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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인준이
신순호
서진이는 아침햇살이 어렴풋이 느껴지면서 살며시 누군가 옆에 있는 것 같아 벌떡 일어났습니다. 4살배기 사촌동생 새미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가 서진이 일어나자 한마디 툭 내뱉었습니다.
“언니, 미워.”
서진이는 그만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혼자 남을 새미가 울까 봐 아무도 떠난다는 말을 안했지만 어제부터 뭔가 어수선하게 돌아가는 집안 분위기에 새미도 짐작을 하는 듯 했습니다.
“에이, 새미야. 언니가 왜 미워.”
“언니도 갈 거지? 나만 혼자 두고 갈 거지?”
“……”
8살 서진이와 두 살 위 서영이 언니, 그리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엄마는 두 달 전 캐나다의 큰 이모 집에 놀러와 신나는 여름을 보내고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린 새미는 늘 혼자 놀다가 사촌언니들이 와서 인형 놀이도하고, 블록도 같이 쌓고, 숲 속, 분수공원등을 쏘다니며 너무너무 신나게 여름을 보냈습니다. 서진이와 서영이는 새미에게 줄넘기와 그네타기도 가르쳐주고 인형 눈을 예쁘게 그리는 방법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런데 같이 계속 사는 줄 알았더니 이제 돌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미는 많이 속상했습니다. 서진이도 오늘 한국으로 돌아가면 언제쯤 만날 수 있으려나 생각하니 눈물이 자꾸 나왔습니다. 그래도 서진이는 억지로 참고 웃으면서 새미 손을 잡고 놀이방으로 갔습니다.
“새미야, 언니랑 주방놀이 하자.”
“그래.”
새미는 투정부리던 것을 어느새 다 잊어버리고 놀이방 구석에서 서진과 소꿉놀이를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혼자서 여러 역할을 하던 새미는 언니가 딸을 하고 새미가 엄마를 하는 놀이가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하지만 소꿉놀이를 하면서도 서진은 점점 다가오는 이별의 순간이 자꾸만 떠올라 순간순간 울컥해졌습니다. 그때 밖에서 두런두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차고에서 짐을 빼어 싣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새미는 아무소리 않고 장난감 음식을 한상 차리고 있었습니다. 가지, 양파, 배추, 파를 잘라 프라이팬에 볶더니 접시에 담고 빵도 잘라 과일과 함께 내놓았습니다. 숟가락 포크 옆에 물 컵도 놓았습니다.
“언니, 먹어.”
“어머, 새미야. 언니 먹으라고 만든 거야?”
“근데, 언니 가고 나면 누구랑 같이 먹지? 엄마는 언니처럼 안 놀아 준단 말이야.”
냠냠 먹는 시늉을 하던 서진이는 곰곰 생각하다 순간 친구 인준이가 떠올랐습니다. 인준이는 정말 오랫동안 잊고 있던 서진이의 단짝 상상 친구입니다. 오래전 서진이가 지금 새미만큼 작았던 어느 날, 언니 서영과 친구 희연이와 집안에서 숨바꼭질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서진이는 안방에 있는 옷방 문 뒤의 쌓아놓은 상자들 사이에 숨었는데, 숨죽여 한참을 기다리다가 그만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얼마를 잤을까 서진이가 자세를 바꾸면서 옆의 상자를 건드렸고 상자가 무너지면서 잠을 깨게 되었습니다. 어느새 집안은 어둑해졌고 방에서 나와 엄마와 언니를 찾았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얼른 거실의 불을 켜고 소파에 앉았지만 사방이 너무 조용했습니다. 서진이는 TV를 켰지만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얼른 다시 꺼버렸습니다.
“엄마…. 언니…”
서진이만 두고 모두 어디로 갔는지 겁이 나서 저절로 울음이 터져 나오려고 했는데 갑자기 말소리가 들렸습니다. 동그란 얼굴에 초록색 모자를 쓰고 같은 색 조끼를 입은 귀가 뾰족한 이상하게 생긴 아이였습니다.
“왜 울려고 해?”
“엄마와 언니가 없어졌어.”
“여긴 너희 집이니까 기다리면 오겠지.”
“그래도 혼자 있으니까 무서워.”
“그럼 나가볼까?”
“안 돼. 엄마가 안보이면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랬어. 그럼 엄마가 찾아온다고.”
“그래. 그렇게 하는게 맞아.”
“그런데 넌 누구야?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나? 난 인준이야. 난 네가 있는 곳이라면 항상 너와 같이 있었는데 이제야 내가 보이는구나.”
그렇게 알게 된 인준이와 서진이는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친구가 되었고 인준이 덕분에 혼자 있는 시간이 무섭지 않게 되었습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집에 왔다가 서진이를 본 엄마가 놀라며 안아주고 눈물을 흘리던 순간에도 인준이는 옆에 있었고 서진이에게 속삭였습니다.
“봐, 엄마는 내가 안보이잖아. 그러니까 나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어. 알았지?”
그때부터 인준이는 서진이 옆에서 함께 살게 되었고 기쁠 때, 슬플 때, 외로울 때, 심심할 때, 화가 났을 때 가리지 않고 서진이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서진이가 인형놀이가 시들해질 즈음 인준이도 가끔씩만 나타났고 결국 언제부터인지 거의 잊혔습니다. 그리고 지금 인준이가 떠오르자 어느새 갑자기 나타난 인준이가 옆에 붙어서 서운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습니다.
“난 네가 나를 완전히 잊은 줄 알았어. 뭐, 그게 상상 친구의 운명이긴 하지만. “
“미안해. 난 이제 너랑 놀기에는 너무 컸나봐.”
그리고 서진이는 인준이가 새미에게 더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에 새미에게 말했습니다.
“새미야, 내 친구 인준이를 너한테 두고 갈게. 이제 나는 언니가 되서 상상 친구가 필요 없거든. 인준이는 내가 엄마한테 혼나고 속상할 때 나하고 같이 얘기하고 놀았어. 내가 인준이한테 이제부턴 새미 친구하라고 부탁할 테니까 너랑 같이 지내.”
“어디 있는데? 난 안 보이는데?”
“인준이는 초록색 모자를 쓰고 귀가 뾰족해. 그리고 얼굴은 동그랗게 생겼어. 야채를 안 좋아하고 튀긴 감자를 좋아해. “
“나랑 똑같네? 그럼 걔는 그림도 잘 그려?”
“응, 네가 좋아하는 건 뭐든지 잘해.”
“그럼 나랑 소꿉놀이도 같이 할까?”
“당연하지. 언니보다 더 잘 놀아줄걸?”
“언제 오는데?”
“지금도 옆에 있는데 아직 네가 진심으로 원하지 않아서 안보일거야. “
서진이는 인준이를 새미에게 소개시켜주면서 정말 이젠 제법 큰 언니가 된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상상 친구가 이젠 필요 없을 만큼 자기가 컸다는 생각에 뿌듯했습니다. 아마도 인준이는 갑자기 캐나다에 살게 되어 좀 놀라겠지만 어차피 상상 친구니까 금방 적응할 것입니다. 그래서 새미가 외롭지 않게 좋은 친구가 되어 줄 것입니다. 차마 새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한국으로 떠나는 식구들은 잘 있으란 말도 제대로 못한 채 차에 올랐습니다. 서진이는 새미 옆에 서있는 인준이를 보았고, 이제 인준이도 영원히 이별이라는 생각에 더욱 슬펐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또 다른 자신이었던 인준이를 새미 곁에 두고 가게 되어 안심이 되기도 했습니다.
“새미야 안녕. 또 볼 때까지 잘 지내. 내 친구 인준아….새미 잘 부탁해. 그리고…그동안 너와 같이 놀아서 행복했어.”
아빠가 언니들과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이모를 태우고 공항으로 떠나자, 엄마곁에 가만히 서있던 새미는 기분이 좋지 않아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앞에 어떤 아이가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서진언니가 말한 대로 초록색 모자와 조끼를 입고 귀가 뾰족하고 동그란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좌우로 갸우뚱 하더니 손을 흔들었습니다.
“네가 인준이구나?”
새미는 서진언니가 남기고 간 친구가 반가워서 얼른 옆에 가서 앉았습니다.
“많이 슬프니?”
“응 그랬는데 나랑 놀아줄 친구가 있어서 이젠 안 슬플 거 같아.”
“서진이하고도 정말 잘 놀았어. 이제 서진이는 언니가 되서 상상 친구가 필요 없거든. 어때, 너는 나랑 놀거야?”
“그래. 이제부턴 나랑 놀자. 난 아직 4살이라 언니가 되려면 한참 멀었거든. 집으로 들어가서 내 장난감으로 같이 놀자.”
새미는 어느새 이별의 슬픔 같은 건 다 잊어버리고 새 친구 인준이와 놀 생각에 금세 기분이 좋아져서 씩씩하게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침에 서진이가 예쁘게 양 갈래로 묶어준 새미의 머리카락을 부드러운 바람이 쓰다듬어 주고 있었습니다. (2019년 7월 26일 벤쿠버 조선일보에 발표) |
카레덮밥
신순호
스미하와 함께 마트에 온 은경이는 혹시나 엄마를 만나지는 않을까 조심스레 주변을 둘러 보았습니다. 엄마는 식품부에서 반찬 만드는 일을 한다고 했으니 아마 매장에서는 부딪히지 않을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반찬코너는 멀찍이 돌아서 생활용품쪽만 보고 있었습니다. BTS의 팬이면서 한국물건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스미하가 한국마트에 가고 싶다며 몇번을 졸라 하는 수 없이 같이 온 은경이었습니다.
“야, 저거 맛있겠다. 한번 먹어보자.”
은경이가 말릴새도 없이 스미하는 불고기를 시식하는 식품코너로 달려갔습니다.
“맛있는 불고기가 오늘 스페셜 세일 합니다. 불고기 이즈 어 스페셜 디스카운트 온 세일 ”
시식코너의 아줌마가 큰 소리로 손님들의 관심을 끌면서 즉석에서 굽고 있는 불고기 냄새가 솔솔 콧구멍을 간지럽혔습니다. 은경이는 하는 수 없이 시식하는 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그때 시식코너 아줌마가 몸을 돌리면서 은경이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맙소사, 몸을 완전히 덮을 것 같은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사 모자를 쓰고 입에 투명마스크를 한 시식코너 아줌마는 바로 은경이의 엄마였던 것입니다. 은경이는 순간 땅으로 꺼져 버리고 싶을만큼 창피했습니다. 엄마에게 들킨것 같기도 하고 아닌것 같기도 했지만 어쨌든 은경이는 슬며시 지나쳐 다른 코너로 일단 피한 후 식품코너를 슬쩍 훔쳐 보았습니다.
“아줌마, 이거 신선한 고기에요?”
“네. 오늘 아침에 들어온 걸로 양념한 거에요. 오늘 특별세일이니까 들여가세요.”
그 손님은 정갈하게 정돈된 반찬 팩을 이리저리 헤집어 놓더니 맨 아래에서 하나를 들었다가 다시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저것 만지는 사이 반찬 팩하나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면서 그만 뚜껑이 열리고 말았습니다.
“손님, 그렇게 헤집어 놓으시면… “
“뭐라구요? 이 아줌마가. 여기 매니저 어딨어? 직원 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손님한테 눈을 똑바로 뜨고 짜증을 내?”
“손님 그게 아니구요.”
은경이는 귀를 막고 심정으로 마침 곁으로 온 스미하를 데리고 빠르게 마트를 나왔습니다. 말도 안되는 행패를 부리는 그 아줌마가 너무 싫었고, 죄를 지은것도 없이 쩔쩔 매는 엄마도 싫었습니다. 또한 엄마를 모른체 한 자신에게 너무 실망스러웠습니다.
집에 돌아온 은경이는 계속 마트에서 본 엄마의 모습이 머리에 떠나지 않아 심난했습니다. 그러다 시계를 보니 조금 있으면 엄마가 오실 시간인데 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도 저녁준비를 해야하는 엄마를 위해 오늘은 대신 저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비교적 만들기 쉬운 카레덮밥을 하기로 하고 레시피와 엄마가 요리할때 봤던 것들을 기억해 봤습니다. 먼저 냉장고에서 감자와 양파를 꺼내 먹기 좋은 크기로 깍둑썰기를 했습니다. 양파를 좋아하지 않는 은경이는 골라서 빼려는 심산도 있어서 양파를 좀 더 크게 썰었습니다. 그리고 요리의 빛깔을 예쁘게 내주는 당근도 잘게 썰어 함께 담아 놓았습니다. 칼질할때 칼에 베이지 않도록 왼손을 오그린채 곧추 세우라는 엄마의 가르침을 기억하며서 은경이는 조심스럽게 칼을 다루었습니다. 돼지 고기는 냉동고에서 미리 꺼내어 살짝 해동을 한 다음 당근보다 약간 작게 썰어서 찬물에 담궈 핏물을 뺐습니다. 고기를 좋아하는 은경이는 큼직한 고기를 먹고 싶었지만 엄마가 요새 이빨이 아파서 잘 씹지 못하기 때문에 잘게 썰었습니다. 이제 재료가 다 준비되자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먼저 고기와 양파를 볶은 다음 감자, 당근을 넣고 서로 잘 섞으면서 볶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자박자박 재료들이 잠길만큼 물을 붓고 푹 익도록 끓여주었습니다. 엄마를 위해 정성들여 카레덮밥을 준비하면서 은경이는 계속 아까의 일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모른체 한걸 엄마가 알고 있으면 어떻게 하지… 하지만 친구 앞에서 엄마가 그런 일 하는건 보이기 싫어… 휴, 그래도 엄마가 돈을 벌기 위해 고생하는데 엄마를 창피하게 생각하는건 정말 말도 안되는 짓이잖아. 아이 참, 엄마는 왜 의사나 변호사같은 전문직이 아니고 하필 마트에서 사람들에게 반찬사라고 외치는 일을 할까. 아니 그냥 사람들 눈에 안띠는 사무직도 많잖아.’
냄비속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야채들이 마치 은경이를 비난하며 와글와글하는것 같았습니다. 감자 하나를 꺼내서 씹어보니 잘 익은 것이 이제 카레가루를 넣어주면 될 것 같았습니다. 은경이는 카레를 물에 잘 풀어서 죽처럼 걸죽하게 만들어 냄비안에 살살 저으면서 부어주었습니다. 금세 구수한 카레냄새가 온 부엌에 퍼지면서 냄비속 재료들도 노랗게 물들어 갔습니다. 은경이는 수저를 정갈하게 놓고 김치, 장아찌 같은 기본 반찬에 오목한 접시를 식탁에 배열해 놓은채 엄마를 기다렸습니다.
잠시 후 엄마가 돌아오셨습니다.
“어머, 이게 무슨 냄새야? 카레했니?”
“응, 카레가 먹고 싶어서.”
“에구, 힘들었을텐데. 엄마한테 해달라고 하지.”
“아니야, 오늘은 숙제도 없어서 시간이 있었어.”
“그래, 수고했어. 어디보자…아휴 맛나게 보이네.”
엄마와 은경이는 마주앉아 따뜻한 카레덮밥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엄마는 배가 많이 고프셨는지 밥을 한 번 더 덜어서 카레에 비벼 드셨습니다. 식사 후 설겆이는 엄마가 하고 은경이는 후식으로 사과를 깍았습니다.
“엄마, 나 사실은 오늘 엄마 일하는 마트에 갔었어.”
“그래? 나도 긴가 민가 했는데 맞구나. 그런데 왜 엄마 안보고 그냥 갔어?”
은경이는 갑자기 왈칵 눈물이 나왔습니다. 엄마가 창피해서 모른 체 한게 너무 미안하고 속상했습니다. 엄마는 짐작한 듯 가만히 있다가 말씀하셨습니다.
“엄마가 어릴 때 집이 어려워져서 외할머니가 시장 길바닥에서 찐 옥수수 파는 행상일을 잠깐 하셨어. 하필 학교를 가려면 지나가야 하는 길이라서 학교 끝나고 친구들과 올 때면 다른길로 돌아가거나 애들이 볼까봐 못본척 후딱 지나가곤 했지. 그런데 어느날 같이 걸어오던 친구가 찐 옥수수를 사 먹겠다고 외할머니한테 가는거야. 집에도 놀러온 적이 있어서 외할머니 얼굴을 아는데 말야. 난 어쩔줄 몰라서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 나를 본 외할머니가 갑자기 일어나서 어디로 가버리시더라구. 그 옆 좌판에서 나물 파는 아줌마가 대신 팔아주셨어. 그리고 저녁 때 외할머니는 내일부턴 시장길로 다니지 말고 다른 길로 다니라고 하시더라구. 친구들이 보고 골리면 어떻게 하냐구. 난 내 마음속을 들킨 것 같아서 그날 엄청 울었지. “
“엄마, 미안해… 나도 아까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아냐, 엄마도 어릴 때 그랬었다니까. 하지만 엄마가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우리가 생활하는거니까 너는 엄마가 하는 일을 부끄러워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엄만 영어도 잘 못하고 학교도 여기서 나오지 않았잖아. 정말 아무것도 못할 줄 알았는데 다행히 일자리를 가져서 너무 좋거든. 그리고 열심히 하면 6개월뒤 정규직도 될 수 있대. 그럼 지금보다 대우도 더 좋아질거야. “
“난 그래도 모르는 사람들이 엄마한테 막 ‘아줌마’ 그러면서 함부로 부르는건 싫어.”
“그래, 이해해. 처음엔 나도 낯설고 이상했어. 그런데 은경아, 엄마는 지금 일이 재미있어. 내가 만든 반찬을 손님들이 맛있게 먹고 다시 찾는 것도 기쁘고, 열심히 팔아서 매상이 많이 오르면 막 내가 뭔가 대단한 일을 한것 같아서 좋아. 은경아 너가 불편하면 앞으로도 엄마 아는 체 말고 그냥 가. 어차피 엄만 바쁘니까 괜찮아. 알았지?”
“내가 못되 먹었지?”
“응, 엄마도 너 만할땐 참 못된 딸이었어. 그러니까 너는 내 딸이 확실해.”
울다가 엄마말에 한바탕 웃어 버린 은경이는 아까의 무례한 손님이야기는 하지 않는게 좋겠다고 생각했고, 엄마도 그 손님이 왔을때 은경이가 없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엄마는 정말 그 일이 재미있고 보람있어 하시는구나. 내가 정말 잘못 한 것 같아. 다음엔 스미하랑 같이 가서 그 맛있는 불고기 엄마가 만든거라고 해야겠어.’
‘그때 엄마가 먼저 피하지 않았으면 나도 은경이처럼 모른체 했겠지? 그날 엄마 마음이 지금 나 같을까…’
은경이와 엄마가 각자의 엄마 생각을 하는 사이 밤은 새록새록 깊어갔습니다.
(2020년 2월 21일 벤쿠버 조선일보에 발표)
돌아온 신발
신순호
“어, 내 신발이 없어졌어.”
교실에 도착하여 신발을 갈아신으려던 아라는 깜짝 놀랐습니다. 분명히 어제 집에 가기 전에 벗어서 사물함 바구니에 넣어 두었던 신발이 없어진 것입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오면 외투와 신고 온 신발은 교실 밖 사물함 바구니에 넣어두고 실내화로 갈아 신습니다. 당황한 아라를 도와 리아도 함께 다른 아이들의 바구니를 찾아 보았지만 모든 아이들이 다 실내화를 갈아 신을때까지도 신발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제 새로 사서 기분좋게 신고 온 첫 날 이런 일이 생기자 아라는 너무 속이 상했습니다.
“너 신발에 이름 적어놨지?”
“아니… 한번도 이런일이 없어서 설마하고 안 적었어.”
“에이, 그럼 누가 주웠어도 못 찾아주겠네.”
아라와 리아는 학교 분실함까지 다 찾아보았지만 결국 집에 갈 시간이 되도록 신발을 찾지 못했습니다. 엄마에게도 말 못하고 속을 끙끙 앓던 아라는 다음날 아침 학교에서 다시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역시나 신발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누가 가져갔나봐.”
“그렇다면 범인은 새 신발을 신은 사람이겠군. 발 사이즈가 비슷하고”
허둥대는 아라와 리아를 지켜보던 자칭 탐정 마이클이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일단 발사이즈가 비슷할 4학년과 5학년을 조사해 보자.”
하지만 모든 아이들의 신발을 다 조사할수는 없었고 더구나 비슷한 신발을 보아도 무턱대고 내 신발이라고 주장할수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점심시간에 나와서 노는 아이들 사이에서 같은 디자인의 새 신발을 신은 2명 정도가 의심이 갔습니다. 그 중 한 아이는 아라보다 한참 작았으나 다른 아이는 아라보다 한 학년 위로 4-5학년 통합반이라서 아라네 교실 바로 맞은편 반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아이는 방과 후 수업에 참여하는데 하필 그 수업은 아라네 교실에서 하고 있었습니다. 짙은 의심은 가지만 어떻게 접근을 해야할지 망설이던 마이클은 꾀를 내었습니다. 범인이 스스로 신발을 가져오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쉬는 시간에 맞은편 교실에 가서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시타로와 소피아에게 가서 큰 소리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곁눈질로 의심이 가는 아이가 근처에 있는 것을 살피면서 말입니다.
“어제 아라가 새로 산 실내화를 잃어버렸대.”
“어쩌다가? 이름 안 써놨어?”
“설마 친구 것을 가져갈까 싶어서 안 써놓았대. 우리 학교에서는 한번도 그런 일이 없었잖아. 그래도 서로 신발이 바뀔수도 있는데 이름 안 써놓은것은 아라 잘못이지 뭐.”
“어떻게 생긴 신발인대?”
“회색 스케치 브랜드인데 사이즈는 2야. 어제 처음 신은거라서 완전 새거야.”
“분실함도 찾아 보았어?”
“어제는 없었대.”
“그건 아니야. 그제 집에 갈때 사물함에 벗어 두는걸 나도 봤거든.”
“설마, 그래도 누가 친구 신발을 훔쳐 갔을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 누가 실수로 바꿔 신었을 것 같아. 게다가 아라가 신발에 이름은 안써놨지만 아라만 아는 표시를 해 놓았대. 내일 아침까지 신발을 못 찾으면 선생님한테 말씀 드릴거래. ”
“아라만 아는 표시가 있으면 바로 애들 신발을 조사해 보면 알겠네.”
“그러니까. 너희도 혹시 회색 스케치 새 신발 신은 애 있으면 좀 알려줘.”
“알았어. 아라가 얼른 신발을 찾았으면 좋겠다.”
“아마 누가 주웠으면 이름이 없으니까 오늘쯤 분실함에 갖다 두지 않겠어?”
마이클은 큰 소리로 수다를 신나게 떤 다음 자기 교실로 돌아오면서 빙그레 웃었습니다. 의심가는 그 아이가 눈에 안띄게 신발을 슬며시 벗어서 책상 서랍안에 넣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입이 근질거렸지만 마이클은 시치미를 떼고 누가 주워서 가져다 놓았을 지도 모르니까 아라에게 내일 아침 분실함을 찾아보자고 말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아라가 허둥지둥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분실함 앞으로 가니 마이클이 빙긋 웃으면서 서 있었습니다. 손에는 아라의 새 신발이 들려 있었습니다.
“꺄아, 내 신발이다!”
“네 것인지 어떻게 알아?”
“신발 끈 매듭을 보면 알지. 풀어지지 말라고 삼촌한테 배운 방법으로 묶었거든 .”
“하하, 진짜 너만 아는 표시가 있었구나?”
“무슨 말이야?”
“아무튼 신발이 돌아온 걸 축하해. 그리고 지금 바로 이름 쓰는게 좋을 것 같아.”
“맞어, 맞어. 고마워.”
“이름만 써 놨어도 바로 찾을 수 있었을거 아냐. 어쩌면 잃어버리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아라는 마이클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학생들 중에 똑같은 가방, 똑같은 연필, 똑같은 신발을 가진 아이들이 당연히 있을 것입니다. 소중한 내 물건을 지키려면 이름을 꼭 써 놓아야하는 것이 맞습니다. 아라는 누군지 모르지만 신발을 주워서 분실함에 갖다 놓아서 고맙다고 생각했고, 마이클은 아마도 그 아이가 자기 신발로 착각해서 신었다가 돌려준거라 믿기로 했습니다. 수업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아이들은 서둘러 후다닥 교실을 향해 뛰어갔습니다. 오늘도 신나는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2019년 9월 6일 벤쿠버 중앙일보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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