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글판 2023년 여름편
산수국 꽃 피어나는 광화문광장에 나갔다. 광장의 분수대가 물을 뿜어 올리고 시민들은 물줄기를 즐긴다. 여름날의 도심 풍경이 복잡한 듯 한가함이 교차한다. 교보생명빌딩 광화문글판 2023년 여름편이 단장되어 있다. 이번 광화문글판 여름편은 안희연 시인의 시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에서 가져왔다.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
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 있다
교보생명 관계자는 “어떻게 지나간 줄도 모르는 시간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결국 뭉쳐지고 합해져 저마다 의미를 갖고 있다는 뜻을 담아 문안을 선정했다.”고 설명했다.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지만 지나서 뒤돌아보면 그 시간들은 겹겹의 다른 풍경으로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삶의 새로운 에너지가 된다. 글판의 그림은 연두색 풀밭 언덕에서 토끼가 깡총거리고 소녀가 이를 지켜보는 풍경을 표현했다. 동심을 추억하게 하는 그림이다. 저 언덕을 넘어서 이곳에 왔다. 그 시간 동안 걸어온 무수한 풍경들이 그려진다. 아닐까? 언덕을 걸어올라 언덕 너머의 저곳으로 가야 한다. 그곳에서 이곳을 걸어온 풍경을 추억할 것이다.
안희연 시인은 2012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2015년 첫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로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하였다고 한다.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시 전문을 읽어 본다. 삶은 여름날 언덕을 오르는 일, 힘겹다고 여기면 힘든 길이요, 산책이라 믿으면 산책길이 되는 것이다. 그 언덕길에는 물웅덩이들이 사방에 널려 있고 토끼들도 깡총거릴 것이다. 삶의 고충과 환희가 어울려 언덕을 이룬다. 이 모든 것은 풍경을 이루고 우리의 생각에 따라 다른 풍경으로 그려지기도 할 것이다. 아니다, 저 언덕이 바로 나의 삶이다. 내 삶의 언덕, 물웅덩이와 토끼들을 사랑한다. 저 언덕 풍경이 사계절로 펼쳐져 흘러와 내 삶의 겹겹의 풍경을 보여 준다. 아련하다. 여름 언덕을 발이 푹푹 빠져 오르든 내려가든, 그 언덕 풍경은 각자의 생각과 믿음에 따라 다양한 풍경으로 우리의 가슴을 울릴 것이다.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걸어갔다
언덕이라 쓰고 그것을 믿으면
예상치 못한 언덕이 펼쳐졌다
그날도 언덕을 걷고 있었다
비교적 완만한 기울기
적당한 햇살
가호를 받고 있다는 기쁨 속에서
한참 걷다보니 움푹 파인 곳이 나타났다
고개를 들자 사방이 물웅덩이였다
나는 언덕의 기분을 살폈다
이렇게 많은 물웅덩이를 거느린 삶이라니
발이 푹푹 빠지는 여름이라니
무엇이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니
언덕은 울상을 하고서
얼마 전부터 흰토끼 한마리가 보이질 않는다 했다
그뒤론 계속 내리막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밤이 왔다
언덕은 자신에게
아직 토끼가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고요 다음은 반드시 폭풍우라는 사실
여름은 모든 것을 불태우기 위해 존재하는 계절이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토끼일까
쫓기듯 쫓으며
나는 무수한 언덕 가운데
왜 하필 이곳이어야 했는지를 생각했다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
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 있다
-안희연의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전문
세종대왕 좌상이 앞에 그 뒤에 광화문, 북악산 아래에 청와대가 보인다.
문구와 그림이 조화한다. 언덕을 걷는 사람과 토끼 한 마리가 정답게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