공 등이다. 선과 악이 공존하다가 악의 힘에 파멸하는『파우스트』,『지킬박사와 하이드』,『'이중인격』이 있다. 악한 인간이 교황이 되는『선택된 인간』은 특이한 예가 될 것이다.
따라서 문학이 바보여신 모리아의 역할로 권태로운 인간에게 정신적 즐거움을 준다고 했다. 반면에 종교는 권위자에 의해서 권테로운 인간에게 정신적인 자유와 평화의 지혜를 주게된다. 종교의 권위자는 권태로운 인생이 죄악의 타락한 인생으로 이끌고, 타락한 인생이 죄악의 벌인 죽음으로 이끈다고 경고한다.
에를 들면 불타(부처)는 인간의 현실 상태를 불속에 갖힌 어린이로 보았다. 칼야스퍼스는『소크라테스 불타 공자 예수 모하메드』에서, 소크라테스와 불타는 통찰력, 소크라테스와 예수의 가르치는 방법, 공자와 노자의 도에 대한 접근 방법이 다르다고 비교했다.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는 비지식 (non-knowledge)에 대한 통찰력을, 불타는 해탈에 대한 통찰력을 강조하였다. 소크라테스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시민들을 가르쳤고, 예수는 직설적인 방법으로 가르쳤다. 공자와 노자는, 선과 악을 초월한 영역인 도를 공동체의 생활 질서관으로 보았는데, 공자는 도를 우회적인 방법으로, 노자는 직접적인 방법으로 설명했다. 또한 야스퍼스는 불타와 예수는 각각 힌두철학과 구약성서에 의존하였으며, 불타는 통찰력을, 예수는 신앙을 강조하였다고 비교했다.
끝으로, 사회생활의 필요악인 모레스(mores)와 가면(persona)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권태와 소외에 빠지게된다. 권태는 죄악과 음모의 생활에 젖게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권태를 올바로 추방하는 방법이, 술과 스포츠(헤밍웨이의 주장. 단편 <킬로만자로의 눈> 참조)가 아니라, 문학예술의 즐거움(혹은 재미)을 통한 교훈에다가, 권태의 추방(혹은 정화)와 종교의 통찰력(혹은 신앙)으로 승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사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