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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주 . 2010. 7. 25. 연세소망교회 예배
묵상 1. 시편1편 (묵상기도 / 아직도 어려 매일 잘못을 합니다. 가슴이 작아 소심하고 조급 합니다. 그래서 매일 기도 하며 반성문을 여러장 씁니다. 그래도 여전히 잘못을 저지르고 스스로 지치기도 합니다.)
신앙고백
찬송 499 저 장미꽃 위에 이슬
대표기도
성경 말씀 열왕기하 2장1절~25절
찬송 253 구원으로 인도하는
기도
광고 어려운 사람, 좋은 사람 함께나누는 세상 ‘천지원’으로 오세요.
찬송 93 예수는 나의 힘이요
축도
얼마 전 온 국민을 슬프게 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저도 뒤숭숭해 머리를 짧게 깎았습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이야기입니다.
고인의 마지막 여행길은 봉화마을, 경복궁 영결식, 서울광장, 화장터
그리고 다시 고향 봉화마을에 안치 되었습니다.
약 800km되는 거리를 80km 속도로 진행 되었습니다.
온 거리마다 애도의 물결 이였습니다.
이렇게 마지막 여행은 우리를 슬프게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엘리야의 마지막 여정 800km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엘리야는 휘오리 바람처럼 나타나서 열정적인 삶을 살다가 휘오리 바람타고 승천 했습니다.
마지막 여정에 엘리사와 동행 합니다.
엘리사와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였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호탕한 가수 노사연씨의 만남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 이였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 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돌아보지 말아 후회하지 말아
이 바보같은 눈물 보이지 말아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돌아보지 말아 후회하지 말아
아 바보같은 눈물 보이지 말아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참 애듯한 노래입니다.
만남이 우연이 아니였기에 후회하지 말자는 노래인듯 합니다.
그러니 힘들어도 울지말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가장 어둡고 힘들었던 시대에 선지자였습니다.
가시밭길 인생 이였습니다.
가장 포악한 아합왕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남기고
그릿 시냇가에서 고독 속에서 살았습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스님들도 고행 중에 외부와의 모든 만남을 끊고
절대 고독 속에서 보내는 시간이 있다고 합니다.
엘리야는 지치고 힘들때 엘리사를 만났습니다.
아무 조건도 없는 만남 이였습니다.
저도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누군가 옆에 있어주기만 해도 힘이 됩니다.
요즘 남북문제로 국민이 불안해합니다.
그리고 힘의 논리로 풀어가려 합니다.
그래서 축구장 3개의 크기인
핵잠수함 조지워싱턴호가 동해상에서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7월내 전군 비상훈련체재입니다.
힘은 힘으로 맞서겠다는 의도입니다.
그러나 남북문제는 군방력으로 겨뤄서 해결 될 문제가 아닙니다.
엘리야가 조건 없이 엘리사를 만났듯이
조건없는 만남이 선행 되어야 합니다.
우리 8천만 민족의 바램입니다.
죽어도 소원이 통일이기때문입니다.
요즘 인터넷 채팅은 위험 수위입니다.
조건없는 만남,
묻지마 만남
결과는 사망입니다.
오늘 뉴스에도
잘못된 만남
잘못된 사랑 때문에 어머니가 살해 되었습니다.
이제 엘리야는 마지막 여행을 떠납니다.
아주 슬픈 여행입니다.
고단하고 괴로운 여행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여행이라고 합니다.
길갈에서
엘리사에게 ‘너는 여기 머물라’고 말합니다.(2절)
왜냐하면 엘리야가 가는 길이 고난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길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죽음의 길입니다.
최대의 권력과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2절)
엘리야와 함께 죽겠다는 각오입니다.
벧엘에서
또다시 엘리사야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4절)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아니하겠나이다.(4절)
여리고에서도
한 번 더 강하게 말합니다.
엘리사야 청컨대 여기 머물라(6절)
그러나 엘리사의 맹세는 변함이 없습니다.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않겠나이다.(6절)
길갈에서 벧엘, 여리고 , 요단까지의 마지막 여정은 죽음의 길이였습니다.
엘리사는
후회 할 수 있었습니다.
왜 엘리야를 만나서 괴로움을 자처 했는지.
그래서
얼마든지 세상의 유혹에 빠져 쾌락을 즐길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그 험한 고난의 길을 포기할 수 있는 명분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든지 노래방에서 술집에서 쾌락에 흔들흔들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끝까지 엘리야와 동행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죽음의 요단강가에 엘리야와 엘리사가 섰습니다.
요단강은 시라아 북부 에바 산곡에서 발원하여 메로호수와 갈릴리 호수를 지나 장장 600여리를 흘러 내리는 팔레스틴 최장의 강입니다.
40년전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을 탈출하여
40년 광야 생활의 마지막 장소인 요단강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강을 건너야 살 수 있습니다.
불교 반야심경도 요단강을 건너는 6가지 방법을 제시 합니다.
관자재보살이 깊고 깊은 마음으로 반야의 언덕으로 걸어 갈 때에
오온이 모두 비어 있음을 비춰 보시고 일체의 고액을 제도 하셨느니라.
곧 어떤 강을 건너 반야의 언덕으로 갔다는 말입니다.
이 강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요단강이라고 합니다.
이 강을 건너가는 방법이 ‘바라밀’인데
지혜로 가는 수행방법입니다.
곧 요단강은 지혜의 강이란 의미입니다.
이 수행방법에는 6가지가 있습니다.
6바라밀은 먼저 베풀어야 합니다. (보시 바라밀)
지계 바라밀
곧 반야의 언덕으로 가는 사람은 쓸데없이 살생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쾌락을 좇으며 간음하지 말고, 장사꾼은 저울눈을 속이지 말고
2차 3차 노래방 술집 가지 말고 등의 법과 질서를 지키라는 말입니다.
셋째 인욕 바라밀은 반야의 언덕으로 가는 사람이
화를 내고 짜증을 부려서야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화를 낸다는 것은
자존심 때문입니다.
원래 ‘나’란 국어사전에 없다고 합니다.
천부인으로 만들어진 우리말 우리 글자에는 ‘나’란 태양을 의미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아니라 저쪽이라는 ‘저’입니다.
내가 주체인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주체로 보았다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결국 있지도 않은 ‘나’를 고집하다보니 ‘나’가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믿고 일하라는 정진 바라밀이 있습니다.
다섯 번째는 선정 바라밀입니다.
탐내고, 화내고 어리석음 삼독을 버리면 마음이 고요해져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반야 바라밀입니다.
이 모든 것을 실천하면 부처님처럼 지헤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혜의 강 요단강을 건너 반야의 언덕에 오른다는 것이지요.
사실 요단강은 아주 작은 강입니다.
요즘
요단강물이 오염도가 매우 심각하다고 합니다.
요단강 물을 마시면 설사나 복통을 일으키고
두드러기도 난다고 합니다.
요단강 성지순레시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작은 요단강을 인위적으로 건널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좁디좁은 마음의 강을 건너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내 마음의 생수를 시원하게 마시기도 어렵습니다.
많이 오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욕심 때문입니다.
1930년도에 요단강은 평균 연간 13억 입방미터의 물이 흘렀습니다.
지금은 2,000입방미터가 흐르고 있습니다.
턱없이 부족합니다.
다시 회복하려면 4억 입방미터의 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회복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 합니다.
4대강 준설로 천문학적 예산이 필요하듯
요단강 준설도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오염으로
우리 가슴이 타들어갑니다.
목마름에 세상이 타들어 갑니다.
믿음이 상실 되었습니다.
부부간에도 신뢰가 없습니다.
부자간에도 아들이 부모를 죽이고
엄마가 자식을 죽이고
식물도 꺼리는 근친상간도 숨겨지고
담임선생님이 초등학생을 성추행하고
부모가 자식을 성추행하고
괴롭고
어지러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제 세상의 끝 자락에 서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40년의 허무한 인생을 마치고
요단강 앞에 서 있습니다.
요단강에 두발을 반드시 담가야 건널 수 있습니다.
아직도 세상의 쾌락에 우물쭈물하고 있습니까?
다시 과거로 돌아가 40년의 광야에서 허우적거리고 싶습니까?
엘리야와 엘리사도 요단가에 섰습니다.
그동안 길갈에서 벧엘에서 여리고에서 수많은 역경이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겉옷을 벗어 던졌습니다.(8절
지금이
우리의 쾌쾌 묵은 더러운 겉옷을 벗어 요단강에 던져 버려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비고 빈 모습으로 두발을 요단강에 철퍽 담가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죄악을 씻어 내야 합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9절)
엘리사는 세상의 쾌락과 머니money를 구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갑절의 은사, 영적인 삶을 원했습니다.
기도의 삶,
고난의 삶이였습니다.(9절)
엘리야가 말하기를
네가 어려운 일 difficult thing을 구하는도다.(10절)
그렇습니다.
천국의 문은 좁습니다.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포기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네게서 취하는 것을 보면 see
그 일이 네게 이루리라(10절)
하나님만 바라보면 됩니다.
이제
세상의 쾌락을 보는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를 보는 영안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더러운 세상이 보이지 않습니다.
쾌락에 관심이 없습니다.
TV오락프로에서 합창단 오디션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박칼리라는 중년 여성이 단장입니다.
출중한 인물들이 나와서 오디션을 보았습니다.
너무 잘생긴 남자가 오딧션을 보자
함께 있던 개그맨들이 박칼리 단장에게 묻습니다.
잘 생긴 청년을 보니 어떠냐고.
박칼리 단장은 으아해하며 질문을 한 사람에게 잘생긴 사람이였냐고 되 묻습니다.
그 당당한 모습과 카리스마에 감탄했습니다.
겉모습에 돈에 쉽게 매료되는 세상입니다.
자기 눈을 가졌다는 것이 좋아 보였습니다.
볼 것만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엘리사와 걷고 있다가 홀연히 휘오리 바람을 타고 승천 했습니다.(11절)
삶과 죽음이 조금의 틈도 없습니다.
얼마 전 우리 뒷집 아저씨가 밥을 먹다가 홀연히 죽었습니다.
얼마전 인동초 김대중 대통도 고인이 되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도 안구 기증을 하고 고인이 되었습니다.
법정 스님도 열반의 세계로 갔습니다.
우리도 갑자기, 홀연히 죽게 될 것입니다.
걷다가, 일을 하다가, 밥을 먹다가, 아님 쾌락을 즐기다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시렵니까?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십니다.
엘리야의 겉옷이 엘리사에게 주어졌습니다.
엘리야의 은사가 값절이나 엘리사에게 임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없는 세상이 두려웠습니다.
세상을 감당 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때
엘리사는 믿음으로 외쳤습니다.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나이까.”(14절)
지금 나의 처지가 이렇습니다.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감당 할 수가 없습니다.
괴롭고 슬픔에 가득 차 잇습니다.
그렇다면 엘리사처럼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엘리야는 떠났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남아 내 곁에 있습니다.
고통스럽습니까?
엘리사처럼 외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 어디 계시나이까?
엘리야를 대신 할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준비 시켜 두십니다.
혹독한 고난을 통해서 준비 시켜 두셨습니다.
바로 당신! 엘리사입니다.
바로 당신 ! 입니다.
지금 외치고 있는 당신이 오늘 엘리사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삶에 반전은 반드시 있습니다.
저 역시 바닥을 기고 다닐 때가 있었습니다.
끝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꾼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처럼 목사였습니다.
목회를 그만두고
신촌 뒷골목 판자집 10평을 임대하여 까페을 시작 했습니다.
수입은 하루 5만원 정도였습니다.
싸고 푸짐함 때문에 학생들이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좀 잘된다하니 주인이 가게세를 턱없이 올려 받으려는 것이였습니다.
리어카 끌면서 떡장사할 때도 잘 참아 내던 아내가 북받쳐 울었습니다.
목사님도 함께 울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무허가 판자집을 전전세로 임대하였는데 본 집주인이 돌아 가셨습니다.
주인 아들에게 찾아갔습니다.
이 집을 사겠다고 말했습니다.
10평 판자집을 평당 2500만원을 주면 팔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집값이 2억 5천만원입니다.
계약금 천만원에 잔금은 1년후에 주기로 하고 주인이 되었습니다.
세간에서 쫓겨날 처지에서 집주인이 된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민들레 영토 지승룡 목사입니다.
지금은 4,000평의 규모이고 하루에 10,000명이 다녀간다고 합니다.
저도 연세대 신학교 시절에 까페를 이용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포기할 때 기회를 줍니다.
바로 위기가 기회입니다.
오늘 엘리사처럼 고난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값절의 은사가 임할 것입니다.
값절의 은사는 엘리야의 고난까지도 포함 되는 것입니다.
지금
저는 많이 힘이 듭니다.
제 인내의 한계를 시험받고 있습니다.
그냥 여기 머물라고
포기하라고 요청 받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힘이 드니
그냥 길갈에, 벧엘에, 여리고에, 머물러 있으라고
그냥 여기에서 포기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엘리사야
길갈에서 포기하지 말고 힘내서 함께 가자
벧엘에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함께가자
여리고에서 포기하지 말고 조금만 더 인내하자
그래서 생명의 면류관을 쓰자고
격려하는것입니다.
여러분!
어려우십니까
힘이 드십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만들기 위하여 고단위 연단을 하듯
여러분에게 더 큰 축복을 주기 위하여 인내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엘리야처럼 마지막 세대의 선지자로 쓰시기 위하여
당신을 준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힘들면 여기 머물도록 하세요.
그러나
세상 쾌락이 좋으면 여기서 흔들흔들 사세요
지쳤습니까?
포기하세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