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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의 노래
홍 성 암 (펜문학 2017, 1.2월호)
1.
잠이 깨었을 때 형구는 해변을 강타하는 파도 소리를 들었다. 거센 파도가 메어치는 힘 때문에 지구의 지축마저 부르르 떨리는 듯싶었다. 방문을 열자 거센 바람과 더불어 파도의 포말이 마당까지 날아왔다. 집이 바로 부두가라 거센 바람이 일면 방파제를 넘어온 파도의 포말이 으레 마당까지 흩뿌려지곤 했다. 잔뜩 찌푸린 하늘이었다. 비라도 한 줄기 쏟아질 기세였다. 며칠 전부터 TV에서는 먼 바다에서 풍랑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계속 내보내고 있었다.
형구를 가장 겁내게 하는 것이 이 풍랑의 소식이었다. 어부인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으면서 그는 늘 풍랑과 싸우면서 살아왔다. 그는 대물림 어부다. 한 평의 농토도 갖지 못한 그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영진리의 포구는 그 옆에 있는 주문진 항구에 비하면 아주 작지만 해안선이 매우 길어서 해산물이 풍부했다. 그리고 잡아온 해산물을 주문진읍내로 바로 실어낼 수 있어서 어촌으로서는 편리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영진리의 어촌 사내들은 자연스럽게 어부가 되는 것이다.
형구는 거친 파도소리를 들으며 오늘은 영식이 그의 아내인 순옥의 유해를 바다에 뿌리기 위해서 주문진으로 내려온다는 것을 떠올렸다. 친구들로부터 소식을 접한 이래로 형구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순옥이는 그가 고등학교 때 짝사랑하던 여자였다. 형구뿐 아니라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던 남학생 대부분이 그녀를 짝사랑했다. 그만큼 용모가 빼어나고 심성이 고왔다. 그런 순옥이 죽어서 잿봉지가 되어 내려온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순옥의 남편인 영식은 가난한 어부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돛배인 목선을 타고 근해에서 고기를 잡았다. 집이 해변 바짝 붙어 있었는데 좀 센 파도만 일어도 그냥 무너졌다. 아버지의 수입만으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처지여서 그의 어머니가 물감장수로 나섰다. 시장바닥 노점에다 여러 종류의 물감을 늘어놓고 팔았는데 수입이 별로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교육에 대한 열의가 워낙 강해서 녀석을 대학까지 보냈던 것이다.
녀석은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대기업에 입사하더니 어느 날 청첩장을 돌렸다. 그런데 그 상대가 뜻밖에도 김순옥이었다. 순옥은 이곳 주문진에서 한다하는 집안의 딸이다. 아버지가 은행지점장이고 그 삼촌이 이곳의 국회의원이니 말이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영식의 아내가 되었는지는 도무지 미지수였다. 같은 대학에 진학했다는 풍문이 돌기는 했다. 그러니 대학 커플로 눈이 맞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결혼해서 그런대로 사는 모양이더니 느닷없이 죽음을 알리는 부고가 날아온 것이다.
“등대횟집에서 모이기로 했다. 그리로 와라.”
친구들이 그렇게 알려왔다. 등대횟집은 주문진 북쪽의 소돌포구에 있었다. 소돌이란 지명은 포구 입구에 있는 큰 바위가 마치 소를 조각해 놓은 것 같아서 붙여진 것이다. 그런 포구의 중심에 자리 잡은 등대횟집은 친구인 근섭이 운영했다. 그는 수산고등학교 실습선 선장을 했었는데 은퇴 후에 이곳에다 횟집을 차렸다.
형구가 등대횟집으로 나가니 이미 친구들 여럿이 와 있었다. 친구들은 아침부터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야. 저 새끼 봐라. 이미 뻗을 지경이 다 됐지.”
친구 중의 하나가 방 한쪽에서 졸고 있는 일주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까는 순옥이가 죽었다고 눈물을 질끔거리더니 지금은 졸고 있네.”
남녀공학이던 고등학교 사춘기 때 너도나도 순옥이를 좋아했지만 그 중에도 특별했던 친구가 고일주였다. 그는 주문진에서 제일 큰 정미소집 아들이었다. 돈도 있는 집안이고 그 자신 허우대가 크고 멀쑥해서 여자들에게도 인기가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다른 여자들은 거들떠도 안 보고 오직 순옥이만을 찾았다. 일주는 순옥이 자신을 만나주지 않으니 형구에게 통사정을 했다.
“임마, 친구 좋다는 게 뭐냐? 네가 좀 주선해라.”
형구가 순옥의 막내 동생인 명기의 가정교사로 있었기 때문이다. 형구의 주선으로 그들은 소돌포구의 방파제에서 만났다. 미선이와 함께 나온 순옥은 일주를 똑바로 쳐다보며 쏘아붙였다.
“할 말 있으면 학교에서 하지 왜 이런 곳까지 나오라는 거야.”
“좀 만나주면 안 되냐?”
“무슨 말을 하려는 건데? 지금 해 봐.”
말이 막힌 일주가 주머니에서 불쑥 칼을 꺼냈다. 미군들이 사용하던 잭나이프였다.
“나는 너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어.”
그러더니 자신의 팔뚝을 쳐들고 북 그었다. 피가 튀었다. 당황한 형구가 녀석의 팔을 잡고 헝겊을 찾았다. 그러자 순옥이와 함께 나왔던 미선이가 자신의 속치마를 찢어 주었다. 그걸로 대충 지혈을 하고 병원으로 달렸다. 여러 바늘을 꿰매었다. 급히 병원을 찾았기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팔 병신이 될 뻔 했다고 의사가 말했다. 녀석은 그런 식으로 사고를 쳤다.
친구들은 술잔을 돌리며 영식이 어떻게 순옥이를 꼬셨을까 하는데 화제를 모았다. 그들의 서울 생활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소문만 무성했다.
“고향 까마귀란 말이 있잖어. 둘다 영개구리에다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한 반이거든”
그들이 영개구리란 것은 주영초등학교를 가리키는 말이다. 평소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함께 다닌 고향 친구인데다가 대학까지 함께 다니다 보니 정이 들었을 것이란 말이 설득력이 있었다.
“순옥이 말이다. 그녀석 고약한 술버릇을 알고 결혼했을까?”
모두들 그것을 궁금해 했다. 녀석은 술만 취하면 개차반이었다. 2차 3차는 물론이고 마지막엔 창녀촌까지 가야 직성이 풀렸다. 고향 친구들이 그를 찾아가면 그는 그런 식으로 친구들을 대접했다. 형구도 서울에서 녀석을 만났었다. 원양어선의 계약기간을 마치고 휴가를 나왔을 때였다. 바다에서 고생깨나 했을 거라며 술을 샀다. 그의 방식대로 3차까지 마셔서 고주망태가 되었는데도 굳이 자신의 집까지 이끌었다.
“임마. 너도 순옥이 보고 싶지. 그 집 가정교사까지 했었잖어?”
그건 사실이었다. 녀석의 집은 답십리 언덕받이었다. 형구를 본 순옥도 무척 반가와 했다.
“원양어선을 탔었다며? 힘들었겠다.”
“개소리 말고 술상이나 봐 와.”
영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술상이 나오자 순옥을 옆에 앉게 하고 호통쳤다.
“네 년이 진짜 좋아한 놈은 형구 바로 이놈이지?”
형구가 질색하여 손사래를 쳤다.
“너. 술 취했다 쓸데없는 소리 마라.”
“초치지 말고 들어 봐. 네년 입으로 직접 말해 보란 말이야.”
그러자 순옥이 발끈했다.
“뭘 듣고 싶은데? 술 취한 개하고 사는 꼴 광고 하라고?‘
순옥의 입에서 나오는 독설을 듣는 순간 형구는 문을 박차고 도망치고 말았다. 왠지 그들의 결혼 생활이 별로 원만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그런대로 사는 듯싶었다. 영식은 대기업 중역으로까지 승진했고 순옥이도 아들 하나 딸 하나 낳아서 제대로 키운다는 소문이기도 했다. 이제 부부가 건강하게 해로하는 일만 남았는데 느닷없이 상을 당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래. 사인이 뭐라든?”
“심장마비라지. 잠자고 아침에 보니 죽어 있더라는 거야. 젠장. 요즈음은 부부가 다 각방 아니냐? 자고 나니 안녕이라는 거지.”
그 말에 모두들 말을 잊었다. 모두들 그런 나이었다.
점심때가 되어서야 영식의 일행이 영구차를 앞세우고 등대횟집으로 몰려 왔다. 서울 상가까지 갔었던 친구 십여 명과 함께였다. 모두들 목마른 사람처럼 허겁지겁 소주잔을 기울이고는 서둘러 포구로 나갔다. 근섭이 가두리어장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모터를 장착한 동력선이 있었다. 모두들 그 배에 우르르 올라탔다.
파도가 거칠게 일고 있어서 유해를 굳이 먼 바다까지 가져갈 것 없이 방파제가 있는 포구안의 바다에다 뿌리자는 제안이 많았지만 영식은 굳이 방파제 외곽까지 나가겠다고 우겼다.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해가 뿌려졌던 바로 그 장소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육지에서 수목장을 선호하듯 어부들은 대부분 바다에다 유해를 뿌렸다. 그래서 자신이 죽어도 그렇게 해 달라고 유언했다. 영식은 가난했던 어린시절이 지긋지긋하다고 고향에 거의 발길을 않았었는데 아내의 유해만은 어쩔 수 없었던지 고향 바다로 가져온 것이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혼령이 함께 머물러 있는 곳, 그래서 아내도 이곳에 머물게 하고 훗날 자신도 이곳에 머물게 되리라.
순옥의 유해를 바다에 뿌리고 돌아온 영식은 그동안 술에 골아서 인사불성이었다. 아무래도 이곳에 더 붙들어두기 어렵겠다 싶어서 그가 타고 온 영구차에 억지로 쑤셔 넣었다. 영식이와 그 일행은 한 차례의 회오리바람처럼 몰려왔다가 또 그렇게 떠나갔다.
2.
유영식 일행이 떠나간 뒤의 등대횟집은 갑자기 빈집처럼 썰렁해졌다. 영구차를 떠나보내고 돌아온 근섭이 종업원을 불렀다.
“여기 술상 새로 차려라.”
그러더니 방구석에서 졸고 있는 일주를 술상 앞으로 끌어냈다.
“일주야. 어차피 모두들 죽는 게 아니냐? 우리는 술이나 더 마시자.‘
“개새끼가 말이야. 개선장군처럼 으쓱대는 꼴 봤지?”
일주는 술상 앞으로 다가앉으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무튼 우리 모두가 욕심내던 여자를 통째로 차지했으니 개선장군이 맞긴 하네.”
그러더니 덧붙였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냐? 죽으면 그만인데. 모두가 일장춘몽인거라.”
인생이 일장춘몽이라는 격언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지금 모두의 마음에 절실히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사실 순옥이는 널 그리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었던 것 같았는데 말야.”
근섭이는 순옥이와 담을 함께 하고 있는 이웃집이었다.
“네가 워낙 개판을 치니 어쩔 수 없었지. 칼로 팔뚝을 자르지 않나. 걸핏하면 담을 타넘지를 않나.”
일주는 그 말에는 대꾸도 없이 술잔의 술을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그렇게 몇 잔 거푸 마시자 깨던 술이 다시 오르는지 눈두덩이 게슴츠레 붉어 왔다. 순옥에 대한 그의 열정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여북하면 늙도록 장가조차 가지 않았을까? 그런 그의 마음을 다독거려 준분은 고3 때의 담임선생이었다. 한 번은 담임선생이 교무실로 형구를 불렀다.
“형구야, 너 대학 갈 수 있냐?”
“아니요.”
형구는 어려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서 집안 살림을 꾸리는 처지였다.
“그래서인데 네 점수를 좀 빌리자.”
형구는 처음엔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담임선생이 자세히 설명했다. 일주를 그냥 두면 폐인이 되기가 쉬우니 대학으로 보내자는 것이었다. 부산 같은 큰 곳에 가서 여러 여자들을 만나게 되면 생각도 바뀔 것이라고 했다. 문제는 모자라는 점수였다. 당시는 대학입시에 동계 특전이 있어서 수산고등학교에서 수산대학으로 진학하게 될 경우 입학시험 없이 고등학교 성적만으로도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자면 반에서 5등 안에 들어야 하는데 일주의 성적이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형구의 성적을 빌리자는 것이었다. 좀 황당한 제안이긴 했지만 어차피 대학 진학할 형편도 못되니 손해 보는 일도 아니었다. 당시엔 선생님과 학생 사이가 가까운 친척 같은 분위기였고 그래서 담임선생도 그런 제안을 한 것 같았다. 그런 담임선생의 배려로 일주는 부산수산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영식이가 순옥이 하고 결혼할 때 일주는 어디에 있었냐?”
근섭이 그렇게 물었다. 일주가 묵묵부답이니 형구가 대신 날짜를 곱아보았다.
“그 때가 70년대 초반이니 원양어선에 승선했을 때인 것 같군.”
일주는 대학진학 때 형구의 신세를 진 바가 있어서 이따금씩 편지로 자신의 근황을 알려 왔었다. 그리고 순옥의 소식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 했다. 때로는 순옥에게 보내는 편지를 형구에게 부쳐오기도 했다. 그래서 형구는 일주에 대해서 비교적 많이 아는 편이었다.
일주가 수산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승선한 원양어선은 이탈리아에서 건조된 배였다. 원양어선 중에 가장 설비가 잘 되었다는 평판이 있었다. 일주는 당시에는 드물게 수산대학을 졸업하고 항해사 자격증이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항해사로 취직할 수 있었다. 몇 년 후에 그가 선장으로 발탁되었을 때는 신문에서마저 떠들썩했다. 가장 나이어린 원양어선 선장이라고 해서였다.
그는 처음 배의 선장이 되었을 때 많은 시련과 싸워야 했다. 우선 선원들이 문제였다. 당시는 원양어업의 초창기여서 선원들 대부분이 시험에 의해 공채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승선 경험이 전혀 없으면서도 서류를 위조하여 채용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에 배 멀미를 견디지 못했다. 부산항을 떠난 지 일주일밖에 안되어 십여 명이 늘어졌다. 배 멀미 때문에 죽으면 죽었지 더 이상 못 타겠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선원들은 걸핏하면 선장에게 대어들었다. 나이 든 갑판장. 항해사. 기관장 등이 교묘하게 그들을 조종했다. 나이 어리고 경험이 적은 선장을 얕보고 대하는 것이다.
한 번은 선상반란을 겪기고 했다. 부산항을 떠난 지 2주일 째 되는 날이었다. 나이 든 일항사가 몇 명의 선원들과 작당을 해서 그의 방으로 들어왔다. 몇 마디 고성이 오가는 사이에 그는 꼼짝 없이 잡힌 몸이 되고 말았다. 그는 많은 선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스트에 묶여졌다. 새로 선장의 권한을 탈취한 일항사는 곧장 배를 귀환 조처했다. 배는 방향을 바꾸어 가던 길을 되짚어 오기 시작했다. 그 때의 심정을 일주는 형구에게 편지로 알려왔다.
“그렇게 비참할 수 없었다. 혀를 물고 죽고 싶었다.”
하루 종일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분노였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러나 속수무책이었다. 모두들 깊이 잠든 새벽녘이었다. 누군가가 살금살금 다가왔다. 그는 주머니에 감추어 온 단도로 그의 묶인 밧줄을 끊었다. 그가 3항사로 훈련시키고 있던 고향의 후배였다. 두 사람은 발소리를 죽여 선장실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아직 잠깨지 않은 일항사를 잡아다가 그 자신이 묶였던 마스트에 묶었다.
이때부터 일주는 그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때로는 욕설로, 때로는 주먹으로, 때로는 각목이나 칼 같은 흉기를 동원하여 상대방과 맞서고, 대결하고, 싸워야 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선장이 그 자신의 배에서 권위를 잃으면 그는 이미 선장이 아니다. 선장은 그 배에서 절대자여야 한다. 왕중 왕이다. 그가 일급 선장으로 성장하기까지에는 그만큼 많은 시련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매우 불우한 선장이었다. 뜻하지 않은 사고 때문이었다. 아프리카 더반항을 떠난 지 겨우 하루만의 일이었다. 금성호는 해안지대의 암반을 피해 육지가 안보일 정도로 곧장 멀리 나아갔다. 근해를 완전히 벗어난 충분한 거리에 달했다고 판단되었을 때 일주는 배의 진로를 수정했다. 아프리카의 남단 케이프타운을 돌아 대서양으로 빠질 생각이었다. 지금까지는 주로 인도양에서 맴돌았으므로 오랜만에 새로운 모험을 해 볼 생각이었다. 배는 해안선을 따라 비스듬히 꺾으며 남진했다.
한 밤중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04시 08분이었다. 갑자기 꽈당 하는 벼락치는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배가 기우뚱 기울어지는 것이었다. 암초로구나. 그는 순간적으로 그렇게 판단했다. 그는 갑판으로 뛰어 올라갔다.
“암초인가 봅니다.”
선원들이 웅성웅성 모여 들었다.
“퇴선 명령을 내릴까요?”
일항사가 그렇게 물었다. 원양에서 암초와의 조우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갈팡잘팡하는 선원들에 둘러싸인 선장은 잔뜩 상을 찌푸린 채 똑바로 앞만을 응시했다. 시계(視界)가 제로 상태였다. 한두 번도 아닌 항해인데 암초라니. 순간 어떤 예감이 그의 뇌리에 스쳤다. 그는 목청을 높여 조종간을 잡았던 2항사를 불렀다.
“2항사 몇 도로 꺾었나?”
“255도입니다.”
“뭐얏!”
순간적으로 주먹이 날아갔다. 불의의 일격에 2항사는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일항사. 서치라이트를 밝혀라.”
그가 명령을 내리자 일항사가 조타실로 뛰어갔다. 곧 서치라이트가 빨랫줄처럼 뻗어나갔다. 어둠을 쪼개며 불빛이 회전을 하자 바위들의 무리와 해안선, 그리고 야자숲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원양에 떠 있다고 믿었던 배가 육지를 들이받았으니 말이다. 조타실의 소음 때문에 명령이 잘못 전달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선장은 해도에 금까지 그어가며 항로를 표시했던 것이다.
이런 유례없는 재난으로 입은 정신적 타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현지 경찰관의 심문과 비행기로 급거 날아온 영국 로이드보험회사 조사관의 심문. 그리고 본사 현지 책임관의 문책. 일주는 미칠 것 같았다. 그들은 사건의 고의성 여부를 직접적으로 따졌다. 225도와 255도의 차이는 고도의 지능적인 고의성이 개재되어 있다고 믿는 듯했다. 그들은 60만 불이나 되는 보험금을 노린 계획적인 행동으로 몰고 가려고 했다. 그는 심한 굴욕을 느꼈다. 그는 속으로 주장했다. 너희는 뱃놈이 아니니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뱃놈이라면 누구나 안다. 세상의 어떤 선장도 그런 비열한 짓은 하지 않는다고.
그럼에도 그는 혐의를 완전히 벗지 못한 채 본국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인천에 있는 해양심판소에서 또 한 차례의 취조를 받았다. 역시 문제는 고의성 여부였다. 일단 의심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의심스럽기 마련이다. 항구를 떠나 출항하던 배가 육지의 바위를 들이받았다는 것은 누구도 믿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니 무슨 변명도 통하지 않았다. 그는 오랜 법정 투쟁 끝에 무혐의로 풀려나긴 했지만 선장으로서의 그의 생명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고선장, 이제는 모두 잊어라 순옥이도 잊고 금성호도 잊어라.”
근섭이 다시 술잔을 돌렸다.
“이 세상 모두가 뜬 구름이라고 하더라. 부처님이 그랬다던가? 법정스님이 그랬다던가?”
근섭이 출입문 쪽 벽에 기대어 졸고 있던 승업이를 그제야 발견했는지 불쑥 물었다.
“승업이도 순옥일 좋아했었냐?”
승업이 말귀를 못 알아듣고 멀뚱거리자 다시 물었다.
“너도 순옥이 좋아 했었느냐고?”
“좋아하긴? 오르지도 못할 나무인데.”
“허허, 젠장.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네.”
근섭이는 승업에게 술잔을 돌렸다. 승업은 오복호에서 갑판장을 지낸 적이 있었다. 녀석도 불우한 선원이었다. 인천에서 조기잡이 배를 탔었는데 갑판장 일을 했다. 조기잡이는 주로 연평도 근해에서 이루어졌는데 북방한계선을 넘나들며 조업을 하다가 풍랑을 만나는 바람에 북쪽 경비정에 붙들리고 말았다. 그렇게 북한에 끌려갔다가 1년이 넘어서야 돌아왔다.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통 말이 없었다.
모두들 궁금하게 여겨 당시의 상황을 물어도 그냥 묵묵부답이었다. 누가 보아도 바보천치가 되어 있었다. 북쪽에서는 북쪽대로 1년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온갖 고초를 겪었고 남한으로 돌아와서는 또 관계 당국에 불려 다니며 몇 달 동안 고초를 당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심한 고통을 당한 것은 그의 고향이 금강산 부근의 장전항이어서 였다. 집안이 갑부였던 관계로 그의 아버지가 북쪽에서 반동부자로 몰려서 처형당했다. 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인민재판이 열리고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버지가 죽창으로 찔려서 돌아갔던 것이다. 그런 놀라운 일을 겪게 되고 그 길로 이웃들의 도움을 받아 배를 타고 남쪽으로 피신했던 것이다. 그러니 북쪽에서는 반동분자라고 해서 고통을 당했고 남쪽에서는 아직 북쪽에 친척들이 많이 남아 있는 처지여서 연좌제로 고통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런 고통 끝에 그가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는 거의 폐인이 되어 있었다. 아예 입을 열지 않았고 술만 마시면 깜박깜박 졸다가 소스라쳐 놀라서 달아나곤 했다. 모임에는 아예 나오지 않았는데 근래에는 가끔씩 얼굴을 비치었다. 그렇게 따져보면 어부로 출세한 친구가 별로 없었다.
3.
형구는 등대횟집을 나왔다. 소주를 몇 병이나 비운 터여서 머리끝까지 취기가 올랐다. 술도 깰 겸 그는 영진리로 이르는 해안도로를 터벅터벅 걸었다. 주문진에서 영진리까지는 십리가 채 되지 않았다. 주문진 읍내에서 영진리로 이르는 중간쯤의 솔숲에 그가 다니던 수산고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었다. 형구는 자신도 몰래 예전의 학교 교정을 한 바퀴 돌고 있었다. 군계일학으로 남보다 뚜렷했던 순옥이가 더욱 생각났다. 순옥이를 만나게 해 달라고 일주가 목을 맬 때였다.
“죽은 목숨 살리는 셈치고 한 번 더 만나주려므나.”
그렇게 달래자 순옥이가 똑 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넌 나한테 관심이 없니?”
그 말에 형구는 당황해서 얼굴을 붉혔다. 승업이가 말한 것처럼 그에게 그녀는 ‘오르지 못할 나무’ 였다.
“그러니 두 번 다시 그러 말 한지 마.”
그렇게 순옥이는 단호했다.
그의 모교인 예전의 수산고등학교는 단조한 일자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도립대학이 되어 제법 캠퍼스의 분위기를 풍겼다. 그 캠퍼스의 중간 광장쯤에 몇 개의 기념비를 볼 수 있었다. 모교 출신으로 원양어선을 타다 순직한, 그러니 원양어업을 개척한 선구자들에 대한 공로를 기념하는 것이다. 형구는 <최병순개척비> 앞에 한참동안 서 있었다. 최병순은 주문진읍 교황리 사람이다. 그는 이곳 수산고등학교 어로과 출신으로 형구에게는 3년 선배였다. 비석에는 『바다의 개척자』라는 표제 밑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 있었다.
그대는 한국이 낳은 늠름한 바다의 개척자./ 조국을 떠나 멀리 양양한 바다 / 푸른 파도를 헤치며 / 원양어로 작업을 위해 / 용감히 싸운 산업전사였다. / 어로작업 중 불의의 사고로 /이역만리 낯선 타국에서 / 꽃나이 스물여섯 살로 세상을 떠난 / 그대의 넋을 위로하고 명복을 빌며 / 줄기찬 그대의 개척정신을 이 땅에 / 길이 전하고 기념하고자 / 여기에 그대의 개척비를 세우노라 /
이 개척비는 한국수산개발공사에서 세운 것인데 우리나라 최초의 참치잡이 원양어선인 지남호에 승선해서 조업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순직한 것을 기념한 것이다. 지남호는 원래는 미국수산시험장의 연구용으로 쓰던 것인데 원양어업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당시 이승만대통령의 적극적 후원으로 도입하게 된 배였다. 당시 수산고등학교 출신들은 이 지남호에 승선하는 것이 가장 큰 꿈이었다. 그러나 워낙 지원자들이 많아 선원으로 채용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 경쟁을 뚫고 최병순이 주문진수산고등학교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채용되었던 것이다.
최병순이 탄 지남호는 1968년 1월 남태평의 사모아 근해를 목표지로 정하고 부산항을 출항했다. 일본 시모노세끼항에 정박해서 8개월분의 쌀과 부식, 기름 등을 실었다. 남태평양까지 가는 데만도 1달 정도 걸린다. 지남호에 선원으로 승선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 지나치게 흥분했던 탓일까? 병순은 싱가폴 부근 근해에서 시험조업 중 투승했던 그물을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그물에 휘말렸다. 순간 그물에 띄워놓은 부표에 머리를 부딪쳤다. 그 충격으로 졸도했는데 끝내 깨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무튼 원양어선의 목적지인 남태평양의 사모아 근해까지 가보지도 못하고 좌절하게 된 것이다. 그게 너무나 안타까워서 모교의 교정에 개척비란 이름으로 기념비를 남기게 된 배경이었다.
<최병순개척비> 옆에는 강원도 교육감의 이름으로 세워진 <위령비>가 하나 더 있었다. 거기에는 이종호, 김철광, 김옥준의 이름이 씌어져 있었다. 그들 모두가 형구의 2,3년 후배들이었다.
여기 바다의 삼용사 / 고이 잠들었노라 / 저 억센 파도와 싸우다 / 젊음을 바친 /
그대들의 높은 개척정신을 / 길이 후배에게 전하고자 / 비를 세워 명복을 비노라
이들도 남태평양에서 참치잡이 조업을 하던 원양어선에 승선했다가 사고를 당한 사람들이다. 형구에게는 낯익은 후배들이었다. 사고를 당한 때가 1972년 12월이었으니 이 시기에는 형구도 원양어선을 타고 있을 때였다.
형구가 타고 있던 원양어선은 월미호였다. 선장이 영진리 바로 이웃집에 살던 박용태 선배였다. 박용태는 부산 수산대학교 어로과로 진학해서 본격적으로 항해사의 훈련을 받았다. 당시 부산대학에는 1957년에 도입한 137톤 크기의 목선인 흥양호가 있었는데 원양어업계의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실습선이었다. 박용태는 여기서 착실히 훈련을 쌓아서 항해사 자격증을 땄다. 그리고 원양어선을 탔다. 처음에는 항해사 실습생인 3항사란 이름으로 시작하여 2항사를 거쳐 선장인 1항사 자격까지 차례대로 습득했다.
드디어 박용태에게 기회가 왔다. 원양어선인 지남호의 조업 성공으로 미국에서 12척의 새로운 원양어선을 도입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 중의 한 배에 선장으로 채용된 것이다. 박용태선장은 회사에서 채용한 선원 외에 자신의 고향 후배들에게도 기회를 주고 싶어 했다. 그래서 형구도 선원으로 승선하게 된 것이다. 남편 없이 홀로의 몸으로 형구를 키운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지만 당시의 분위기가 너도나도 원양어선을 타는 때여서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형구의 뜻을 굽힐 수는 없었다. 더구나 선장이 바로 이웃집에 살던 박용태 형이었으니 어머니에게는 그나마도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탄 원양어선 월미호는 6507크라스의 독항선이다. 이 배의 만선은 400톤 정도였다. 그들은 남태평양의 사모아 근처에서 주로 조업을 했다. 때로는 대서양 쪽으로 건너가기도 했는데 그럴 때는 스페인의 라스파르마스항에 기항하기도 했다. 주로 참치를 잡았다. 알바코, 비가이, 옐로우핀, 마린, 스키프잭 등이었다. 이 배의 만선이 되자면 대체로 6개월 동안 바다에 떠 있게 된다. 3년에 한번쯤 겨우 고국으로 돌아오고 그것도 선주와 재계약이 되면 곧장 다시 출국을 해야 했다.
서너 번의 계약기간을 무사히 채웠다. 그러나 재난은 항상 예기치 못한 순간에 다가오기 마련이다. 사모아 근해에서였다. 그들은 막 낚싯줄의 투척을 끝낸 참이었다. 40km에 달하는 낚싯줄에는 냉동된 싱싱한 꽁치들이 미끼로 매달려 있었다. 내일이나 모래쯤 만선이 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만선이 되면 으레 한판 잔치를 벌였다. 술통의 술을 모두 비우고 푹 쉰 다음 스페인의 라스파라마스항으로 상륙하게 된다. 그러면 두둑한 상륙수당이 지급되고 선원들은 그 돈으로 술집으로 찾아들어가는 것이다. 선장이나 선원들이 그런 기대에 부풀어 있을 때였다. 느닷없이 무선국장으로부터 긴급 보고가 올라왔다.
“허리케인입니다.”
무선국장의 보고에 모두들 놀라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허리케인이 예상 진로를 바꾸어 우리 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물살이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바다에는 파도꽃이 하얗게 일면서 선체가 몹시 흔들렸다.
“낚싯줄은 어떻게 할까요?‘
일항사 월준이 선장에게 물었다. 박용태선장은 5m 간격으로 이어지는 부렌치 라인이 묵직하게 처져 있는 것으로 보아 참치가 제법 많이 물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욕심 같아서는 낚싯줄을 걷고 싶었다. 라이훌라로 낚시를 감기 시작하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니었다. 대망의 만선이 시간문제였다. 그런 선장의 마음을 짐작했는지 무선국장이 다시 재촉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허리케인이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원양의 넓은 바다에는 항상 바람의 소용돌이가 있기 마련이었다. 문제는 그 바람이 어떻게 엄습하느냐에 달렸다. 박용태선장은 결국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마침내 명령했다.
“라디오 부이를 설치하라.”
낚시줄 거두는 것을 단념한 것이다. 낚시줄에 일정한 간격으로 라디오 부이를 설치한 후에 일단 피신을 해야 했다. 라디오 부이는 낚시줄에 전파를 발송하는 부표를 말한다. 허리케인이 끝난 후에 그 전파를 좇아 다시 낚시줄을 인양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리케인이 끝난 후에 유실된 낚시줄을 회수할 확률은 매우 적었다. 그러나 그런 장치를 해두지 않을 수도 없었다.
갑판에서는 선원들이 바쁘게 뛰어다녔다. 갑판장의 지휘 아래 선원들은 배의 모든 기물들을 단단히 졸라맸다. 폭우를 동반한 폭풍이 몰아치면 배의 모든 기물들이 제멋대로 굴러다니며 사람을 다치게 하기 때문이었다. 갑판뿐 아니라 선실안의 작은 물건이라도 단단히 동여매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갑판장은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목청껏 소리치며 선원들을 독려했다. 무선국장의 설명대로라면 허리케인의 중심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해도에는 대피할 항구가 하나도 없었다. 선장은 각 선실을 돌며 모든 상태를 점검했다. 노련한 갑판장의 지휘대로 허리케인을 맞이할 준비가 제대로 완료되어 있었다.
배는 시속 13노트.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어떻게든 허리케인의 중심부에서 멀어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남반구에서 선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허리케인이었다. 파도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뱃전을 후려쳤다. 물살이 빠르게 뒤로 물러갔다. 광활한 바다가 잔뜩 찌푸린 하늘에 짓눌려 먹물처럼 까맸다.
시간이 자나면서 파도는 더욱 거세어져서 드디어 파고 20m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빗발이 조타실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파도의 포말들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갑판으로 튀어 올랐다. 박용태선장은 키를 잡고 방향을 조정하면서 밀려오는 파도를 노려보았다. 바다가 광란했다. 천지개벽 이전의 어떤 생물같이 거센 숨결로 배를 삼키려 했다. 이빨을 드러내어 으르렁거리는 물결. 파랗게 불을 켠 혓바닥. 바다는 눈에 불을 켠 거대한 파충류였다.
파도는 조타실의 창문을 절벽처럼 막아섰다. 꼿꼿이 일어선 물결의 절벽이 와르르 무너져 왔다. 그것은 거대한 산이었다. 태백산맥의 준령들이 일시에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배는 하늘 높이 치솟았다가 깊숙한 벼랑으로 곤두박질했다. 배는 파도를 뚫을 때마다 잠수함이 되어 물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다 파도를 빠져나오는 순간 배의 양현에 있는 현창이 열리며 배에 실린 수백 톤의 바닷물이 폭포수처럼 빠져나갔다.
파도가 배의 위치를 제멋대로 흔들어 놓았다. 다음 파도가 다시 밀려올 때가지 배의 위치를 바로잡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을 보침(補針)이라 한다. 배는 항상 파도를 정면으로 하여 5도에서 15도 정도로 비껴가며 운행해야 한다. 그것이 가장 안전한 각도이기 때문이다. 박용태선장은 파도를 향하여 오른 쪽으로 5도 비껴서 뚫고 다음번엔 왼쪽으로 5도 비껴 뚫는 식으로 배를 몰았다. 파도의 능선들이 계속 밀려 왔다. 하늘이 흔들리고 땅이 흔들렸다. 이때의 월미호는 하나의 나뭇잎에 지나지 않았다.
파고 25m. 바다가 곧추섰다가 무너져 내렸다. 배가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배는 물속에서 방향을 잃고 유영(遊泳)했다. 그러다가 기적처럼 선체가 물위로 떠올랐다. 현창이 열리며 쏟기는 물결소리가 요란했다. 배의 방향이 휙 뒤틀려 있었다. 선장은 재빨리 보침(補針)을 통하여 배의 방향을 바로잡았다. 또 하나의 파도가 절벽처럼 곧추서서 다가오고 있었다.
“선장님. 선장님”
다급한 목소리가 인터폰을 통해서 들려왔다.
“선장님. 어디 계십니까?”
“뭐냐? 얘기하라. 선장실에 있다.”
“기관장입니다. 물이 새고 있습니다.”
“뭐얏. 자세히 말하라.”
“기관실 부분입니다.”
박용태선장은 배의 조정간을 일항사에게 맡기고 곧바로 기관실 쪽으로 뛰어갔다.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선장실로 다시 돌아온 박용태선장은 마이크를 잡고 퇴선 명령을 내렸다.
“모든 선원들은 지금 즉시 퇴선한다. 구명복 착용을 확인하고 구명대를 띠워라.”
“평소 훈련했던 대로 하라. 가급적 같은 조끼리 행동하라.”
그 명령에 따라 구명복을 착용한 선원들이 구명대를 띠우고 바다로 뛰어내렸다. 순식간에 바다의 여기저기에 구명대에 매달린 선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파도가 그들을 제멋대로 끌고 다녔다. 구명대에 매달린 사람들이 파도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팔과 다리를 비틀어 균형을 잡으려는 모습도 보였다.
“구조 요청은 되었나?”
선장은 마침 다가온 무선국장을 향해서 물었다.
“기지 회사와 가까운 항구에 모두 전달했습니다.”
“결과는?”
“날씨 때문에 당장은 불가능하다는 회신입니다.”
박용태선장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충분히 예상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선국장도 바다로 뛰어내렸다. 이제 배에 남은 사람은 조타실에 있는 일항사를 제외하고 형구와 갑판장만 있었다. 선장은 그의 뒤에 우물거리고 있는 형구를 보자 와락 끌어안았다.
“형구야. 너도 나처럼 해병대 출신이지?”
“그럼요.”
“우리 해병대답게 군가나 한번 같이 불러 볼까?”
박용태선장이 형구의 어깨를 감싸 안자 그들은 얼결에 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전투와 전투 속에 맺어진 전우야 / 산봉우리에 해 뜨고 해가 질 적에
부모형제 너를 믿고 / 단잠을 이룬다.
박용태선장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고향과 후배의 어머니 얼굴이 새삼 떠올랐기 때문인지 모른다. 노래가 끝나자 선장은 두 사람을 즉시 뛰어내리게 했다.
“선장님은요?”
형구가 외치듯 물었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형구는 갑판장과 더불어 무섭게 소용돌이치는 바다로 뛰어내렸다. 파도에 휩쓸리면서 문득 갑판을 올려다보니 선장은 난간을 잡고 몸을 지탱하며 파도에 떠도는 선원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원들이 그런 선장을 쳐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선장님 어서 퇴선 하십시오. 퇴선 하십시오.”
선원들의 아우성이 울부짖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선장은 말없이 그들을 응시하다가 끝내 쫓기듯 갑판에서 사라졌다. 아마도 곧바로 조타실로 들어가 보침을 계속하려는 모양이었다. 월미호는 금방이라도 침몰할 듯 기우뚱거리며 파도를 뚫고 있었다.
형구는 갑판장과 한조가 되어 구명대에 매달렸었다. 구명대 하나에 대여섯 명의 선원들이 매달려 있었다. 파도는 하늘로 치솟고 바람은 미친 듯이 불어왔다. 허기와 졸음도 견디기 어려웠다. 깜박 졸다가 구명대를 놓쳐 버리며 그것으로 끝이었다. 때때로 상어의 습격을 받았다. 악. 하는 비명과 더불어 옆의 동료가 갑자기 물속으로 사라졌다. 상어의 이빨에 물려간 것이다. 바다에 떠 있는 인간이란 상어에겐 더 할 수 없이 좋은 미끼였다. 졸음과 허기와 목마름 그리고 상어의 위협에 떨면서 그러다 끝내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가 구조되었을 때,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세 명이었다. 스물여덟 명의 선원 중에 단지 세 명.
바다에서 사람의 목숨이란 결코 자신의 것일 수 없었다. 그래서 배에서는 걸핏하면 제사를 지낸다. 출항할 때는 출항제. 입학할 때엔 입항제. 적도를 지날 때는 적도제를 지낸다. 선장과 사관이 목욕재계하고 돼지머리와 몇 종류의 과일이 곁들인 젯상을 마련해서는 정성껏 제사를 올리는 것이다. 그래서 어창에는 제사지낼 돼지머리가 늘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정성은 그저 마음의 위안을 위해서일 뿐이었다. 사고는 언제 어디서고 예고 없이 그들을 엄습하곤 했던 것이다.
형구는 교정의 어딘가에 세워졌을 박용태선장의 <추모비>를 찾아 헤매었다. 수산고등학교 동창회에서 세운 것이다. 그러나 근래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캠퍼스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추모비를 어디로 옮겼는지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4
형구는 놀라서 헤엄쳐 갔다. 순옥이가 파도에 휩쓸리고 있어서였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헤엄쳐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저러다 큰일 나겠는데. 형구는 전력을 다 해서 헤엄치지만 마냥 그 자리였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안 되는데. 그렇게 안타깝게 허우적거리다가 의식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꿈이었다. 형구는 휴- 한숨을 쉬었다. 생시 때처럼 그 기억이 너무나 선명했다.
형구가 가정교사가 되어 가르치고 있던 명기가 해수욕을 가자고 졸랐다. 모처럼 누나도 방학이 되어 서울에서 내려 왔으니 하루쯤 쉬고 싶다고 했다. 순옥이도 그러자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수산고등학교가 있는 곳의 해변으로 나왔다. 그곳엔 키 넘는 솔숲이 있어서 그늘이 좋았다. 주문진 해수욕장과는 반대 방향이어서 비교적 한적했다. 거기에다 바다가 얕고 바다속 모랫벌엔 조개가 많았다. 대복이라는 이름의 조개였다.
명기가 졸라서 형구는 열심히 조개를 잡았다. 바닷물이 가슴께쯤 되는 바다에서 발로 모래를 파헤치면 조개가 밟혔다. 그러면 물속으로 잠수해서 그 조개를 움키는 것이다. 한참 열심히 조개를 잡고 있는데 명기가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형. 저기 누나 좀 봐. 이상하지?”
형구는 그들과 제법 떨어진 곳에서 헤엄치고 있던 순옥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순옥이 파도에 휩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 모두가 바닷가 출신이라 수영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익숙치 않은 곳의 바다에서는 자칫 화를 불렀다. 바다도 강물처럼 어느 한 방향으로 흐르기도 하고 때에 따라 밀물과 썰물이 있어서 파도가 모래를 밀어 올리기도 하고 긁어 가기도 했다. 형구가 놀라서 헤엄쳐 갔을 때 순옥은 이미 탈진된 상태였다.
“순옥아. 배영을 해. 배영을.”
순옥이 몸을 뒤채어 뒤로 누웠다.
“팔과 다리를 벌리고. 힘을 빼고 하늘을 쳐다 봐.”
수산고등학교는 여름 방학 때면 일주일 동안 해양훈련이란 이름으로 수영을 가르쳤다. 그래서 모두들 웬만한 수영의 기본동작을 알고 있었다. 순옥은 형구가 시키는 대로 힘을 빼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형구는 순옥을 육지 쪽으로 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물살이 썰물 때처럼 먼 바다 쪽으로 나가고 있었고 조류도 남쪽으로 강줄기를 이루며 흐르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해변으로 곧장 돌아올 수는 없었다. 형구는 물줄기가 흐르는 방향으로 순옥을 계속 밀었다. 힘든 사투 끝에 해변에 이르렀을 때는 영진리 앞바다였다.
해변의 모래톱에 이르자 두 사람은 죽은 듯이 늘어졌다. 지쳐서 몸을 운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형구의 귓바퀴에 순옥의 입김이 다가왔다.
“형구야. 넌 내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야. 날 네 각시 삼아주지 않을래?”
형구는 놀라서 눈을 떴다. 순부시게 아름다운 여자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침 석양의 맑은 빛살이 강열해서 더 이상 눈을 뜰 수 없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그녀는 그러나 ‘오르지 못할 나무’ 였다.
형구의 마음 속 깊이 감추어 두었던 기억 하나가 꿈속으로 비집고 들어와 온통 그를 뒤흔들었다. 아직 캄캄한 밤이었다. 파도소리가 더욱 거칠게 들려 왔다. 이제 더 이상 잠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형구는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문밖으로 나섰다. 빗방울이 선뜻선뜻 했다. 부두로 나가니 로푸줄로 묶인 배들이 서로 부딪치며 찌그럭대는 소리가 요란했다. 방파제가 갖추어진 포구안으로 파도가 산더미처럼 무너져 내렸다.
오랜 기억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의 일이다. 파도는 무섭게 으르렁거리는데 출어한 대부분의 배들이 돌아오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부두로 몰려나와 방파제를 바라보았다. 우비를 갖추어 입었지만 빗줄기가 사정없이 몸속을 파고들었다. 밤이 깊어서야 방파제 너머로 가물가물 불빛이 흔들렸다. 마을의 배들이 하나 둘 돌아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부두에 늘어선 사람들이 남포불을 흔들어 신호를 보냈다. 가물가물 다가오는 배에서도 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을쪽의 신호를 알아보았다는 응답이었다. 배가 방파제를 이루고 있는 바위무리에 가까워질수록 긴장은 점점 더 고조되었다. 마을 쪽에서 장정들이 입나팔을 만들어 외쳤다. 거- 뉘 배고. 거- 뉘 배고. 배에서도 남폿불을 휘두르며 무엇이라 응답했지만 말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비바람 소리에다 파도소리가 벼락치듯 해서였다.
그런 중에도 누군가가 소리쳤다. 용복호라고 했제. 분명 용복호라고 했어. 그럼 규범이 배다. 선장이 규범이란 뜻이다. 배는 높은 파도의 꼭지점을 타고 방파제 안쪽으로 파도에 휩쓸려 와락 달려들며 물속으로 내리 꽂혔다.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모두들 숨을 죽였다. 물속으로 처박혔던 배가 불쑥 솟구쳐 오르며 포구안으로 휩쓸려 들어왔다. 와- 함성이 일었다. 살았다. 살았어. 용복호의 가족들이 서로 얼싸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는 중에 다른 한 척의 배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불빛이 파도의 능선에 갖혀 사라졌다가 다시 솟구쳐 오르기를 반복했다. 부두는 다시 팽팽한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번의 배는 포구안으로 휩쓸려 들어오면서 물속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머리를 쳐들지 못했다. 부두에는 가족들의 통곡소리가 넘쳤다. 그날 영진리의 배 중에서 두 척이나 난파당했고 형구도 그 때 아버지를 잃었다.
영진리의 어부들은 대부분 그런 식의 아픈 과거를 지니고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딛고 그 들은 어부가 되어 살아간다. 젊어서는 근해어선이나 원양어선에 취업했었다. 그러다 나이가 들어서는 가두리 어장이나 양식장 같은 것으로 생계를 꾸렸다. 형구는 머구리배 한 척을 갖고 있었다. 때때로 그 자신 잠수복을 입고 물속으로 들어가 전복이며 해삼 등을 채취했다.
그런데 이제 한 가지 일이 더 늘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혼령이 휘돌고 있는 영진리 앞바다에 가끔씩 순옥의 혼백도 헤엄쳐 올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잠수경을 쓰고 물속을 누빌 때 순옥의 혼백을 찾아 헤맬 것만 같은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첫댓글 오랜만에 단편소설 한 편을 읽었습니다.
그 어느 분을 떠올리게 하는 영식과 순옥, 가슴이 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