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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 같은 여름 휴가이지만 일이 잘 안풀린다.
오히려 평소때 없던 업무전화도 자주 오고 또 사무실도 두번이나 출근해야 했고...
휴가 첫날인 월요일 새벽에 혼자 지리산종주를 하려고 계획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월요일날 업무관련 일처리 할 것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다리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아서였다.
수술을 한뒤 석달하고도 이십여일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장시간 동안 부려먹거나 일정 강도 이상을 지속할 경우에 무슨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우려가 그것.
현명해졌던지 늙었던지 아뭏든 둘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저런 이유로 특별한 외출없이 하루하루 휴가가 지나고 있는데 이웃 비호클럽에서 토요일날 당일종주를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올타꾸나 좋은 기회다!'
하지만 이것 또한 곧바로 신청하거나 연락을 하지 않고 하루동안 곰곰이 생각을 가늠해 보고 난 뒤 집사람하고 상의를 거쳐 결정했다.
'우와~이제 사람이 되어가는 건지...'
금요일 저녁에 아시안컵 축구중계도 마다하고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지만 깊은 잠은 잘수가 없다.
재작년에 당일종주를 다녀온 뒤로 역대 두번째 당일종주이고 다리수술을 마친 뒤로 완치여부를 판가름지을 중요한 고비이기 때문에 더욱 긴장감이 감돈다.
7월 24일 새벽 3시, 경기장정문에서 버스에 승차한 인원이 19명 이라는데 한분이 늦는 바람에 30분이나 지연이 된다.
성삼재에서 준비를 마치고 5시에 산행출발 하려던 계획에 당연히 차질이 생기고...
5시가 넘어서야 성삼재에 도착한 일행이 각자 서둘러 산행길에 오르는 분위기인데 러너스팀은 주차장에서 밥을 먹고 오른다며 함께 하자고 한다.
김밥을 먹고 볼일을 본 다음 출발할때 확인한 시간이 5시30분 조금 못 미친다.
러너스팀 여섯과 나, 이렇게 일곱이 졸지에 한팀이 되었고 비호의 본진 보다는 20분 가량 늦은 출발.
재작년에 왔던 기록을 대충 떠올려보니 천왕봉까지 9시간이 걸렸고 노고단 정상까진 30분, 그렇다면 이사람들과 노고단에 이르는 시간을 확인해보면 전체 주파시간을 예측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이 복장들은 가볍게 했고 가방도 아주 작거나 아에 없거나 해서 다행(?)이라면 다행인데...
노고단 산장에서 학생들과 함께 종주중인 택곤형님을 만나고 곧바로 노고단에 오른다.
33분 47초,
막 햇살이 비치기 시작하는데 시야보다 아래쪽에서 쏟아지는 햇살에 시야가 가려 길이 보이지 않는다.
순간적으로 길이 확인되지 않아 손으로 햇살을 가리며 확인하고 지나게 된다.
임걸령 샘터까지 32분이 걸려서 가볍게 뛰듯이 이동하고 물을 보충한 뒤에 길을 재촉하는데.... 아뿔싸!
노루목에서 삼도봉쪽으로 가던 도중 맞은편 햇살을 신경쓰느라 미쳐 보지 못했는지 아님 쉬고 있는 사람들에 막혀 길을 잘못 봤는지 ...
반야봉으로 오르게 된 것이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이길을 수십번이나 지나다닌 사람이 이런 실수를...
한겨울에 눈밭을 헤치며 혼자 지날때도 이러지는 않았는데 아무생각없이 막 뛰어서 지나다 보니 ...
나야 괜찮은데 함께 온 여섯명한테는 미안하기 그지없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올라온 김에 사진이나 찍자는 말 밖엔~
서둘러 내려와서 주능선길에 다다르지만 그냥 막 지나가도 힘들 형편인 당일종주에 반야봉까지 경유하게 되었으니 이 일을 어쩔꼬~
삼도봉으로 내닫는 발길에 조급함이 실리지만 뒤따라 오는 일행은 오히려 이야기 소리가 커지는 기분이다.
삼도봉을 지나 550계단을 내려가자 낮익은 풍경, 화개재가 나오고 연이어 토끼봉을 넘어 연하천산장으로 향한다.
그무렵 뒤따라오던 일행의 말소리중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5시에 화엄사를 출발해서 혼자서 대원사까지 종주하는 분이라는데 입이 딱 벌어진다.
완전히 땅밑에서 땅밑까지 그것도 제일 긴 코스로 종주하는 것이다.
전주에서 오셨다는데 나를 포함해서 주변분들 중에 아는 분들이 많으신것 같다.
내가 수술한 것까지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듣고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은 갈길이 우리보다 훨씬 더 멀기에 한결 더 속도를 내어 일행을 앞서나간다.
총 3시간 58분만에 연하천 산장에 도착, 간식을 먹으며 20여분간 휴식을 한다.
몸이 좀 있어(?) 보이는 중년 남자 두사람이 나를 힐끗 보더니 숫제 반말로 묻는다.
"어이~마라톤 하는 사람인가?"
'피식'
"응 그려 복장을 봉게로 긍가만?"
'....'
이 양반들 보기엔 20대로나 보이나 보다.
나이 사십에 길거리에서 봉변을 당하고 이렇게 막 취급 당해도 기분 나쁜일은 아니다.
연하천을 출발한지 한시간이 조금 못되서 벽소령산장에 이른다.
10분동안 물을 보충하고 다시 길을 재촉하는데 일행중 한분이 보이지 않는다.
대열은 자연히 이동하는게 빨라지고 ....
한30분 가량 이렇게 속도를 높혀 움직이다가 드디어 분실(?)했던 분을 발견하는데 나머지 분들은 안도감과 함께 속도를 다시 낮추고 나는 빨라진 그대로 유지하고 나가다 보니 점점 여섯명의 본대열과는 멀어지기 시작하는 느낌이다.
선비샘에서 시원한 물이 원없이 나온다.
아까 괜히 벽소령에서 물뜨러 내려갔다 왔나 싶다.
그냥 지나쳐와 여기서 이렇게 좋은 물을 맘껏 마실걸...
덕평봉에선 천왕봉이 멋지게 들어오길래 한참 셔터를 눌러대며 대지리의 멋진 장관을 마음껏 감상한다.
이제사 혼자 온 느낌이 들면서 산과 내가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는 기분이다.
'어이 잘 있었는가? 나도 그간 잘 살았다네!'
산에서 느껴지는 이맛!
고독하면서도 누군가 꼭 함께 있는듯한 이런 기분!
이 기분을 마음껏 누리며 달리듯이 길을 재촉한다.
벽소령에서 세석에 이르는 길이 주능선 가운데 가장 험하고 이렇다할 중간 기착지 없는 긴 코스인데 아마도 종주의지를 시험받는 구간이 아닐까 한다.
칠선봉을 오를무렵에 드디어 비호팀의 후미가 잡히기 시작한다.
두세명씩 그룹을 지어 가고 있다가 뒤에서 나타난 나를 보고는 다들 똑같이 놀라며 묻는다.
"아니, 앞에 가지 않았어요? 이부장은 지금 강기상씨 따라 잡는다고 난린데..."
"어쩐지 아무리 빨리 뽑아봐도 안보인다고 하더니..."
밥 먹고 늦게 출발했고 반야봉에 들러 늦었다고 설명을 하며 하나씩 대열을 앞질러 간다.
6시간 57분만에 세석에 도착해서 후미가 도착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다가 점심을 먹는다.
발도 씻고 양말도 널어서 말리고...
무려 40분간이나 휴식을 취했다.
이제 대열이 다 합쳐져서 빨리갈 필요도 없어졌고 빨리 가본들 버스가 일찍 떠나는 것도 아니고...
산행의 의미와 마음가짐이 잠시 사이 이렇게 달라진다.
전체적인 흐름이 예정시간보다 늦은 것은 아닌데 사람들의 모양새를 보니 많이들 지친것 같아 보인다.
본격적으로 힘이 드는 것은 바로 지금부터인데....
촛대봉 이후로 또다시 홀로 산행이 계속되고 다른때 산행보다 한참 늦은 1시간6분만에 서드럭서드럭 장터목산장에 도착한다.
놀랍게도 엄배성형님이 일행과 함께 밥을 먹고 있다 반갑게 맞아준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물을 길어다 놓고 후미대열을 기다리다가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 또다시 혼자서 길을 재촉한다.
제석봉 오르막을 단숨에 치고 오른다음 전망좋은 고원에서 홀로 기념촬영을 하고 천왕봉으로 향한다.
통천문을 오르기 전에 정동씨와 마주치며 그간의 안부(?)를 주고 받는다.
"형 어디갔었디야? 내가 찾을라고 얼마나 빼고 뽑고 해도 안보였는디... 밥은 잘 먹었데?"
대답은 아까 사람들 만날때 했던 녹음테입이 똑같이 돌아간다.
통천문을 오르고 난뒤 언제나처럼 극심한 체력저하가 나타난다.
고산지대 특유의 증상이고 누구나 겪는 것인데 지금은 천왕봉에 다 왔다는 반가운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장터목에서 37분이 걸려 천왕봉에 도착했고 총 산행시간으로 따지면 9시간 33분이 소요되었다.
반야봉 경유를 감안하면 2년전과 거의 같은 시간대이다.
15분 동안 사진도 찍고 주변 풍광도 감상하면서 노닥거리다가 비호클럽 산악부장님과 함께 서둘러 하산길에 접어든다.
이제 시원~한 맥주도 생각나고...막걸리도 한잔 쭉~생각나고...
빨리 내려가서 계곡에 몸 담그고 여유도 즐기고 싶고...
장터목까지 26분만에 내려온 뒤 1시간 21분만에 백무동에 이른다.
총 산행시간은 11시간 48분!
계곡으로 풍덩~
두길쯤 되는 폭포 아래서 도인처럼 물을 맞으며 세상만사 다 잊어버리고 노닥거린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다.
달리기를 한 덕이 아니었다면 어디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이던가?
이렇게 먼 거리를, 2박3일은 족히 걸리는 시간을 하루낮으로 압축해서 누릴수 있고, 한 술 더 떠서 흘러가는 세월을 거슬러 최고의 체력을 가질수 있다는 것이...
무한한 감사와 무한한 행복감에 젖으며 지리산을 다시 또다시 올려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