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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출 산
@ 해발 809m(천황봉)
@ 위치 : 전남 영암군과 강진군
지리, 내장, 천관, 변산과 함께 호남 5대명산 중의 하나로 꼽히는 기암괴석의 전시장같은 월출산은 바위가 경관의 핵심을 이룬다.
그러나 월출산은 다른 산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바위의 산이다.
월출산 사자봉은 북한산 인수봉에 비유되고, 구정봉은 속리산 문장대, 불티재능선에서 바라본 암릉은 설악의 용아릉에 비교할 수 있겠다.
또한 월출산 이외의 다른 산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기상천외한 기암 풍치가 사방에 널려있다.
작은 덩치에도 불구하고 바위로 표현할 수 있는 대부분의 경관을 모두 갖춘 바위전시장이 바로 월출산이다.
1988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산봉으로는 정상인 천황봉을 비롯, 구정봉, 도갑산(376), 주지봉(491), 사자봉, 매봉, 문필봉(월각산), 형제봉 등이 있다.
형제봉은 바람골 우측에 솟은 두개의 봉우리를 말한다.
바람골 왼쪽으로 올라가면 시루봉과 연실봉이 있고, 암봉 사이로 관목과 너덜이 섞인 룬제가 있다.
이곳을 올라가면(암벽장비필수) 고도 200m가 넘는 제1매봉이 솟아있다.
월출산은 바닷가 평지에서 불쑥 솟구친 산이다.
백두대간의 지맥에 그 연을 대고 있기는 하지만 사람 눈에는 평지에서 돌올한 암봉으로 보인다.
영암을 향해 가다보면 월출산 북쪽지역은 넓고 평평한 벌판지대다.
이 영암벌 서부지역은 과거 바닷물이 드나들던 간척지로 해발 20-30m 높이가 고작이다.
이런 평야지대에서 800여m의 바위산이 불쑥 치솟은 것이다.
영암읍내로, 그리고 읍내에서 동쪽의 천황봉 아래로 다가설수록 치솟았다는 느낌은 더하다.
천황사 밑으로 다가들면 월출산의 바위는 종내는 거대한 벽으로 일어선다.
산 안에 들어가서 보는 월출산의 기암 풍치는 최고봉인 천황봉의 동쪽과 서쪽이 크게 다르다.
동쪽은 크고 높은 기둥 형상의 암봉들이 굵직한 능선줄기에 굳건히 뿌리박고 서서 장관을 이룬다.
서쪽 지역은 온갖 기교를 다한 크고 작은 암탑들의 전시장이다.
그래서 월출산 동서 종주 산행은 빼어난 기암괴석을 전시해 놓은 전시장을 관람하는 것과 같다.
월출산 주변의 사람들은 이 기암들 마다 이름을 붙여 귀뜰바위, 구멍바위, 남근바위, 사자바위, 말바위, 돼지바위, 칼바위, 탕건바위, 시루바위, 거북바위 등등 모든 형상을 찾아내어 부르고 있다.
41.88㎢라는 가장 작은 면적으로 국립공원의 호칭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기암들의 풍광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이다.
멀리서부터 그 모습이 기이하기 그지없는 천황봉 정상에서는 오래전부터 하늘을 향해 제례를 올렸던 흔적으로 기와편이나 그릇조각 등이 발견된다.
광주민학회가 출가한 <월출산>에 따르면,
'삼국사기에 월나악(月奈岳)에서 국제로 소사를 지낸다는 기록이 전한다.
월나군은 지금의 영암읍과 군서면 일원에 있던 현의 이름이다.
현재의 영암(靈巖)이라는 지명 또한 월출산에서 유래한다.
'월출산에 세 개의 움직이는 큰 바위(動石)가 있었는데, 그 동석 때문에 영암에 큰 인물이
난다고 시기한 중국인들이 바위 세 개를 모두 밀어 떨어뜨렸다. 그러나 그 중 하나가 스스로 옛 자리를 찾아 올라갔고, 여기서 영암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이 기이한 형체의 산에는 당연히 신령스런 기운이 깃들었으리라는 믿음과 소망이 누가 새겼는지 모르지만 구정봉 정상부 한 바위에 새겨진 '動石'이라는 글씨에서 우러나온다.
이 동석이 바로 영암이며 이것이 북쪽 고을의 이름이 된 것이다.
월출산은 우리 고유의 산줄기 개념인 산경표의 분류에 따르면 호남정맥의 한 지맥에 속해 있다.
북쪽 절반쯤이 영암군에, 남쪽 절반은 강진군에 속해 있다.
이렇듯 면적 비를 보면 비슷한데도 불구하고 보통 '강진월출산'이 아닌 '영암월출산'으로 부르는 것은 지리적인 조건 차이 때문이다.
강진 쪽은 사람들이 주로 모여사는 곳과 다소 먼 거리가 있지만, 영암사람들에게는 월출산이 바로 뒷산이다.
월출산을 평지에서 불끈 치솟은 산으로 인식하는 이들은 강진이아니라 영암사람들이다.
아득히 먼 신라시대에 월출산은 영암월출산이 아니라 '구림(鳩林) 월출산'이었다.
월출산 서쪽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옆의 장천리 선사주거지는 2,200여년 전의 것이고, 간척이 이루어지기 전 구림은 일본과 중국을 오가는 무역항이었다.
구림마을 뒤의 절인 도갑사 사적이에 '월출이란 산 이름은 중국 남부의 월저국에서 문수보살이 나와 이곳에서 살앗기에 유래한 것'이라는 기록이 전하며, 이 마을에서는 일본에 문물을 전한 왕인박사와 풍수지리학의 대가인 도선국사가 태어나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 때의 월출산은 '구림 월출산'이었던 것이다.
월출산에는 한때 아흔아홉개의 사암이 있었다고 전한다.
기록이나 유물 등으로 미루어 이 산 곳곳에 많은 절과 암자가 있었슴은 분명하다.
도갑사 계곡에서만 상·중·하견암, 상경사, 안심사 등 10여군데, 천황사 계곡에서 여섯군데의 사찰터를 찾아냈다고 한다.
월출산에 지금 남아 있는 큰 절은 도갑사와 무위사 두 곳이다.
규모는 도갑사가 한결 크지만 절의 운치에서는 무위사 쪽이 한결 뛰어나다.
천황사는 그 이름이 알려진 정도와는 달리 작은 암자의 규모다.
월출산 산행의 대부분은 천황사-바람폭포-광암터-천황봉정상-구름다리-천황사로 이어진 코스를 택한다.
여름에는 가장 수량이 풍부한 금릉경포대코스에 인파가 집중된다.
현재 월출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가 개방해두고 있는 코스는 천황사에서 도갑사에 이르는 종주코스와 남쪽 금릉경포대코스 등 크게 네가닥이다.
영암실내체육관에서 산성대를 통하여 광암터로 이어지는 산성대암릉 코스도 매우 좋은 코스이나 아직은 비정규 등산로일 뿐이다.
월출산은 단풍산행지로 제격이다.
주봉 천황봉을 중심으로 구정봉, 미왕재 등에서 펼쳐지는 경치는 천하절경이며, 산 전체가 암봉과 절벽단애를 이뤄 마치 기암괴석의 전시장을 떠올릴 정도로 장관을 이루고 있는 산이다.
월출산 단풍이 가장 아름답게 물드는 곳은 관리사무소에서 천황봉 오르는 계곡길이며 11월 초순까지 절정을 이룬다.
월출산은 동백산행지다.
천황사에서 바람골 계곡으로 동백꽃들이 등산로 양쪽으로 줄지어 있어 봄에는 꽃의 터널을 이루게 된다.
도갑사 부근에도 동백꽃들이 많이 있으며 3월 중순에 피기 시작하여 3월말이나 4월초까지 절정을 이룬다.
월출산은 바위산행지다.
산 전체가 기암괴석과 절벽, 암봉으로 되어 있으며 정상에서 사방으로 내려다 보는 경치는 천하절경으로 일찌기 호남의 소금강이라 한다.
월출산은 진달래, 철쭉산행지다.
봄에는 진달래와 철쭉꽃이 만발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폭포수와 천황봉에 항상 걸려 있는 안개와 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산봉우리에 하얀 눈이 덮여 있는 설경 등 계절과 시각 그리고 보는 방향에 따라 그 느낌과 아름다움이 달라지는 다양하고 독특한 모습을 자랑한다.
월출산은 벚꽃산행지다.
영암읍에서 도갑사 앞길을 지나 영암 독천에 이르는 6km의 거리는 벚꽃길이다.
20년생 벚나무 2만여 그루가 들어서 있다.
월출산과 영암들녘의 파란 보리밭을 배경으로 흩날리는 벚꽃이파리의 군무가 볼 만하다.
▣ 월출산 이름 유래
월출산은 다른 여러 산들과 마찬가지로 시기에 따라 제각각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1988년 광주민학회에서 펴낸 책자 <월출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월출산이 기록상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삼국사기이며 그 뒤 세종실록지리지, 고려사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에 월출산, 월생산, 월산 등 주로 월(月) 자와 연관되어 표기되고 있다.
한편 소금강산, 화개산, 조계산, 보월산 따위로도 불린다.
이와 함께 여러 문헌에 나름대로 유래를 적고 있거나 구전되고 있다.
월출산이란 산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우선 <고려사>에 보면 고려 초에는 월생산(月生山)이라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산의 서쪽에 있는 마을로서 왕인, 도선 등의 인물이 태어난 유서깊은 마을인 구림에서 보면 마치 달이 이 산에서 생겨나 떠오는 듯이 보이기 때문에 월생산이라 했으며, 나중에 월출로도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곳에 '달뫼(月山)'라는 마을 이름이 전하기도 한다.
한자가 쓰여지기에 앞서 순수한 우리말로 된 이름인 '달이 나오는 산', 즉 달나산이었다고 한다.
월출산의 북쪽 영암과 서쪽의 목포 일대에 사는 사름들은 초저녘에 월출산 암봉 위로 달이 떠 있는 경관을 늘 보게 된다.
그래서 달이 나오는 산, 달나산이라 불렀는데, 당시에는 우리 문자가 없어서 산 이름을 쓰지 못하다가 한자가 들어와 '달'은 月로 고쳤는데, '나온다'는 '나'는 미처 고치지 못하고 이두식으로 소리만 따서 '어찌 나(奈)'자를 써서 월나산이라 했다 한다.
고려시대에 접어들어 '나온다'를 '날 生'자를 써서 월생산이라 했는데, 사실은 '낳는다'가 아니라 '나온다'여서 조선조에 와서야 비로소 월출산으로 되었다.
'달나산'이 조선조에 와서야 완전하게 한자화 된 것이다.
또 다른 설로, 월생은 곧 '얼나' 라는 토박이말의 한자 표기라는 주장이다.
즉 월출산은 알짜, 알맹이, 씨알 등 만물의 근원을 뜻하는 말인 '알'에서 비롯된 이름으로서, 이 산 주변에 무수히 널려 있는 성혈(性血)-즉 알터가 또한 이 설을 강하게 뒷받침해준다.
한편 월출산 서쪽의 사찰인 도갑사의 <영암지도갑사사적>(1663년)에는 '옛날 문수대사가 월저국에서 나와 이곳에서 살았으므로 월출이라 부른다'고 적었다.
이중 어느 것이 맞다고 단정짓기는 극히 어려운 일이라고 할 것이다.
▣ 볼만한 곳
★ 월남사지 모전석탑
월출산 천황봉 정남쪽 월남리의 평지에 월남사지와 모전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월남사는 고려나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진각국사 혜심(1178~1234년)이 창건했다는 간단한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게다가 어떤 이유에선지는 모르지만 혜심을 기르는 진각국사석비(보물 제313호)가 이곳에
남아 있어 혜심 창간설이 나돌았다.
그러나 연대를 추정할 때 그는 월남사를 크게 중창한 인물로 보인다.
절터 주변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어 옛 흔적은 희미하다.
하지만 그 이름이 후세에 전하며 많은 사람이 찾는 것은 바로 '월남사지 모전석탑'(보물 제298호) 때문이다.
마을 가운데 시골집 돌담을 돌아서면 나타나는 이 붉은색 탑은 그 단아하고도 우아한 풍모가 사람의 마음을 흔든다.
차분히 탑을 보고 있으면 돌덩어리가 사람에게 말을 거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힐 정도다.
고려시대 탑으로 추정되는데 건축 양식은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빼닮은 완벽한 백제의 것이다.
고려시대에 백제양식을 계승한 백제 사람들의 작품으로 관심을 끈다.
★ 주거변천사 야외전시장
월출산 종주 기점인 구림 마을 도로변에는 최근 조성이 끝난 주거변천사 야외전시장이 있으므로 산행 후 한번 들러볼 만하다.
인류 최초의 주거형태인 동굴집부터 움집, 죽담집, 초가집, 기와집을 각각 현존하는 형태를 그대로 본떠 재현해 두었다.
원형 움집은 영암군 장천리 선사주거지(지방기념물 제98호)의 움집을 재현한 것으로 한반도 북부지방과 중부지방에 분포한 청동기시대(B.C 10세기경) 의 일반적인 움집이다.
죽담집은 돌을 한 줄 놓고 흙을 놓고 또 돌을 놓고하여 돌과 흙으로 쌓은 담을 벽체로 삼은 집이다.
초가집은 덕진면의, 13대째 살아오고 있는 최성호씨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64호)을, 기와집은 270년 전에 군서면에 건축된 주영헌 가옥의 안채를 재현한 것으로, 남부지방의 전형적인 일자형 팔작지붕 기와집의 전형을 볼 수 있다.
★ 무위사
월출산 남쪽,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죽전 마을에 자리한 무위사는 국보 제134호인 극락보전으로 이름난 곳이다.
커다란 팽나무 고목이 서 있는 넓은 절 마당에 덩그러니 자리잡은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 맞배지붕 집으로 단순미가 일품이다.
면과 선의 적절한 조화와 분할로 군더더기 없는 경쾌함이 보는 이를 감동시킨다.
세월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는 빛 바랜 절집을 조용히 돌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무위사에는 국락보전 외에도 고려 왕건이 선각대사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세운 편광영탑(보물 제507호)과 현존하는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극락보전 목조 삼존불 뒤의 후불벽화가 볼거리다.
사적기에 의하면 무위사는 신라 진평왕 39년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관음사라 했고(617년), 헌강왕 원년 도선국사가 중창해 갈옥사라 했으며(875년), 고려 정종 원년 선각대사가 3창하여 모옥사라 했고(946년), 조선 명종 10년 태감선사가 4창해 무위사라 칭했다(1555년)고 전한다.
하지만 이 기록의 대부분은 사료로서 신빙성에 문제가 있고 고려시대 선각대사와의 관련성만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국보 제13호 극락전은 벽에 29점의 벽화가 있었으나, 지금은 본존불(本尊佛) 뒤의 탱화(幀畵) '아미타삼존도'와 '수월관음도'만 남아 있고, 28점은 보존각에 소장되어 있다.
이 벽화들은 법당이 완성된 뒤 찾아온 어떤 노거사(老居士)가 49일 동안 이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에 그렸다는데 궁금증을 참지 못한 주지스님이 법당 안을 엿보니 파랑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막 그리다가 인기척을 느낀 새가 붓을 떨어뜨리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그래서 지금도 후불탱화의 관음보살 눈에는 눈동자가 없다는 전설이 있다.
아랫부분에 적힌 화기에 따르면 이 그림은 강노지 등 여러 사람의 시주로 대선사 혜련 등이 그렸고 성종 7년(1476)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 월출산 온천장
월출산 온천장의 온천수는 월출산 암반대의 주요 구성암석인 홍색 장석화강암을 수원으로 하고 있기에 맥반석 온천수로 부른다.
600m 지하의 월출산 맥반석 암반대에서 올라오는 천연 온천수를 사용하며, 맥반석 온천의 한 특징인 약알칼리성 식염천으로 각종 미네럴 성분과 원적외선 방사량이 풍부해 피로회복이 빠르며 신경통, 피부질환 등에도 효험이 뛰어나다고 한다.
1,500명 동시 수용이 가능한 대온천탕은 매그넘탕, 히노키탕, 유수기류탕, 약탕, 서늘한 바깥 공기를 맞으며 온천욕을 할 수 있는 노천탕, 그리고 핀란드식, 쑥찜, 안개사우나 등의 시설이 돼 있다.
입욕료는 어른 6,000원(투숙객 4,000원, 평일 5,000원이며 단체 30명 이상은 할인). 지하 온천욕장 입구에는 스낵코너도 있다.
전 객실에도 24시간 나트륨과 게르마늄이 함유된 약알칼리성 온천수를 공급한다고 호텔측은 설명한다.
객실의 경우 4인 기준 96,800원. 비수기와 평일에는 30% 정도 할인해 준다.
영암 공용터미널에서 시종 방면 군내버스가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며, 10분 소요. 택시료 5,000원. 온천장 전화 061-473-6311.
★ 왕인박사 유적지
군서면 구림리 성기동은 일본 비조문화의 창시자인 왕인 박사가 태어난 곳이다.
왕인박사는 백제 고이왕 25년 일본 응신왕 초청으로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건너가 학문을 비롯하여 기술과 공예등 백제의 선진문화를 전파시켜 일본의 고대문화 형성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왕인박사의 탄생지인 성기골 근처에는 왕인박사가 마셨다는 성천이 있고 주변 계곡에는 여러 가지 역사적인 흔적들이 남아있다.
왕인박사가 유학의 도를 깨우쳤다는 월출산 죽순봉일대에도 책을 보관해두고 공부했다는 책굴과 제자들이 공부한 문산재 양산재가 있다.
성기동 집터 마당바위에는 '고 최씨원 금 조씨정'이라는 기록이 있다.
예날에는 최씨의 정원이었으나 지금은 조씨의 것이라는 뜻이다.
그외에도 태를 묻었다는 삼나태골,일본으로 배를 타고 떠났다는 상대포가 있다.
지금의 기념관 앞은 논인데 지형적으로 보아 옛날에는 취락지였을 가능성이 높아 본격적인 발굴을 통하여 옛모습을 복원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문화행사로는 왕인박사를 추모하기위한 춘계대제와 월출산 천황제,군서 벚꽃축제등이 열린다.
구림리에는 신라시대 최씨 처녀가 구림의 어느 밭에 열린 한자가 넘는 오이를 몰래 따먹고 지금의 도갑사 자리에서 도선을 낳았다는 전설이 동국여지승람에 전하기도 한다.
월남리 기점
※ 월남리→천황봉코스
※ 월남리→바람재코스
남쪽 강진군 성전면에서 바라보는 월출산은 부드럽고 순탄한 산세를 지닌 지극히 여성스러운 산세로 그 일면을 돌변한다.
월출산의 거센 골격미가 식상하다면 남쪽의 고요한 정취를 느껴봄직도 하다.
무위사와 금릉경포대 계곡을 지나 월출산에 오르는 코스도 좋다.
월출산을 오른쪽에 비껴 주고 버스는 이내 풀티재라는 큰 고개를 넘는다.
이 고갯마루는 영암과 강진을 갈라 놓는 경계 지점이다.
19년 동안이나 유배 생활을 한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으로 귀양 가면서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그 때 바라본 월출산이 마치 고향에서 보던 도봉산과 너무도 닮아, 머리를 숙인 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는 가슴아픈 글을 남기게 한 곳이다.
풀티재가 끝날 즈음이면 넓은 들판과 함께 동그마니 자리 잡은 마을이 나타난다.
여기가 월남리, 옛날에 월남사라는 절이 있던 곳이다.
그러나 월출산의 수려한 봉우리를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자리가 월남사터다.
지금은 퇴락하여 절집도, 스님도 없는 폐사지의 쓸쓸한 빈 터엔 3층 석탑 하나가 덩그러니 서서 그 옛날을 지키고 있다.
이 3층 석탑은 고려 시대의 유물이지만, 부여에 있는 백제시대 정림사지 5층 석탑의 늘씬하고 우아한 풍모를 본받아 주목되고 있다.
또, 절터 한 쪽에는 우람하게 생긴 돌거북이 깨진 비석을 짊어지고 있다.
이 비는 월남사를 창건한 진각국사의 공적을 기록한 것으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규보가 지었다.
비문에 의하면, 이 절은 고려 무신 정권 때 실권자였던 최우의 발원으로 창건하였다고 하니, 그 예사롭지 않은 역사성을 미루어 알 만하다.
월남리 코스는 월출산을 오르는 여러 코스 가운데 가장 유순하면서도 손쉬운 등산로 가운데 하나로 가족산행에 적당한 곳이다.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은 편안하고 안전하며 경사도 비교적 완만하다.
코스는 줄곧 계곡을 따라 오르며 중간에 천황봉쪽과 바람재 방향으로 나뉘는 갈림길이 있다.
매표소에서 갈림길까지는 30분 정도 걸린다.
월남리 경포대 매표소를 지나 산길을 따라 10분 정도 가면 취사장이 갖춰진 야영장이 나온다.
이 야영장에 닿기 직전, 왼쪽의 계곡으로 내려서면 금릉경포대란 글이 음각된 곳으로 나서게 된다.
멋스런 필치를 감상하고 다시 등산로로 돌아 나와 오르면 취사장이 마련된 야영장에 닿는다.
야영장을 지나 20분 거리의 합수지점에서 길이 갈린다.
오른쪽은 천황봉 동쪽 능선안부로 붙는 길이고,
왼쪽 계곡길은 바람재로 이어진다.
두 길 모두 계곡으로 연결되는 등산로로, 천황봉쪽이 조금 더 길고 막판에 경사가 급하다.
① 오른쪽 계곡길(천황봉방향)을 따르면 물을 3번 정도 건너며 고도를 높이고,
통천문 아래 능선 안부로 올라선다. 약 1시간 거리,
안부에서 통천문을 경유 천황봉까지는 400m 가량 떨어져 있다.
천황봉에 오르면 주능선을 따라 산행을 이어가거나,
다시 돌아 내려와 구름다리를 거쳐 천황사쪽으로 하산할 수 있다.
② 계곡 중간의 갈림길에서 바람재로 가려면 왼쪽 길을 따른다.
비교적 순탄하고 안전한 길로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군락을 이룬 동백나무 군락을 통과하며
40분 가량 오르면 시야가 터진다.
주능선의 봉우리들이 보이기 시작하면 바람재에 거의 다다른 것이다.
바람재 직전의 바위 사면을 지나는 곳이 위험스럽기는 하지만,
철제 난간이 설치되어 손쉽게 통과할 수 있다.
바람재에서는 능선을 타고 도갑사나 천황사쪽으로 산행을 연결할 수 있다
월남사지
월남리(月南里)는 통일신라때 동월남, 서구림이라고 불렀던 명촌이다.
월남사지(月南寺)의 창건은 『신증동국여지승람』(1531년)에 「高麗僧眞覺所創有李奎報碑(고려승진각소창유이규보비)라 하여 간략한 월남사의 창건내역을 밝히고 있다.
또 『동국여지지』 및 『호남읍지』등에도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위 내용에 의하면 월남사는 진각국사(1178∼1234)가 창건하였으며, 여기에 이규보(1168∼1241)가 지은 진각국사碑가 있다고 하였다.
이들 기록대로라면 월남사는 고려후반기에 창건된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현지에 유존하고 있는 백제계 석탑이라 일컫는 모전석탑의 편년이 고려초기 또는 고려후기 등 두가지로 추정되는 학계의 견해가 있고, 뿐만아니라 1980년대 중반에 이 寺址(사지)에서 백제계의 와당이 발견되는 등 아직도 사지 전체에 대한 성격 파악이 어려운 실정이다.
월남사의 폐찰년대는 정확히 전해진 기록은 없으나 『동국여지지』에 「眞覺所創有李奎報撰碑今廢(진각소창유이규보찬비금폐)」라 한 점으로 미루어 이 책을 쓸 당시(1649∼1659)에 이미 월남사는 폐찰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뒷받침 하는 내용이 「무위사사적기」에 나와 있는데 위 내용에 의하면 월남사는 임진왜란(1592년)때 왜구의 침략에 의해 폐찰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월남사지석탑은 고려시대에 건립된 백제계 양식의 석탑으로서 고려시대에 왜 이곳 월남사에 백제계통의 석탑이 세워졌을까 하는 의문을 제시하면서 일찍부터 국내에서 주목되어온 탑이다
그러나 이 의문점을 풀어줄만한 관련자료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어 월남사에 관한 연구는 현실적으로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탑의 기단은 단층이며 밑에 두꺼운 하대석을 놓고 우주석과 면석을 별석으로 하여 그 위에 갑석을 놓았다.
탑신부는 1층 탑신이 2∼3층에 비해 높은 편이고 결구수법은 각면이 일정하지 않은데 남쪽에서는 엇물림식으로 서쪽은 1매의 벽판석이며, 북쪽은 또 엇물림식, 동쪽에서는 좁은 1석을 삽입하여 면석을 마련케 하였으나 1매의 삽입석이 유실되어 현재는 잡석을 채워 놓았다.
2층탑신부터는 급격히 높이가 낮아지면서 결구매수도 4매로 줄어들고 각면에 우주가 모각되었다.
3층탑신은 1석으로 되었으며 각면 우주의 모각 등은 그 수법이 동일하다.
옥개석은 추녀끝이 약간 반전되었을뿐 거의 수평이며, 옥개석의 상·하를 수매의 별석으로 결구하여 층급받침을 이루었는데, 하면의 층급받침은 3단이나 중앙받침은 하면에 모를 죽인 각형이고, 상하의 2단은 4분원의 형식을 취했다.
이러한 형식은 2층까지 계속되다가 3층에서는 2단으로 줄었다.
상륜부는 탑신과 같은 석재와 소로형의 옥개석을 올렸으나 이들 전체는 노반으로 볼 수 있으며 그위로 복발과 양화가 있다.
이 탑은 塼塔(전탑)을 닮았다 하여 모전석탑이라 부르고 있으나, 이는 탑재의 각 부재를 수매의 여러조각으로 결구하였을 뿐으로 그 석재 자체가 塼(전)을 닮았다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 석탑은 월남사지석탑 또는 월남사지 삼층석탑으로 해야 옳겠다.
또 이 탑은 좁은기단, 가벼운 배흘림이 보인 탑신, 옥개받침에서 나타난 형식 등은 부여 정림사지 석탑을 모방한 백제계 석탑이라 하겠다.
이 탑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이 탑을 조각하게 된 석공에게는 아리땁고 젊은 부인이 있었다.
석공은 이 불사가 끝나기까지 나를 찾아오지 말고 집을 잘 지키라고 당부한 후 왔었다.
그러나 그의 부인은 너무 오랫동안 집을 비운 남편이 견딜 수 없이 보고 싶었다.
어느날 그녀는 몰래 이곳 월남사를 찾아 들었다.
그리고 먼 발치로 석탑일에 열중한 남편을 훔쳐보았다.
불사에 열중한 남편은 그 일에만 삼매경에 빠져 있었던지 수척해 보였다.
돌아서려던 그녀는 아쉬운 마음으로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아 작은 목소리로 남편을 불러봤다.
사랑하는 부인의 목소리를 들은 석공은 그녀를 향해 머리를 돌렸다.
순간 벼락이 치며 그가 완성직전에 있던 석탑은 조각나고 그의 사랑하는 부인은 돌로 변해버렸다.
석공은 돌이 되어버린 부인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렸으나 이미 때가 늦어 버렸다.
다시 처음부터 일을 새로 시작해야 했던 석공은 인근을 뒤져 석재를 구했으나 쓸만한 돌이 없었다.
석공은 생각 끝에 그의 부인이 화신한 돌을 쪼아 다시 이 탑을 완성했다고 한다
월출산 전설
조선시대 영암읍에 경주 이씨들이 살고 있었다.
고려말 대문장 익제 이제현의 후손인 주남이라는 사람은 조상의 묘자리를 명당에 모시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유명한 지관을 불러 명당을 잡아 달라고 청하였다.
'좋은 명당을 하나만 잡아 주십시오.'
'내 힘써 보지요. 그러나 명당자리 잡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라서 좋은 명당이 잡힐지 모르겠군요.'
'그러니까 청하는게 아니겠소?'
지관은 주남의 간절한 청을 받아들여 월출산을 중심으로 명당을 찾으러 나섰다.
월출산 상봉에 올라 산세를 훌어보던 지관은 음기가 뻗고 있는 독천지역의 산을 바라보더니 그곳을 가보기로 했다.
'바로 저 산이야'
지관은 독천에 이르자 비래산을 올라갔다.
비래산 정상에서 내려다 보던 지관은 비래산 허리를 바라보더니 무릎을 쳤다.
'아주 좋은 여근혈 명당이로군.'
지관은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띄우며 기뻐했다.
지관이 내려다 본 명당자리는 여자의 생식기 모양을 한 지형으로 좀처럼 잡기 어려운 명당이었다.
'이곳이 음핵부분에 해당되니 이 자리에 묘를 써야 자손이 번창하겠어.'
지관은 혼자 중얼거리더니 주위를 살폈다.
'물이 있어야 완전한 명당인데.....'
여근혈 명당 아래쪽을 내려다 보던 지관은 여근혈 명당 백여m 쯤 아래에 여자의 음부 모양을 한 샘 하나를 발견해냈다.
'제대로 된 명당이로군!'
지관은 곧바로 산을 내려와 주남을 만나러 갔다.
주남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나타난 지관을 보고 반갑게 맞이했다.
주남은 극진히 지관을 모신 뒤 넌즈시 말을 꺼냈다.
'그래, 좋은 명당자리를 잡으셨는지요?'
'한 자리가 있었는데....'
'그게 어떤 지린데요?'
주남은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독천땅에 여근혈 명당이 있는데, 이곳에 묘를 쓰면 자손이 번창하겠습니다.'
'그래요. 다 지관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주남은 지관의 손을 꼭 붙잡고 고마움을 표했다.
주남은 길일을 택하여 조상의 묘를 여근혈 명당에다 썼다.
그래서인지 그의 동생이 현종 13년에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 벼슬을 하게 되었고, 그 후 경주 이씨들의 자손이 날로 번창해 갔다.
그러나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그 후였다.
이 명당자리에 묘를 쓰고 나서 경주이씨 집안은 많은 음덕을 입었지만, 친족간에 좋지 않은 사건이 종종 일어났다.
그것은 근친상간의 일이 일어나 가문의 누를 끼치는 것이었다.
경주 이씨 문중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유명한 지관을 모셔왔다.
'지관님, 자주 근친상간이 있으니 해결방안을 좀 일러 주십시오.'
지관은 독천 여근혈의 이씨 무덤을 보고 말했다.
'좋은 명당이구려. 그러나 음기가 너무 성해 그런 일들이 생겨나는 것이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요?'
지관은 한참동안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산 밑에 냇가에다 우시장을 만들면 많은 남자들이 모여드니까 양기가 발산되지요.
그래서 강한 음기를 중화시킬 수 있지요.
그리고 비래산과 마주보이는 장정산의 맥이 남근을 닮았으니
그 사이에 우시장이 서면 그런 일은 없어질 것이요.'
경주 이씨 자손들은 기뻐하며 곧바로 지관이 일러준 곳에다 우시장을 설치했다.
독천이라는 지명도 바로 우시장이 생긴 뒤부터였다.
송아지 독자와 냇천자를 써서 독천이라고 불러졌으며, 지금까지도 우시장이 형성되고 있다.
그후 이상한 일은 여근곡의 샘이 때때로 붉은 빚을 띄울 때가 있었다.
그럴때면 꼭 이씨 집안에 좋지 않는 일이 생겨난다고 전해 내려온다
월출산 주능선 종주는 취향에 따라 방향이 달라진다.
다리품을 덜 팔고 싶은 사람들은 대개 서쪽 도갑사에서 동쪽 천황사 정상으로 향하고,
조망 위주의 산행을 하려는 이들은 동쪽 천황사에서 도갑사쪽으로 선택한다.
이중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산행중 조망이 가장 뛰어난 급경사 쇠사다리 길은 올라가는 것이 차라리 더 안전하므로 이 길을 가려면 동에서 서쪽으로 택하는 것이 정석일 것이다.
천황사에서 천황봉까지 줄창 오르막으로만 알고 있으나 실제로는 많은 봉우리들을 오르내리게 되므로 식수를 넉넉하게 준비해야 한다.
차량은 매표소 지나 야영장 앞의 주차장까지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단풍철에는 매표소 뒤 주차장에 주차토록 통제한다.
천황사 입구에는 24시간 편의점과 스넥코너가 있어 부족한 물품을 보충할 수 있다.
매표소와 주차장, 음식점, 가게 등을 지나 산에 오르기 시작하면 바로 앞에 보이는 돌비에 하춘화가 노래한 '영암아리랑' 가사가 새겨져 있다.
[달이 뜬다 달이 뜬다 / 영암 고을에 둥근 달이 뜬다.
달이 뜬다 달이 뜬다 / 둥근둥근 달이 뜬다.
월출산 천왕봉에 보름달이 뜬다.
아리랑 동동 쓰리랑 동동 / 에헤야 데헤야 어서와 데야
달보는 아리랑 / 임보는 아리랑]
그리고 바로 윗쪽에는 고산 윤선도 선생이 지은 <산중신곡>(山中新曲)중의 '조무요'(朝霧謠)가 새겨진 시가비가 서 있다.
[월출산 놉더니마난 ?乍? 거시 안개로다 / 천황 제일봉을 일시에 가라와다 /
두어라 해 펴딘 휘면 안개 아니 거드랴]
천황사 집단시설지구에서 매표소를 지나 야영장까지는 걸어서 30분.
아스팔트 길만 따라가면 도로 끝에 천황사 야영장 앞 주차장에 도착한다.
이곳 주차장옆 수도에서 식수를 준비하고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월출산 동쪽에 자리한 천황사 야영장은 울창한 송림 속에 들어서 있다.
바로 옆에 주차장과 매점 겸 관리사무소 직원 숙소가 있으며,
야영장 내 취사장, 화장실 시설도 갖추어져 있다.
주차장에서 숲길을 따라 10분을 들어가면 대나무숲속 삼거리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 길은 바람골계곡 코스로서 장군봉의 허리춤을 돌아 천황봉으로 오르는 길로 조망은 뒤떨어지지만 천황봉까지 비교적 쉽게 오를 수 있는 길이다.
※ 이 길로 접어들어 20여분 오르면 15m높이의 바람폭포에 닿는다.
바람폭포는 평소에는 물이 없고 우천시에나 그 위용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바람폭포를 지나면서부터 월출산의 기암괴석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바람폭포를 지나 광암터를 향해 오르다 보면 비슷한 형상의 암봉 6개가 모여있는 육형제봉이 보인다.
대나무숲속 삼거리 갈림길에서 왼쪽 길은 구름다리를 경유하여 매봉 정상을 지나 사자봉 뒤로 가파른 철계단이 연이어지는 힘든 길이다.
물론 조망은 이 구름다리 길이 더 뛰어나다.
[매표소0.4㎞←천황사→ 좌:구름다리1.1㎞ 천황봉2.9㎞/우:바람폭포1.2㎞ 천황봉2.9㎞] 이정표가 있다.
갈림길목에서 3분 거리인 천황사는 바랜 기와를 얹은 자그마한 당우 2채가 모두인, 명성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작고 초라한 절이다.
영암면 용흥리 속칭 바람골에 위치한 사찰로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이다.
구름다리로 오르는 길은 경사가 너무 가팔라서 쇠파이프로 가로지름대만 있는, 말 그대로 쇠사다리만 놓아둔 곳이 한둘이 아니다.
삼거리에서 8분 정도 오르면 [천황사0.6㎞←이정표→구름다리0.3㎞] 이정표를 지난다.
10여분 급경사 길이 더 이어지다가 왼쪽으로 길게 완경사 길이 이어진다.
완경사 길에 공중전화 박스 겸 휴식처 역할을 하는 시루봉 아래의 육각지붕의 정자각이 나온다.
정자에서 본 구름다리와 주위 기암괴석이 멋지다.
곧이어 월출산의 명물인 구름다리에 도착한다.
구름다리는 길이가 52m이고 계곡 바닥까지의 높이가 120m나 되는 스릴 만점이다.
전국적인 명물로 이름높은 이 월출산 구름다리는 과거엔 건너갔다가 되돌아와야 했으나 1988년 국립공원 지정 직후 건너편에서 매봉 정상을 지나는 쇠다리길이 개설되었다.
대다수 탐방객들은 구름다리를 건너갔다가 되돌아와서는 구름다리 바로 아래의 계곡으로 낸 하산로를 따라 내려간다.
<시루봉과 매봉을 연결하는 구름다리>-염정의님 촬영
구름다리를 지나면 [천황사1.1㎞ ←구름다리→ 천황봉 1.7㎞/경포대3.8㎞] 이정표가 나오고 한동안 내리막길이이어진다.
구름다리 건너의 조망대에서 기암 조망을 즐긴 뒤 쇠사다리길로 접어든다.
쇠사다리길은 자칫 실수하면 크게 다치게 될 곳이 많으므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눈비가 올 때라면 다리를 건너자마자 이 곳부터는 등산이 통제되는 곳이기도 하다.
매봉 정상에 다다르기까지 흡사 암벽등반을 하며 탐승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8분 정도 진행하면 [구름다리0.3㎞←이정표 → 천황봉 1.5㎞/경포대3.6㎞]가 나오고,
사다리에서 사다리로, 바위 틈 사이도 지나며 잠시 더 오르면 매봉 정상(605.5m)이다.
주차장에서 이곳 매봉 정상까지는, 비록 걷기 나름이지만 경치 구경하며 쉬는 시간까지 감안해 잡아 2시간쯤으로 잡아두는 것이 좋다.
사방이 절벽으로 이루어진 매봉 정상의 평평한 바위를 지나 철계단을 내려서면 길이 비교적 순해지며 기암봉들이 남쪽 뒤로 이어진다.
비록 경사가 다소 약하지만 다른 산들에 비하면 급경사여서 역시 쇠사다리는 연속된다.
이 길을 걸어오르면 연실봉의 남쪽 허리를 끼고돌아 연실봉과 사이의 안부로 올라서고 사자봉(667m)의 뒷면이 바라뵌다.
지리원 지형도에는 동쪽 저 아래 408m봉을 사자봉이라 표기했으나 지역산악인들은 잘못 된 것이라며 667m봉을 사자봉이라고 주장한다.
광주민학회가 펴낸 책자 <월출산>에 보면 사자봉 사진이 게재돼 있는데, 바로 667m이다.
다만 높이는 지리원 지형도의 표기를 그대로 따라 408m라 틀리게 적었다.
월출산의 이 수많은 기암봉들은 적어도 굵직하고도 높게 솟은 것들은 과거 저마다 이름을 가졌을 것이 분명하지만, 현재는 정확하게 전하는 것이 몇 되지 않는다.
한 예로, 사자봉 서쪽 위 능선상에 솟은 703m봉, 그 남서쪽 아래 668.5m봉은 솟아오른 높이나 생김으로 보아선 멋진 이름을 가졌을 것 같은데 명확히 전해진 바가 없다.
<월출산>책자에 '기봉(旗峰)은 동남쪽에 사자봉과 함께 있다' 는 정도로만 애매하게 전할 뿐이다.
사자봉 뒤로 돌아 일단 주능선 위로 오르면길이 한결 순해진다.
이름없는 703m봉 남쪽 밑둥을 돌아 천황봉을 향해 오르다 보면 '등산로 통제 및 이용 안내'라 쓰인 커다란 안내판이 선 곳에 다다른다.
이곳에서 사자봉~구름다리까지의 급경사 구간은 겨울이 매우 위험하므로 산행을 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한겨울에 이 길로 들었다가 사고를 당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한다.
이 안내판이 선 곳에서부터 왼쪽(남쪽) 아래로 월출산 제일의 계곡인 금릉경포대쪽 갈림길이 이어지고 있다.
안내판 위, 200m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난 바람골 갈림길목을 지나고 183계단에 이어 통천문이라 부르는 바위구멍에 이른다.
지리산 천왕봉 아래 통천문처럼 바위가 천장을 이룬 바위굴이다.
통천문을 지나 300여m 오르면 곧 월출산 정상인 천황봉(812.7m)이다.
천황봉 정상은 매우 널찍한 암반지대로서 300여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바위와 초지로 되어있다.
정상표지석과 소사지(小祀趾)안내비가 세워져 있다.
정상 중앙 바닥에는 황동판으로 만든 이정표와 영암26 (1996 재설) 삼각점이 박혀있다.
이곳은 중식장소로나 주위 조망을 즐기는 휴식장소로 인기가 높다.
평평한 정상에서 동쪽 사자봉 일대를 바라보는 조망이 빼어나다.
구정봉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평평한 바위가 있어 쉬어가기 좋다.
천황봉 동쪽은 암봉들의 굵직한 남성미를 자아내고, 천황봉 이서쪽은 호박돌처럼 둥글둥글한 바윗덩이들이 교묘하게 균형을 잡으며 층층이 늘어선 풍광이 단연 제일경이다.
작은 기암봉들이 길게 날개를 편 듯한 구정봉 양쪽 능선 위에 온갖 기이한 형상으로 솟아 있다.
천연의 수석 전시장이니, 기암의 숲이니 하는 월출산의 별명이 어울리는 풍광이다.
정상에 서면 남으로는 두륜산(685)과 달마산, 갈두마을과 남해가 조망되며 영암읍과 영산강, 영암만도 보인다.
북쪽으로는 멀리 무등산(1187), 서쪽으로는 강진 수인산(561)과 용두산(514)가 조망된다.
<천황봉정상>-염정의님 촬영]
천황봉에서 남근바위 지나 바람재까지는 약 1km로 줄곧 내리막이다.
거리상으로는 천황사~천황봉간과 비슷하지만 30분이면 닿는다.
기암괴석을 감상하며 내려서면 길쭉하게 솟은 기묘한 남근바위를 만나게 된다.
높이가 10m 남짓한 길쭉한 오이같은 기암이 절벽과 나란히 서 있다.
월출산을 종주한 사람 치고 이 남근바위를 배경으로 사진 한 장 찍어가지 않은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바로 건너편의 평편한 입석에도 더욱 사실적인 남근석이 밑을 향하여 판화처럼 박혀 있다.
<남근석>-염정의님 촬영
남근바위 바로 아래 안부가 늘 심하게 바람이 불어 바람재라 부르는 고개다.
천황봉과 구정봉.향로봉을 이어주는 능선의 허리부분이며, 경포대계곡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다.
경포대에서 올라오는 탐방객들에게 바람재의 시원한 바람은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다.
6월이면 원추리 군락이, 가을에는 억새군락이 바람재 초지 위에 떠있다.
겨울철로 이 고개를 넘나드는 바람은 숨길을 턱턱 막을 정도이니 주의해야 한다.
이름 그대로 영암과 강진을 넘나드는 바람의 통로구실을 한다.
<바람재 서쪽 풍광>
주능선의 넓은 길을 따라 구정봉쪽으로 향한다.
구정봉으로 가려면 바람재에서 향로봉으로 이어지는 주등산로에서 벗어나 북쪽으로 향해야 한다.
<베틀굴>-염정의님 촬영
산사면을 따라 오르면 바위 봉우리인 구정봉에 이르기 직전에 베틀굴(일명 금수굴)과 만나게 된다.
깊이 10여m로 넓은 항아리 형태의 이 굴은 임진왜란 때 이 지역 아낙네들이 전쟁의 참화를 피해 이곳 굴속에 숨어서 베를 짰다는 전래된 이야기로 생긴 이름이다.
굴에 들어서면 어둡고 으스스하다.
굴 안의 깊은 속에는 항상 물이 고여 있어서 음굴, 또는 음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굴 내부의 모습이 마치 여성의 국부와 같은 형상에서 생긴 이름이다.
꼼꼼히 살펴보면 절묘하게 만들어진 여자의 그곳, 가려진 옹달샘이다.
남근석과 베틀굴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다.
전설 같은 얘기로는 두 바위가 서로 사랑에 빠져 월출산의 수많은 석상들을 낳았다고 한다.
전설에 걸맞게 연인들이 사랑의 맹세를 하고 있는 연인바위, 입맞춤하고 있는 사랑바위, 아기를 가진 배부른 임산부바위, 단란한 모습의 가족바위를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인물상이 널려 있다.
하지만 형태나 크기로 보아 베를 짤 만한 곳으로 보기에는 어렵다.
단지 안내판에 천황봉 방면의 남근석에 대한 언굽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동굴이 토테미즘 대상 가운데 하나인 여근석이 아니었나 추측할 수 있다.
<또 하나의 남근석-원래는 하늘을 향해 서있었다고...>-염정의님 촬영
베틀굴을 돌아보고 왼쪽의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넓은 바위지대가 나오고 그 정면에 상단부가 평평한 구정봉 정상이 보인다.
구정봉 정상에 오르려면 몸이 비대한 사람은 끼어 다니기 어려운 좁은 바위사이를 통과해야만 한다.
그래서 이곳을 월출산 제2의 통천문이라 한다.
구정봉은 말 그대로 산 정상에 아홉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아홉 개의 우물이 있는 곳이다.
침식작용으로 생성된 커다란 웅덩이에 항상 물이 고여 있는 모습이 마치 우물같이 보여 구정봉(九井峰. 705m)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는 이 아홉 개의 웅덩이에 대하여는 영암 구림에 살던 부자가 권세를 이용하여 온갖 오만과 횡포를 부리다가 하늘의 노여움을 사서 아홉 번 벼락을 맞아 죽은 흔적이 웅덩이가 되었다고도 한다.
구정봉은 마치 장군이 투구를 쓰고 있는 모습과 같다 하여 일명 장군봉이라고도 부른다.
바위지대를 우회하여 정상에 오르면 탁 트인 조망과 건너편에 바라보이는 천황봉의 남성적 강인함이 인상적이다.
여기서 보는 천황봉 경관이 가장 장엄하고 아름답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구정봉이 월출산의 최고봉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구정봉의 바위우물>-염정의님 촬영
<구정봉과 뒤쪽으로 천황봉>-염정의님 촬영
이곳에서 북쪽으로 500m 가량 떨어진 곳에 월출산 최고의 문화재인 용암사지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구정봉 옆의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 갈림길에서 급경사 능선을 타고 내려서면 곳곳에 방향을 가리키는 안내판이 매달려 있다.
자그마한 스테인레스스틸 표식이 달린 뚜렷한 길을 따라 내려서면 15분 이내에 능선 왼쪽으로 길이 꺾인다.
제대로 된 길은 계속해 능선을 타고 가야한다.
산비탈의 자그마한 평지 뒤편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웅장한 모습의 불상이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국보 제144호인 이 불상은 자연암석에 조각한 높이 8.5m 가량의 거대한 마애불로 고려시대 초기인 9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멋진 조형물이다.
자연석에 새긴 단정한 석불은 금방이라도 설법을 쏟아 놓을 것같이 생명감이 넘친다.
여래상에서 곧바로 상견암 암자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고 하나 길 찾기가 애매하다.
이 여래상에 관하여는 신라나 고려시대에 영암 지역이 중국이나 인도 등 남방으로 가는 해로의 시발지였다는 점에서 뱃길이 무사하기를 빌기 위해 이 곳에 새겼다고 하기도 하고, 백제 유민들의 발원으로 새겼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온다.
석불 아랫쪽에는 '용암사'였던 넓은 절터가 있는데 그 곳엔 지금도 샘물이 나오며 물이 흐르고 있다.
이 물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하산해보면 아기자기한 계곡의 바윗덩어리와 때묻지 않은 주변의 경관에 마음이 상쾌하다.
이렇게 흐르는 물은 계곡을 따라 흘러 영암의 식수 근원인 상수원이 되며 그 아래 마을 가까이엔 대동제가 있다.
그러나 절터에서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것은 상수도 보호구역으로 출입금지 구역이기 때문에 절터에서 석불있는 쪽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 나와야 한다.
<돌 위의 석탑과 탑에서 본 마애여래좌상 >-염정의님 촬영
구정봉 갈림길목 근처의 암부는 주변 조망이 훌륭하여 한참 쉬어갈 만하다.
다시 주능선에 오른 뒤, 향로봉(743.1m)을 서쪽으로 우회하는 주등산로를 따라 진행하면 곳곳에 철계단이 나온다.
멀리 하얀 융단을 깐 미왕재의 억새밭이 보이는 바위지대에 이르면 널찍해서 수십 명이 휴식하기에 적당한 곳이다.
향로봉(743m,월출산제2봉)에서 1km정도(30분) 내리막길을 걸으면 널찍한 억새밭을 이룬 미왕재에 도착한다.
억새밭은 사람이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목책이 쳐져 있었다.
또 한가운데쯤에 넓은 전망대를 만들어 식생을 훼손하지 않고도 억새를 즐길 수 있게 해두었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예전 같은 환상적인 억새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한다.
억새밭에 잡초와 싸리나무 등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억새밭 중간의 갈림길목에는 불룩 튀어나온 바위지대가 있는데, 여기 앉아서 또한 주위를 보는 멋이 괜찮다.
주능선 종주는 대부분 이곳 미왕재에서 계곡을 따라 도갑사로 하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무위사로 하산하는 계곡길은 2004년까지 지연휴식년제로 묶여 있고, 도갑산(375m)을 경유해 도갑사쪽으로 내려서는 능선길은 사람의 발길이 뜸해 불편한 데다 조망도 시원치 않다.
① 도갑산 하산코스
도갑산 코스는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아 호젓한 맛은 있으나, 시야가 나쁘고 잡목이 우거져 그다지 좋은 등산로는 아니다.
하지만 도갑사 계곡 길에 식상한 등산인들이라면 한번쯤 하산로로 이용해 볼 만한 곳이다.
물론 이 코스로 산행을 시작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2시간 이상 오름길의 잡목숲을 헤쳐야 할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오르기 보다는 차라리 하산길로 이용하는 것이 좋다.
억새밭으로 유명한 미왕재가 이 능선 코스의 시작점이다.
도갑사로 가는 계곡 길로 접어들지 말고 서쪽의 능선 끝까지 가면 무위사와 도갑산 방향의 등산로를 막은 울타리가 있다.
자연휴식년제 구간은 무위사 계곡길만 적용되고 있다.
이곳을 지나면 무덤 2기가 나타나고 계속해 능선의 고도가 낮아진다.
산세는 주능선의 화려함과는 너무도 대조적으로 심심할 정도로 평탄하다.
게다가 산길은 한껏 자라난 관목들의 가지로 가득해 앞으로 나가기 힘들 정도다.
손발을 이용해 나뭇가지를 헤치고 1시간 정도 진행하면 소나무와 활엽수 사이로 도갑저수지와 영암 벌판의 모습이 손바닥만하게 보이는 도갑산 정상에 도착한다.
주능선은 잡목에 가려 조망이 트이지 않는다.
동원농장으로 가려면 정상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서 서쪽의 지능선을 타고 내려선다.
도갑산 정상에서 동원농장으로 이어지는 비포장도로와 만나는 지점까지 약 40분 소요.
능선 중간에서 도갑사로 하산할 수도 있다.
② 도갑사 하산코스
미왕재 이후부터는 계곡으로 내려선다.
계곡 자체의 경치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어서 걸음이 절로 빨라진다.
도갑사까지 1시간이면 닿는다.
표지판과 나무울이 안내하는 대로 억새밭 북쪽의 샛길로 내려선다.
미왕재에서 도갑산으로 하여 도갑사로 가는 길도 있지만 대개는 이 홍계골 계곡 길을 이용한다.
홍계골은 제법 길이는 길지만 수량은 역시 바위산이어서인지 신통치 못하다.
물이 적으니 계곡 암반이나 바위들도 계류의 조탁을 받지 못해 생김이 들쭉날쭉하다.
미왕재에서 30분을 내려서면 계류를 만난다.
이곳에서는 북쪽 상견암 길이 갈라지는데, 미왕재로 올라갈 때 자주 사람들이 헷갈려서 엉뚱하게 상견암 길로 접어들곤 한다.
30여분을 더 내려서면 도갑사에 도착한다.
도갑사 뒤 계곡에 용추폭포가 있다.
도선 수미비를 뒤로하고 작은 다리를 건너면 용수폭포를 만나게 된다.
<도갑사>-염정의님 촬영
<도갑사계곡>-염정의님 촬영
월출산 서쪽에 있는 도갑사는 월출산 사암 중에 가장 큰 절이다.
한때 99개 절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 절다운 절은 도갑사뿐이러고 할 수 있다.
과거 한때는 선,교 양종 스님의 숫자가 1,000명을 넘었고, 총규모가 966칸, 소속암자만도 12개나 되었던 대가람이었다고 한다.
대흥사의 말사로 도갑사는 신라시대 승 통고(通高)에 의해 문무왕1년(661)창건되었다고 한다.
원래 그 자리에 '문수사'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여기서 어린 시절을 보낸 도선국사가 신라 헌강왕 6년(880)에 불사를 일으켜 그 터에 다시 사찰을 지어 도갑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후 조선조에 들어 두어 차례 중창을 거쳤다.
조선 중기 1456년(세조 2년)에 신미와 수미 대사가 중건했는데, 이 때의 건축물인 해탈문은 국보 제50호다.
해탈문은 절의 배치상 사천왕문에 해당한다.
1960년 해체,보수할 때 중도리 밑에서 발견한 묵서로 된 상량문에 의해 건립연대가 1457년임이 확인되었다.
정면 3칸, 옆면 2칸이고 지붕은 겹처마로 된 맞배지붕이다.
기단은 허튼층 쌓기로 하였고, 주춧돌 또한 자연석을 써서 전체적인 느낌은 소박하면서도 정겹다.
도갑사에는 이밖에 통일신라시대 불상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는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이 볼거리다.
미륵암 안에 있으며 구정봉 마애여래좌상과 생김이 흡사하다.
도선은 9세기 신라 말의 승려이자 풍수설의 대가로 영암 구림에서 태어났다.
고려 왕실은 도선의 고려 태조에 관한 예언으로 그를 극진히 존경하였다고 한다.
고려 태조는 '신라 말엽에 사찰을 함부로 이곳 저곳 세웠기 때문에 지덕을 손상하여 나라가 멸망하였으니 경계하여야 한다'고 했을 정도로 도선의 풍수도참설을 신봉했다.
<도갑사매표소 입구>-염정의님 촬영
사찰에서 나와 무엇보다 일본 황실에 우리의 문화를 전파한 '왕인박사유적지' 등을 돌아보는 것도 의의있는 일일 것이다.
정문에서 바라볼 때 오른쪽 기슭의 '성기동'(聖基洞)이 왕인박사가 태어난 곳이다.
그 성기골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은 그가 마셨다고 하여 '성천'(聖泉)이라 부르기도 한다.
유적지 뒷편인 월출산 기슭으로 오르면 왕인박사가 공부했다는 책굴(冊窟), 문산재(文山齋), 양사재(養士齋) 등이 있고 두 손을 소매 안에 넣은 모습을 조각한 2.57m의 석상이 있다.
이 석상은 왕인의 제자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스승을 그리워하며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사당 우편 왕인박사 탄생유적지에는 '옛날 최씨의 정원이 지금은 조가의 장소다.'(古崔氏園今曹家場)라는 글귀가 두 줄로 새겨진 바위가 있다.
이 곳은 도선의 어머니 최씨가 살았던 터로 그 곳에 한 자의 길이가 넘는 참외가 자라서 그것을 먹고 도선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구림리'(鳩林里)라는 마을 이름도 도선이 태어난 후 버려졌는데 비둘기의 보살핌을 받았다고 하여 '비둘기 숲'이란 뜻으로 붙여졌다.
이러한 탄생설화를 가진 도선은 풍수지리설로 유명한데 중국에서 풍수설을 배웠다는 설과 지리산의 어떤 도인으로부터 그 비법을 배웠다는 설이 있다.
심지어는 여우 여인에게서 구슬을 얻은 후 지리에 통달했다는 이야기도 전하는데 당시 풍수가 유명해진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 월출산 주능선 종주는 거리 자체가 10km로 얼마 되지 않아, 쉬는 시간 포함하여 7~8시간이면 넉넉하다.
도갑사에서 오른다면 별반 힘들이지 않고 소풍 가듯 하는 걸음걸이로 오를 수 있는 곳이다.
그후 천황봉까지도 동쪽부터의 등행에 비하면 한결 쉬워서 도갑사~천황봉쪽으로 종주하는 이들도 많다.
오르면서 주위의 기암괴봉들을 조망하는 재미는 천황사쪽이 훨씬 좋다.
더군다나 사자봉~매봉~구름다리의 쇠사다리 코스는 내려가기가 한결 더 위험하고 까다롭기도 하다.
만약 도갑사쪽에서 시작하는 종주를 할 경우에는 구름다리코스를 피하고 천황봉~광암터~바람골 코스를 이용하는 것이 안전하다.
종주는 겨울의 경우 구름다리~매봉~사자봉 코스는 피한다.
아이젠을 착용한 상테로 쇠사다리를 연이어 밟고 가기가 곤욕스럽다.
광암터~바람폭포 길로 가면서 보는 경치도 뛰어나다.
주능선을 타는 산행이 95%인데다가 능선 상에는 샘이 한 군데 있지만 관리가 잘 되지 않는다고 하니 아예 없는 것으로 간주, 물을 넉넉히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