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보는 동학농민전쟁이 벌어지기 한해 전 서울의 대표적인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조선 왕조 시대의 마지막 후예였던 셈이다. 그는 가학(家學)의 전통을 이어받아 식민지 조선의 문화계를 지키는 중심적인 인물이 되었다.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으로 말미암아 민족 정체성에 위기가 닥치자 이른바 조선학운동(朝鮮學運動)을 통해 민족정신을 지키려 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대한민국의 초대 감찰위원장으로서 새 나라 건설에 앞장섰다.
정인보는 1893년 5월 6일 외가인 서울 종현(鍾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경시(景施)였고, 자는 경업(經業)이었으며, 위당(爲堂)과 담원(薝園) 그리고 미소산인(薇蘇山人) 등의 호를 썼다. 본관은 동래로서 호조참판을 지낸 아버지 정은조(鄭誾朝)는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정원용(鄭元容)의 증손(曾孫)이었다. 정인보는 이회영(李會英)·이시영(李始榮) 형제와 마찬가지로 대표적인 소론(少論, 조선 시기 붕당 중 하나) 명문가 출신이었다.
정인보는 일제의 국권 침탈이 본격화되자 부모를 따라 진천과 목천 등지로 낙향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는 진천에 머무는 동안 집안 어른인 정인표(鄭寅杓)에게 주역(周易)을 배웠다. 정인표는 18세기의 정제두(鄭齊斗)의 학문을 이어받은 인물이었다.
정인보는 18세 무렵 이건방(李建芳)의 제자가 되었다. 이건방도 정제두의 제자로 이루어진 강화학파(江華學派)의 맥을 이은 인물이었다. 강화학파는 성리학이 판을 치던 조선의 사상계에서 유일하게 양명학(陽明學)을 받아들여 발전시킨 학파였다. 그는 이건방을 통해서 양명학을 접할 수 있었고 훗날 직접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이라는 글을 짓기도 하였다.
정인보는 1911년부터 1912년 사이에 두 차례에 걸쳐 중국 만주로 건너가 이시영 등이 운영하고 있던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방문하였다. 당시 신흥강습소를 운영하고 있던 이시영·이석영(李石榮) 형제는 그와 마찬가지로 소론 명문가 출신이었다. 그는 1913년 상해로 건너가 약 반년 동안 머물렀다. 그는 그곳에서 홍명희(洪命熹)·문일평(文一平)·이광수(李光秀) 등과 동거하였다. 그는 신채호(申采浩)·신규식(申圭植)·김택영(金澤榮) 등과 함께나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중국 외유를 통해서도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하고 귀국하고 말았다.
정인보는 중국 외유를 마치고 돌아온 후 10여 년 동안 특별한 사회활동을 하지 않고 칩거하면서 내면적 역량을 길러나갔다. 그는 3·1 운동이 끝나고 난 뒤 비로소 조선 문화계의 중심적인 인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정인보는 1923년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의 전임교수로 초빙된 후 1937년까지 15년 동안 이곳에서 교육과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는 주로 한문과 역사를 가르쳤다. 그는 이밖에도 협성학교(協成學校)와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 등 여러 학교에 출강하였다. 그는 1924년부터 『동아일보(東亞日報)』의 논설을 집필하였으며 1925년에는 한때 경영난에 빠졌던 『시대일보(時代日報)』가 재정을 보충하여 속간하게 되었을 때 한기악(韓基岳)과 함께 간부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정인보는 대종교(大倧敎)에도 입교하였다. 『대종교중광60년사』에 따르면 그는 국내 지역을 관할하던 남일도본사의 일원이었다고 한다. 그는 1920년대 중반 이후 중광절(重光節)이나 개천절(開天節) 등 대종교의 기념일을 기리는 강연이나 논설을 도맡다시피 하였다.
정인보는 1926년 순종이 죽었을 때 「유릉지문(裕陵誌文)」을 짓는 일을 맡았다. 당시 순종의 장례식을 이용하여 제2의 3·1 운동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순종의 장례식 당일인 6월 10일에는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정인보가 지은 지문은 바로 이날 『동아일보』에 게재되었다. 이러한 글을 정인보가 지었다고 하는 것은 당시 조선 문화계에서 그가 차지하고 있던 위치가 어떠한지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920년대 조선 문화계의 숙원사업은 조선어사전 편찬이었다. 당초 주시경(周時經)이 조선광문회(朝鮮廣文會)를 통해 『말모이』란 제목으로 조선어사전을 편찬하려 시도한 바 있다. 하지만 그의 사망으로 『말모이』는 미완성으로 그치고 말았다. 최남선(崔南善)은 1927년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를 조직하여 조선광문회의 남은 원고를 바탕으로 다시 조선어사전 편찬을 시도하였다. 이때 정인보도 계명구락부에 참여하여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에 힘을 보탰다. 그는 1929년 정식으로 출범한 조선어사전편찬회에 발기인과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 조선학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는 점차 노골화하고 있던 일제의 동화정책에 맞서서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운동이었다. 정인보는 안재홍(安在鴻)·문일평 등과 함께 조선학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1935년 7월 20일에 정약용(丁若鏞) 서거 100주년 기념 학술행사를 개최하였다. 이것이 바로 조선학운동의 신호탄이 되었다.
정인보는 개인적으로 1920년대 말부터 이미 민족 문화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는 1929년 『성호사설(星湖僿說)』의 해제를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1930년대에 들어서도 『동아일보』에 여러 고전에 대한 해제를 꾸준히 연재하였다. 그는 1933년 8월 경북 풍기에서 2백년 전에 제작된 「동국조선지도」와 「백두산도(白頭山圖)」를 발견하는 등 그동안 묻혀 있던 고전들을 발굴하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는 1934년 9월 10일부터 『동아일보』에 「유일한 정법가 정다산 선생 서론」이란 제목의 논설을 6회에 걸쳐서 연재하였다. 그는 이러한 연장선에서 조선학운동을 제창한 것이다.
정인보가 왜 조선학운동을 제창했는지는 그가 1935년 1월부터 『동아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한 「오천년간 조선의 얼」이란 글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얼’ 중심의 정신사적인 역사관을 강조하였다. 그가 강조한 ‘얼’이란 민족정신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얼’의 반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역사라고 보았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신채호와 박은식(朴殷植)의 민족주의적 역사관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다.
이렇게 정인보는 신채호와 박은식의 민족사관을 이어받았지만 고대사뿐 아니라 조선 후기 의 사상사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특히 남인(南人, 조선 시기 붕당 중 하나)과 소론의 학풍에 주목하였고 이 가운데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사상적 흐름을 찾아내 이것에 대해 실학(實學)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의 조선학을 지탱하는 하나의 기둥이 웅혼했던 고대사였다면, 또 하나의 기둥은 조선 후기의 실학이었다.
총독부 당국은 정인보가 제창한 조선학운동을 위험시하였다. 그래서 그가 강사로 내정되어 있던 조선역사강좌는 종종 금지되곤 하였다. 『동아일보』에 기고된 그의 글들도 빈번하게 압수되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갈수록 조선학운동마저도 탄압을 받게 되자 그는 가족을 이끌고 낙향하였다. 1940년에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으로 이주하였으며 1943년에는 전라북도 익산군 황화면 중기리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정인보는 1945년 8월 15일 해방되자마자 사방에서 부름을 받았다. 해방 직후 만들어진 건국준비위원회는 135명의 주요인사에게 안내장을 발송하였는데 그의 이름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미군정 당국도 그에게 협력을 요구하였다. 그는 1945년 11월 14일 미군정 학무국 산하에 만들어진 조선교육심의회에 교육이념분과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정인보는 신탁통치반대운동을 계기로 정치활동에도 뛰어들었다. 그는 1946년 초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과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의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정치활동은 그의 체질과는 맞지 않았기 때문인지 1946년 11월 2일 모든 정치단체에서 탈퇴하겠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리고는 당시 국학(國學)의 최고학부를 표방하면서 만들어진 국학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정인보에게도 중요한 역할이 맡겨졌다. 그는 1948년 8월 28일 정부의 기강을 확립하고 사정활동을 수행하기 위한 감찰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다른 공직은 마다하던 그도 감찰위원장 자리만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감찰위원회는 출범 이후 정력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측근이던 임영신(任永信) 상공부장관의 면직(免職)을 결의하고 이를 국회의장에게 통고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당시 정부는 감찰위원회의 권한을 축소하려고 하였다. 그는 감찰위원장으로 취임한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49년 7월 사임하고 말았다. 그는 감찰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난 후 다시 은거하면서 국학 연구에 몰두하다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납북(拉北)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