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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fucian Values for the Next Millenium)
Daniel A. Bell
1. Introduction
2500여년 전, 정치철학자였던 공자(孔子; 551-479 B.C.)는 올바른 정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수용해 줄 통치자를 찾기 위해 그의 조국 노(魯)나라를 떠났다. 불행히도 그는 한 명도 찾지 못한 채 교육에 전념하기 위하여 정착할 수 밖에 없었다. 몇 세대 후, 공자의 손자의 제자 중 하나였던 맹자(孟子; 390-305 B.C.)는 공자의 사회정치 사상을 전파하는 데 전념하였다. 공자와 마찬가지로 맹자 역시 그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기회를 찾아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녔다. 맹자는 공자에 비해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는 잠시 제(薺)나라의 재상으로 봉직했었다) 그 역시 마침내 정치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교육을 위해 정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몇 백년 후, 『논어』와 『맹자』에 기록된 공자와 맹자의 사회정치 사상은 글자그대로 세계를 변혁시킬 만한 것임이 입증되었다. 그들의 사상은 점차 중국, 일본, 한국 전체에 전파되었고 19세기 말에는 동아시아 지역이 완전히 유교화되었다. 즉, 유교적 가치와 관습이 중국, 한국, 일본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지도하였고 정부의 전 조직이 공자와 맹자의 이상(理想)에 비추어 정당화되었다. 유교주의는 20세기 들어 주춤하였다. 특히, 중국 공산당은 유교적 세계관을 뿌리뽑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여러 학자들은 오랫동안 젖어있던 유교적 관습들은 심지어 문화혁명의 가장 암울했던 시기 동안에도 배경 이론들과 가치들을 제공해왔다고 주장해왔다. 더욱 최근에는, 동아시아 학자들과 사회비평가들 (그리고 몇몇 외국 학자들) 사이에서 신(新)유교부흥운동(Neo-Confucian revival movement)이 대두되었다. Tu Wei-ming이 지적한 대로, 지난 40년간 남한, 대만, 홍콩, 싱가포르에서 유교 연구에 대한 관심의 급증은 유교적 전통에 새로운 역동성을 낳았다. Tu는 유교적 인문주의(Confucian humanism)의 '제 3기'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중국 공산당조차도 그들의 반유교적 입장을 수정해왔다. 장쩌민(Jiang Zemin)과 이른바 신보수파들은 정당성의 위기와 중국공산당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는, 널리 확산된 사회적 불안에 대한 해법으로 유교로 돌아섰다.
분명히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에서 나타나는 가치들은 이미 '역사의 쓰레기통'에 버려졌다고 믿는 회의론자들도 남아있다. 또 어떤 다른 이들은 유교적 가치가 계속해서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배경적 규범과 관습을 지도해 나가고 있다고 인정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가치들이 근대 세계에서는 바람직한 것이 되지 못하므로 어느 곳에서든 그 추악한 머리를 쳐들려고 하는 한, 유교주의는 저지되어야만 한다고 덧붙일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칠 것이다. 첫째, 고전적인 유교의 가치들은 동아시아에서 계속해서 도덕적,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이 지역에서의 어떤 새로운 정치적 질서도 유교적 성격(Confucian characteristics)에 의해서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대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영향력이 있고 또한 동시에 바람직한 고전적 유교적 가치들은 과연 무엇인지 확인해 보고자 한다.
2. 실행가능하면서도 동시에 바람직한 유교적 가치들의 선별에 관하여
그러나 어떤 유교 가치들을 다루어야 하는가? 복잡하고 변화하는, 수세기에 걸친 유교적 전통으로부터 가치들을 어떻게 선별할 것인가? 이 유교적 전통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었고 또 때로는 법치주의(Legalism), 다오이즘(Daoism), 그리고 최근에는 서구 자유주의와 갈등을 겪으면서 이들과 상합하기도 하였는데 말이다. 이를 위하여, 본 논문에서는 다음의 기준들을 사용하였다.
첫째, 유교의 창시자인 두 사람, 공자와 맹자가 지지하고 옹호한 가치들에 한정할 것이다. 물론 『논어』는 유교전통에 있어 중심적이고 기초적인 텍스트이고 유교주의의 어떤 해석도 공자의 언설에 어느 정도 근거해야만 한다. 공자의 사상을 다듬고 체계화했던 맹자는 유교적 전통에 있어 두 번째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다. 맹자의 철학은 송(宋)나라 이후 중국제국에서 정설(正說)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는 현대 신(新)유교 철학자들에 의해 영감의 원천으로 여겨지고 있다.
둘째, 현대 유교 지식인들에 의해 명백히 거부된 유교적 가치들은 제외한다. 리콴유(Lee Kuan Yew)같은 동아시아 정치 지도자들 또한 유교적 가치들에 호소해 왔지만 비평가들은 이러한 지도자들은 유교적 전통에 대한 진실한 관심보다는 국내외에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의 증대에 맞서 자신들의 독재정치를 정당화할 필요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러한 주장의 진실 여부를 떠나 논의의 초점을 유교 철학자들과 사회 비평가들에 한정함으로써 더 이상의 논쟁을 피할 수 있다. 이러한 신(新)유교주의자들은 대체로 남자의 여자에 대한 타고난 우위,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대중들의 완전한 배제,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3년상(喪), '하늘'이 어떤 방식으로든 통치자들의 행위를 지시한다는 생각 등의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이런 관점을 제공해주는 것으로 보이는『공자』와 『맹자』의 본문들은 현대사회에는 아무런 함의를 갖지 않는 단지 그 시대의 무지한 편견들로 재해석되어 왔다.
셋째, 서구 자유주의에 대비되는 유교적 가치들로 한정한다. 현대 유교 지식인들은 종종 자유민주주의 규범들과 일치하는 가치들을 인정해 왔다. 좀 더 정확히 말해, 몇몇 자유주의적 사상들과 관습들은 유교적 가치들을 보완하고 풍성하게 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회의론자들은 자유주의적 유교주의자들은 독재정치에 반대하기 위해 최선의 현대 자유민주주의 규범들에 부합되는 것들을 그들 자신의 전통 중에서 선별해냈다고 대답할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신유교주의자들은 공자와 맹자의 가치들을 동아시아에서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단으로 여기기 때문에 단지 전략적인 이유에서 옹호한다는 반론에 대응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이를 위해서, 필요하다면 현재 일어나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르는 자유민주주의적 규범들과의 갈등의 영역들을 알아볼 것이다. 유교적 규범들이 독립적인 가치를 가진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무엇보다도 현대 유교 지식인들의 견해대로 갈등이 일어날 경우 서구 자유민주주의 규범들이 항상 자동적으로 우선권을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서구 자유주의와 중복되는 영역들도 상당히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본 논문에서는 이를 다루지 않겠다.
넷째,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아직도 동아시아 국가들의 관습과 제도들을 지도하고 있는 유교적 가치들에 한정하려 한다. 유교적 가치들이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정치적 관점에 결정적인 시각을 제공할 수 있을 가능성의 여지를 남겨 놓기를 원하기 때문에, 유교적 가치들이 현대 동아시아에서 '가장 바람직한 형태'로 표출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할 것이다. 만약 현대의 몇몇 표출 형태들이 이에 해당한다고 적절히 지적할 수 있다면, 현대 사회에서 고전적인 유교적 가치들은 더 이상 영향력이 없다는 잠재적 반론에 대응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이로써 수천 수백 년 동안 사장(死藏)되어온 가치들을 실행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현존하고 있는 유교주의를 개혁하는 문제가 되기 때문에, 유교 정치의 임무는 덜 유토피아적인 것이 된다.
오늘날의 유교주의자들이 유교적 가치들을 선택하는 데 있어 나의 이러한 기준들을 반드시 따라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러한 기준들이 유교적 가치들이 현대 사회에서 적합한가에 대해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흥미로운 결과들을 낳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근대 사회를 위한 유교적 가치들을 선택하는 다른 방법들이 있다는 것을 절대로 배제하지 않는다.
유교적 가치들의 실제 내용에 관해 말하자면, 위의 기준들을 충족하는 다음의 세 가지 가치들이 논의될 것이다. (1) 물질적 복지라는 최우선 가치, (2)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가족 구성원들의 부양이라는 가치, (3) 현명하고 자비로운 엘리트에 의한 통치라는 가치가 그것이다. 앞의 두 가치들은 이미 동아시아 사회들에서 바람직한 형태로 실현되었지만, 세 번째 가치가 바람직한 형태로 현실화되기 위해서 현존하는 유교주의가 개혁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할 것이다.
3. 물질적 복지라는 최우선 가치
『논어』에 따르면, 정부는 국민의 물질적인 복지와 지적, 도덕적 개발을 위한 조건들을 확보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갈등하는 경우에는 첫 번째 것에 우선 순위가 있다.
선생님은 위(衛)나라로 가시는 길이었고 염유(檦有)가 수레를 몰고 있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백성들이 많구나!", 염유가 말하길, "백성들이 많은 이후에는 무엇을 하 여야 합니까?", "그들을 부유케 하여라", "그들이 부유해지고 난 이후에는 무엇을 하여 야 합니까?", "그들을 교육하여라" (13.9)
이는 더 높은 국민총생산(GNP)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된 의무는 가장 궁핍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
"나는 군자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지 부유한 사람들을 더욱 부유하게 하지는 않는다고 항상 들어왔다." (6.4; see also 16.1)
맹자는 공자의 이러한 생각을 그대로 되풀이한다. 백성들은 그들의 도덕성을 개발할 수 있도록 반드시 교육을 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먼저, 정부는 물질적인 복지를 제공해야만 한다.
[백성들은] 항산(恒産)이 없이는 항심(恒心)을 가질 수 없다. 항심이 없으면, 방탕하게 되고 사치하게 되며 못하는 짓이 없게 된다. 이들이 법을 어긴 후에 그들을 벌하는 것 은 백성들에게 덫을 놓는 것이다. 자비로운 권력자가 어떻게 백성들에게 덫을 놓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백성들에게 어떤 생활수단이 필요한가를 결정할 때 현명한 통치자 는 그 생산이 한편으로는 부모를 모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내와 아이들을 부양하는 데 충분하도록 보장함으로써 백성들이 항상 풍년에는 충분한 식량을 갖도록 하고 흉년에는 굶기를 면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 후에라야 통치자는 백성들을 선(善)으로 이끌 수 있 고, 이렇게 해서 백성들은 쉽게 그를 따르게 된다.(1A.7, Lau; 3A.3)
국민이 다음 끼니를 걱정해야 한다면 도덕적 행위를 도모할 수 없다. 따라서, 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국민의 물질적 복지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맹자는 이를 단지 추상적인 희망사항으로만 남겨두지 않았다. 그는 국민의 물질적 복지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실질적인 방법을 함께 제시한다. 한 예로, 정부는 거래되는 물건의 가격을 정해서는 안 된다. 국민들은 물건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가격을 갖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상품의 가격은 근본적으로 상품의 가치에 대한 국민들의 판단에 의해 결정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사물이 서로 같지 않다는 것은 그들 본성의 일부이다. 어떤 것들은 다른 것들보다 두 배, 다섯 배, 열 배, 백 배, 심지어 천 배나 만 배의 가치가 있다. 만일 이들의 가격을 같은 수준으로 낮춘다면 국가에 혼란을 가져올 뿐일 것이다. 만약 대충 만들어진 구두 가 잘 만들어진 구두와 같은 가격에 팔린다면 누가 좋은 구두를 만들겠는가? (3A.3; Lau)
가격통제를 하는 것은 다시 말해 비효율을 가져오는 것이다. 국가가 수입관세를 부과해서도 안 된다: "국경에서 여행자들은 세금부과 없이 검사받아야 한다"(2A.5; Dobson). 맹자는 또한 낮은 세금이 경제를 이롭게 할 것이라고 제시한다: "곡물과 아마(亞麻)를 심은 들판을 잘 돌보고 그 생산물에 세금을 적게 부과하라. 그러면 백성들이 풍요로와질 것이다" (7A.3, Dobson; 3B.8 그리고 『논어』12.9). 간단히 말해, 맹자는 높은 세금과 거래에 대한 규제가 국민의 빈곤화와 탈도덕화를 낳는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자유시장경제의 옹호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유교주의자들은 사유(私有)경제를 상정하고 있다'는 말이 될까?
별로 그렇지 못하다. 자유시장을 제한하는 커다란 유교적 한계가 있는데, 곧 토지의 매매는 국민의 생활수단을 보장해야 하는 국가의 의무에 의해서 제한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는 어떻게 이 목적을 실현할 것인가? 맹자는 유명한 '정전법(井田法; well-field system)'을 제시했다.
인간다운 정부는 토지의 경계를 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만약 경계가 올바로 정해지지 않으면 면적 분할이 고르지 않아 관리의 봉급으로 사용하기 위해 거두어들이 는 생산물(조세)이 공정하게 분배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폭군과 부패한 관리들은 틀림없이 경계를 정하는 것을 소홀히 할 것이다. 경계가 바로 정해지고 나면 한가히 앉 아서도 토지의 분배와 봉급을 정할 수 있다. 비록 등(岇)나라의 영토가 좁고 작다하더라 도 귀족과 농민이 있다. 귀족이 없이는 농민을 통치할 이가 없을 것이고, 농민이 없이는 귀족을 부양할 이가 없을 것이다. 나는 격지(隔地)의 토지는 아홉 개의 밭으로 나누어 중앙의 (여덟 가족에 의해 공동 경작되는) 밭을 '조(助; aid(tax))'로 정하고, 나라 중앙 의 토지에서는 백성들이 수확의 십분의 일을 스스로 내도록 할 것을 제안한다. 대 신(大臣) 이하는 [각 가족이] 50묘(mou)씩을 제수(祭需)마련용 토지로 가지도록 하고 성 인 남성 한 명마다 25묘를 추가로 갖도록 해야 한다. 죽은 이가 있거나 사람이 다른 집 으로 옮길 경우에도 그 지역을 떠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한 지역에서 같은 정전에 속 하는 사람들은 들어가고 나오면서 서로 도움을 베풀고 망을 보는 데 협력하며 아플 때 돌봐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백성들은 친밀하고 조화롭게 살게 될 것이다. '정전(井 田)' 하나는 사방 1 리(里)이고 900 묘로 이루어진다. 중앙의 구역은 공전(公田)이 된다. 여덟 가구(家口)가 각각 사(私)적으로 100 묘씩 소유하고 공전은 공동으로 경작한다. 공 전의 작업이 끝나야만 각자의 일을 할 수 있다. (3A.3)
이것은 국가 내의 토지의 경계를 확립하기 위한 다소 엄격한 지침들 같아 보이지만, 오히려 맹자는 '이는 다만 한 제도의 대강의 개요일 뿐이다. 이를 수정하고 적용하는 것은 당신과 당신의 통치자에게 달려 있다'고 지적한다(3A.3). 국가가 지역공동체 수준에서 비교적 균등한 토지의 분배를 유지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각 가구가 자신의 가족을 위해 생산적으로 토지를 이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과 충분한 식량이 비(非)농민 계층에게 공급되도록 하기 위해서 토지의 생산물에 대한 농민들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후 중국의 통치자들은 정전법의 원칙들을 그들의 상황에 맞게 적용했다. 당(唐)나라 초기에 토지는 국가가 소유하고 국가에 의해 대체로 정전법에 따라 농민 가족들에게 분배되었다. 그러나 결국 국가 소유 체제는 무너졌고, 송(宋)조에 이르기까지 사적 소유를 포함한 여러 토지소유 형태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는 국민의 물질적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서 토지의 매매에 대한 통제를 지속시켜 왔다. 명(明), 청(淸)조에는 국가가 지역공동체의 곡물창고를 통해 농민들을 생존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보호했다. R. Bin Wong이 지적한 대로 '공동체 곡물창고'는 외연적으로 이러한 시설의 개설과 유지의 책임을 지역 주민들의 손에 두는 것이었다. 지역 곡물 저장소를 발달시키기 위해 귀족과 그 밖의 다른 사람들에 의존하려던 국가의 의도는 생계 안정을 위한 기본적 노력을 사회 안정의 핵심 요소로 여긴다는 것을 나타낸다.
물론, 중국공산당은 모든 종류의 지역공동체 자주권과 농사에 대한 가구별 책임을 없애고 농민들이 국가소유의 인민공사를 위해 일하도록 강제함으로써 토지분배의 '유교적' 원칙들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이 체제는 결코 국민들을 부유하게 하지 못했고 오히려 대규모의 비효율을 가져왔다. 1978년에 덩샤오핑(Deng Xiaoping) 정부는 정전법의 원칙들로의 복귀로 여겨질 수 있는 농촌 토지 개혁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국가소유의 인민공사들은 가구(家口)별 책임 체제로 대체되었다. 이 체제에서 '마을 통치 기구였던 마을 협동조합이 소유에 관한 다른 권리들을 갖는 한편, 이제 마을의 각 가구들은 농토를 사용할 권리를 부여받는다.' 농민들은 생산의 일정량(대체로 가구별 토지의 1/6에 해당)을 낮은 고정 가격에 국가에 제공할 의무를 갖지만, 그 나머지는 자신이 갖거나 공개 시장에서 파는 것이 허용된다. 이 체제는 그후 중국의 급속한 경제 발전(과 이에 따른 국민의 물질적 복지의 향상)을 뒷받침한 것으로 널리 인정되어 왔다.
4. 도움이 필요한 가족 구성원 부양이라는 가치
유교윤리의 기본 가정 중 하나는 도덕적 삶은 개별적인 인간 관계의 맥락 내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일반 국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계는 무엇보다도 가족이다. Ruiping Fan이 지적한 바대로 '가족 관계는 매우 중요해서 유교에서 강조하는 기본적인 인간관계의 3/5에 해당한다. 자신의 가족을 그 자체로서 번성하기도 하고 곤란을 겪기도 하는, 나머지 사회로부터 독립적인 단위로 여겨야 한다는 것은 유교의 도덕적 필요조건 중 하나이다.
가족의 맥락 내에서 개인들은 서로서로 어떤 의무를 갖는다. 특히, 경제적으로 생산능력이 있는 성인들은 도움이 필요한 가족 구성원들을 돌봐야만 한다. 이 의무는 글자 그대로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정치적 입장에서 이는 맹자가 지적한 대로 정부는 경제적으로 생산능력이 있는 가족 구성원들이 '한편으로는 부모를 돌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내와 자녀들을 부양할' 충분한 생활 수단을 갖도록 보장하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의미한다(1A.7; Lau). 자녀들을 돌보는 것의 가치는 다른 문화권들에서도 널리 찾아볼 수 있는 것이지만, 유교는 연로한 부모를 돌보는 효(孝)에 대해 특별히 강조한다. 간단히 말해, 나이든 부모를 돌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맹의자(孟懿子)가 효에 대해 물으니, 선생님께서 "불순종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대답하 셨다. 번지(樊遲)가 자신의 수레에 선생님을 모시고 갈 때, 선생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 다. "맹의자가 효에 대해 물어 내가 '불순종하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번지가 여쭈 었다. "무슨 뜻입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에는 예(禮)를 따라 섬겨라.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예에 따라 장사하고 예에 따라 제사를 지내 라." (2.5; 1.2, 2.6, 2.8, 4.19, 19.17)
효는 단지 나이든 부모에게 물질적 편안함을 제공하는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자하(子夏)가 효에 대해 물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중요한 것은 태도이다. 만약 젊은 자식이 단지 할 일이 있을 때 부모를 위해 그 일을 하거나 음식이 있을 때에만 부 모로 하여금 먹고 마시게 한다면 어찌 이를 효라 하겠느냐?" (2.8; Mencius, 6B.3)
여기서 공자는 참된 효는 오직 자신의 유익을 희생해야만 할 때에도 나이든 부모를 섬기려는 의지가 있느냐에 의해서만 검증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듯 하다. 공자는 극단적 상황 하에서의 예외를 인정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나이든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망을 억제해야만 한다.
또한 효는 다른 여러 도덕적 의무들에 우선한다. 맹자는 '이기적으로 아내와 자녀들에만 몰두하는(4B.30; Dobson)' 사람들을 비난한다. 이보다는 가장 큰 의무인 자신의 부모에 대한 의무에 특별히 집중해야만 한다(4A.20). 그리고 공자와 맹자는 모두 나이든 부모를 돌보는 것이 다른 공(公)적 의무에 우선한다고 주장한다.
간단히 말해, 유교주의자들은 생산능력이 있는 성인들은 도움이 필요한 가족 구성원들을 돌볼 의무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들은 나이든 부모를 봉양할 필요를 강조한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이러한 의무들은 (협의의) 개인 자신의 유익에, 그리고 경쟁적인 다른 의무들에 우선한다. 이러한 의무는 동아시아 국가들에 의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실행되어 왔다. 이러한 실행 방법 중 하나로써 재산의 개인 소유를 강조하는 자유주의에 대비되는 가족 공동 소유의 관습을 논의하려 한다.
전통적인 중국 사회에서, 재산(토지 포함)은 개인이 아니라 가족에 의해 소유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가족 공동체는 함께 살았고 가족 재산을 공동 이용했으며 이는 이런 맥락에서 경제적으로 생산능력이 있는 성원들이 도움이 필요한 성원들을 돌봐야 할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여겨졌다. 또한 '적어도 2천 년 동안 중국에서 존재해 온' 가족 공동 재산의 관습은 법적인 함의를 가지기도 했다. 법에 따르면, 나이 어린 가족 성원들은 가족 재산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전용(專用)한 죄가 적용될 수 있을 뿐 절도죄가 적용되지는 않았다. 재산은 가장이 사망했을 때에만 분배되었다. 분배할 때에는 재산은 대체로 모든 아들들에게 균등하게 분배되었고 딸들은 이차(二次)적인 상속권을 가졌다. 개인적인 재량(裁量)의 여지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유언에 의한 상속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1931년 중국국민당은 중국 민법을 공포(公布)하였는데 이는 명백히 중국의 법을 근대화하고 분가(分家)를 금지하는 명령을 폐지하려는 시도였다. 이 민법은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졌고 마지막 부분은 상속을 다루었다. 표면상, 새로운 민법은 '유언자의 유언에 의한 재산의 처분'이라는 '서구적' 사고를 권장하였다. 여성에게도 동등한 상속권(rights of succession)이 주어졌다. 서구식 관습법과 마찬가지로, 재산의 임의적 처분은 어린 자녀들을 부양해야 할 필요에 의해 제한을 받았다. 중국의 민법 역시 재산의 처분에 대한 전통적인 유교적 제한내용들을 보전하였다. 유산분배를 받을 수 있는, '부모'와 '조부모'를 포함하는, 가족 성원들의 자세한 서열을 규정하였다. 더욱이, 사망자의 생시에 그의 부양에 의존했던 도움이 필요한 가족 구성원들 역시 상속권을 가졌는데, 구체적인 세부 사항들은 '가족 회의'에 의해서 정해졌다. 간단히 말해, 유증(遺贈)과 상속을 통한 세대간 재산(토지 포함)양도는 연로한 부모와 조부모를 포함하는 도움이 필요한 가족 구성원들의 부양이라는 유교적 가치에 의해서 제한되었다. 개인은 사후(死後)에도 이러한 의무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놀랍게도, '공산주의' 중국에서의 상속 관습 역시 상속에 관한 전통적인 유교 사상을 구현(具現)하고 있다. 1985년 4월 10일 전국인민대표회의(the National People's Congress)는 중국인민공화국 역사상 최초의 상속법을 공포하였다. 1931년의 중국민법과 마찬가지로 상속법은 가부장적 관습을 거부하고 개인의 독자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성에게 동등한 상속권(rights of inheritance)이 부여되었고 유언에 의한 상속이 법적으로 허용되었다. 그러나 유언에 의한 상속에서 고인(故人)의 선택은 연로하거나 허약하거나 미성년인 상속인에게 생활수단을 공급해야 한다는 조건의 제한을 받는다. 게다가, 고인을 유기(遺棄)하거나 학대함으로써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 상속인들은 그들의 상속권을 상실한다. 상속법은 또한 비유언 상속(즉, 고인이 유언없이 죽은 경우)이 법정(法定) 상속을 통해 실행되도록 한다. 이 경우, 재산의 처분에 대한 전통적인 사고가 역시 작용한다. 제 10조는 토지가 다음과 같은 순위에 의해 상속된다고 규정한다.
제 일 순위: 배우자, 자녀, 부모
제 이 순위: 형제자매, 친 조부모, 외 조부모
법정 상속인들은 또한 상속인들의 상대적인 재정적 필요와 고인을 부양할 의무를 수행한 정도에 따라 중요한 예외적 경우에 해당할 수 있다 (제 13조). Louis Schwartz가 지적한 대로, 이러한 예외적 경우들은 사회의 기본 복지단위로서의 가족에 대한 전통적인 유교적 관념으로부터 의식적으로 도출된 것이다.
중국 법학자들은 가족 성원들이 서로 부양하지 못하는 것은 비도덕적(immoral)이면서 동시에 불법적(illegal)인 것이라고 강조한다. 제 13조는 '법적 효력을 가지고' 가족 내에 서 서로 돌보는 전통적인 중국 관습을 지속시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의무와 수혜 의 상호성은 법(fa)을 통해 유교적 윤리 원칙들(li)을 시행하는 전통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현대 유교적 관점에서 유증과 상속을 통한 재산의 세대간 양도는 자녀와 연로한 부모를 포함하여 형편이 좋지 않은 가족 구성원들에게 도움을 제공할 필요에 의해서 제한되어야 하는 것이다. 윤리적으로 (그리고 이제 법적으로도) 도움이 필요한 가족 성원들의 상속권을 박탈할 수 없고, 잠재적 상속인들은 만약 사망자의 생시에 그들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면 상속권을 상실하게 된다.
5. 현명하고 자비로운 엘리트에 의한 통치라는 가치
유교 윤리의 기본 가정 중 하나는 인간의 궁극적인 사명은 공직에 봉사하는 것(public service)이라는 것이다.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로(子路)가 참된 군자의 자격에 대해 물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의 일에 부지런할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기르는 사람이다"라고 하셨다. 자로가 말하기를, "그 이상 더 나아갈 수는 없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다른 사람들의 일의 몫을 가볍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기르는 사람이다" 라고 하셨다. 자로가 말하길, "그에 서 더 나아갈 수는 없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온 백성들의 몫을 가볍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기르는 사람이다. 만약 이를 할 수 있다면, 요(堯)임금이나 순 (舜)임금이라도 그를 비난할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라고 하셨다.(14.45)
플라톤이 말한 몽매한 동굴 거주민들 중에서 공공의 임무를 맡는 철학자 계층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적 명상이 최상의 기쁨이라는 생각, '세속적인 기능들에 덜 전문적으로 얽매여 있고 더 자유로운 위치에 있는 것 같아 보이는 이스라엘과 서구의 예언자들', 올바른 삶에 대한 어떠한 개념에도 특권을 부여하지 않으려 했던 근대 자유주의 사상가들과는 달리, 공자의 최상의 인간은 공직(公職)에서 완전한 자아실현을 이룬다. 따라서 유교주의 국가는 윤리적, 지적 엘리트를 판별해내고 그들에게 정치적 권위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구조화되어야 한다. 정부 관리로서의 이러한 엘리트들은 국민의 복지를 제공할 특별한 의무를 가지며, 국민들은 이에 상응하여 이러한 임무를 만족스럽게 수행하는 엘리트들을 존경할 의무를 가진다.
전통적인 유교 사회는 유명한, 2천년동안 지속되어 온 능력위주(meritocratic) 공직 시험 제도를 통해 이 가치를 실행했다. 물론 이 제도도 단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대체로 '최고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정부'를 구성하는 데 있어 매우 성공적이었다. 경쟁 시험을 통한 공직에의 입문의 길은 몇몇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모든 남성에게 개방되어 있었는데, 합격한 사람들(종종 이를 위해 인생의 반을 쏟아 부은)은 공직에 필요한 도덕적, 지적 자격을 독점적으로 갖춘 것으로 여겨졌다. 공정하고 개방적인 시험에 합격함으로써 자신들의 능력을 입증한 학자-관리들에게는 (서구의 기준에서 볼 때) 매우 대단한 존경과 권위가 주어졌다. 공정하고 개방적인 시험은 종종 신분상승의 수단으로 여겨졌는데, 이는 사회의 하층에서도 체제의 정당성을 획득하는 데 기여하였다.
물론, 시험제도는 20세기 초 중국왕조와 함께 몰락하였다. 더구나, 중국공산당은 지적 엘리트에게 존경과 권력을 부여하는 유교적 정치 가치를 뿌리뽑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Tu Wei-ming에 따르면, '유교적 학자-관리 정신은 동아시아 사회들의 정신문화적 구조 내에서 아직도 기능하고 있다.' 이것은 왜 중국 공산주의 지도층이 다시 유교 연구를 장려하고 있고 최근에 중국에서 경쟁적 공직 시험이 다시 제도화되었는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유교적 정치 엘리트주의의 현대적 형태는 아무래도 다행히 전면적인 '문화 혁명'을 겪지 않은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전국적인 대학 예비고사에서 최상위 학생들은 동경대 법학부에 입학하고 졸업과 동시에 가장 명예로운 정부 부서 내의 지위를 얻는다. 정치 체제 내에서 그들은 국가의 정책들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고 실제로 그들은 국가의 선출된 정치가들을 포함한 어느 누구로부터도 독립적이다. 싱가포르에서는 국립대학의 최고 졸업생들은 사적 부문의 돈 잘 버는 직업이 아니라 공직을 놓고 경쟁한다. 'A급(A levels)'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들은 미국과 영국의 최상위 대학에서 유학할 수 있는 정부장학금이 주어지며, 그들이 싱가포르로 돌아오면 거의 곧장 공공 부문에서 책임있는 지위가 주어진다.
유교적 엘리트들은 2차 대전 이후 동아시아 국가들에서의 빠르고 비교적 평등한 경제적 성장, 안정적인 가족관계, 범죄없는 거리 같은 사회적, 정치적 위업에 기여해 왔다. 그러나, 유교적 엘리트주의의 단점들은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의 최근의 사건들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치가들의 뒤에 숨어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정책들을 만드는 책임감없는 관료들에게 과도한 권력을 부여하는 것의 위험을 노출시켰다. 한 극심한 경우를 예로 들자면, HIV 감염의 위험이 알려진 지 오래되었던 때인 1985년까지도 후생성의 관료들은 소독된 혈액의 수입 허용에 반대했다. 그 결과 수백 명의 일본 혈우병자들이 AIDS로 사망했다.
'유교적 엘리트주의'가 한층 더 독재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싱가포르에서는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싱가포르는 공식명칭 상으로는 민주주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야당 후보들은 파산, 명예훼손, 망명 등의 형태로 보복을 당한다. 그 결과 선거기간에 여당인 국민행동당( People's Action Party)에 감히 맞서려는 자질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선거기간과 선거기간 사이에 정부는 정부의 정책들에 비판적인 전문가들과 종교기관들에 가혹한 조치를 취한다. 따라서 국가 내에 팽배한 공포 분위기는 반사회적이고 편협한 이기적 행위에 대한 은근한 부추김과 함께 예측가능한 결과가 된다.
이제 문제는 어떻게 무책임하고 은밀하고 오도된 의사결정의 위험을 최소화하면서 실력에 의해 선발된, 재능있고 공공심있는(public-spirited) 엘리트에 의한 통치, 즉 유교적 엘리트주의의 장점들을 보존하느냐 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이를 위해 17세기 학자인 Huang Zongxi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Huang의 저서 Waiting for the Dawn: a Plan for the Prince는 전제(專制)적 정부에 대한 공격으로 시작된다. '고대에는 천하만민이 주인이었고, 군주(prince)는 소작인이었다. 군주는 그의 전 생애를 천하만민을 위해 일하며 보냈다. 이제는 군주가 주인이고 천하만민이 소작인이다. 아무도 평화와 행복을 어디에서도 찾지 못하는 것은 모두 군주의 탓이다.'
Huang의 생각에 왕조체제는 단지 모범적인 성품의 덕있는 통치자를 찾음으로써 개혁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유교주의자들과는 달리 Huang은 강력한 총리나 상대적으로 권력이 강한 대신들 같은 황제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마련된 특수한 법과 제도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유교적 학자-관리들의 훈련을 위한 학교의 정치적 역할을 강화하자는 Huang의 제안은 특히 적절하다. 그의 생각에 모든 단계의 학교는 개방적인 공론(公論)의 장소로써 기능하여야 했다. 그는 동한(25-220 A.D.) 때에 학자-관리들의 최고 훈련 학교였던 제국 대학(the Imperial College)의 학자들이 권력자들에 대한 두려움없이 중요한 사안들에 대해 거리낌없는 토론에 참여하고, 최고위 관리들은 그들의 질책을 피하려고 애썼던 점을 지적했다. 더욱이, Huang은 당시의 위대한 학자들 중에서 뽑혔던 제국대학의 학장은 총리와 같은 중요성을 가져야 하며 황제는 총리와 몇몇 장관들과 함께 한 달에 한 번씩 제국대학을 방문해야만 한다고 제안하였다. 황제는 학장이 국가의 행정에 대해 질문하는 동안 학생들 사이에 앉아 있어야만 한다. 간단히 말해, 이 체제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통치자들로 하여금 Theodore de Bary가 말했던 '학자들의 의회(Parliament of Scholars)'에서 책임을 물도록 하는 것이다.
게다가, Huang은 학자-관리 선발을 위한 유교적 시험 제도를 수정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그 당시의 시험이 피상성과 표절행위에 대해 상을 주는 것일 뿐이며, 따라서 '참 재능'을 가진 학자들을 발굴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고 단정했다. 그는 시험은 암기력과 함께 독자적인 사고를 측정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나라와 송나라의 여러 학자들의 말한 바를 하나씩 열거한 후에 응시자들은 그 자신의 의견으로 결론을 내려야 한다. 한 권위자의 말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Huang의 제안은 그의 시대에는 너무 급진적이었지만, 이것이 만약 민주적으로 선출된 하원(下院)과 결합된다면 근대적 맥락에서 진지하게 검토할 만한 가치가 있다. Huang의 제안의 근대적 적용은, 말하자면, 민주적으로 선출된 하원(下院)과 경쟁 시험을 통해 선발된 대표자들(deputies)로 구성된 '유교적' 상원(上院)(이를 '학자회의(House of Scholars)'라 부르자)으로 이루어진 양원(兩院) 입법부의 형태가 될 것이다.
학자회의는 몇몇 장점들을 가질 것이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치가들과 달리 대표자(deputies)들은 정치적 협의에 참여할 때, 특정 선거구를 배려해야 할 필요에 의해 제한받지 않고 정치적 결정에 의해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들의 요구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 의원들이 권력의 남용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염려는 임기의 제한과 부정부패에 대한 엄격한 처벌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토론은 TV를 통해 대중에게 곧바로 방송될 수 있고 이는 투명성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험 절차가 재능있는 의사결정자들의 선발을 보장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는 점이다. 시험 절차가 재능있고 성실한 의사결정자들을 선발하는 데 있어 매우 불완전한 기제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절차가 민주적인 선거를 포함하여 현재 제시되고 있는 다른 정치적 선발 방법들보다 더 효과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학자들의 의회가 영국의 상원(the House of Lords)이나 캐나다의 상원(the Senate)같은 의회 체제(parliamentary system)에서의 상원(the upper houses)보다 더욱 능력위주일 뿐만 아니라 또한 결코 덜 민주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물론, 시험의 내용, 규모의 문제, 양원간의, 전국·지방 의회간의 관계, 그리고 어떻게 의원들을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더욱 떨어뜨려 놓을 수 있을 것인가 등과 같은 많은 사안들이 여전히 해결과제로 남아있다. 나는 이에 관해 다른 곳에서 몇몇 아이디어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은 궁극적으로는 실제로 제헌 의회에서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6. 비(非)유교 사회에서의 적용가능성
이러한 세 가지 유교적 가치와 이들의 정치적 함의는 유교적 전통에 의해서 형성되지 않은 사회에서 어느 정도 실현 가능한가? 다시 말해, 이러한 가치들이 국제적인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가? 각 가치를 다시 한 번 보면서 비유교 사회에서의 이러한 가치들의 실행의 잠재적 가능성을 살펴보자.
유교적 입장에서 정부의 첫째 우선 순위는 국민의 물질적인 복지를 보장하는 것이고 다른 가치들과의 갈등의 경우 이 의무가 다른 가치들에 우선한다. 특히 재산권은 국민의 물질적 복지를 보장할 필요에 의해 제한되어야만 한다. 이를 위해, 맹자는 정전법을 제안했는데, 이는 곧 국가가 국가의 비(非)농민 구성원들의 물질적 복지를 보장하기 위하여 농산물의 일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또한 지역공동체 수준에서의 토지의 균등한 분배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가 간섭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외에는 개별 가구들이 토지를 생산적으로 이용하고 자유시장에서 농산물을 팔 권리를 가진다. 만약 국민의 물질적 복지 증진이라는 목표를 더욱 효과적으로 보장할 수 있다면 다른 대안(代案)적 재산권 분배 방식은 (원칙적으로) 수용가능하다. 그러나, 정전법은 중국 역사상 영향력을 행사해 왔고 또 현대에도 계속하여 의미가 있다 - 덩 샤오핑(Deng Xiaoping)의 농촌 토지 개혁 프로그램은 (이론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실제적으로) 맹자의 정전법으로의 '복귀'를 나타낸다. 따라서 정전법을 지도하는 원칙들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역사상의, 그리고 오늘날의 성공의 높은 장벽을 뛰어넘어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물질적 복지의 가치와 맹자의 실행 아이디어는 주로 농촌 사회에 적용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회들이 꼭 유교적이거나 중국계이어야만 할 이유는 없다 (확실히, 맹자는 그의 원칙들이 보편화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비(非)동아시아 사회들도 맹자의 정전법을 제대로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은 공산주의적 집단주의로부터 이러한 맹자식의 사적, 공적 재산의 혼합으로의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 따라서 이것이 쿠바와 같은 공산주의 국가들에서의 개혁을 위한 지침을 제공할 수 있을 것임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또한 어린 자녀와 연로한 부모를 포함하는 도움이 필요한 가족 구성원들의 부양이라는 유교적 가치에 관해서도 논의하였다. 가족 공동 재산제 하에서는 경제적 생산능력이 있는 사람이 그들 가족의 능력이 못한 성원들을 돕기가 더욱 용이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법적으로 집행되기도 한다) 개인보다는 가족에게 재산권을 부여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원칙적으로 유교주의자들은 도움이 필요한 가족 성원 부양의 가치를 더 효과적으로 보장하는 재산권의 대안적 분배 방식이 있다면 이에 찬성할 것이다. 그러나, '더 위대한 중국'에서 현대 의사결정자들은 몇몇 유교식 재산권들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매우 다른 정치적 사상에도 불구하고 중국국민당(the Nationalist Party of China; 즉, the KMT), 중국공산당, 그리고 홍콩 정부는 도움이 필요한 가족 성원들의 상속권을 박탈할 개인의 자유를 폐지하는 법을 모두 통과시켰다. 더욱 개인중심적인 재산권이 도움이 필요한 가족 성원들의 부양이라는 유교적 가치를 증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화시키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른 사회들이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가족 생활에 미치는 침식적 효과에 대해 염려하는 만큼 이들도 당연히 도움이 필요한 가족 성원들의 부양이라는 유교적 가치와 그 실제적 결과로부터 영감을 구하려는 것이다. 서구 사회의 페미니스트 사상가들과 공산사회주의(communitarian) 사상가들은 연약한 가족 성원들을 돌봐야 할 필요성에 관한 글을 써왔는데, 가족중심 재산권(또는 그 변형들)이라는 유교적 아이디어는 이러한 목표를 장려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질 수 있다.
마지막으로, 현명하고 자비로운 엘리트에 의한 통치라는 유교적 가치는 현대 유교 사회들에서 적합할 지도 모른다. 이 가치는 유교 사회에서의 정치적 의사결정자들을 선발하기 위한 경쟁적 시험의 방법에 의해서 제도화되었지만, 너무 자주 정치권력의 무책임하고 자의적인 사용을 낳아왔다. Huang Zongxi의 사상에 의거하여 이 가치는 경쟁 시험에 의해 선발된 회원들로 구성된 학자회의에 의해 제도화될 수 있음이 제시되었다. 이 제안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하원과 결합된다면 독재정치의 위험을 피하면서 동아시아에서의 통치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오랫동안 비교적 제대로 기능하는 체제를 갖고 있는 국가들이 현실에서 그 장점들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제도를 택하기 위해 현재의 정치적 상태를 버릴 것이라고 기대할 이유는 없다. 더구나, 능력에 의해 뽑힌 학자 관리를 존중하는 전통이 없는 사회에서는 학자회의는 이상하게 (혹은 더 나쁘게) 보일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전통적으로 '뛰어나게 머리가 좋은' 지식인들에 대한 대중적인 적개심이 존재하는 미국에서 학자회의가 대중적인 정당성을 크게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엘리트적인 정치 문화를 가지고 있는 국가들에서는 학자회의가 급진적인 정치적 개혁을 위한 여러 선택 가능한 방법 중 하나로 여겨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완전히 비현실적이지는 않다(헌법적인 현 상태가 심각한 정당성 위기를 겪고 있다고 한다면). 예를 들어, 중국 본토에서는 현재의 정치체제가 오랫동안 안정적일 것으로 보이지 않고 많은 개혁자들이 21세기 중 개헌을 기대하고 있다. 일본과 남한 같은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은 최근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들 또한 민주적 집산주의(populism)에 지적 엘리트들을 대표하는 제도를 혼합하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수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프랑스 정치 생활에서의 지식인들의 사회적, 정치적 중요성을 볼 때, 학자회의를 위한 문화적 토양이 프랑스에서 비교적 좋을지도 모른다. 만약 제 5공화국이 심각한 정치적 혹은 헌법상의 위기를 겪는다면, 아마도 학자회의가 '제 6공화국' 구성을 위한 하나의 제안으로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이러한 세 가지 유교적 가치들과 이들의 정치적 함의는 유사한 정치 문화를 갖고 유사한 정치적 문제들에 당면한 비유교 사회에서도 당연히 적용 가능하다. 만약 이러한 가치들이 더욱 국제적으로 부각된다면, 그리고 만약 이들이 자유주의 사회의 결점들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널리 인식되게 된다면, 이 가치들 또한 언젠가는 보편적으로 공유되고 실행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