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까르미네르품종 만화로 묘사한 까르미네르
한동네에서 같은 재료와 양념을 써서, 서로 참견해가며 품앗이로 김장을 담가도, 묘하게 집집마다 맛이 다르다.
와인은 어떤가. 역시 와이너리마다 땅의 기운과 포도품종이 다르고, 섞는 비율이 다르고, 오크통 숙성 기간이 다르니 당연히 차이가 날밖에. 하지만 전세계 와인 맛은 같아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절대 미감’을 지닌 평론가 로버트 파커의 영향이 크다. 말 한마디로 그해 농사 가치를 결정하니 농부들은 파커 입맛에 맞추기 위해 안달이다. 그래서 점차 맛이 파커의 입맛대로 균일화되어 간다는 말이 나온다.
이런 현상은 신세계 와인도 마찬가지. 가격대비 질이 좋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칠레 와인도 보르도의 유명 와인제조업자들이 들어와 맛을 균일화시켰다. 테루아의 특징이 아니라면 분간해내기 힘들 정도다.
그런데, 이렇듯 똑같은 맛에 싫증을 느낀 사람이라면 귀를 기울일 만한 와인이 있다. 이름도 생소한 카르미네르(Carmenere) 품종이다. 카르미네르는 18~19세기에 프랑스 오리지널 보르도와인을 제조할 때 꼭 들어갔던 품종이라고 한다. 하지만 유럽의 포도밭을 황무지로 만든 포도 질병 필록세라가 나돌 때 전멸되었다. 한데 1970년대 초, 우연히 보르도의 유명한 학자에 의해 칠레에서 발견되어 화제를 모았다. 필록세라가 전세계 포도밭을 휩쓸었으나 칠레만은 유일하게 영향을 받지 않은 것.
카르미네르는 진하면서 부드러운 맛이 메를로와 비슷하다. 그러면서 오랜 여운과 힘을 지녀 남미 여인의 정열을 떠올린다. 특히 코끝을 자극할 정도로 스파이시한 향미는 순간 움찔할 정도로 강하다. 하지만 입안에서 한바퀴 굴리고 나면 깊고 부드러운 질감이 감미롭게 혀끝을 감싼다. 칠레 특유 진흙모래의 충적토가 만들어내는 촉촉하고 진한 맛이 그대로 배어 있되, 향은 여느 품종과 확연히 다르다.
100% 카르미네르 와인을 만들어 낸 ‘마법의 손’은 반세기 역사를 자랑하는 산 페드로. 그중 산 페드로 창립 연도와 같은 이름이 붙은 ‘1865 리제르바’(5만원)는 단연 새롭다. 첫 느낌은 벨벳처럼 부드럽지만 완숙미가 있고 뒷여운이 길다. 잔에 출렁이는 강렬한 보랏빛이 인상적. 불고기 등 한국음식과도 조화를 이루고, 음식과 함께 했을 때 더욱 맛있는 와인이다. ‘카스티오 데 몰리나’(3만5천원·사진) 또한 후추향이 강하면서 복합적인 맛이 잘 어우러졌으나, 마지막 한방울까지 요동치는 1865의 향기에는 접근하지 못한다. 현재 2000년 빈티지가 들어와 있고, 앞으로 3~8년을 더 보관했다 마셔도 좋다. 다만 마시기 3시간 전에는 디켄팅을 시켜 몸을 풀어야 더 향기롭다.
모두 최근 빈티지여서 이 예사롭지 않은 향기들이 오랜 시간 잘 숙성되었을 때 어떻게 달라질지 자못 궁금하다. 뭔가 색다른 와인 한잔을 마시고 싶을 때, 특별한 자리에서 이야기가 있는 와인을 내놓고 싶을 때 카르미네르는 향기로운 선택일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