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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의 창시자 태조(太祖) 조광윤(趙匡胤)
북송 태조(太朝)는 이름이 조광윤(趙匡胤: 927~976)이다. 일찍이 후주(後周)의 전전도점검(
殿前都点檢: 후주 최고 무관직의 하나, 황제 친위군의 최고 장수)을 역임하고 있었는데, '
진교병변(陳橋兵變)' 중에 황제로 옹립되어 송나라의 창시자가 되었다.
17년간 재위하다 50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후세 사람들은 그가 동생 조광의(趙匡義)에
게 피살되었다고 의심하기도 한다. 영창릉(永昌陵: 지금의 하남성 공현<恐縣> 서남쪽)에 안
장되었다.
조광윤(趙匡胤)의 본적은 탁주(涿州: 지금의 하남성 탁현)인데, 부친 조홍은(趙弘殷) 때에
낙양(洛陽)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낙양의 협마영(夾馬營)에서 태어났다. 부친 조홍은은 후
당(後唐), 후진(後晋), 후한(後漢)의 군관이었다. 조광윤은 처음에 후한의 대장 곽위(郭威)
의 휘하에 있으면서 무예를 좋아하여 곽위의 눈에 들었다. 그후 그는 다시 곽위를 후주(後
周)의 황제로 옹립하는데 참여하여 전장금군(典掌禁軍)에 중용되었다. 후주 세종(世宗) 시
영(柴榮) 때에 그는 또 혁혁한 전공을 세워 전전도점검(殿前都点檢: 황제 친위군의 최고 장
수)으로 승진하여 후주의 병권을 장악하고, 송주(宋州: 지금의 하남성 상구현<商丘縣> 남쪽
) 귀덕군절도사(歸德軍節度使)를 겸임하여 수도 변경(汴京: 지금의 하남성 개봉<開封>)의
방위를 책임졌다. 후주 세종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시종훈(柴宗訓)이 7살의 어린 나이로 황
위를 계승하였다. 조광윤은 그의 동생 조광의(趙廣義), 막료 조보(趙普)와 함께 황위 찬탈
을 비밀리에 모의하였다.
960년 정월, 진주(鎭州: 지금의 하북성 정종현<正宗縣>)와 정주(定州: 지금의 하북성 정현<
定縣>)에서 북한(北漢)과 요(遼)나라의 연합군이 남하하여 후주를 침공해 들어온다는 보고
를 보내왔다. 후주의 부태후(符太后)와 재상 범질(范質), 왕부(王溥) 등은 사실 여부를 확
인하지 않고 황급히 조광윤에게 대군을 거느리고 북상하여 적을 방어토록 하였다. 갑신일(
甲辰日) 조광윤의 부대는 진교역(陳橋驛: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 동북 40리 지점)에 이르러
숙영을 하였는데, 그 다음날 새벽 진교역에서는 갑자기 사방에서 큰 함성 소리가 울려퍼졌
다. 술에서 막 깨어난 조광윤이 침실에서 나와 보니 조광의와 조보를 필두로 한 장수들이
한 손에 무기를 들고 대오를 지어 뜰 앞에 서서 일제히 소리치는 것이었다.
"저희들에겐 주인이 없으니 점검(点檢: 즉 조광윤)께서 천자가 되어 주십시오!"
조광윤이 아무 대답을 하지 않자 장수들은 미리 준비해 둔 황포를 그의 몸에 입힌 후에 일
제히 절을 올리고 "만세(萬歲)"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 사건을 역사에서는 '진교병변(陳橋
兵變)'이라 일컫는다.
이에 조광윤은 대군을 거느리고 변경으로 회군하였다. 후주의 대신 한통(韓通)은 정변이 일
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군대를 조직하여 대항할 준비를 하던 도중 조광윤의 부하에 의
해 피살되었으며, 재상 범질(范質), 왕부(王溥)는 협박에 못이겨 굴복하였다. 정월 5일 오
후에 조광윤은 시종훈을 폐위시키고 황제에 올라 국호를 송(宋), 연호를 건륭(建隆)이라 하
고 도읍을 변경(汴京: 지금의 하남성 개봉<開封>)에 정했으니, 역사에서는 그것을 북송(北
宋)이라 일컫는다.
조광윤은 북송을 건국한 후에 천하에 할거 세력이 난립하는 것을 보고 조보에게, "나는 침
상 밖이 모두 다른 사람의 영역 같아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다."고 하였다. 그후 조보의
도움으로 송나라는 먼저 후주의 잔존 세력 이균(李筠), 이중진(李重進) 등의 반항을 진압한
다음, '선남후북(先南後北)'의 정책을 취하여 남평(南平), 호남(湖南), 후촉(後蜀), 남한(
南漢), 남당(南唐) 등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북방의 거란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였다.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조광윤은 많은 조치를 취하였다.
961년 가을 어느날 저녁에 송 태조는 금위군(禁衛軍) 장수 석수신(石守信) 등을 연회에 초
청하였다. 절반 쯤 지났을 때 송 태조가 입을 열었다.
"제장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오. 그러나 천자의 자리에 오르고 보
니 절도사 시절에 유유자적하던 때와는 달리 하루하루가 실로 힘들군요. 지금 나는 거의 하
루도 편안하게 잠자지 못하고 있소."
석수신 등이 "폐하께서 지금 귀하신 천자의 몸이 되셨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송 태조는 "이 자리에 누가 앉고 싶소?"라고 물었다. 석수신 등은 그 말 속에 뼈가
있음을 직감하고, "지금 천명이 이미 정해졌는데 누가 감히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
까?"라고 하면서 급히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태조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대들이야
다른 마음을 품을리 없겠지만, 만약 어느날 아침에 부하들이 그대들에게 황포를 입힌다면,
그대들이 황제가 되고 싶지 않다 하더라도 잘 안될 것이요!"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석
수신 등이 대경실색하여 황급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채 눈물을 흘리면서, "저희들이
정말 어리석게도 그 점을 미처 생각치 못했으니 폐하께서 저희들에게 활로를 열어 주십시오
."라고 말하자 태조가 대답했다.
"사람의 수명은 매우 짧소.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서 편안하게 부귀영화를 누리면 그만일 뿐
이오. 내가 그대들을 위해 생각해보니, 병권을 내놓고 지방으로 내려가 좋은 논밭과 집을
사서 자손 대대로 물려주고 자신은 매일 흥겹게 술마시며 평생을 즐겁게 보내는 것이 제일
좋겠군요. 나는 그대들과 다시 인연을 맺겠소. 이렇게 하면 군신 간에 의심이 사라지고 상
하가 모두 편안해질 테니 이 얼마나 좋은 것이요!"
석수신 등은 은혜와 위엄이 함께 서린 이 말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그 다음날 바로 병을 핑
계로 사직하고 병권을 반납하였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으로 그 유명한 '배주석병권(杯酒釋
兵權: 술로 병권을 놓게 하다)' 이야기이다. 얼마 후 태조는 같은 수단으로 왕언초(王彦超)
등 절도사들의 병권도 박탈하고, 지방의 행정권, 재정권도 모두 중앙으로 환속시켰다. 이러
한 조치는 기본적으로 중국역사상 여러 차례 출현하였던 지방할거 국면을 종식시켰다.
태조는 농업생산을 중시하여 수리사업을 일으키면서도 부역을 줄여 사회 경제적 발전을 촉
진시켰다. 태조는 많은 업적을 남긴 제왕이긴 하였지만, '내부를 안정시켜 외적을 막는(安
內外守)' 정책을 편중되게 시행하여 문(文)을 중시하고 무(武)를 경시하였다. 이로써 그후
로도 북송은 내부를 중시하고 외부를 경시하여 나날이 허약해지는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는 병권을 내놓은 장수들에게 대량의 전답을 하사하고 토지의 겸병을 강화하여 계층간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으며, 이로써 건국한지 얼마되지 않아 농민봉기가 폭발하였던 것이다.
태조는 비록 장수였지만 독서를 매우 좋아하여 항상 손에 책을 놓지 않았다. 그가 후주 세
종을 따라 평회전(平淮甸: 지금의 회하<淮河> 유역)에 갔을 때, 어떤 사람이 후주 세종에게
그가 여러 대의 수레에 자기 물건을 실었는데 그 중 대부분이 보물이라고 밀고했다. 세종이
사람을 보내어 사실을 조사해 보게 하였더니 수레 안에는 수천권의 책만 가득하였다고 한다
. 그래서 세종이 그에게, "그대는 장수인데 책이 웬말이요!"라고 묻자 그는, "제게는 폐하
께 바칠 좋은 계책이 없으니, 책을 많이 읽어 견문을 넓히고 지혜를 닦을 수밖에 없습니
다."라고 대답했다.
태조는 황제에 오른 후에도 학자들을 존중하고 중용하였다. 한번은 그가 어려운 문제를 만
나 재상 조보에게 물었더니 조보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것을 다시 학자에게 물었
더니 학사(學士) 도곡(陶穀)과 두의(竇儀)가 정확하게 대답하였다. 태조는 "재상은 반드시
학자를 등용해야지!"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독서를 많이 하지 않는 문신이나 무관들
에게 태조는 항상 책을 많이 읽어서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라고 독려하였다. 이에 조보
같은 사람이 바로 그의 독려를 받으면서 손에 책을 놓지 않은 인물로 변신했다.
태조는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 자격과 경력을 따지지 않았다. 그는 한편으로는 신하들에게
유능하면서 자격과 경력에 흠이 없는 인재를 선발하여 중임을 맡기라고 명령하였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자신이 직접 내외 백관들의 장단점과 재능을 유심히 살피면서 암암리에
기록해 두었다. 그리하여 자리가 빌 때마다 그는 자신이 기록해 둔 책을 펼쳐서 그 자리에
가장 적합한 인재를 선발하였다. 이것은 또한 신하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함양하는데 최선을
다하도록 하였다.
태조는 담력과 지략을 갖춘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가 황제에 막 올랐을 때는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는 절도사들이 제압하기 힘들 정도로 거만하게 굴었는데, 당시에 그들을 '십형제(十
兄弟)'라 일컬었다. 어느날 태조가 그들 십형제를 불러 칼과 활, 준마를 준 다음, 자신도
호위병 없이 홀로 말에 올라 그들과 함께 황궁 밖으로 달려나갔다.고자문(固子門)의 수풀
속에 이르러 십형제와 함께 말에서 내려 술을 마셨다. 술을 몇 잔 들이킨 후에 태조는 갑자
기 그들에게 말했다.
"여기는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이니, 그대들 중에서 황제가 되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 나를
죽이고 제위에 올라도 좋다."
이러한 그의 기개에 기가 질린 십형제는 하나 하나 땅에 엎드려 벌벌 떨면서 "소인들이 어
찌 감히!"라고 연발했다. 태조는 재삼 물었지만 그들은 머리를 조아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
았다. 그러자 태조는 그들에게,"그대들이 나를 천자로 받아들인 이상 당연히 각자 신하의
책무를 다해야 한다. 앞으로 천자를 안중에 두지 않고 오만방자하게 굴며 불법을 저지르면
더 이상 용서치 않겠노라!"고 훈계하자, 절도사들은 모두 만세를 외치며 복종을 맹세했다.
태조는 도량이 넓어서 살륙으로 사람을 복종시키지 않았다. 한번은 그가 연회를 베풀어 신
하들을 초청했다. 그 중 한림학사(翰林學士) 왕저(王著)는 원래 후주의 신하였는데, 이때
술에 취해 옛 주인이 그리워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크게 놀란 신하들은
모두 손에 땀을 쥐었다. 그런데도 태조는 전혀 그를 나무라지 않고 그를 데리고 나가 휴식
을 취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왕저가 나가려 하지 않고 병풍 뒤에 숨어서 대성통곡을 하자
간신히 그를 데리고 나갔다. 이틑날 어떤 사람이 왕저가 대성통곡한 이유는 후주 세종이 그
리워서 그런 것이니 엄벌에 처해야 마땅하다고 아뢰었다. 그러자 태조는 "술에 취해 그런
것이야. 세종 때 나는 그와 같은 조정의 신하여서 그의 성격을 잘알아. 그와 같은 서생이
옛 주인이 그리워 우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으니 그를 내보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태조가 '진교병변' 후에 회군하여 변경 황궁으로 들어왔을 때 어떤 후궁이 어린애를 안고
있는 것을 보고 누구의 아이인지를 묻자 후주 세종의 아들이라 대답했다. 이때 태조는 한
쪽에 서 있던 범질, 조보, 반미(潘美)에게 그들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지 물었다. 조
보 등은 당연히 제거하여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대답했지만, 태조는 "내가 남의 자리를 이
어받으면서 다시 그의 자식마저 죽여야 하다니, 나는 차마 그러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그
리고는 그 아이를 반미에게 키우라고 준 후에 더 이상 그 아이에 대해서 묻지 않았으며, 반
미도 태조에게 그 아이 이야기를 한번도 꺼내지 않았다. 그 아이는 성인이 된 후에 이름을
유길(惟吉)이라 하였고 벼슬이 자사(刺史)에 이르렀다.
또 한번은 태조가 말을 타고 출궁한 적이 있었는데, 대계교(大溪橋)를 지날 때에 갑자기 화
살이 하나 날아와서 황룡기(黃龍旗)에 꽂혔다. 금위군은 모두 대경실색을 하였지만 태조는
오히려 가슴을 치면서 "내게 활쏘는 법을 가르쳐 줘 고맙구나!"라고 하고는 금위군이 화살
쏜 사람을 잡으러 가지 못하게 했다. 그후에는 정말로 아무런 일이 없었다.
진교역(陳橋驛)은 진교와 봉구(封邱: 모두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 동북쪽에 있음) 사이에 있
었다. 조광윤이 정변을 일으켰을 때 진교의 수문장은 문을 닫고 조광윤의 군대가 통과하도
록 내 버려두지 않았다. 조광윤은 어쩔 수 없이 봉구로 돌아갔더니 봉구의 수문장은 즉시
문을 열어주었다. 조광윤은 황제에 즉위한 후에 오히려 진교의 수문장은 승진시키면서 직분
에 충실하였다고 칭찬하고, 봉구의 수문장은 본분을 망각하였다고 힐책하면서 참수하였다.
태조는 후원에서 새 잡기를 좋아하였다. 한번은 한 신하가 급한 일이 있다고 하면서 뵙기를
청하자 즉시 그를 접견했다. 그러나 상소문을 읽어 보니 매우 평범한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 태조가 대단히 화를 내면서 왜 거짓말을 했느냐고 꾸짖자, 그 신하는 "신은 아무리 작은
일도 새 잡는 일보다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매우 화가 난 태조는 도끼자
루를 들고 그의 입을 내리쳐 그의 치아 두 개를 부러뜨렸다. 그 신하는 아프다고 소리치지
도 않고 천천히 몸을 아래로 굽혀 치아를 잔에 주워 담았다. 화가난 태조가 "치아를 주워
담아 나를 고소하러 가려느냐?"라고 묻자, 그 신하는 "신에게는 폐하를 고소할 권한이 없습
니다. 다만 사관은 오늘의 일을 반드시 기록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태조
는 갑자기 화를 누그러뜨리며 그가 충신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에게 상을 내려 표창하였
다.
976년 10월, 태조는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어 모든 정사를 동생 조광의에게 위임하였다. 조
광의는 낮에는 정사를 처리하고 밤에는 만세전(萬歲殿)에 누워있는 형에게 문병갔다. 계축
일(癸丑日) 저녁 무렵 폭설이 휘몰아치는 중에도 조광의는 여전히 상소문을 검토하고 있었
다. 내관이 황급히 달려와서 태조가 만세전에서 급히 부른다는 보고를 전했다. 급히 달려가
보니 태조는 침상에서 숨을 헐떡이며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눈을 크게 뜨고 문밖만 바라
보고 있었는데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조광의는 침상 옆에서 태조를 모시고 있던 내관
을 물러가라 명하였다. 내관들은 문밖에서 멀찌막이 서있었으며, 만세전 안에서는 마치 태
조가 조광의와 이야기하는 듯한 소리만 들렸다. 그 소리는 어렴풋하였으며 때로는 이어졌다
끊겼다 하여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였다. 잠시 후 만세전 안에는 촛불에 흔들리는 그림자가
보였는데,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면서 마치 조광의가 무엇을 피하는 듯 하였다. 계속해서
도끼가 바닥에 찍히는 소리가 들리면서 태조의 격앙된 목소리가 이어졌다.
"잘 가거라!"
이때 조광의는 문쪽으로 달려가서 내관에게 황후와 황자를 불러오게 하였다. 황후와 황자가
달려와 보니 태조는 이미 죽어 있었다. 이를 근거로 후인들은 다음과 같이 추측하곤 한다.
조광의가 만세전에 들어간 후 태조가 잠든 틈에 태조를 간호하던 후궁 비씨(費氏)를 희롱하
였다. 태조가 깨어나서 그 상황을 보고 크게 진노하여 조광의에게 도끼를 집어던지자 조광
의가 살짝 피하여 도끼가 바닥에 찍혔다.
어떤 사람은 태조에게 귀신이 달라붙어 조광의가 귀신을 쫓아내 주기 위해 도끼를 휘둘렀기
때문에 도끼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고도 하고, 조광의가 태조를 죽일 계책으로 그
런 것이라고도 한다. 지금까지도 당시의 그 촛불 그림자와 도끼 소리는 아직도 풀지 못한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조광윤이 죽은 후 그의 묘호를 태조(太祖)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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