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개교 100주년도 넘는 재동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58년, 참말로 나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 채 학교에 들어갔다.
첫 딸인데다 어찌 아이를 간수해야 되는 줄도 몰랐던 엄마는 뭘 모르니까 학교를 보내는 것이고, ㄱ,ㄴ은 죄다 학교에서 배우겠거니 하며 나를 학교에 보냈다고 한다.
삼청공원 약수터 구석구석을 누비던 나의 자유시절은 일단 마감을 했고, 빨간 란도셀, 하얀 레이스 칼라가 달린 자주색 벨벳 원피스에 흰 스타킹을 신고 초등학교의 첫 날을 맞았다.
입학식 날부터 징징 울면서 갔다. 다른 집 애들은 미리부터 책보 싸 놓고, 왼쪽 가슴의 흰 손수건에 붓 글씨체로 이름 석자를 써서 매단 단정한 매무새였다.
잠투정으로 부어터진 얼굴을 하고 학교에 가보니 애들마다 제 이름 석자는 물론 부모 성함까지 또박또박 쓰는 게 아닌가?
다른 아이들도 다 당신 딸 수준인줄 알았던 윤순모 여사(울 엄마)는 그때부터 당황하기 시작하여, 닦달을 하며 ㄱ ㄴ ㄷ ㄹ + - 시계 보는 법 등을 나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워낙 헐랭이여서 이것저것 잃어버리기 일쑤였던 나…. 그 중에서 내가 제일 속상했던 건, 구구단 카드가 담긴 예쁜 주머니를 학교 똥두간에다 '풍덩!' 빠뜨린 것이었다. 동네가 울릴
정도로 왕 통곡을 하며 집으로 돌아 왔다.
대개 큰딸이 거의 그런 성향 아닐까 싶은데, 야물지 못하고 얼 띠고 하여튼 내가 그랬다.
게다가 학교에 넣은 가장 큰 이유가 애가 키가 커서였다니….
어린아이일 때 석 달, 여섯 달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되짚어보면, 나는 나이보다 일찍 학교 들어간 값을 톡톡히 치른 셈이다.
게다가 매는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이유는 양희경이를 매번 고자질했기 때문이다.
옛날 파리채의 자루는 철사에다 비닐 테이프를 줄줄 감은 건데, 그게 바로 나의 매였다. 종아리엔 언제나 몇 줄이 그어져 여름에도 반 스타킹이나 양말을 신어야 창피함을 모면할 수 있었다.
된통 맞고 울 땐 우리 집 옆 굴뚝에 기대어 먼 하늘 쪽을 바라보며 '지금 이 여자는 나를 낳은 엄마가 아닐 거다. 진짜 나를 낳은 엄마는 저 하늘 아래 어딘가에 살고 계실 거야. 엄
마! 엄마! 보고 싶어요!'하며 되도록 울음 끝을 기일게 늘이며 갖은 청승으로 우는 시간을 늘여 붙였다.
동생은 참말 성가시기도 한 존재다. 동생 손 꼭 잡고 놀라는 게 엄마의 꾸준한 명령이었는데, 물론 말 잘 듣는 날은 손금 따라 까만 땟국이 줄을 배일 정도로 동생 손을 붙잡고 다녔
지만, 가끔 옆집 경숙이네 동생을 던지듯 맡겨놓고 신나게 삼청 공원을 뛰어다니는 날이면 꼭 엄마한테 들키게 되었다.
그럼 또 파리채로 맞는 날!
그러다 어느 날 저녁 희경이가 펄펄 열이 나면서 아팠는데, 나는 그야말로 한참 놀다가 어두워지고 나서야 집에 들어왔다. 헛소리하며 앓는 동생 옆에서 청승맞게 '꺼이꺼이~' 울며
'이 못된 언니를 용서하라'고 기도한 기억도 난다.
막내 희정이가 태어나던 날. 희경이랑 둘이 안마당에서 놀다가 '응애응애~' 하는 아기 울음 소리를 들었다. 첫째, 둘째 때와 달리 유일하게 아버지가 지켜본 셋째의 출산이었다.
지금도 햇살이 따사로운 가을날 아침 들리던 아기 울음소리가 생생하다. 그리하여 내가 학교 가기 전 우리 집은 딸 셋이 되었고, 양대령(울 아버지 별명)은 막내를 퍽이나 예뻐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