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보살(彌勒菩薩) / 보고 싶은 불. 보살
미륵보살(彌勒菩薩)
반가의 자세로 천년의 미소를 간직하며 사유하고 있는 뜻은?
미륵보살은 왜 사유하는가?
사람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삶과 그 의미에 대해서
곰곰이 사유하기 시작한다.
바로 그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이 반가(半跏)의 자제로 앉아 있다.
손을 턱 밑에 살포시 갖다 데고서는 깊은 사유 끝에 생의 의문을
풀어낸 듯 조용히 미소 짓는다.
그때 어디선가 미풍이 불어와 옷자락을 가볍게 흔들고 지나간다.
바로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의 모습이다.
이 미륵보살의 산스크리트 명은 미륵불과 마찬가지로 즐거움을 준다는
마이트리(maitri)에서 파생된 마이트레야(Maitreya).
자씨보살(慈氏菩薩)은 그 의역이다.
우리나라 국보 78호와 83호 각각 지정되어 있을 뿐더러
일본 국보 1호로 지정되어 있는 것이 미륵반가사유상(彌勒半跏思惟像)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사유하는 것일까.
그것은 비단 자신의 문제뿐만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사유이다.
'어떻게 도탄에서 신음하는 이웃의 고통을 덜어 주고
그들과 더불어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어 갈 것인가'를 깊이 사유한다.
그 모습을 그린 것이 미륵사유상인 것이다.
미륵보살이 머무는 대지 도솔천이란
우리나라 대부분의 미륵상이 미륵보살이기보다는
미륵불로 조성되어 있음에 반하여
유독 고구려, 백제, 신라 각각의 대지에 반가사유상을 한
미륵보살이 많이 등장한다.
물론 그 이후에도 반가사유상이 조성되기는 하였지만
이 시기만큼 유행의 물결을 타지는 않았다.
왜 그랬을까. 왜 유독 삼국 시대에 미륵보살상이 많이 조성되었을까.
그것은 장차 이 땅에 미륵불이 출현하는 불국토의 건설을 위한
준비 기간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다지려는 의도일 것이다.
보살의 시대가 있어야 부처님의 시대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자! 지금부터 그에 대한 구체적인 실증을 미륵보살과
그의 대지인 도솔천과 관련지어 탐색해 보겠다.
도솔천의 산스크리트 명은 투쉬타(Tusita)로 '만족시키다'라는 뜻의
동사 투슈(Tus)에서 나온 말이다.
모든 것이 만족된 곳이라는 의미로 지족천(知足天), 희족천(喜足天)으로 의역되며,
도사다천(覩史多天)으로 음역되기도 한다.
그곳은 사실 불교의 세계관 중 욕계(欲界) 제4천에 해당되는
천(天)으로 깨달음의 세계는 아니다.
격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욕망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그런데 중국이나 우리나라 내지는 일본에 투영된 도솔천은
아미타 정토 다음가는 미륵정토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어떻게 미륵보살은 도솔천에 태어나게 되었을까?
석가모니 생존시 아일다(阿逸多, Ajita)라는 수행자가 있었다.
그는 살아 생전 열심히 도를 닦아 죽어서 도솔천에 왕생하여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이라는 위치에 서게 된다.
즉 아일다가 미륵보살이 된 것이다.
일생보처보살이란 이 한생을 지나고 나면 다음 생에 비어 있던
붓다의 자리를 매꾸게 된다는 의미이다.
도솔천은 그러한 일생보처보살이 머무는 곳이다.
석가모니불도 이 세상에 태어나 깨들음을 이루기 전에는
도솔천인 내원궁(內院宮)에서 살았던 것으로 설해져 있다.
미륵보살은 56억 7천만년 동안 도솔천에서 머물며
여러 중생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고 깊은 사유에 잠기기도 하면서
수행을 닦아나간다.
그렇게 미륵보살이 현재 깊은 사유에 빠져 있는 곳이 도솔천이라고 한다면,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을 많이 조성했던 삼국시대 각각의 분위기는
그 대지를 각각 도솔천의 향운으로 자욱하리만치 아늑한 보금자리로 가꾸려했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신라 청소년들의 지도자적 구국 집단인 화랑도들이 스스로를
미륵의 후예인 용화향도(龍華香徒)라 칭함에서랴.
백제의 무왕, 신라의 진흥왕, 고구려의 장수왕이 미륵불이 출현할 때
이 사바세계를 다스린다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을 자처한 것도
그러한 사정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논리를 좀 더 설득력 있게 전개시켜 보자.
인도에는 태자사유상이라는 조상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그 도상을 보건대 보관을 쓴 싯타르타 태자가 반가좌를 하고선
깊이 사념에 든 상으로서 미륵반가사유상과
유사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 태자사유상이란 고타마 싯타르타가 출가하기 전에
인생의 의미를 곰곰히 사유하는 모습,
즉 생로병사의 고통스러운 현실에 직면하여 어떻게 하면
이 생과 죽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를 사유하는 것이리라.
거기에서도 물론 자기 인생의 고통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에 대한 고통과 그 연민,
그리고 그 고통으로부터 해탈로 사유가 깊어가는 과정이 그려질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미륵보살의 사유상이나 태자의 사유상이나
사유의 모델에서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다.
사실 우리나라의 반가사유상이 태자사유상을 모델로 했으리라는 추측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공통적인 사실에 접근하게 된다.
싯타르타 태자건 미륵보살이건 그 사유의 태도는
분명 깨닫기 이전의 철저한 고민과
나 자신을 비롯한 모든 중생의 구제에 대한 사유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깨닫기 바로 직전의
수행자가 거주하는 국토가 말하건 데 도솔천이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삼국시대의 분위기는 부처님이 출현하기
바로 직전의 도솔천으로 여겼다는 추론이 분명해진다.
미륵불은 56억 7천만년을 지나 이 사바세계가 청정해져
모든 인간들이 계행(戒行)을 바로 지키고 아름답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되고난 이후에 출현한다고 했다.
간혹 이런 의문을 품어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올바로 생활하고 세계가 진정
아름다워 졌을 때 부처님이 할 일이란 무엇인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 번뇌의 미세한 티끌마저 끊어버리고
그 모두를 해탈시기기 위해서?
물론 그것도 타당한 이유이기도 하겠지만,
그것만으로 뭔지 개운치 않은 구석이 남는다.
바로 그 개운치 않는 구석을 해결해 주는 것이
나는 미륵보살과 그의 대지인 도솔천일 것으로 생각한다.
미륵보살의 설법과 인도로 올바른 도덕적 실천과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중생들의 부단한 노력,
그 수행의 기간이 바로 미륵보살이 활동하는 공간, 도솔천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미륵보살로서의 삶이 중생들을 교화하여
아름다운 세상을 만든 연후에 미륵불은 출현하여
모든 중생들을 성불시킨다면 미륵보살과 미륵불의 세계,
구도자로서의 세계와 깨달음의 세계는 썩 잘 어울리지 않는가?
사유하는 실존은 평화롭다
인생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평화로운 모습,
그것은 진정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에서 느낄 수 있는
번뇌가 가득한 모습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실존철학자 싸르트르는 일본 국보 1호인 광륭사(廣隆寺)
미륵반가사유상을 앞에 두고 한 말을 떠올려 본다.
'나는 오늘날까지 수십년 철학자로 보낸 생애 동안 이처럼
인간 실존의 평화로운 모습을 구현한 예술품을 본 일이 없습니다.
이 보살상은 우리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마음의 영원한 평화라는
이상을 남김없이 최고도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실존의 평화로운 모습, 그것은 가상의 자기를 부단히 비우면서
주체적으로 참 자기를 형성해 나가는 큰 사람의 모습이다.
바로 그 바람직한 인간의 모습을 이 반가사유상이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그 일본 국보1호가,
한국에서만 자생하는 적송(赤松)으로 만들어 졌다는 사실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 그것을 한국에서 만들어 가지고 일본에 가져갔는지,
아니면 나무만 가져다가 일본에서 제작했는지 모르지만 -
그 반가사유상은 백제인 혹은 신라인의 손으로 만든 한국의 인간상임에 틀림없다.
우리나라 국보 78호와 이 상을 비교해 보면
그 구조의 유사함에서 놀라게 된다.
우리나라 것은 청동이고, 일본에 있는 것은 나무로 되어 있기에
그 질감이나 세밀한 차이를 제외하고서는 별반 차별성을 느낄 수 없다.
게다가 이 보살상이 반가사유상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은
일본에 불교가 유입할 당시 한국불교가 일본 문화에 끼친 영향을
확실하게 증거해 준다.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6-7세기경 아스카 시대의 미륵상은
대부분 한국에서 유행의 물결을 탔던 반가사유상 형식이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의 미륵사유상을 보건대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교각상(交脚像)이나 걸터 앉은 의자상(倚坐像)이 대종을 이루므로
중국불교가 일본에 직수입되었다고 볼 수 없기에 더욱 그렇다.
(조계사)
[출처] 목야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