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회사 35
(타협하는 한국교회)
이제 일제는 국내에서 가장 큰 영향력 끼치는
미국 남, 북장로교가 학교폐쇄를 결정하자
본격적으로 국내의 한국 장로교 총회를 이용해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한다.
1938년 전국에서 가장 큰 평북노회가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신사참배를 결정하고
제 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허용이 결정된다.
그 때 현장에 있었던 사람의 증언을 적어본다.
"교회 안과 밖에는 수백명의 사복경관으로
완전 포위되었고 강대상 아래 전면에는
평남 경찰 부장을 위시하여
고위경관 수십명이 긴 검을
번쩍이면서 자리를 잡고 앉았으며
총대 목사님들 좌우에는 그 지방 경찰관 2명이 앉았고
실내 후면과 좌우에는 무술경관 100여명이 서 있었다."
그 살벌한 분위기는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으며
주기철 목사, 이기선 목사, 김선두 목사 등
신사참배를 적극 반대하는 유력한 교회 지도자들은
사전에 이미 모두 구금되었고
일제의 압력에 어쩔수 없이 끌려 온
27회 총회 노회 대표 목사 88명, 장로 88명, 선교사 30명
모두 206명이 넋을 잃고 앉아 있을때
이미 짜여진 각본대로 평양, 평서, 안주 3개의 노회
연합대표와 평양노회장 박응률 목사의
신사참배 결의 및 성명발표의 긴급제안이 있었고
뒤이어 박임현, 길인섭 목사의 동의와 재청이 있었다.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전신을 떨면서
" 이 안건이 가하면 예 라고 대답하시오." 라고 물었을 때
제안자와 동의, 제창자를 포함한 10명 미만이 떨리는 목소리로
"예" 라고 대답했고 그들 외 전원은 침묵을 지켰다.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한 후 총회원들은
평양 신사에 가서 신사참배를 하였다.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한 한달 후에
감리교 총회 또한 신사참배를 결정하고 결의문을 채택한다.
'신사는 종교가 아니므로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는 애국적 국가의식이므로
목회자들은 신사참배를 솔선수범하고
국민들을 계몽시킴으로써
비상시국하의 황국신민으로서의 책임을 다한다.'
조선 장로교회 임원들의 신사참배 모습
1938년 9월 12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사진으로
총회 참석자들은 이곳에서 절을 하고
손뼉을 치는 참배의식을 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