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다 살다 그리다 꽃잎 바다 초록 우도
안정희 씨의 남편 편성운(37) 씨가 낡아빠진 트럭을 타고 마중을 나왔다. 편 씨는 섬사람답게 잘 그을린 구릿빛 얼굴에 구레나룻을 길렀다. 누구를 닮았다 싶었다. 육지에 나가면 사람들이 사물놀이 하는 김덕수 씨의 동생이 아니냐고 묻는단다.
편 씨의 트럭을 타고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느릿느릿하게 움직였다. 맞은편에서 차가 오면 조심해서 피해야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길이다. 시커먼 현무암 돌담 담장 너머로 만발한 유채꽃이 노랗다. 그 너머로 보이는 바다는 파랗다. 섬은 이렇게 원색적이다. 도시에서 보는 중간색 따위는 없다. 외지 사람들이 관광객용 사륜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모습이 보인다. "저러다 다칠라…." 아니나 다를까 과속으로 달리다 가끔 사고가 발생한다.
섬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간다. 도시에서처럼 서두를 이유는 하나도 없다. 섬에 또 하나 없는 게 음주단속이다. 예전에 우도에서 음주단속을 했던 순경이 한 명 있었는데, 육지로 쫓겨났다.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보일러공이 직업이었던 편 씨는 가끔 사람들이 부를 때만 달려가고, 지금은 주로 유기농으로 땅콩 농사를 짓는데 몰두하고 있단다. 바다의 거친 바람과 물이 고이지 않는 척박한 땅에서 자란 우도 땅콩. 알이 작고 탱글탱글하면서 무척이나 고소하다. 편 씨가 꼭 우도 땅콩 같다는 생각을 했다.
Scene 2. 버스로 만든 예쁜 갤러리
섬의 북쪽 끝, 안 씨의 포장마차가 있는 오봉리에 도착했다. 바다와 등대를 배경으로 빨간색 지붕의 포장마차 '초록우도'가 풍경화의 일부가 되어 있다.
우도 문어와 해물이 듬뿍 든 파전, 제주 막걸리, 부산 오뎅 등등을 판다. 가장 인기있는 메뉴는 안 씨가 그린 그림엽서다. 작은 칠판에 '예쁜 우도 그림은 삐삐 주인 언니가 그렸어요'라고 적혀 있다. 만화 속 주인공같은 그를 만났다.
"2~3년 전부터 북유럽 여행자들이 우도에 많이 와요. 제 그림엽서를 보고 최고라면서 선물로 사갑니다. 책에 시를 실으면서 모두 영문으로 번역해 놓은 것도 외국 여행자들을 위해서죠."
안 씨가 그린 더 많은 그림과 엽서는 포장마차 앞에 있는 버스 갤러리(국내 유일?)에서 만날 수 있었다. 버스는 편 씨가 사흘 동안 뚝딱거려서 갤러리로 개조했다. 버스 뒷공간에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가 있다. 이 모든 게 사랑하는 아내의 작품 활동을 위한 남편의 배려이다. 유리창 앞으로 자동차 대신 배가 지나가는 버스를 어디서 보셨나요?
안 씨는 "우도의 아름다운 풍경과 삶의 희로애락을 담고 싶었다. 섬에 오는 여행자들에게도 여유를 안겨주고 싶어 이번에 책을 내게 됐다"고 말했다. 책을 펼쳐 보았다.
'우도를 그리는 꽃잎바다'(초록우도)에는 안 씨가 그린 수채화 32점과 자작 시 32편이 짝지어 있다. 초록우도는 그녀를 위해 편 씨가 차린 출판사 이름이기도 하다. 아내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는 출판사가 없어서 출판사를 그냥 차렸단다. 하여튼 못 말리는 부부다.
묵묵히 앉아있던 편 씨가 바닷가로 나간다. 문어를 가지러 가는 길이란다. 버스에 앉아 있으면 문어가 돌 위에 올라와 있는 모습이 보인다. 가서 들고 오면 된다니….
Scene 3. 일주일 만에 돌아온 육지 처녀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 궁금했다.
이들은 2001년 5월 지금 장사를 하는 등대 앞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부산대 미대 90학번인 안 씨는 10년 만에 학교를 졸업하고 혼자서 우도를 찾았다. 우도는 이전에 친구들과 한 번 놀러왔을 때부터 이유도 모르게 마음을 사로잡았단다.
우도 총각이었던 편 씨는 마침 전날 '어버이날 행사'를 마치고 마을 청년회원들과 남은 안주로 술 한 잔을 나누고 있었다. 그 앞으로 안 씨가 쓰윽 하고 지나가다 합석이 되었다.
편 씨에게 안 씨의 첫 인상이 어땠었는지를 물었다. "나이를 묻더니 '나보다 세 살 어리잖아, 이제부터 나한테 누나라고 부르라'고 하더라고요.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나 했죠."
두 사람은 그날 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긴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바로 다가온 이별. 육지 처녀는 섬을 떠났다. 마음이 시렸지만 어쩔 수 없었던 우도 총각, 그저 바다만 바라보고 소주만 마셨다.
그런데 1주일 만에 육지 처녀가 돌아왔다. 그녀는 "우도에서 살겠다"며 보따리를 들고 왔다.
부산의 친정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어릴 적부터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아온 맏딸이었다. 실망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나중에 친정아버지가 다녀가고 나서 그녀가 지었다는 시가 이렇다.
'울 아부지는 딸 보러 섬에 와서 노래만 불렀다/ 밤이고 아침이고/ 소주병 차고 바다 보며 노래만 불렀다/ 백마강 달빛 아래 춤추는 댄서의 순정/ 순이는 어데로 가고 검은 상처의 부루스/ 죽어도 낭만적일 울 아부지/ 배타고 나갈 때까지 즐거이 부르다가 갑자기 꺼이꺼이 울었단다/'
Scene 4. 아내 그림 전시회를 열다
시어머니인 강재덕(74) 씨도 처음부터 안 씨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치렁치렁한 옷차림에 예술가 특유의 자유분방한 행동이 좋게 보였을 리 없다. 게다가 나이도 외동아들인 편 씨보다 세 살이나 연상이었다.
말은 안했지만 시어머니 입장에서 마음에 또 걸리는 게 있었던 모양이다. 강 씨의 남편은 만화가였다. 그는 1960년대 후반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라는 만화책을 발간해 국가보안법에 걸렸다. 수배 생활 중에 우도를 찾았고 여기서 강 씨를 만났다. 아들인 편 씨가 태어날 때쯤 뭍에 일이 생겨 섬을 떠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섬에서 태어나 섬사람끼리 결혼하는 게 관례인 이곳은 섬이다. 육지에서 불현듯 찾아와서, 게다가 예술을 한다는 사실이 특히 걱정이 되었을 것 같다.
이런 기우와는 달리 안 씨는 우도에 활력을 가져왔다. 활달한 성격에 이웃 '할망들'하고도 친하고, 시어머니 강 씨하고는 아예 친구같다.
2004년에 제주도에서 전시회가 열렸을 때는 시어머니, 친정 부모님을 비롯해 많은 친구들이 찾아와 축하해주었다. 사촌오빠인 '안철수 연구소'의 안철수 씨도 큰 꽃다발을 보내주었다. 안철수 씨는 출판을 앞두고 추천글을 받으러 갔을 때에도 "정희야 네가 부럽다. 나는 정말 바빠서 죽겠다"고 말했단다.
이제 편 씨의 소망은 하나가 남았다. 작은 화랑을 만들어서 아내의 그림을 더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Scene 5. 잃어버린 꿈 찾아 '초록 우도'로
우도는 이제 외국인에게도 인기가 있는 섬이다. 찾아오는 손님이 는 일은 반길 만하지만 이 때문에 섬 풍경이 달라져 안타깝다.
버스도 늘어나고 여름에는 교통 체증까지 생겼다. 관광객들을 실어 나르려고 더 큰 배가 자주 드나들면서 방파제도 덩달아 길어졌다.
거세진 물살로 모래가 떠내려가면서 산호사 해수욕장도 갈수록 볼품없어지고 있단다. 마구잡이로 들어서는 펜션들도 볼썽사납기는 마찬가지다.
우도에도 지방선거를 알리는 플래카드가 여기저기 걸렸다. 오는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개발을 주장하는 후보자들도 나타났다.
편 씨는 "우도는 보존이 되어야 하고, 저는 안전한 먹을거리를 공급하고 싶다"는 꿈을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안 씨의 그림은 세상살이에 찌든 사람에게 섬 풍경만큼이나 위안과 기쁨을 주고 있었다. 고등학교 재학 때 색소폰을 배운 편 씨는 멋진 연주로 여행자의 텅 빈 마음을 달랜다. 부부의 인심에 끌려 이들 집에서 며칠 신세지고 가는 여행자가 셀 수 없이 많다.
안 씨는 "남들은 내가 여기서 사는 걸 부러워만 한다. 하지만 나는 부러우면 산다"고 말한다. 한 친구는 안 씨에게 "정희야, 나도 미치고 싶은데, 아무튼 네가 살고싶은 대로 살아라"고 글을 남겼다.
사람들은 우도에 왜 갈까. 잃어버린 꿈을 만나러가는 걸 아닐까. '초록우도'는 이 세상의 여행자들이 잠시 쉬어가는 소중한 곳이다.
이곳을 다녀간 사람은 다음 카페 '초록우도(cafe/daum.net/greenisland)' 회원이 돼 추억을 남기고 있다. 안 씨의 책은 아직까지는 이곳을 통해서만 구할 수 있다.
우도=글·사진 박종호 기자
첫댓글 우도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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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꿈을 꾸는 소녀...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