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소나무
한 정 순
금강송이 유난히 아름다운 양양의 어성전이다. 숲속에 아담한 산막이 있고 몇 발자국만 나서면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이어진다. 큰 키에 붉은 갑옷을 입고 도열한 모습이 하도 좋아서 마음 설레지 않을 수 없다.
어성전 계곡엔 손 선생이 퇴직 후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산다. 그녀의 초대로 문우 셋이 이곳에 와 있다. 이박삼일 일정으로는 오늘 상경했어야 했지만, 그가 치맛자락을 잡으며 낙락장송을 보고 내일 가라기에 못이기는 척 눌러앉았다. 그리고는 우중에 경사 70도는 됨직한 가파른 산을 오르고 있는 것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이라고는 우리 일행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태풍 갈매기의 여파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니 누군들 이 시간에 산을 오르겠는가. 우리는 내일이면 집으로 돌아가야 할 몸이니 비가와도 오늘 밖에 시간이 없다.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또 한손으로는 밧줄을 잡아당긴다.
제일 연장자인 수원 김 선생님이 앞장을 서고, 대전 권 선생과 손 선생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모두 거뜬히 올라가는데 유난히 나만 힘에 겨워 숨을 헐떡이며 땀을 비 오듯 쏟는다. 죽은 나뭇가지로 지팡이를 삼았더니 한결 힘이 된다.
동서남북 분간이 안 되는 산 길, 제법 올라왔건만 안개에 가려 내려다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아직은 한낮인데 울창한 숲속이라 그런지 해가지는 듯 어둡다. 앞에 가던 손 선생이 “가슴이 답답해지거나 통증이 오거든 절대로 올라오지 마세요.” 당부를 한다. 그 소리를 들으니 더럭 겁이 난다. 지팡이를 짚었던 손에서는 힘이 빠지고, 기진맥진하여 낙락장송이 아니라면 포기하고 싶다. 아주 가깝게 마주 보고 섰던 건너편 산도 운무에 싸여 보이지 않고 정상에 서 있는 나무 잎만 희미하게 바람에 일렁일 뿐이다. 영락없는 구름위에 신선이다.
그래도 오로지 그를 보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다보니 저만치 머리위로 금강송이 줄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큰 낙락장송 두 그루가 먼저 우리를 반긴다. 그 둘레만도 두 팔이 모자라며 키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크다. 눕다시피 하고 사진을 찍으려 해도 밑둥치는 앵글 속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까마득하게 올려다 보이는 그 둘은 똑같이 남쪽을 향해 가지를 뻗었고 생김새도 비슷하게 닮아 형제 같기도하고, 궁합이 잘 맞는 부부 같기도 하다. 같은 시기에 나서 어깨동무하고 이때까지 같은 울타리 안에서 함께 살았으니 이보다 더한 인연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그 둘을 보면서 억지를 써본다. 천생연분 ‘부부 소나무’라고.
부부 소나무는 충북 보은에 있는 ‘정이품송’처럼 대접 받는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요, 천연기념물 팔 호로 지정된 ‘백송’처럼 희귀해 보호받는 처지도 아니다. 그저 흔하디흔한 적송으로 태어나 고향 떠날 줄 모르는 농민처럼 강원도 산골 오지 마을에서 올곧게 자랐을 뿐이다. 어찌 보면 열악한 환경에서 휘어져 자란 소나무가 더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지만, 국보 1호의 기둥이나 대들보로 쓰기에도 손색이 없으리만치 의젓한 금강송의 자태는 믿음직한 청년 같아서 더욱 아름답다. 그의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백 이 삼십년은 됨직하다.
백 년 전이면 호랑이도 나왔음직한 강원도 산골, 한 종자로 구르고 구르다 뿌리내린 곳이 그의 탯자리가 되었으리라. 누가 거름 주어 기른 것도 아니요 스스로 났고 자랐음이 분명하다. 가지치기도, 몸피불리기도, 자손 퍼트리기도 스스로 했으리라.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아기의 열 손가락 같은 솔잎을 펴 들고 아빠 엄마 발치에서 한 뼘도 못되는 애기소나무가 함께 자라고 있다. 형도 있고 아우도 있다. 하도 예뻐서 캐다가 우리 집 화분에 심어놓고 혼자서만 즐길까 하는 충동에 빠져 눈길로 어루만지면서 비닐봉지를 찾았다. 그때 애기소나무가, ‘나는 여기가 좋아요’하는 듯해 얼른 마음을 접었다. 보이지 않는 위대한 힘에 의해 다수종이 모여 숲을 이루고 미생물까지 공존하는 산. 소중한 어린 생명을 도둑 질 할 뻔했던 순간이었다.
강원도의 특성이 눈과 추위가 남쪽보다 월등한 곳이다. 그래도 그 많은 세월 어떻게 견디어 왔는지 대견스럽기까지 하다.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생명에 위험을 느낄 때면 스스로 가지를 쳐내는 아픔도 겪었을 것이고, 오늘의 낙락장송으로 꿋꿋하게 성장하기까지 만고풍상 인들 어찌 없었으랴. 상지로는 붉은색이 역력하면서도 하지로 내려갈수록 거북등 같은 갑옷을 입고 삭풍의 세월을 말하지만, 그의 반생도 못산 내가 어찌 그를 헤아릴 수 있으리. 다만 명성 없이 산을 지키며 금강송의 본분을 다하는 ‘부부 소나무’의 올곧음만을 부러워 할 뿐이다. 피차 몸도 마음도 비에 젖은 채 마주한 만남이었지만 그를 본 소감은 ‘아· 잘생겼다. 멋지다.’ 밖에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살아서는 푸른 숲을 이루고 피톤치드로 인간을 도우며, 죽어서는 궁궐의 재목이나 문화재로 태어나 수 천 년을 다시 사는 부활의 금강송. 그들을 두고 내일이면 우리는 떠나간다. 언제 또다시 올지 기약도 없지만 내가 이름 지어준 '부부 소나무'만은 대대손손 울울창창하게 고향을 지켰으면 좋겠다.
2008. 7. 21. (14매)
첫댓글 한별님! 두 소나무에게 부부의 연을 맺어 주셨군요. 그 동안 서로 바라만 보아야 했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중매 세 번이면 극락에 간다는데...ㅎㅎ저는 자주 보아도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 아니 느꼈어도 글로 표현하지 못한 것들을 한별님은 멋지게 표현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젠 누구라도 어성전에 불러 들이지 말아야 하겠어요. 제 글감을 다 빼앗기니까요.ㅎㅎㅎ
들미소님 죄송허구먼유. 헌디 중매는 잘한거쥬?.
아이고, 쓰던 것 즉시 중지하겠으니 제발 다시 한 번 불러주오.
죄송하긴요. 캐도 캐도 무한정 나올 듯한 곳입니다. 글감 캐러 또 오세요. 중매는 정말 잘 하셨어요. 제가 가끔 가서 보고 알콩달콩 사는 모습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어! 한별님과 봄비님이 같은 시각에...? 이러다 세 사람이 범벅이 되겠어요.ㅎㅎㅎ
잘 생긴 금강 소나무 한 쌍이 눈에 삼삼합니다. 이젠 한별님의 글로 그 소나무들은 서로 깊은 인연의 끈을 엮었네요. 그 혼인에 둘러리로 있었음을 감사해야 겠습니다. "죽어서는 궁궐의 재목이나 문화재로 태어나 수 천 년을 다시 사는 부활의 금강송." 글이 참 반듯하고 깨끗합니다. 언제나 편안하면서 따뜻한 글을 쓰는 한별님, 멋집니다.
과찬으로 용기주시니 감사합니다.
글벗들의 아름다운 인연에 아름다운 만남입니다. 선생님 네 분이 산을 오르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 아름다운 어성전에서 또한 아름다운 벗들을 불러모아 아름다운 자연 속으로 동행하며 글감 하나를 뽑아 내시는 정경이 참으로 곱습니다. 그리고 애기 소나무는 한별님! 가족을 떠나서는 살아내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랍니다. 그 곳에 두고 오시기 잘 하셨어요. 소나무의 애절한 목소리를 들을 수있는 귀를 가진 사람 몇 안되니...... 한별님! 대단해요!!!
'부부 소나무'의 내력을 '한 종자로 구르고 구르다 뿌리내린 곳이 그의 탯자리가 되었으리라' 그리고 애기소나무가 ‘나는 여기가 좋아요’라고 하는데서 감탄하게 됩니다. 금강송의 자태를 보는듯한 문체가 움추렸던 가슴을 펴게 만드십니다. 과연 들미소님이 경계를 하실만도 합니다. 멋진 수필 한편으로 무더위를 날려보냈습니다. 하도 좋아서 마음이 설렙니다. 감사합니다.
해바라기 수필의 산실(들미의 소). 그동안 들미의 소가 소재가 되었던 글을 쓰신 분들...쥔장이신 들미소님을 비롯하여 바다님, 봄비님, 엄지님, 그리고 한별님. 산방산님의 글도 있던가? 들미의 소에 기념비라도 세워야 겠습니다.
항상, 밤늦게까지 카페 불을 밝히고, 창가에 앉아 차를 드시며 정겨운 담소를 나누시는 6학년 삼총사(;매사에 액티브하신 '봄비님', 뭇쏘를 몰고 자갈길을 달리시는 야성적인 '미소님', 항상 끝마디에 조용히 몇마디 남기시는 '한별님'), 소인의 고정관념 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별님'의 '부부 소나무'를 읽고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외유내강, ".... 한 종자로 구르고 구르다 뿌리내린 곳이 그의 탯자리가 되었으리라....." 모습과는 전혀 다른 강인한 한국의 여인만이 쓰실수 있는 표현입니다. 경륜이 부럽습니다. 자주 들려 읽겠습니다.
이렇나마 글을 쓸 수 있게 금강송을 보여주신 들미소님께 다시 한번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진심으로 꿉뻑 절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답글을 달아주신 선생님들께도 감사합니다. 제 글을 차마 내놓기가 부끄러워서 못 올리다 용기를 내어보았습니다. 잘못된 지적 기다리겠습니다.
한별님의 은은한 미소를 닮은 글 너무좋습니다.
한 폭의 수채화 같은 글입니다. 선생님 덕분에 천 수 이상을 누릴 금강송과 그 가족들... 오래오래 행복하길 빕니다. 좋은 글~감사합니다.^^
초록의바다님 마야님 감사합니다. 더욱 배우고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