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괴산읍을 지나서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을 만난다. 달천을 건너자 길은 두 갈래로 갈린다. 왼쪽 길은 충주호로 이어지고 오른쪽 길은 이화령을 넘어 경상북도 문경으로 통한다.
문경 쪽으로 달리던 버스가 남쪽으로 방향을 틀자 깊고 아름다운 계곡이 기다리고 있다. 쌍곡구곡이라 불리는 계곡이다. 계곡은 동쪽의 보개산, 칠보산, 악희봉과 서쪽의 군자산, 남군자산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줄기가 소를 이루거나 주변의 바위들과 어울려 빼어난 경관을 만들어 내었다.
봄은 어느덧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와 있건만 쌍곡계곡에 얼어있는 얼음을 보면 완연한 봄이라 부르기엔 아직 이른 듯하다. 이 계곡에는 빼어난 명소 아홉 군데가 있어 쌍곡구곡이라 부른다. 제1곡인 호롱소를 지나서 만난 제2곡 소금강이 나의 넋을 빼앗아 버린다.
고드름을 거꾸로 세워놓은 듯이 우뚝우뚝 솟은 수많은 바위며 여기에 걸린 소나무가 금강산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기암절벽과 노송이 어우러진 빼어난 풍경은 티없이 맑은 계곡과 함께 하여 선경이 되었다.
이런 곳을 그냥 지나치는 버스가 야속하다. 잠깐만이라도 내려서 소금강의 선경에 취해보고 싶지만 어쩔 수가 없다. 어느새 소금강은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산행을 마치고 다시 소금강을 지난다는 기대감이 그런 대로 아쉬움을 달래준다.
이름에서 느티나무 괴(槐)를 쓰고 있듯이 충청북도 괴산에는 300년 이상된 해묵은 느티나무가 굉장히 많다고 한다. 괴산에는 느티나무 못지 않게 산이 많다. 백두대간 줄기가 경상북도 문경과 충청북도 괴산을 가르면서 북에서 남으로 길게 뻗어가기 때문이다.
괴산과 문경을 가르는 백두대간은 조령산(1,017m)에서 시작하여 백화산(1,064m), 희양산(998m), 악희봉(940m), 장성봉(915m), 대야산(931m), 조항산(951m)에 이르기까지 900∼1000m대의 산들을 우뚝우뚝 세웠다.
괴산에는 백두대간을 이룬 산뿐만 아니라 칠보산(778m)과 보개산(709m), 남군자산(827m)과 군자산(948m), 박달산(825m)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산들이 수없이 많다.
아름다운 산은 아름다운 계곡을 만들었으니 이중환이 '금강산 남쪽에서는 으뜸가는 산수'라고 극찬했던 화양구곡과 대야산 자락에 자리잡은 선유동구곡, 그리고 군자산과 칠보산 사이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쌍곡구곡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나는 오늘 쌍곡구곡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소금강을 지난 버스는 계곡 깊숙이 빠져든다. 협곡을 이룬 계곡을 지나자 계곡 주위에 좁다란 논과 밭이 있고 몇 채의 집들이 자리잡은 조그마한 마을이 나온다. 서당말이라 부르는 자연부락이다. 마을은 옛 마을이되 겉모습은 민박이나 식당을 주업으로 하는 양옥집으로 바뀌었다.
쌍곡 제3곡으로 불리는 떡바위 앞에서 내린 우리는 쌍곡계곡이 품어내는 봄기운을 들이마신다. 길가의 바위가 가래떡 모양으로 길쭉하게 누워있다 해서 떡바위라 부르는 모양이다. 떡바위는 덕바위로도 불린다.
우리가 오르려고 한 칠보산 봉우리는 보이지 않고 칠보산 북쪽으로 이어지는 보개산이 대신 모습을 드러낸다. 이 도로를 따라 계속 달리면 제수리치라 불리는 고개를 넘어 화양구곡에 닿는다.
쌍곡계곡을 건너려는데 제4곡 문수암이 기다리고 있다. 문수암 보다는 주변의 소나무가 오히려 운치를 더한다. 계곡의 채 녹지 못한 얼음을 살짝 밟아보니 스르르 부서져 버린다. 겨우내 녹을 생각을 않던 얼음도 봄바람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다.
계곡을 건너서 오른쪽으로 난 널찍한 길을 따라 산행을 시작한다. 다람쥐 한 마리가 따스한 햇살 아래서 봄을 즐기고 있다. 봄 노래를 부르는 새들의 노래 소리도 이미 차가운 겨울에 내는 애처로운 목소리가 아니다. 겨우내 얼었던 땅도 녹아 질컥하다.
묘지에 올라서자 건너편으로 군자산이 우뚝하다. 아름드리 소나무 숲은 점차 바위와 어울린다. 저 아래로는 쌍곡계곡의 물줄기가 생기를 되찾은 듯 힘차게 흘러간다. 살구나무골 입구인 절말 마을도 내려 보인다. 절말에서 살구나무골과 수정바위골이 만난다.
칠보산이라는 산 이름을 생각한다. 일곱 개의 봉우리가 보배롭고 아름다워 칠보산이라 부렀을 듯 한데, 불교적인 의미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불교의 무량수경에서 말하는 칠보(七寶)는 금·은·유리·파리·마노·거거·산호를 가리킨다. 칠보산 자락에 자리잡은 각연사 스님들이 화려하고 찬란하게 비친 칠보산을 바라보면서 칠보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1봉에 올라서서 바라본 2봉은 말 그대로 장관이다. 힘차게 뻗은 수직 절벽들과 갖가지 모양을 한 노송들은 한 편의 실경 산수화다. 기암절벽 하나만 있어도 아름다운데 거기에 소나무의 멋이 가미되었으니 이는 천하의 비경이다.
이런 바위들은 보는 것 못지 않게 어렵사리 오르는 스릴이 있어 약간의 묘미를 제공해 준다. 2봉을 넘어 다시 오른 3봉 또한 장관이다. 3봉에 서서 내려보는 쌍곡계곡이 아찔하다. 계곡 건너편에서 바라보고 있는 군자산과 남군자산이 군자인 양 늠름하다. 정면으로 정상인 7봉이 큰 형님 마냥 우뚝 서 있다.
3봉에 앉아서 소나무가 내는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쫑긋해 본다. '송운(松韻)을 들을 줄 아는 귀라야 별들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 어느 시인의 노래를 상기해 보지만 아직 내게는 그럴 만한 마음의 준비가 부족하다. 마침 불어오는 바람이 솔향을 실어와 나의 콧등을 씻어줄 뿐이다.
붉은 줄기가 곧게 솟은 모습과 구불구불하게 뻗은 가지에 푸른 잎이 주는 청신함은 소나무가 가지고 있는 여유다. 소나무 중에서도 우리 나라 고유 수종인 적송일 때 소나무로서의 참 멋이 나온다.
이런 소나무를 보고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넉넉하고 풍성한 마음이 생기는 것 같다. 이러한 여유가 사람다운 삶을 가져다 줄 것이다. 동양화에서 기암절벽과 노송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빼어난 풍경 탓도 있겠지만 이 속에서 느껴지는 여유로움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3봉을 넘어서면서부터는 넓적하고 매끈한 면을 가진 바위들이 부드러움을 가져다준다. 응달진 곳의 희끗희끗한 잔설은 가는 겨울을 아쉬워하는 산의 양면성이다. 가끔 만나는 고사목에서도 소나무의 멋을 맛본다.
내려 보이는 살구나무골과 쌍곡계곡의 깊은 맛과 바위의 화려함, 그리고 소나무의 고고함이 별천지와 같은 느낌을 준다. 바위는 부드럽다가도 거칠고, 크고 웅장하다가도 작고 아기자기하다. 소나무 또한 어떤 놈은 하늘 높이 솟아 시원스럽기도 하고, 어떤 놈은 온갖 고통을 다 겪은 듯 용틀임하는 모양이다. 가지를 옆으로 뻗어 우산 모양을 하고 있는가 하면 밑으로 늘어뜨려 머리 숙여 인사하고 있기도 하다.
흐르는 듯 멈추는 듯한 느림이 있다가도 날아가는 듯한 빠름이 있다. 느림과 빠름의 조화가 이곳 소나무와 바위에 있다. 이런 풍경을 접하면서 일행들과 약간의 간격을 두고 혼자 걷는다.
길이 20m, 높이 10m쯤 되는 깔끔한 바위를 만난다. 부드러우면서도 위압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부드러움과 위압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이 바위를 보면서 상존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이렇듯 칠보산은 정말로 깔끔하다. 부드러우면서도 아기자기하고, 깨끗하면서도 편안하다. 정상인 마지막 7봉을 오르는 데, 상당히 가파르다. 쌍곡계곡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어준다.
정상에 올라선다. 정상 바로 옆의 널찍한 너럭바위가 더없이 시원한 전망을 가져다준다. 쌍곡구곡을 가운데 두고 말발굽 모양으로 한 바퀴 돌아오는 산세가 편안하다. 건너편에서부터 군자산, 남군자산, 막장봉, 악희봉을 이으면서 달려온 산줄기는 내가 지금 서 있는 칠보산을 거쳐 북쪽으로 보개산까지 뻗어가면서 가운데 깊고 그윽한 계곡을 만들어 낸 것이다.
동쪽으로 희양산이 바라보이고, 칠보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악희봉을 거쳐 장성봉, 대야산, 그리고 속리산으로 이어가는 백두대간이 유장하다. 멀리 남쪽 속리산 천황봉이 우뚝 솟아 의젓하다.
지금까지 나의 혼을 빼앗아 갔던 일곱 봉우리와 산자락이 품에 안겨오고 올해 들어 자연휴식년제가 풀려 사람을 맞고 있는 살구나무골이 부드러운 느낌으로 나의 가슴을 파고든다. 정말 아기자기하고 깔끔하고 신선한 산이다.
표지석이 있는 정상에 서자 북동쪽으로만 시야가 열린다. 덕가산과 악희봉 너머로 희양산이 선명하다. 악희봉에서 뻗어오던 산줄기가 697봉에서 한 줄기는 이곳 칠보산으로 뻗어오고, 또 한 줄기는 덕가산(858m)으로 뻗어나가면서 또 하나의 협곡을 만들어 내었으니 저 아래 각연사 계곡이다.
"어디서 오셨시유?"
"서울에서요."
"멀리서 오셨네유? 칠보산 참 좋지유?"
느린 충청도 말씨의 청주 아저씨는 충청북도에 있는 산 자랑을 시작한다.
"속리산 서부능선 묘봉이나 상학봉도 좋구유 속리산 아래 구병산도 좋아유. 소백산이나 월악산 같은 국립공원은 물론이고 도락산·금수산 등 충주호를 끼고 있는 산과 칠보산 근처의 대야산·막장봉·희양산……."
이 분은 자기 고장 산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칠보산 정상에서 동쪽 암릉을 타고 내려가 697봉 아래 안부에서 남쪽으로 내려서면 살구나무골로 이어지고, 북쪽으로 내려서면 각연사로 하산한다. 그러나 우리는 보개산 쪽으로 가는 서북 능선으로 내려선다.
북쪽 비탈에는 희끗희끗한 잔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산세는 오전과는 달리 부드럽게 펼쳐지면서 걷기에도 부담이 없다. 가끔 전망이 트이는 곳에서는 오른쪽으로 각연사가 내려 보인다.
칠보산과 덕가산 사이 골짜기 깊숙이 자리잡은 각연사가 그윽하다. 각연사에는 신라 말 이래의 석조불상 가운데서도 걸작으로 손꼽히는 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433호)이 함초롬한 미소를 머금고 비로전에 앉아 있다.
이 불상에 얽힌 이야기를 상기하면 재미있다. 처음 저 절을 창건할 때는 살구나무골 입구 절말에서 공사를 시작했다. 절을 지으려고 목재를 다듬으면서 나온 톱밥이며 대팻밥이 밤새 없어지곤 하여 조사해 보니 산까치들이 무리를 지어 물어다가 산 너머 지금의 각연사터에 있던 연못에 떨구더란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스님들이 연못을 헤쳐보자 거기에서 석불이 나왔다. 그래서 절터를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절 이름도 '늪 속에서 부처님이 나와 깨침을 얻다(覺有佛於淵中)'는 뜻으로 각연사(覺淵寺)라 했다.
소나무의 크기도 점점 커져 아름드리로 변하고 키도 더욱 훤칠하다. 소나무가 많은 이곳에서는 송이버섯이 많이 채취된다. 추석을 전후한 시기에 따는 송이는 버섯 중에서도 최고급에 속한다. 아무튼 이곳 송이버섯은 근처 마을 사람들에게 짭짭한 소득을 올려준다.
길가에는 가끔 바위가 나타나기도 하는데, 말안장과 같은 안장바위, 돼지 콧구멍 같은 구멍이 뚫려 있는 돼지바위도 눈에 띈다. 돼지바위를 지나자 곧 바로 보개산과 칠보산을 가르는 안부, 청석재다.
여기에서 오른쪽의 각연사로 갈 수도 있지만 우리는 왼쪽 떡바위골로 내려선다. 조금 욕심을 부리면 보개산까지도 밟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청석재에서 내려서자 금방 떡바위골 계곡이다.
계곡에는 겨우내 빙폭을 이루었던 얼음이 아직도 장관을 이루고 있다. 굴참나무·갈참나무 등 참나무류에게 자리를 양보한 산자락에서는 봄을 나르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계곡의 물소리며 새싹을 틔우려는 나무들의 움직임이 그것이다.
나목 사이로 올려다 보이는 칠보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오전에 올라갈 때와는 또 다른 멋으로 다가온다. 청석재에서 15분 정도 내려오자 '집터'라고 쓰인 곳이 나온다. 나무들이 무성히 자라있지만 약간 남아 있는 돌담만이 문수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던 자리임을 알려준다. 다시 소나무 지대로 바뀐 떡바위골을 빠져 나오자 오전에 출발했던 떡바위다.
계곡에서는 봄을 알리는 버들강아지가 고개를 흔들어댄다. 물이 흘러가듯이, 때가 되면 계절이 바뀌듯이 사람의 마음도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며 살 수는 없을까? 일곱 개의 보물이라는 뜻의 칠보도 결국 억지스럽지 않음에서 나올 것이다.
버스는 어느덧 칠보산과 쌍곡계곡을 뒤로 하고 빠르게 달려가고 있다. 나의 고개가 자꾸 만 뒤로 돌아간다.
첫댓글 언제갈껀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