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지미 코너스와 비욘 보그의 라이벌 관계가 무르익고 후반에는 존 매켄로가 뛰어들어 남자 테니스의 3인 경쟁체제가 확고해질 무렵, 당시 공산권 국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겁없이 도전장을 내민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반 랜들이다. 랜들의 성과는 지미 코너스와 비욘 보그, 매켄로 뿐만 아니라 80년대를 호령했던 매츠 빌란더, 슈테판 에드버그, 보리스 베커와 경쟁해야 하는 치열한 환경에서 거둔 것이었기 때문에 후세의 평가에 있어 다른 이들과는 차별화 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반 랜들이 -여자테니스의 나브라틸로바와 함께-테니스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전설적 인물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가 바로 동구권 출신이라는데서 증명하려고 한다. 자본주의 스포츠의 결과물이 되어버린 오픈시대 이후 사회주의국가에서 프로선수들의 활동범위는 아무래도 제약을 받기 마련이다. 물론 과거에도 체코출신의 야로슬라프 드로브니(Jaroslav Drobny)가 프랑스오픈(51, 52)과 윔블던(54)을 제패한 바 있고 얀 코데스(Jan Kodes)도 프랑스오픈(70, 71)과 윔블던(73) 타이틀을 획득한 바 있다. 말하자면 체코는 전통적으로 테니스 강국이었고 루마니아의 일리 나스타세(Ilie Nastase, 72년 US오픈과 73년 프랑스오픈 제패) 또한 공산권 국가 출신으로서 이름을 날린 선수였다. 그러나 이들과 이반 랜들과 다른 점은 공산국가 출신으로서의 남다른 설움 속에서 4대 메이저 대회 19회 결승 진출, 그중 8개의 메이저 타이틀, 당시까지 최다기간 랭킹1위 보유(270주)라는 기록적인 전과를 올렸기 때문이다.
이반 랜들(Ivan Lendl, 1960- ) 그는 존 매켄로가 태어난 지 1년 후인 1960년 3월 7일 체코슬로바키아의 오스트라바(Ostrava)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올가 랜들로바(Olga Lendlova)는 체코 국내랭킹 2위까지 오른 톱클래스 테니스 선수였고 아버지 이리 랜들(Jiri Lendl) 또한 국내 정상급의 테니스 선수였다.(그의 아버지는 1990년 체코 테니스협회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이러한 뒷배경 때문에 이반 랜들은 어려서부터 쉽게 테니스를 접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라켓을 잡은 것은 그의 나이 만 5세 때. 당시 까지도 선수생활을 하였던 어머니는 그를 어느 테니스 클럽에 등록시키고 다른 어린 선수들과 연습시키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테니스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고 기량은 날로 늘어만 갔다.
그의 나이 8세 때인 1968년. 그는 어린 눈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가장 암울했던 역사를 목격하게 된다. 피폐한 경제와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부르짖으며 프라하 거리로 나온 체코시민들은 탱크를 앞세운 소련군의 무차별 침공앞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 자유의 선봉에 선 당서기장 두프체크는 연행되고 이 때부터 무시무시한 소련의 압제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른바 ‘프라하의 봄’ 사건이 그것이다. 소련의 정치적 압력하에서 체코국민들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자라는 과정에서 공산주의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게된 이반 랜들은 체코가 자신의 전 인생을 바칠 곳이 될 수 없다고 인식, 해외로 나아가 테니스로 성공하는 외길인생을 목표로 삼게 된다. 그의 나이 15세에 이를 무렵, 그의 실력은 벌써 국가대표로 손색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에게는 마땅한 훈련장소가 없었다. 특히 겨울철에는 실내 테니스장을 이용해야했으나 인구30만의 도시에 실내 테니스장은 단 한 곳 뿐이었다. 더욱이 자신에게 배당된 시간은 일주일에 고작 1시간 뿐. 그렇지만 예정된 사람들이 오지 않으면 더 연습할 수 있었기 때문에 랜들은 매일 실내 테니스장으로 향했다. 사회주의 국가의 낙후된 시설 속에서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연습뿐이었다.
18세 때인 1978년, 그는 드디어 체코 국가대표에 발탁되고 동시에 프로로 전향했다. 그가 일찍부터 프로로 전향한 이유는 체코를 떠나 자유롭게 자본주의의 선진 환경에서 테니스를 하고픈 욕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 스포츠가 국가지상주의를 목표로 하고 있고 자본주의 스포츠인으로 대변되는 프로 선수들에게는 지원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프로를 택했던 것이다. <후에 그가 조국 체코를 등지고 미국을 택했다는(그는 85년에 조국을 떠났고 92년에 비로소 미국 시민이 되었다.) 비난이 따랐지만 그의 조국에 대한 기여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1978년부터 1985년까지 체코의 국가대표로 데이비스컵 대회에 참여하였고 1980년엔 사상 처음이자 현재까지도 유일하게 조국 체코에 우승컵을 안겨준 이가 바로 이반 랜들이다.
그는 프로에 뛰어든 1978년부터 1980년까지 메이저 대회에서 두각을 보이지 못했다. 지미 코너스, 비욘 보그, 존 매켄로와 같은 철옹성을 동구권 출신의 신출내기가 허물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80년에 연말 마스터스 컵에서 준우승(우승은 비욘 보그)을 차지하면서 그의 존재가 테니스계에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한다.
메이저 타이틀 획득의 꿈은 그가 여러 번 준우승을 기록한 끝에 1984년 프랑스오픈에서 이루어졌다. 84년 우승하기 까지 그는 준우승만 4회를 기록했었으므로(81년 프랑스오픈, 82, 83년 US오픈, 83년 호주오픈) 그의 첫 메이저 타이틀이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후 그가 거둔 메이저 타이틀은 존 매켄로(7개)를 뛰어넘는 총 8개. 프랑스오픈 3회 우승(84, 86, 87)과 US오픈 3년연속 우승(85-87), 그리고 호주오픈 2회 우승(89, 90)이 그것이다. 그는 준우승을 포함하여 메이저 대회 단식에서 결승에 진출한 것만해도 19회에 이른다. 19회의 결승진출은 오픈 시대 이후 지미 코너스와 비욘 보그, 존 매켄로를 능가하는 기록이 되었다. 유일하게 윔블던에서만 우승하는데 실패(86, 87년 준우승)하여 4대 메이저 대회 타이틀을 모두 획득하는 쾌거를 이루지 못했다.
그가 이룬 업적은 <메이저 대회 최다 결승진출> 뿐만이 아니다. 83년 2월에 처음으로 랭킹 1위에 등극한 이래 90년 8월까지 총 270주 랭킹 1위에 올라 지미 코너스(268주)를 누르고 당시까지 역대 최다 1위랭킹 보유자로 기록되었다.(후에 샘프라스에 의해 갱신됨) 특히 85년 9월부터 88년 9월까지 거둔 <158주 연속1위 달성>은 지미 코너스(160주 연속)에 이은 역대 2위 기록이다. 또한 그는 메이저 타이틀을 포함하여 통산 94개의 싱글 타이틀(109개의 지미 코너스에 이어 역대 2위), 1279승 274패라는 총전적(지미 코너스에 이어 역대 2위)을 보유, 개인타이틀 수에서도 기록적인 선수임을 증명하였다. 톱랭커 8명이 연말의 왕중왕을 가리는 마스터스컵 대회에서도 5회 우승(81, 82, 85, 86, 87), 4회 준우승(80, 83, 84, 88)하여 이후의 샘프라스(5회 우승)와 함께 최다 왕중왕에 올랐던 사실도 무시할 수 없는 업적으로 꼽히고 있다.
1985년부터 87년까지 3년 연속으로 ATP에 의해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던 그는 1994년 부상이 악화되어 US오픈 참가를 끝으로 은퇴의 길을 택했다.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조국을 떠난 그는 1992년 공식적으로 미국 시민권이 주어졌다. 그는 자신의 국적변경으로 인하여 한때 체코국민들로부터 <나브라틸로바와 함께 조국을 등진 인물>이란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동구권의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하기 시작한 90년대 이전,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시기에 테니스를 통하여 사회주의의 체제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등 부상이 완치되지 않아서 은퇴후 현재까지 시니어 투어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다. 시니어 투어 대신에 현재 아마추어 골프선수로 활약하고 있는데 얼마전 미국 플로리다 주의 미니 골프투어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둔것으로 알려졌다. 가족으로는 아내 사만다(Samantha)와 다섯 자녀가 있으며 그중 4명의 딸들이 주니어 테니스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올해 2001년 비로소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된 이반 랜들. 테니스 팬들은 이제 그의 플레이를 볼 수 없지만 그는 팬들의 기억속에 전설적 인물로 영원히 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