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전직 로이터통신(Reuters) 기자였던 앤드류 맥그레거 마샬(Andrew MacGregor Marshall)이 2013년 10월 31일에 자신의 자신의 블로그 '젠 저널리스트'(ZENJOURNALIST)에 공개한 논문이다. 이 글은 이제까지 태국 정치 및 왕실에 관해 발표된 글 중 가장 심도 있는 내용이며, '위키리크스'(Wikileaks)가 폭로한 미국 정부의 비밀 외교전문을 광범위하게 분석해, 태국 정치의 심연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크메르의 세계'가 한국어로 번역했고, 동영상 등 일부 자료를 추가했다. 전편을 먼저 읽어보려면 여기(1편, 2편, 3편, 4편)를 클릭하라.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5)
กลียุค — Thailand’s Era of Insanity
2008년 8월 31일, 치앙마이(Chiang Mai)의 한 대학에서 영어 강사를 하면서 프리랜서 작가 생활을 하던 호주인 남성 해리 니콜라이데스(Harry Nicolaides)가 서양인으로는 왕실모독 처벌법(lèse majesté law: 형법 제112조)의 가장 최근의 위반자가 됐다. 니콜라이데스는 2005년에 <신빙성 : 그 진실은 진실인가?>(Verisimilitude: Is the truth, the truth?)라는 제목의 소설을 자비로 출판했다. 그는 겨우 50부만을 찍었고, 팔린 책은 고작 7권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이 책의 한 문단에서 태국 왕자의 성적인 속임수와 관련된 내용을 다뤘다. 비록 왕자의 이름은 명시되어 있지 않았지만, 마하 와치라롱꼰(Maha Vajiralongkorn: 1952년생) 왕세자를 모델로 한 것임이 분명했다.
라마 국왕부터 왕세자에 이르기까지, 귀족들은 연애에 관한 복잡한 관계와 음모들로 유명했다. 왕세자는 주요한 아내들을 여럿 두고 있었고, 노리개용 애첩들도 비밀리에 한 무리를 두고 있었다. 그의 아내 중 한명은 비밀로 부쳐진 부적절한 관계 때문에 최근 가족 전체를 이끌고 해외로 망명했다. 여기에는 왕세자 부부가 함께 잉태했던 아들도 포함됐다. 왕세자는 이후 다른 여성과 결혼해 새로운 자녀를 낳았다. 왕세자가 첩들 중 한명과 사랑에 빠졌다가 그녀가 왕세자를 배신할 경우, 그녀는 물론이고 그 가족들까지 사라진다는 소문이 있었다. 사라지는 이들은 이름과 가문의 혈통, 그리고 존재했던 흔적까지 모두 영원히 지워졌다. |
니콜라이데스는 자신의 고국인 호주로 돌아가기 위해 방콕의 국제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다 체포됐다. 그는 보석도 불허된 채 '방콕 구치소'(Bangkok Remand Centre)에서 재판을 기다려야만 했다.
한편, '쁘레아위히어 사원'(Preah Vihear temple)을 둘러싼 긴장완화의 노력이 태국 군의 공세적 병력 이동때문에 손상을 받게 되면서, 캄보디아와 국경분쟁을 둘러싼 적개심은 계속해서 끓어올랐다. 시리낏(Sirikit: 1932년생) 왕후에 충성하는 태국 군 수뇌부는 태국-캄보디아 국경분쟁을 끓어오르게 만든 후 계속해서 긴장을 유지시켰다.
(사진) 에릭 G. 존 태국주재 미국대사. 그는 태국의 정치소요가 극심해진 2007년 10월부터 2010년 12월 사이에 태국에서 근무하면서, 당시 상황에 관한 수많은 외교전문을 남겼다. 물론 그러한 외교전문은 본국 국무부로 비밀리에 보낸 것이지만, '위키리크스'의 폭로로 인해 미국 정부의 합법적인 공개시기보다 50년 이상 일찍 세상에 나오고 말았다. [크세]
방콕 주재 미국대사 에릭 존(Eric G. John)은 2008년 8월 29일 본국에 보낸 비밀 외교전문에 <태국시위: PAD에 관한 입문서>(Thailand Protests: A PAD Primer)란 제목을 달았다. 그는 이 전문을 "옐로셔츠 운동(PAD)에 관한 가이드북"이라고 규정했다. 이 전문은 옐로셔츠 내부의 극단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면서, 그들이 시리낏 왕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친-탁신계 정부인] 사막 순타라웻(Samak Sundaravej: 1935~2009) 총리의 '국민의 힘 당'(PPP) 정권에 반기를 든 반정부 시위의 배후는 '국민 민주주의 연대'(PAD: 옐로셔츠 운동)임. 옐로셔츠 운동은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1949년생) 총리에 대한 부정부패 증언들로 고조된 불만 때문에 생겨났고, 2005년에 최초로 등장했음. 옐로셔츠 운동은 탁신 정권을 실각시킨 2006년 9월 19일의 군사 쿠테타 이후 대체로 모습을 감췄지만, 금년(2008) 3월 28일에 태국 정치에 다시 등장했음. 지도부 구성은 과거와 동일하지만 지지자 수는 이전보다 감소했고 주장하는 의제들은 더욱 급진적으로 변했음. 이후 이 운동은 활성화됐고, 때때로 공격적 모습도 보이면서 태국의 정치 무대에 상시적으로 등장하는 세력이 됐음. 지난 90일 동안의 반정부 시위는 가뜩이나 악명높은 방콕의 교통정체를 완전히 마비시키는 일을 수도 없이 연출했으며, 언론사들을 일시적으로 점거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총리를 집무실에서 몰아낸 것도 여러 차례임.
PAD는 8월26일 공세적 행동에 돌입하여, 그 결과 지도부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되고 운동의 미래도 불확실성에 빠졌음. 그 이전까지 PAD는 대중운동에서 정당으로 탈바꿈할 것처럼 보였음. 대중운동으로서의 PAD의 목표는 탁신과 그 동맹세력이 손댈 수 없는 것처럼 보일 때마다 그들과 싸우는 것이었음. PAD는 '포퓰리즘'과 '왕당파-민족주의' 성향을 동시에 가진 채 정당으로 거듭나려고 했고, 과대망상적 기질을 지닌 PAD 지도자 손티 림텅꾼(Sondhi Limthongkul: 1947년생)은 새로 탄생할 정당을 마치 탁신이 '타이락타이 당'(TRT)에 대해 발휘한 영향력처럼, 자신의 사당으로 만드려 했음.
PAD는 원래 [사무직] 근로자, 왕당파 대중, 방콕 중산층의 광범위하고 느슨한 연합세력이었으며, 사회적 정의와 정부 내 투명성 증대를 갈구하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음. 하지만 PAD는 2008년 재등장하면서 반-민주적 원칙들로 옮겨갔고,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 1927년생) 국왕보다는 점차로 시리낏 왕후의 인맥집단과의 관련성을 강화시켜나가면서, 자신들의 출생 원천이 됐던 세력을 대부분 포기해버렸음.
최근 시위과정에서는 PAD 지지자들이 시리낏 왕후를 상징하는 색깔인 연한 파란색의 팔목 밴드와 여타 장신구들을 착용하기 시작했음. 많은 태국인들은 그러한 움직임이 남부지방 문제와 같은 현안들에 더욱 국가주의(=민족주의)적 접근방법을 보이는 것이라고 보고 있고, 필요하다면 군부의 개입도 포함하는 등 탁신 진영에 대한 보다 공격적인 반대 운동이라고 보고 있음. |
손티 림텅꾼이 가진 반-민주주의적 신념은 그가 소위 "새 정치"(New Politics)에 관한 철학을 공공연히 주장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명확해졌다. 그가 주장한 '새 정치'는 '네트워크 군주제'가 70%의 국회의원을 임명하고, 30%만 선거로 뽑는 제도였다. 이러한 기묘한 발상은 의회를 탁신의 통제에서 영원히 벗어나 있게 하고, 와치라롱꼰 왕세자가 차기 국왕에 즉위하는 일을 막기 위한 동기에서 기인했다.
8월26일, 옐로셔츠 운동(PAD)은 정치위기를 한차원 더 고조시켰다. 그들은 사막 총리 정부가 폭력적인 대응으로 나오도록 만들기 위해, 이날 하룻 동안 사전에 계획된 도발행위들을 하면서 정부청사(=총리 관저)로 쇄도해 점거했다. 미 대사관은 이날 본국에 보낸 비밀 외교전문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현재 진행 중인 태국의 정치 드라마에서 가장 최근의 소용돌이를 살펴보면, PAD가 방콕 및 전국의 전략적 포인트들에서 대규모 시위를 일으키고 있음. 일부 언론 소식통들은 이러한 행위를 사막 순타라웻 총리의 집권 PPP 정부가 문을 닫도록 하려는 최후의 시도라고 보도하고 있음.
[보수 야당인] '민주당' 국회의원이자 부총재이기도 한 끄라이삭 춘하완(Kraisak Choonhavan, ไกรศักดิ์ ชุณหะวัณ: 1947년생)은 8월25일 본 대사관과의 접촉에서, 자신이 PAD 지도부로부터 그들이 의도하는 바를 전해들었다고 밝혔음. PAD 지도부는 정부가 과잉대응에 나서도록 만들기에 충분할 정도로 경찰과 시위대 사이의 충돌을 유발시키려 하고 있음. 그리하여 군부의 개입이나 또 다른 쿠테타가 발발할 수 있도록 만들기를 바라는 것임.
오늘(8월26일)의 활동은 예상못할 정도로 이른 시각에 시작됐음. PAD 지지자 80~100명이 새벽 4시30분~5시30분 사이에 정부가 소유한 NTB TV 방송국을 장악하려 했음. 태국 경찰 소속 병력이 나서서 시위대 대부분을 검거하긴 했지만(각종 보도들은 60~80명을 체포했다고 전함), NTB 건물의 통제력과 방송 송출 상황이 이날 하룻 동안 계속 요동쳤음. 결과적으로 NTB 봉쇄 시위는 PAD가 사막 총리 정부 및 공권력과 직접 충돌을 도발하려는 의도된 시도들 중 첫번째 활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음.
PAD는 놀랄만한 효율성을 보이면서 정부청사(=총리관저) 뿐만 아니라 교육부, 재무부, 농업부, 교통부 청사들로도 동시다발적인 행진을 벌였음. 오후 3시 무렵, 그들은 이들 부처들 및 정부청사를 점거했음. |
8월29일, 옐로셔츠 운동은 위기를 한층 더 고조시켰다. 그들은 [남부지방들인] 푸켓(Phuket), 끄라비(Krabi, 까비), 핫야이(Hat Yai) 등 몇곳의 지방 공항들을 봉쇄했고, 핵심 철도 구간들도 차단시켰다. 수많은 내외국인 관광객들의 발이 묶였다. 부분적으로는 사막 총리가 육군사령관인 아누퐁 파오찐다(Anupong Paochinda) 장군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찌됐든 사막 총리는 옐로셔츠들이 던진 미끼를 물지 않았다.
아누퐁은 충성도 면에서 이중적 성격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육군 내 [최고 파벌인] '제21연대'(=왕후근위대) 출신 계파에 속한 동시에 [탁신을 실각시킨] 2006년 9월 쿠테타에도 가담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탁신과 '군사예비사관학교'(AFAPS: [역주] 고교과정의 통합사관학교) 10기 동창생이기도 했다. 아누퐁은 2008년 내내 정치 갈등이 악화되는 가운데서도 자신은 중립을 지킬 것이라고 고집했다. 하지만 그러한 태도는 사막 총리가 옐로셔츠 운동에 대해 확신에 찬 대응을 할 때 필요한 군대의 지원을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막은 이 점을 인지했고, 경찰이 PAD 지도부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받은 상태였음에도 강력한 진압에 나서는 일은 삼가했다. 이에 관해 미 대사관의 8월27일자 비밀 외교전문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PAD가 충돌을 촉발시키려 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현재까지 태국 정부와 경찰은 누가 봐도 충돌을 피하겠다는 수동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음. |
크리스 베이커(Chris Baker: 1948년생)와 파숙 퐁파이찟(Pasuk Phongpaichit, ผาสุก พงษ์ไพจิตร: 1946년생) 부부는 2009년에 출판한 뛰어난 저서 <탁신: 아시아에서의 정치 비즈니스>(Thaksin: The Business of Politics in Thailand)에서, 군부가 정부에 대한 지원을 거부한 일은 "중립적" 입장과는 거리가 매우 먼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2007년 10월에 육군사령관 직을 이어받은 아누퐁 파오찐다 대장은, 자신과 육군이 또 다른 쿠테타를 일으키진 않겠지만 [정부와 반정부 시위대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겠다고 지속적으로 말했다. 그는 이 분쟁이 "정치적"인 것이기에 정치적 수단을 통해 해결돼야만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PAD가 정부의 권위 약화를 노리고 고의적 전략으로 법률을 어기기 시작한 상황에서, 그가 말하는 "중립"이란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아누퐁의 "중립"은 [군대가] 집권 PPP 정부에서 실질적으로 철수하겠다는 의미였다. 즉, 말(馬)이 날뛰며 기수를 던져버린 격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군부의 활동 독립성 및 집권 PPP 정부의 통치 적법성의 훼손 두 가지 모두를 상징하는 일이었다. |
|
(사진) 2006년 쿠테타로 인한 1년여의 헌정중단 기간이 끝난 후, 새로 탄생한 친-탁신계 정당인 '국민의 힘 당'(PPP)은 방콕시장을 역임한 사막 순타라웻을 얼굴로 내세웠다. 사막은 관록의 정치인이자 'TV 요리쇼' 진행자로도 유명한 인물이었다. 보수 성향의 태국 사법부는 결국 그가 총리 재임 후에도 자신이 수년간 진행해온 요리 쇼에 출연해 출연료를 받아 "이권에 개입했다"는 핑계를 들이대며 총리직 부적격 판결을 내린다. 이로써 그의 총리직 수행은 7개월여만에 끝이 났고, 그는 1년 뒤 간암으로 사망했다. [크세] |
한편 '네트워크 군주제' 내부의 지도급 인사들은 사막 총리를 몰락시킬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추밀원'(Privy Council: 국왕자문기구) 위원인 싯티 사웻실라(Siddhi Savetsila: 1919년생)는 9월3일 미국대사 에릭 존과의 만남에서, 자신이 푸미폰 국왕에게 제출할 예정인 안이라면서, 사막을 정계에서 제거하기 위한 은밀한 계획을 들려줬다. 에릭 존 대사는 당일로 본국에 보낸 비밀 외교전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추밀원 위원인 싯티 사웻실라 예비역 공군대장은 9월3일 본 대사와 만나, 자신은 탁신 전 총리 및 그 연장선 상에 있는 사막 총리에 대해, 자신이 지지하는 태국, 즉 군주를 중심으로 하는 체제의 실존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했음.
싯티 장군은 자신이 외국인 중에서 이 정보를 공유하는 사람으로는 본 대사가 유일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자신이 오늘 중 후아힌(Hua Hin) 별궁에서 있을 추밀원 위원들의 국왕 알현 때 푸미폰 국왕에게 보고할 예정이라는 시나리오를 말해주었음. 그 해법은 무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태국 민주주의를 복원시키는 방식이라고 함. 즉, 헌법은 그대로 놔둔 상태에서 (국회의원이 아닌) 의회 외부인도 내각에 입각할 수 있도록 개헌을 하는 것이라고 함. 국회(=하원)와 상원도 그대로 둘 예정이라고 함. 그리고 보편적으로 존경받는 아난 빤야라춘(Anand Panyarachun: 1932년생) 전 총리에게 이 "프로젝트"의 지도자 자리를 맡긴다는 것임. 이 프로젝트에는 군부와 내무부에서 은퇴한 이들 및 학자들 가운데 존경받는 동시에 "정직한" 이들과, PAD 지도자 중 1~2명, 그리고 필시 '민주당' 인사들 중 일부를 포함하게 될 것이라고 함. 이들이 가지게 될 권한은 경제, 사회, 정치 부문에서 광범위한 개혁조치들을 시행하는 내용이 될 것이라고 함. 이러한 프로젝트는 탁신이 보여준 골칫거리 결과들을 제도권으로부터 "뿌리뽑아줄 것"이라고 함. 이러한 메세지를 사막 총리에게 전달할 사람은 아누퐁 육군사령관이 될 것이며, 그 밖의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말함.
싯티 장군은 이 계획을 갖고 자신에게 접근해온 이들이 일군의 저명 인사들이었다면서, 그들의 수는 자신의 소박한 거실에 모두 들어올 수 없을 정도의 인원이었다고 밝힘. 그들 저명 인사들 중 싯티 장군이 본 대사에게 유일하게 실명을 거론한 사람은 쁘라못 나콘탑(Pramote Nakorntab, ปราโมทย์ นาครทรรพ)임. 쁘라못은 '쭐라롱꼰 대학'(Chulalongkorn University)의 은퇴 교수이며 정치학자임. 그밖의 사람들 중에는 공군의 고위 장교 1명과 헌법재판소 재판관 1명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함.
싯티 장군은 자신이 추밀원 위원으로서 국왕에 자문만 제공하는 역할을 할 뿐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자신이 그들을 만난 것은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할 준비가 되어 있는 "전직 군 지도자" 자격으로 만난 것이라고 말함. 그는 자신이 이 계획을 기꺼이 국왕에게 제출하여 권고하려는 이유는 [추밀원 의장인] 쁘렘 띠나술라논 (Prem Tinsulanonda: 1920년생) 장군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말함. 싯티 장군은 쁘렘 장군이 PAD를 후원하고 '민주당' 정부를 출범시키려 한다는 혐의로 너무 심하고도 부당하게 비판을 받아왔다고 말함. 그는 판돈이 커지긴 했지만 태국의 민주주의 제도를 갱생시키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라면서, "우리가 진다면 탁신이 돌아올 것이다. 만일 탁신이 돌아온다면 군주제도 없어질 것"이라고 말함. |
이러한 관찰은 '네트워크 군주제'에 대한 놀라운 통찰이다. 엘리트 인사들이 사적으로 음모를 계획해서 꾸민 후, 국왕에게서 지지의 신호를 받아내려 했다는 것이다. 이 계획은 참다운 민주주의를 보류시키고 왕당파의 "착한 사람들"을 임명해 통치한다는 "태국식 민주주의"(Thai-style democracy)의 또 다른 버전이다.
2008년에 89세였던 싯티 사웻실라는 낡은 시대의 고루한 정객으로서, 1940년대와 1950년대에 파오 시야논(Phao Sriyanond, เผ่า ศรียานนท์: 1910~1960)의 계파에 속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추밀원 의장 쁘렘 띠나술라논 장군이 총리를 하던 시대(1980년대)에 외무부장관을 지냈다. 싯티가 스스로를 정치에 참견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선거로 선출된 정부의 전복을 주창했다는 사실은, 바로 왕당파의 중진급 인사들이 얼마나 현실과 괴리되어 있으며 착각 속에 살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 것이었다.
9월2일자 외교전문에 따르면, 아난 빤야라춘은 미국 외교관들과의 대화에서 사막이 힘에 떠밀려 권력을 내려놓게 될 것이라면서, "정권교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보지만, 그것이 전통적인 쿠테타 방식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9월3일자 외교전문을 보면, 아난은 자신이 음모의 계획자들과 접촉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외교전문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아난은 자신이 지난주 내내 [음모를 기획한] 그룹으로부터 소식을 듣고 있었다는 점을 인정했음. 하지만 그 계획이 실행에 옮겨지기 전에 직접 참여하는 일은 거부했다고 함. 그는 계획이 진행되면 그때 가서나 그에 관해 그들과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함. 아난은 이 계획이 최소한 태국 민주주의의 내용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점을 확실히 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보면서, 능력은 인정되지만 선출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함. 아난은 "나는 언제나 내 스스로의 사람"이라고 주장하면서, 과거에도 다른 이들이 자신을 조종하려 들 경우엔 그들이 제안한 여러 직책들을 거부한 바 있다고 말함.
본 대사는 [아난에게] 태국이 헌법적 틀 내에서 법치주의 원칙에 입각해 있는 일이 상황 전개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강조했음. 그렇지 않다면 미국이 그에 따른 대응을 할 것이라고 말함. 이에 대해 아난은 2006년 9월 쿠테타 당시 미국이 보여준 대응방식에 자신은 동의하지 않았다면서, 여러 나라들의 선출직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자신이 서구적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말함. |
관료조직과 사법부도 정권전복 계획을 지원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였다. 9월2일 '선거관리위원회'(EC)는 [탁신의 고위급 측근인] 용윳 띠야빠이랏(Yongyuth Tiyapairat)의 선거매수 혐의와 관련하여 집권 PPP를 해산시킬 수도 있는 선관위원 투표를 실시했다. 9월3일 뗏 분낙(Tej Bunnag)이 외무부장관 직에서 사임했다. 사막은 점차 고립되어 가고 있었지만 버티고 있었다.
그 사이 정부청사를 점거한 옐로셔츠(PAD) 시위대의 세력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미 대사관은 9월8일자 비밀 외교전문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정부청사의 생활환경이 악화되고 있지만 PAD는 정부청사 점거를 계속하고 있음. 주말에 내린 비로 인해 정부청사 마당은 진흙 바다로 변했음. 위생조건의 악화를 막고, 태국 언론들이 '지린내'라고 보도한 것을 감소시키기 위해, 시위 지도부는 악취 나는 진흙탕 바닥에 흰색 "소독약" 분말을 뿌리기 시작했음. 시위대는 현 정부를 견디기보다는 악취를 견디는 것이 낫다고 농담삼아 말하곤 함. |
옐로 진영은 모멘텀을 상실할 것을 우려하여 9월9일 반격에 나섰다. '헌법재판소'(Constitutional Court)는 사막 총리가 이권개입 관련 규정을 위반했다고 판결했다. 사막 총리가 비록 명목상의 금액만을 받긴 했지만, [TV 요리쇼 전문가인] 그가 총리 취임 후에도 <시식과 투덜거림>(Tasting and Grumbling) TV 요리 쇼에 계속해서 출연한 일이 이권개입 금지 규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헌재의 이런 결정은 기묘하고도 편파적인 판결이었다(법학자 위라팟 쁘리야웡[Verapat Pariyawong, วีรพัฒน์ ปริยวงศ์]은 하버드대학에 제출한 자신의 논문 <사법부 요리를 위한 3가지 레시피>(Three Course Recipe for the Court’s Cookery)에서 이 판결을 전문적으로 분석한 바 있음). 이 판결은 사법부가 국민 다수의 민주적 의지를 좌절시키려는 왕당파 엘리트 계층의 도구로 전락했음을 그 이전의 어떤 경우보다도 명확히 보여줬다.
이 판결의 결과로 사막은 사임해야만 했다. PPP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국회는 다시금 그를 총리로 지명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탁신과 그 동맹세력은 그러한 선택 대신 사막을 배제시키기로 결정했다. 미국대사 에릭 존이 지적한 바 있듯이, 탁신 세력은 "사막이 이제 자산보다는 부채 규모가 더 큰 상태"라는 점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들은 사막 대신 [당시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을 맡고 있던] 탁신의 매제 솜차이 웡사왓(Somchai Wongsawat: 1947년생)을 차기 총리로 지명했다. 사막은 집권 PPP 총재직에서 사임한 후 미국 대사 에릭 존을 만나 시리낏 왕후를 맹렬히 비판했다. 미 대사관의 10월1일자 비밀 외교전문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사막은 본 대사에게 지난 7개월간 총리로 재임하는 동안 자신에게 가해진 정치적 압력에 대해 묘사했음. 그는 시리낏 왕후에게 경멸감을 표시했음. 그는 왕후가 2006년 쿠테타 뿐만 아니라 PAD가 일으키고 있는 현재의 소요사태에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함. 사막은 시리낏 왕후가 추밀원 의장인 쁘렘 장군을 비롯해 스스로를 왕당파라고 자처하는 여러 인사들을 이용하여 PAD나 여타 선동가들과 공조하고 있다고 말함. 사막은 자신이 정기적으로 푸미폰 국왕을 알현했던 사실을 언급하면서, [왕당파인] 자신의 반대자들보다 자신이 푸미폰 국왕에 대해 더욱 충심을 갖고 있고 국왕의 지지도 받고 있었다고 주장했음. 사막은 군주제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면서 왕세자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음. |
10월3일, 태국 군대와 캄보디아 군대는 '쁘레아위히어 사원' 주변에서 교전을 벌였다. 같은 날, 경찰은 PAD 지도자 중 한명인 차이왓 신수웡(Chaiwat Sinsuwong)을 체포했고, 이틀 뒤에는 옐로셔츠의 상징적 인물인 짬렁 시므앙(Chamlong Srimuang: 1935년생) 예비역 육군소장도 체포했다. 짬렁의 체포는 아마도 추밀원 의장 쁘렘 장군까지 개입해 주의깊게 쳐놓았던 덫으로 보인다. 정부가 짬렁의 체포를 왕실도 승인했다고 생각하게 됐던 것이다. 짬렁도 자신의 체포가 임박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짬렁은 1992년의 시위 때도 당국이 자신을 신병을 확보하는 일을 지지자들을 움직이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 바 있다. 미 대사관은 10월6일자 외교전문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짬렁은 자신의 체포를 예견했던 것으로 보임. 그는 오전 9시경 정부청사에서 시위대에게 들려줄 편지를 남겼음. 그는 이 편지에서 반정부 시위가 애국적 의무라면서, 남아있는 PAD 지도자들은 자신이 체포된 후 정부와의 협상을 중단하라고 지시했음.
최근 몇주 동안 정부청사의 시위대는 그다지 활력도 없었고 참가자 수도 빈약했음. 본 대사관이 9월 말 주중 한낮에 정부청사를 방문했을 때, 우리는 250여명의 시위대만 볼 수 있었음. 많은 지지자들은 정부청사에 직접 오기보다는 친-PAD 성향의 위성채널인 ASTV(Asia Satellite Television)를 통해 연설을 듣는 쪽을 택하고 있음.
짬렁의 체포는 특히 PAD 동조자들에게 활력을 줄 것으로 보임. 10월4일, 현장을 방문했던 [미국 국무부 산하] 정보조사국(INR)의 분석가는 정부청사 내에 대략 1천명 정도의 지지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산했음. 각종 보도들에 따르면, 짬렁이 체포된 후 정부청사의 군중 수는 상당히 증가하고 있고, 지방의 PAD 지지자들도 방콕으로 상경하고 있음. 경찰의 한 고위 간부는 10월6일 본 대사관과의 접촉에서, 10월5일 밤에 정부청사에 머물고 있던 시위대 수를 1만명 정도로 추산했음. 이 간부는 10월6일 집회 때는 5천명 정도 더 불어날 것으로 예상했음. |
미국대사 에릭 존은 10월7일자 외교전문에서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성찰해보면, PAD 지도자 짬렁 시므앙은 10월5일 체포당한다는 데 동의하여 완벽한 덫을 놓은 것으로 보임. 짬렁의 체포는 점차 의기소침해지고 있던 PAD 시위대에게 새로운 활력을 주었음. 그것은 정부와 야당이 개헌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한 위원회 구성에 합의하여, PAD의 행보에서 완전히 바람이 빠질 수 있는 위협이 생겨난 시점이서 이뤄진 것임. |
그것은 모두 옐로 진영이 짠 계획의 일환이었다. 쩜렁의 체포는 10월7일에 발생할 경찰과 시위대 사이의 폭력적 충돌 촉발을 위한 서곡이었다. 이날은 솜차이 신임 총리가 국회에 출석해 정책발표를 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왕당파 재벌기업가인 '싱하 맥주'(Singha beer) 가문의 쭈띠난 피롬팍(Jutinan Bhirombhakdi 혹은 Chutinant Bhirombhakdi, จุตินันท์ ภิรมย์ภักดี)은 10월6일 옐로셔츠 지도자와 만찬을 가졌다. 그는 [미국 대사와의 만남에서] PAD 지도부가 군부 쿠테타에 정당한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해 자신들의 지지자들 가운데 최소 20명 정도는 경찰과의 충돌과정에서 사망해주길 바라고 있었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인정했다. 에릭 존은 훗날의 외교전문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쭈띠난은 PAD가 쿠테타 촉발을 유도할 수 있을만한 폭력상황 유발을 지속적으로 목표로 삼고 있다고 보았음. 그는 자신이 10월6일에 PAD 지도자 한명(누군지는 모르겠음)과 만찬을 가졌다고 밝혔는데, 그 인사는 PAD 시위대가 10월7일 국회에서 시위를 벌일 때 폭력사태를 유발시킬 계획이라 말했다고 함. 익명의 그 PAD 인사는 10월7일 밤이면 군대가 정부에 대항하여 개입할 것이라 예고했다고 함(결과적으로는 잘못된 예고였음). 쭈띠난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PAD가 아직도 갈등유발에 열중하고 있다면서, 그들이 바라는 것은 최소 20명 이상이 사망하여 군대의 개입을 필연적이고 정당한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라고 함. |
10월6일 밤, 옐로셔츠 시위대는 정부청사에서 출발해 국회의사당으로 행진하면서 바리케이드와 철조망, 그리고 부비트랩(booby trap: [역주] 건드리면 폭발하는 장치)을 설치했다. PAD 사수대는 새총, 쇠파이프, 골프채, 핑퐁폭탄(pong bomb, 삥뻥폭탄: [역주] 태국의 과격 시위대가 사용하는 일종의 사제 수류탄), 몽둥이 등으로 무장하고 주변을 순찰했다. 이제 "검은 화요일"(Black Tuesday)의 유혈 충돌을 위한 무대가 설치된 것이다.
10월7일 오전 6시경, 경찰은 국회앞에서 옐로셔츠 시위대 해산 작전을 시작했다. 아마도 [독일인 기자] 닉 노스티츠(Nick Nostitz)는 태국에 주재하는 외국인 언론인들 가운데 최고의 인물일 것이다. 그는 이날의 상황을 현장에서 목격한 후 ['호주 국립대학'(ANU)에서 운영하는] 웹사이트 '뉴 만달라'(New Mandala)에 상세한 설명과 포토 뉴스를 올려주었다.
노스티츠는 경찰이 확성기를 통해 "시위를 평화적으로 끝내지 않을 경우 최루탄을 사용하겠다"고 여러 차례 경고방송을 했다고 전했다. 경찰은 모든 이들이 태국인이라면서, 모든 태국인들은 서로 싸워서는 안 되기 때문에 충돌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 말했다. 옐로셔츠들이 움직이길 거부하자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하며 바리케이드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례적으로 강력한 폭발들도 몇차례 발생했다. 노스티츠는 양측의 접전이 끝난 후 어떤 상황이 발생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데다 연기가 자욱해 무슨 일이 진행중인지 정확히 알기 어려웠다. 매운 최루탄 가스는 거의 모두의 눈을 멀게 만들었다. 경찰 중에서도 제대로 된 가스 마스크를 착용한 이들이 소수였고, 대부분은 가스 때문에 영향을 받는 것 같았다. 충돌 내내 경찰의 스피커는 시위대에게 싸움을 중지해줄 것을 요청했다. 시위대가 활동을 멈추고 도로에 주저앉은 직후, 경찰은 국회 정문의 개방이라는 목적을 달성했다.
내가 심하게 부상당한 시위 참가자들을 확인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한 남성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는데, 그의 다리는 무릎에서부터 날아가버린 상태였고, 그의 옆에는 몇줄의 실낱같은 피부가 주름처럼 접혀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충격에 빠진 경찰관들이 모여 있었다. 일부 경찰관은 그 남성을 안심시키려 하고 있었다. 주변으로는 중상을 입은 시위 참가자 두세명이 더 있었다. 이후 상황은 고요해졌다. 나는 경찰관 몇명에게 부상자들에 관해 말을 걸어보았다. 경찰관들도 모두 충격에 빠져 있었다.
|
경찰의 작전은 국회의 회의가 열릴 수 있도록 하여 솜차이 웡사왓 총리가 연설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옐로셔츠 시위대는 아침부터 반격에 나서 경찰을 놀라게 만들었다. 미 대사관의 10월7일자 외교전문은 이날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아침에 이뤄진 경찰의 작전은 시위대 70명 이상을 병원에 입원토록 만들었다. 대부분은 최루탄 가스에 의한 증상들이었지만, 의료진은 소수의 부상자가 중상이라고 보고했음. 여기에는 다리를 잃은 부상자 1명과 [폭발물] 파편에 맞은 부상자 1명이 포함됨. 정오경 충돌이 있고 나서, 오후 한낮 무렵 병원 관계자들은 부상자 수가 101명으로 증가했다고, 본 대사관 측에 확인해주었음. 부상자 대부분은 최루탄에 의한 증상이나 밟히면서 부상한 사람들이지만, 시위 참가자 1명은 다리를 잃었음. 한낮의 충돌에서는 경찰도 여러명 부상당한 것으로 보고됐음.
'수도권광역경찰청'(MPB)의 '집회/정보실' 부실장인 수왓(Suwat) 경찰대령은 본 대사관과의 접촉에서, 경찰이 아침 무렵의 작전에서 최루탄과 섬광탄만을 사용했다고 밝힘. 경찰은 [시위대에게 중상을 입힌 폭탄의 경우] 불꽃놀이용 폭죽과 유사한 검은 화약을 철제 용기에 담아서 조악한 방식으로 제조된 사제 파이프폭탄일 것으로 보았음. 그 폭탄이 폭발할 때, 여성 1명이 다리를 잃었음. 경찰은 그 폭탄을 던진 것이 [자자극을 노리는] PAD 시위대였을 것으로 보고 있음.
납득되진 않지만, 경찰은 솜차이 총리가 국회에서 연설하는 동안 경비 병력을 감소시켰고, PAD는 다시금 바리케이드 설치에 나섰음. 언론 보도들에 따르면, PAD 시위대는 국회 정문에서 경찰들을 몰아내기 위해 파이프들을 사용했고, 정문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할 목적으로 경찰 차량들을 징발했음. 그에 따라 국회의원들과 상원의원들이 내부에 갇혔고, 솜차이 총리도 일시적으로 갇힌 상태였음. 이후 차이 칫첩(Chai Chidchob, ชัย ชิดชอบ: 1928년생) 국회의장은 정책심의를 보류하고, 10월8일 예정되어 있던 회의도 취소시켰음. |
가두에서의 싸움은 오후 내내 맹위를 떨쳤고 밤 시간으로도 이어졌다. PAD 시위대는 쇠파이프와 핑퐁폭탄을 이용해 경찰을 공격했고, 새총을 이용해 강철 베어링 볼과 대리석도 쏘았다. 심지어 일부 시위대는 총기류까지 갖고 있었다. 시위대는 트레일러 1대를 포함하여 차량 여러 대를 이용해 경찰의 저지선을 들이받기도 했다. 옐로셔츠 시위대 1명은 픽업트럭을 이용하여 고의로 경찰관 1명을 친 후, 다시 후진하기도 했다.
오후의 충돌과정에서 싸움이 벌어지던 곳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주차되어 있던 체로키(Cherokee) 지프차량 1대에서 폭발이 발생하여, 전직 경찰중령 메티 찻몬뜨리(Methee Chartmontri)가 사망했다. 메티는 [북동부 지방인] 부리람(Buri Ram)에서 온 PAD 사수대의 지휘자였고, PAD 지도자 까룬 사잉암(Karoon Sai-ngarm, การุณ ใสงาม: 1952년생)의 처남이기도 했다. 폭발로 인해 메티의 몸은 갈갈이 찢겼고, 그의 시신 부위들 중 대부분은 망가진 지프 차량에 터져나가 있었지만, 그의 팔 부위는 끝내 발견할 수 없었다.
'검은 화요일'의 2번째 사망자는 '넝 보우'(Nong Bow)라는 별명을 가진 앙카나 라다빤냐웃(Angkhana Radappanyawut)이었다. 앙카나는 방콕의 '어섬션 대학'(Assumption University) 경영학과를 졸업한 28세의 여성이었고, 세 자매 중 맏딸이었다. 그녀는 이날 가족과 함께 시위에 참가했다. 그녀의 가족 모두 옐로셔츠 운동 지지자였다. 앙카나는 싸움이 치열했던 '로얄 플라자'(Royal Plaza)의 모퉁이 근처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가슴 왼편 옆구리는 폭발로 절개되어 심장, 위, 비장, 왼쪽 신장이 파열됐고, 왼쪽 팔과 왼쪽 갈비뼈 모두가 골절됐다. 그녀는 PAD의 상징인 노란색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고, 태국 국기의 상징색인 빨강, 흰색, 파랑의 팔목띠를 착용하고 있었다.
닉 노스티츠는 총 3부작으로 예정하고 있는 자신의 책 <레드 대 옐로>(Red vs. Yellow)의 제1권에서 당시의 현장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또 다른 부상자 여성은 거리에 널부러진 파편 더미들 한 가운데 쓰러져있었다. 나는 처음에 그곳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군대의 위생병들이 그녀에게로 다가간 후에야, 나는 부상자가 여성이란 것을 깨닫게 됐다. 그녀가 바로 이날 발생한 2명의 사망자 중 1명인 앙카나 라다빤냐웃이란 것을 확인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달이 지나서였다. |
10월7일 사태에 관해서는 엄청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옐로셔츠 측은 시위대 2명이 사망하고 충격적인 부상자들이 발생한 일을 경찰의 잔인성 때문이라며 비난했다. 그들은 사망자 2명을 순교자로 칭송했다. 옐로셔츠들은 ['중앙 과학수사연구소'(Central Institute of Forensic Science) 소장이자 2004년 인도양 쓰나미 참사 당시의 영웅이기도 한 저명 여류 법의학자로서, 보수 왕당파 인사인] 폰팁 로짜나수난(Porntip Rojanasunan, พรทิพย์ โรจนสุนันท์: 1955년생) 박사가 [폭발물 탐지기인 GT200을 사용하여] 조사한 결과를 근거로 들면서, 사망자와 부상자들은 경찰이 중국제 최루탄을 사용하면서 발생한 것이라고 비난해댔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나중에 정밀한 분석을 피해나가지 못했다. GT200 조달사업의 대실패([역주] 아피싯 정권 때 영국 기업이 개발해 태국 군에 대당 300만 달러 이상의 가격에 800대를 납품 계약한 이 기기는 2010년 초 거의 엉터리 물건으로 판명됨)에 따른 결과로, 폰팁 박사가 부패하고 무능한 사기꾼이란 점과 그녀가 기본적인 과학적 원칙들조차 무시했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메티 찻몬뜨리가 자신이 운반 중이던 폭발물 때문에 사망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다. 아마도 그는 폭발물을 미숙하게 조작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팔 부위가 영원히 발견되지 않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앙카나의 경우, 그녀의 가족들은 고의든 아니든 그녀가 PAD의 폭발물을 운반하고 있었다는 주장을 분노에 차서 부인했다. 노스티츠는 <레드 대 옐로> 제1권에서 이 논쟁을 다음과 같이 검토했다.
앙카나 로다빤냐웃의 죽음은 이후 몇주 동안 커다란 논란이 됐다. PAD는 그녀가 무고한 시위 참가자였을 뿐이라면서, 경찰이 그녀를 공격해 죽일 때 그녀는 단지 정부청사로 되돌아오기 위해 걷고 있었을 뿐이라고 묘사했다. 그리하여 그녀의 죽음을 둘러싸고 순교자 숭배와 영웅적 추앙 분위기가 형성됐다. 반면 '레드셔츠'(UDD) 운동은 그녀가 폭발물 운반에 이용당한 순박한 사람이었다면서, 그 과정에서 그녀가 사망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녀의 사망 장소로부터 고찰해보면, 그녀가 이 투쟁에 비폭력으로 임했는가에 관한 의심의 여지가 있다. 그녀의 사망 지점은 싸움의 최전선이었고, '로얄 플라자'의 뒷쪽이 아니었다. '로얄 플라자' 뒷쪽이 적대적 분위기도 없었고 국회에서 정부청사로 이동하는 지름길이기도 했기 때문에, 단순한 시위 참가자가 이용하기에는 보다 논리적 합당성을 지닌 루트였다. 앙카나의 죽음에 관한 논쟁은 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아마도 만족할만한 결론은 영원히 도출될 수 없을 것이다. |
앙카나의 죽음을 둘러싼 정황은 진흙탕에 빠졌지만, 옐로셔츠 진영이 이날 자신의 지지자들 중 일부가 사망하도록 만들겠다는 전략의 일환으로, 그녀가 폭발물을 운반하던 중 우연한 폭발로 사망했다는 것은 그다지 그럴 듯해보이지 않는다. 미 대사관의 10월8일자 비밀 외교전문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듯이, 이날 국회에서의 충돌은 경찰의 공격적인 대응을 유도해내기 위해 PAD가 펼친 가장 최신의 노력이었다.
어제의 대부분 기간 중, 경찰 대오를 공격한 것은 PAD였고 그 밖의 다른 방식은 아니었음. 경찰의 보고에 따르면, PAD 시위대는 충돌과정에서 권총, 칼, 쇠파이프로 무장했고, 휘발유를 채워넣은 탁구 공들, 즉 소형 화염탄을 갖고 있었음. |
옐로 진영의 전략에 따라, 야당 정치인들과 왕당파 [주류] 언론매체들은 이날 발생한 사망자들 및 아수라장을 이용하여 선거로 뽑힌 정부의 적법성을 공격했다. [보수 야당] '민주당' 총재인 아피싯 웻차치와(Abhisit Vejjajiva: 1964년생)는 기자회견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선언했는데, 그러한 논평은 후에 [그가 총리가 됐을 때] 자신을 따라다니게 된다.
발생한 모든 일들에 관해, [솜차이 웡사왓] 총리는 알지 못했든 아니면 고의였든 자신의 책임을 부인할 수 없다. 당국을 욕하는 것보다 더욱 나쁜 것은 국민들을 비방하는 일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국민들을 죽이고 중상을 입힌 후 그러한 국민들을 범죄 혐의로 고발하는 국가일 것이라고 단 한번도 생각해본 일이 없다. 이러한 일은 수용할 수 없다. 나는 정부에 있는 이들이 언제나 국민들에게 그들이 태국인인가 아닌가를 묻는 것을 들었다. 당신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고려하면, 태국인이냐 아니냐는 질문 축에도 들지 못한다. 오히려 당신들이 인간인가 아닌가를 물어야만 할 것이다. 지구 상에서 민주주의 체제를 가진 나라치고 국가가 국민들을 유린하는 나라는 없으며, 국민으로부터 탄생한 정부가 책임을 지지않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
또한 '쭐라롱꼰 대학 병원'(Chulalongkorn Hospital)의 의사들은 부상당한 경찰관들을 치료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병원 의사인 수텝 콘찬윗(Suthep Koncharnwit)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쭐라롱꼰 병원'의 의료진은 PAD 지지자들과 충돌과정에서 부상당한 경찰관은 돕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폭력적인 행동을 비난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사회적 조치이다. |
한편, 신문들은 이날의 폭동을 대서특필하면서, 경찰과 정부의 이미지를 먹칠하는 데 나섰다. 다음의 사진은 충돌 다음날인 10월8일에 발행된 영자지 <더 네이션>(The Nation)의 1면의 모습이다.
10월9일, 항소법원(=고등법원)은 PAD 지도자 9인에 대해 최고로 엄중한 반란죄 혐의를 적용했다. 짬렁은 보석으로 나왔다. 같은 날, '행정법원'은 경찰에 대해 시위대 통제에 보다 덜 강압적인 수단을 사용하라고 명령했다. 정부는 그 어느때보다도 약화된 외형을 갖게 됐다.
앙카나 라다빤냐웃이 사망한지 6일 후인 10월13일, 시리낏 왕후가 그녀의 장례식에 개인적으로 참석하여 의례를 주재했다. 장례식장에 모인 수천명의 옐로셔츠 시위대는 "왕후 폐하시여, 만수무강하소서"를 연호했다. 장례식이 끝난 후 앙카나의 아버지 찐다(Jinda)는 보도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후 폐하께서는 내 딸이 국가와 군주를 구하려 했기 때문에 착한 여성이라고 말씀하셨다. |
옐로셔츠들은 시리낏 왕후의 움직임을 왕실이 자신들의 명분을 지지하고 있다는 명시적 증거라고 보았다. 하지만 왕후의 행동은 군주제를 위해서는 대단히 결정적이고도 매우 위험한 움직임이었다. 시리낏 왕후가 극단주의적인 반-민주적 운동 세력을 공공연히 지지하고 나서자, 많은 태국인들은 충격을 받았다. 옐로셔츠 운동은 선거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고의로 경찰과 충돌을 도발하는 집단이었다. 미국대사 에릭 존은 본국으로 보낸 비밀 외교전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시리낏 왕후는 지난 10월7일 PAD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과정에서 사망한 미천한 신분의 PAD 지지자의 장례식을 직접 주재하면서, 전례없이 대담한 정치적 진술을 실천적으로 발언했음. 심지어는 왕후와 가까운 일부 인사들조차 그러한 공공연한 정치적 행위에 개인적으로는 불편한 심경을 갖고 있음을 표명했음. 왜냐하면 그러한 행동이 푸미폰 국왕이 오랜 기간 선양하려고 했던 '비정치적 군주'라는 개념을 잠식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임.
시리낏 왕후의 장례식 참석 이후, '왕실모독 처벌법'(=형법 제112조) 위반 행위에 관한 공적인 불평이 증가하고 있음. 그 중 많은 부분은 시리낏 왕후를 타겟으로 하고 있음. 집권 PPP에 친화적인 정치인들은 최근 몇달 동안 본 대사관과 접촉할 때, 시리낏 왕후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감을 동시에 표명했음. 이러한 왕실의 정치화는 현 시점에서 최종적인 왕위계승을 둘러싼 추가적인 불확실성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처럼 보임. 또한 그러한 움직임은 푸미폰 국왕 사후에 군주의 역할을 재정의할 때가 도래했을 때, 왕당파들에게 부메랑이 되어 날아갈 가능성도 있음. |
앙카나의 장례식에는 시리낏 왕후 외에도 [막내 딸인] 쭐라폰 왈라일락(Chulabhorn Walailak: 1957년생) 공주, 아누퐁 파오찐다 육군사령관, [보수 야당인] 민주당 총재 아피싯 웻차치와, PAD 지도자 손티 림텅꾼도 참석했다.
자신의 지프 차량에서 자신이 운반하던 폭탄 때문에 사망한 메티 찻몬뜨리의 장례식은 10월14일에 거행됐다. 이 장례식은 아난 빤냐라춘 전 총리가 주재했다. 아난은 왕당파들이 [정부를 전복시킨 후] 임명직 총리로 앉히고 싶어하는 인사였다. 그리고 민주당 총재 아피싯도 참석했다. 저명한 왕당파 인사들이 이러한 장례식들에 참석한 것은 태국 국민들이 선거를 통해 보여준 선택 및 법치주의에 대한 공공연한 경멸을 표시하는 놀라운 사건이었다. 왕후, 육군사령관, 야당 대표, 그리고 "국가화합용" 총리 후보로 거론되는 인사가 적법성을 지닌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수단도 사용할 태세가 되어 있는 정치운동 세력에 공공연한 연대감을 표명한 것이다.
군주에게 등을 돌리게 된 태국인들에게 있어서, 앙카나의 장례식이 거행된 2008년 10월 13일은 거의 신화적 지위를 갖는 날이 됐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날은 왕실이 정치를 초월하는 중립적인 갈등 중재자라는 신념을 더 이상 견지할 수 없게 된 날이다. 그들은 이날을 '완 따사왕'(วันตาสว่าง), 즉 '깨달음의 날'이라고 부른다.
싯티 사웻실라는 미국대사 에릭 존과의 대화에서, 시리낏 왕후가 시위대 장례식에 참석한 일을 푸미폰 국왕도 전적으로 지지했다고 주장했다. 에릭 존 대사는 싯티 장군과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싯티는 PAD를 군주제에 필수적인 지지를 제공하는 세력으로 보면서, "만일 우리(=왕당파)가 PAD를 잃는다면 우리는 이 싸움에서 지는 것"이라고 말함. 그는 10월7일의 충돌이 있은 후 자신과 쁘렘이 국왕에게 PAD에 대한 지지를 표명해줄 것을 진언했다면서, 10월7일 시위 중에 사망한 시위참가자의 장례식에 시리낏 왕후가 참석하는 일을 국왕이 지지했다고 주장함. 국왕은 이어서 싯티의 자문에 감사를 표했다고 함. 싯티는 추밀원 위원들 중에서 자신과 쁘렘만이 정치적 대치국면에 관해 국왕과 왕후에게 조언을 제공하고 있다고 말함. |
하지만 싯티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푸미폰 국왕은 그 계획을 지지한 적이 결코 없었다. 에릭 존 대사는 [친-왕실] 기업인 쭈띠난 피롬팍과 자신이 나눈 대화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쭈띠난은 시리낏 왕후가 10월13일의 장례식에 참석한 일이 매우 부정적인 파장을 몰고 왔다는 데 동의하면서, 심지어는 중립적 입장의 태국인들조차 왕후가 부적절하게도 국왕을 정치로 끌고들어간 것으로 느끼고 있다고 말함. 쭈띠난은 또한 주로 왕후에 초점을 맞춘 군주제에 대한 반 공개적인 비판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도 인정함. 쭈띠난은 푸미폰 국왕이 그 계획이 지닌 지혜가 무엇이냐고 질문하여 왕후가 장례식에 참석하는 일을 단념하게 하려 했지만, 그녀에게 참석하지 말라고 명령하기 직전의 수준에서 멈춘 것이라고 확신에 차서 말함. |
더욱이 푸미폰 국왕은 자신의 아내가 자만에 차 야심을 품은 일과 옐로셔츠 시위대가 대소동을 피우는 일 역시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
(자료사진) 시리낏 왕후(좌측)와 쭐라폰 공주(우측)가 2008년 10월 13일 옐로셔츠 시위 중 사망한 여성 앙카나 라다빤냐웃의 장례식을 주재하고 있다. |
* 시리즈물 바로가기 :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2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3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4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5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6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7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8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9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0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1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2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3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완결편)" |
|
첫댓글 결국 최근 몇달 동안에 태국에서 진행된 상황은..
가만보면 2008년의 재판이란 것이죠..
얼굴마담만 손티 림텅꾼과 짬렁 시므앙에서
수텝 트억수반과 붓다 이싸라 승려로 바뀌었을 뿐이죠
하여간 이 자들은
자기들 지지자들까지 몰래 죽이는 자들이니..
봉건적 왕정이라는 게 참으로 무섭고도 대단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태국의 정정에 대해 잘 몰랐었는데, 사람들의 고통이 많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