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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자연의 소리 ▷ 실전 임야개발 & 전원생활 부자들 ◁ 원문보기 글쓴이: 풍암 ( 창원 )
노란 개나리가 흐드러졌던 85년 부곡온천의 봄,
참으로 행복했었다.
내 인생도 개나리처럼 활짝 필 것만 같았다.
대학 캠퍼스에서 낭만을 즐기고 있을 친구들,
취업일선에서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을 친구들,
나는 부곡온천에서 밤의 황제(?)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 곳에서는 더 이상 나를 ‘성구’라고 부르지 않았다.
19세에 드디어 내 이름 석 자를 찾았다.
“정성규”
참, 내 나이는 24살이었다.
민기형이 나이를 몇 살 올리라 해서 5살이나 높였다.
워낙 조숙하게 보여서~
모든 사람들에게 호칭은 두 가지로만 불렀다.
50살 된 식당아주머니도 누나~~
55살 된 파출소장님도 행님~~
예의가 없다고, 오지랖이 넓은 애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세지로 불린 스몰a형을 아시나요?
난 한마디로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전형적인 A형,
그것도 스몰a형이다.
모르는 여자분이 길을 물으면 식은땀이 흐르면서 말을 더듬었고,
마음에 드는 여학생이 다가오면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벌렁거렸다.
아는 것도 별로 없었지만,
설혹 아는 것이 있어도 안다는 표현을 못할 정도였다.
고 3을 앞둔 2학년 겨울방학,
‘이렇게 살다가는 안되겠다. 성격을 바꾸자’고 마음먹었다.
그리고는 당시 부산에서 가장 번화한 서면거리 한 중앙에 섰다
“진영 사는 학생인데 집에 갈 차비가 없습니다. 500백원만 도와주이소.”
큰맘을 먹었지만 입안에서 맴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행인들이 한마디라도 할라치면 뒤돌아 도망치듯 뛰어서 숨어버렸다.
하루... 이틀... 사흘...
점점 입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어눌하지만 호소력 있는 연기까지 가능해졌다.
구걸한(?) 수입은 밥값과 차비만 빼고는 걸인의 깡통에 넣어 주었다.
‘좋다. 이제는 물러설 데가 없는 곳에서 해보자.’
문방구에서 300백 원짜리 볼펜을 왕창 사서 시내버스에 올랐다
하지만 운전석 옆 출입문 앞에 서자 다시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대로 시내버스에서 내리기를 몇 차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승객여러분 ! 안녕하십니꺼?
이 볼펜을 팔아 어린 동생들을 먹여 살려야 합니다. 도와주십시오~
하나에 500백 원입니다.”
막내인 내가 없는 동생까지 팔고는 멀대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버스 승객들이 ‘멀쩡하게 생긴 놈이~~’ 라는 눈빛을 보낼려면
슬그머니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버렸다
내가 꼭 이 정도까지 해야 하나?
이만해도 되지 않았나?
몇 번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기왕 시작한 거 확실하게 고쳐보자며 굳게 마음을 먹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처음 볼펜 3개를 팔고는 후덜거리는 다리로 뒷골목까지 달렸다.
그리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화자찬을 했다 " 제법이다 너~"
거듭할수록, 하루 20번 정도 버스를 타고, 볼펜 100개까지 팔 정도가 됐다.
갈수록 능청스러워지고 있는 내 모습에 흐뭇했다.
기사 아저씨의 호통도 감수할 만큼
“야 임마~, 안 내리나?”
“걱정마이소. 다음 정거장에서 내립니더. 운전 조심하이소~~.”
15일 간의 성격 개조 프로젝트는 성공적이라 할 수 있었다.
마지막 도전을 결심했다.
진영에서 김해를 오가는 마부산 버스!
학교를 가기 위해 빨간색 완행버스를 타고 다녔다
마산에서 부산을 오가는 버스라 진영에서 타면 빈 좌석이 많았고,
맨 뒷좌석은 학생들의 지정석처럼 비어 있었다.
하지만 김해 한림면을 지날 쯤엔 콩나물시루가 될 정도로
승객들로 가득 찼다.
아까부터 내 눈은 그녀에게 꽂혀 있었다.
두근두근... 콩닥콩닥...
심호흡을 크게 하고, 침을 꼴딱 삼켰다.
실업계여고 앞,
흰 칼라에 단발머리가 유난히 예쁘던 그녀가 버스에서 내렸다.
난 뒷좌석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난 김해고의 정성규다. 니 내하고 친구하자.”
뭇 남학생들의 부러움과 시기를 느끼는 것도 잠시,
친구들의 온갖 소리가 들렸다
“절마 저기 미친나~~?”
“그 여학생은 안된다. 우리의 여신이다~”
“성구~ 파이팅 ~~”
버스는 나를 기다려주지 않고 떠나버려 지각을 걱정해야 했으나
그 딴 건(?) 생각나지도 않았다.
난 콧노래를 부르며 뒷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여학생과는 아주 오랫동안 친한 친구로 지냈다.
역시 옛말 틀린 게 하나 없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
그 이후로 내 성격을 완전히 바꿨다고 생각했는데..
피는 속이지 못하는 걸까?
난 요즘도 혼자인 게 좋다.
가끔은 부끄러움을 타기도 하다
한편, 부곡온천에서 내 비중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일마~, 어이 정사장!” 이라고
부르는 소리에는 뒤돌아보지 않아도 될 만큼
술집을 맡아서 운영을 해달라는 업주들이 늘어났다.
예쁜 아가씨를 자신들의 가게에 보내달라며 뇌물(?)을 주는 업주도 있었다.
더러는 “우리 가게에 손님이 통 없어~. 뭐가 문제 같냐?”며
자문을 구해오는 분도 있었다.
한술 더 떠서 나이트와 캬바레에 와서 1시간만 있어주면
5만원을 주겠다는 사장도 있었다.
유흥업소에서 왜 나를 필요로 했는지는 읽는 분의 판단에 맡긴다~~~ ㅋㅋ
“어떻게 하면 손님들이 더 좋아하실까?”
“손님들이 술을 주문하면 우루사와 박카스를 먼저 드렸고,
룸에 들어갈 때는 갈아 신을 수 있도록 슬리퍼를 준비했다.
구두는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닦아 놓았다.
그리고! 술자리가 끝날 즈음
“사장님,집에 가셔서 사모님께 드리세요~.”
꽃을 한 아름 선물하기도 했고, 보잘것 없지만 귀걸이를 드리기도 했다
“정사장 덕분에 바가지 안 긁히고 아침에 해장국 얻어먹었네. 고맙소~”
룸살롱의 운영으로 한 달 순이익이 1천만원이 훨씬 넘었다
당시 진영에 있는 우리 집이 1천만원 정도 했으니깐,
한 달에 집 한 채 씩 벌어들인 셈이다.
30명이 넘는 아가씨와 남자직원들은
거의 타지에서 돈을 벌러 온 사람들이었다.
때론 지각을 하고, 때론 편을 갈라 시기와 질투를 하기도 했다.
그대로 뒀다가는 배가 산으로 갈 것 같았다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하는데...
구리알 같은 돈을 투자하기로 결심을 했다
“오늘 점심은 갈비 먹으러 가입시더. 할 말도 있고 다들 오셔야 합니더.”
음식이 나오기 전에 중대발표를 했다.
“밖에서 생활하는 분들은 오늘부터 00주택으로 이사를 하이소.
밥도 주방아주머니가 챙겨드릴 겁니더.
그라고 큰돈은 아니지만 전부 기본 월급을 드리겠습니더.“
“와~~ 사장님! 멋쟁이”하는 소리에
에라이~ 모르겠다
“보너스도 석 달에 한 번씩 드리겠습니더~~~” 질러버렸다.
“와~ 와~~ 와우~~ .”
식당 안이 직원들의 함성으로 들썩였다.
한솥밥을 먹는 식구(食口)는 많은 것을 가능하게 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잘 내 지른것 같다. ㅋㅋ
얼마전 인연을 맺은 카페의 댓다캐라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내가 있어야만 일이 된다면 " 점빵"이고
내가 없어도 운영이 된다면 " 회사"라고
난 그날 이후 영업시간에도 홍보를 하러다닐 수 있었다.
그 시절, 어린 나에게 직원보다 피붙이 같았던 형과 누이가 있었다.
충청도 산골에서 온 성철이형!
키가 154cm 정도나 됐을까?
왜소한 체격 때문에 땅꼬마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그 때 형님 나이가 38살 쯤이었다.
겨울철이면 몸보신을 한다고 뱀이나 개구리를 잡아 뒷마당에서 고아 드시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어느 날, 뽀얗게 곤 개구리탕을 우리에게 먹이려고 밥상에 올린 적이 있었다.
아가씨들이 기겁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그 후로는 성철이형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담배와 술을 하지 않은 형은 매달 모은 돈을 노모에게 보내드렸다.
어느 날 “성규야~ 나 이제 엄니 모시고 살란다.
그 동안 모은 돈이면 땅 몇 마지기는 살 수 있을 거 같다.
점점 엄니가 아프셔서 걱정이 되어서 마음이 편치가 않어..”
“행님아, 잘 생각했다. 그라머 이삿집 내도 날라다 줄게 행님집에 같이 가자 "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동네를 지나 걸어서만 갈 수 있는
오솔길을 20여분 뒤에 도착한 충청도 산골.
형님 집을 보는 순간 12평의 우리 집은 궁궐이었다.
쓰러져가는 3칸짜리 오두막에 노모께서는 걸음마저도 불편하셨다.
아들이 온다고 하루 종일 아궁이 불을 때셨는지,
그날 밤 참으로 오랜만에 몸을 지지며 잤던 것 같다.
다음날 아침. 푸성귀와 산골에서는 귀한 구운 갈치 세 토막이 전부인 밥상.
갈치 가시를 일일이 발라서 어머니 숟가락에 올려주는 아들.
아들이 올려준 갈치를 맛있게 드시는 어머니....
가족도 잊고 몸 하나로 세상과 맞서 싸우는 나에게
형은 가족의 의미를 가르쳐 주었다.
성철이형, 건강하시죠??
전라도 여수가 고향인 미옥이 누나.
미옥이 누나 ~ 내다 성규!
우리 가게의 올드미스 서른여섯의 미옥이 누나
술집에서 일 할 만큼 예쁘지도, 나이가 어리지도 않았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두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자청해서 술집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여관의 허드렛일을 도맡는 대신 숙소를 공짜로 해결하였고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며 식사를 해결할 정도였다
가게에 나와서는 악착같이 손님 테이블에 들어갔고,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언니야, 이 화장품이 내 피부에 안 맞네. 쓸래?”
화장품은 다른 아가씨들이 오래돼 버리거나 안 쓰는 것을 얻어 사용했고,
아가씨들이 매일 가는 온천 한번 가지 않고 집에서 물을 끓여 씻었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고 뒷담화를 들을 만큼 억척스런 누나였다.
영업을 마친 새벽, 포장마차에서 누나와 밥을 먹게 된 어느 날
“사장님~ 내 막내동생과 나이가 같네요~”
내겐 또 한 명의 누나였다.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애쓰는 누나에게
“누야~ 내 좀 도와도 . 아가씨들 관리도 하고 가게의 매상도 누야가 맡아주면 안되겠나?
내 월급도 좀 더 올려줄게~”
어찌나 기뻐하던지... 그 모습이 천사 같았다.
지금은 무엇을 아끼며 살고 있을까?
자연의소리에 있는 집들의 소품은
창원의 오피스텔 분리수거장에서 주워온 것들이 많다.
아마도 막내동생과 동갑인 내가 누나의 검소함을 닮아가는 것 같다.
지금, 새벽 4시 10분.
문득, 미옥이누나가 있을 것만 같은 포장마차에 가고 싶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탄탄대로 비단길 같던 부곡온천에서 잘 나갈수록
내가 치러야할 몫은 커져 갔다.
사흘이 멀다하고 문제가 생겼다.
인근 불량배들과의 자릿세를 놓고 싸움을 수 없이 해야 했고,
다른 룸살롱 주인들이 깡패를 동원해 영업을 방해하기 일쑤였다.
86년 4월 어느 날.
그날은 직원 생일이라 영업을 마친 후
마산 어시장에서 조촐한 파티 계획이 있었다.
새벽 4시경, 가게문을 닫는데 8명의 어깨들이 술을 마시러 들어왔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들이었고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인상들이었다.
“손님, 오늘은 마쳤으니까 다음에 오시면 안되겠습니까?”
“장사 잘 된다는 소문 듣고 왔는데, 영 싸가지가 없는 것들이네.
손님이 왔으면 퍼뜩 다시 문 열어라.“
“오늘은 직원 생일이라....”
“이 새끼가 돈 좀 벌었다고 눈에 뵈는 게 없나?
당장 술상 봐 온나.“
지금껏 봐온 동네 불량배와는 차원이 달랐다.
30분가량의 실랑이로 아가씨들이 다치고 가게는 쑥대밭이 되었다.
나는 내 식구와 가게를 지키려고 싸워야만 했다.
20분이 채 지나지 않아 공포를 느꼈다.
그것도 잠시 뿐 ‘이대로 죽겠구나’
스르르 감기는 눈앞에 죽음이 있었다.
고통도 죽음의 공포도 잊혀지고 편안함이 느껴졌다.
보이는 건 현실이 아닌 우주와 같은 공간, 구름 속...
그 구름은 손에 잡히지 않은 채 나는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눈을 감고 뜨기를 몇 차례,
지금도 가물거리는 기억만 있다.
살아야겠다란... 내 스스로 ...
살기 위해 난 변해야만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소리가 들리고 빛이 보였다.
그러나 어딘지는 알 수가 없었다.
여전히 구름에 떠다니는 나를 느꼈을 뿐.
다시 눈을 감았다.
서서히 느껴졌다.
여전히 구름에 떠 있었지만,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경찰차 싸이렌소리, 응급차소리, 그리고 내 주변...
병원에서 며칠 응급치료를 받은 후 창녕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됐다.
경찰서와 검찰청을 오가며 조사를 받아야 했다.
“왜 내가 잡혀 와야 합니까? 나는 피해자입니다
저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었고, 아가씨들이 많이 다쳤고 우리 가게가 전부 파손됐습니다.”
억울함을 호소해 봤자 소용이 없었다.
“상대방들이 많이 다쳐서 입원을 했고,
고소를 했기 때문에 구속수사를 해야 한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조사를 받는 동안 나는 한 번도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사실과 다른 부분은 진술서에 지장도 찍지 않았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내가 왜 유치장에 감금됐어야 했는지 모른다.
법이란 게 참 어려웠다.
20여일의 유치장 생활.
평범한 시절을 보낸 열아홉의 나에겐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벌어졌다.
양육강식의 세계.
결국 10여일이 지나 내가 선택한 방법은 로마의 법이었다.
난 방장이 되어 있었다.
내게 그리고 미결수들에게 평화는 찾아왔지만
하지만, 벗어나고 싶었다 그 곳을...
온갖 경험을 해본 지금도 생각조차 하기가 싫다.
다만, 한 가지 맹세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싸우지 않을 것이라고... ”
그 후 난 남과 싸우지 않는 법을 터득해나갔다.
그 때 그 사고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도 술집을 하고 있을까?
신이 내게 더 큰 세상을 보라고 기회를 주신 것 같다.
다행히 진실이 밝혀져 재판을 받지 않고 유치장에서 풀려났다
부곡온천에서 스타가 될 뻔한 내가 별을 달 뻔했다.
별은 자연의소리 밤하늘에 무수히 반짝인다.
첫댓글 풍암 선생과 인연 닿으면 포장마차 소주 한 잔 나누고 싶은 마음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