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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하나님 안에서 안전한 성도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1-5).
우리는 지금까지 이 위대한 요한복음 17장을 공부하면서 특히 첫 다섯 구절 속에 계시되고 펼쳐져 있는 위대한 구원 교리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구원에 대한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진리를 보편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어떻게 하나님의 위대한 속성과 그의 거룩하심, 그의 긍휼, 그의 지혜, 그의 사랑, 그의 공의로우심과 능력을 명백히 드러내는지를 보았습니다. 이런 것들을 방금 전까지 살펴보았는데. 그러나 이제 여기에서 우리가 들은 바를 좀더 따라 나아가 보고 좀더 세분화시켜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훨씬 더 놀라운 방식으로 펼쳐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정말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분이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할 일이 없이 그저 시간이 많은 사람에게라면 그 모든 일이 재미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고 묵상하는 것은 다 옳은 일이다. 그러나 내 자신을 위해서 말한다면 나는 생활이 너무 어렵고 많은 시련을 겪고 있다. 나는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고 있다. 내가 가진 힘이 있다면 전부 내 생활유지를 위해 쓰여야 한다. 내 자신의 생활 속에서 내 코가 석 자이다. 그리고 우리 식구를 볼 때 참 가슴이 미어진다. 문자 그대로 나는 온갖 종류의 문제에 온갖 방식으로 뒤범벅되어 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무지와 우둔함에 빠진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자주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의 교리를 하나의 이론으로, 나와는 거리가 먼 어떤 것으로 여겨 왔습니다. 그러나 내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이런 생각보다 더 기만적인 생각은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기도를 드리셨다는 사실 자체가 이런 생각이 얼마나 철저하게 어리석은 생각인지를 입증해 줍니다. 주님은 왜 그런 기도를 드리셨습니까? 그것도 특별히 제자들의 귀에 들리게 기도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직 하나, 즉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관심이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르쳐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체로는 그들과 더 이상 있지 않게 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 그들을 위해서 한 일에 대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로 말씀 드리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계속해서 "나는 세상에서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11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어떤 소원을 갖고 계신지를 아버지께 알려 드렸습니다. 그들을 향한 주님의 소원은, 그들이 주님께서 그들을 떠난다는 사실과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고 핍박할 것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자기들의 관계에 대하여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었습니다.이보다 더 실제적인 것이 결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복음이 이 세상에 사는 누구에게든지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궁극적 힘과 소망과 위로는 다름아닌 구원의 계획을 바로 이해하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바로 아는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저는 기독교 목회를 여러 해 동안 해 오는 가운데 분명히 관찰하였습니다. 보편적으로 말씀 드려서, 목회자인 저는 많은 사람들이 겪는 대부분의 어려운 문젯거리들은 이 위대한 교리를 확실히 붙잡지 못한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우리의 고통의 원인을 따져 보면 다름아닌 우리의 주관적 생각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 의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를 이 위대한 계획의 일부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우리의 대부분의 어려움들은 거의 자동적으로 해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복음 17장의 첫 다섯 구절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상세한 측면들을 계속해서 연구해 나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 준다고 말씀드렸으니, 이제부터는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계획되었다는 사실을 중점적으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이 사실이 여기에 아주 분명한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에서 포착해야 할 첫 번째 사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표현해도 괜찮은지는 몰라도,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아이디어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생겨났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 안에 그 원천과 기원을 갖고 있습니다. 자, 이것은 정말 놀라운 사상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것을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 즉 우리의 생각, 우리의 전체 사고 방식과 사상 속에 들어 있는 죄, 그리고 세상에 있는 죄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설득시켜서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반대하고 겁주는 존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가 항상 달래 드려야 하고 설득시켜야만 하는 어떤 무서운 분쯤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마치 우리에게 친절하시거나 은혜로우시거나 우리를 사랑하실 의향이 전혀 없으신 분으로 여길 때가 많습니다.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을 영원한 영광 속에서 우리와는 멀리 떨어져 계신 분으로, 또는 우리를 향해서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는 절대적 의를 가지신 무서운 분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호의를 베푸시도록 하기 위하여 무진 노력을 계속 기울여야 하는 존재라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구원은 모두 다 하나님의 생각 속에서 기원된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목적입니다. 저는 심지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을 달래실 필요가 없다고까지 말씀 드리는 바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들이 아슬아슬하게 위험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찬송가들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 주십사고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해야만 한다는 결론으로 이끄는 가사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 가사는 '대언하다' 라는 어휘를 전적으로 크게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고후 5:19)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독생자를 주셨으니..." (요 3:16). 그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단히 큰 수고를 하셔서 하나님 아버지를 설득시켜 우리를 용서하고 받아들이게 되셨다는 사상은 비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완전한 오해입니다. 구원의 원천과 기원은 오직 하나님의 위대하고 영원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제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봅시다. 구원은 하나님의 아이디어일 뿐만 아니라, 우리는 여기에서 그것이 시종일관 완벽하게 계획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시간의 세계 속에서 어떤 신자든지 알 수 있는 가장 깊은 확신과 위로의 원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 구원에는 우연적인 것이나 우발적인 것이나 수정이 불가피한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보다 우리에게 더 큰 위안과 확신을 주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완벽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인 영원 전부터 인류 구원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계획은 하나님 마음속에 영원히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우연이 들어갈 자리는 전혀 없습니다. 구원 계획이 수정되거나, 변화되거나, 어떤 국면에서 달라질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여 방황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참 이상한 결론을 이끌어 내는 어떤 잘 알려진 성경해석이 한 가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게 하셨지만 유대인들이 그 하나님의 아들을 배척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원래의 계획을 변경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고 믿으면서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구원 방법을 도입해야 하셨고, 그래서 교회가 존재하게 되었고, 궁극적으로 미래의 어느 때에 그 나라가 소개될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원래 계획이 수정되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미 말씀 드린 바대로, 이것은 성경에 전혀 기초하지 않은 이론입니다. 오히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창세 전에, 즉 인류 중 단 한 사람도 태어나기 전에 세워진 것이 분명합니다. 바로 여기 예수님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라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그 사실을 발견합니다. 무슨 때를 말합니까? 하나님께서 미리 확정하신 때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그 목적 전체가 바로 이 단어 '그때'라는 그 표현 속에서 발견됩니다. 우리는 다시 이 요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계획이 절대적으로 완전한 것이며 창세 전에 이미 완전한 계획으로 존재했다는 진리를 끌어내기 위하여 잠시 이 문제를 지나가며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이것을 확실히 새길 수 있도록 잠시 이 시간적 요소를 살펴보겠습니다. 계획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계획이 인간에게 점진적으로 계시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항상 모든 일이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적절한 시기에, 단 한 순간의 지체도 없이 일어난다는 점이 매우 강조되어 있습니다. 모든 계획이 이미 확정되어 있습니다. 모든 일이 각각 그 적절한 순간에 일어납니다. 최초의 약속이 정확한 타이밍에 의해 주어졌으며, 홍수가 특별히 정해진 시점에 닥쳐왔으며,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창 6:3)라는 경고가 인류에게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같은 일을 하고 계시지만, 거기에 목적이 있고 정해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시기를 확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도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정확한 시점에 되어진 일입니다.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다 찰 때까지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진술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애굽으로의 이주도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이미 예언된 된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실제로 애굽으로 이주하기 이전에, 이미 아브라함은 그의 자손들이 애굽 땅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머물게 될 것인지를 정확히 통보받았습니다(430년). 이 모든 것들은 완벽한 시간계획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일의 시기를 정하시고 그것이 일어날 정확한 순간을 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는 약속이 필요한 바로 그때에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윗도 자기 시대에 약속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선지서들 안에서도 이런 주장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선지서들에 보면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일 만큼 정확하고 자세한 예언들이 수두룩하게 나옵니다. 그러나 그 위대한 계획을 영원 속에서 세우신 분이 다름아닌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을 때, 그리고 모든 일이 이 위대한 디자인을 이루기 위해 일어나도록 모든 것이 확정되고 모든 것이 계획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때, 우리는 이 사실을 그리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런 것을 예상할 수 있으며, 또 이런 사실을 성경에서 정확히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갈라디아서에 바울이 기록한 유명한 구절이 나와 있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갈 4:4). 그런데 사람들이 자주 이러한 질문을 던집니다. "왜 그리스도는 더 일찍 오시지 않았는가? 왜 그는 그 특정한 시기에 오셨는가?" 우리가 비록 이 질문에 대하여 상세하게 대답할 수는 없다 하여도, 적어도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시점에 오셔야 했던 많은 이유가 있다고는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하나님의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큰소리 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일정한 기간을 주셔서 그 기간동안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깨달을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율법을 그들에게 주시면서 "만일 너희가 그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너희가 내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최소한 14세기라는 기간을 그들에게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과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지 확인하도록 하셨습니다. 과연 그들은 철저하게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위대한 헬라 철학자들이 연속적으로 인류의 무대에 등장하여 사람들에게 자기 나름의 사상을 발표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올바른 사상을 주시오. 그러면 우리가 그것을 실행에 옮기겠소.” 그들은 애써 노력했지만 실패했습니다. 로마인들과 그들의 법체계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기 전에, '영원 전에 계획된 그때가 이르기 전에 인류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해 보았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놀라운 영적인 진리와는 상관없지만, 제가 여러분에게 한 가지 매력적인 연구 과제를 추천하는 바입니다. 구약성경을 읽으시면서 여러분 자신이 그 당시의 고대 이스라엘 족속의 입장에 처해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과 그 구원 계획을 잊어버리셨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자주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렇게 느끼기 시작하는 때마다. 또는 여러분들이 원수들이 언제나 모든 전선에서 압도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어떤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정확한 타이밍을 보게 될 뿐 아니라, 그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하게 필요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분명히 보게 됩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이런 묵상보다 우리에게 더 큰 위안을 주는 것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시 97:1: 99:1). 우리는 전체적인 계획이 하나님의 마음속에 이미 확고히 세워져 있었다는 이 진리를 굳게 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이 시점에 아버지께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버지와 아들이 본래 합의했던 때가 임박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2장에 기록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보았던 것과 같이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해 제자들을 준비시키고 계셨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이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의 때는 모두 다 확정되어 있으며, 계획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멈춰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종말도 이와 마찬가지로 계획되어 있으며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런 질문을 던지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교회가 약해지는 것을 방치하시는가? 어째서 교회 안에 이런 저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보고만 계시는가? 어째서 하나님께서는 자유주의적 성경 비평이 일어나 근 백여 년 동안이나 활발하게 지속되는 것을 허락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이런 모든 일들을 중단시키지 않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이 점에 대해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해 아래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교회들의 상태에 대해서 당혹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은 염려하거나 고통스러워하거나 자기 영혼을 고문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하늘의 보좌에 앉아 계시며 땅의 거민들을 메뚜기같이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친히 정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때, 즉 역사와 세상의 종말은 이미 확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때를 알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은 누구도 그때를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성자도 알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아신다고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사실을 알면서도 위안과 용기를 얻지 못한다면, 저는 여러분이 과연 그리스도인인지 믿지 못하겠습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는 말씀 같은 영광스러운 성경의 확언들이 우리에게 주는 위안은, 처음 시작할 때부터 목적을 보시는 하나님, 즉 그 권능이 너무나 강하여 그 누구도 대항할 수 없는 우리 하나님의 생각 속에서 모든 것의 목적이 설정되고 계획되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은 심지어 애굽왕 바로와 같은 자를 취하셔서 그를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진흙같이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이제 경외하는 마음으로 이 계획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저는 이것을 살짝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이 이상하고 신기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 일을 좀 하고자 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영원 전에 하늘에서 성부, 성자, 성령 사이에 열렸던 회의에 저와 함께 살짝 참관해 보자고 요청하는 바입니다. 그 회의는 무엇 때문에 개최되었습니까? 바로 이 구원의 문제 때문에 열렸던 것입니다. 그 회의에서 복되신 삼위일체의 제2위격인 성자께서 하나의 과업을 받았습니다. 그 회의에서 성자께서 만물의 상속자로 지명되었습니다. 그 성자께서 여기에서 성부 하나님께 그때 가졌던 영원한 회의의 내용을 상기시켜 드리고 있는 장면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 로소이다."우리 함께 이런 것들을 경이감에 찬 눈길로,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들여다보도록 하십시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 다 같이 이것을 기억하십시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 여전히 우리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회의는 원래 우리의 구원의 문제와 관련해서 열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에서 맨 처음으로 알게 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즉 이 영원한 회의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과 세상에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하여 숙고하는 가운데, 앞으로 죄가 개입되어 인간이 타락할 것을 미리 알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조치가 취해져야 할지를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결정은 이 문제를 특별히 성자께 맡기기로 하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1:10에서 바울 사도가 선언한 것처럼,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여기에서 다시 때의 요소가 나타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다시 말하면, 바로 그 회의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머리로 지정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책임지게 되셨으며, 온 세계와 인간의 머리 또는 대표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언급하시면서 지상 명령을 주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 28:18).
자 바로 이것이 우리가 절대 오해해서는 안 되는 중대한 원리입니다. 이 원리가 바로 구약에 나오는 수많은 모호한 사건들에 큰 빛을 던져 주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그런 사건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주의 천사'라 불리우는 이가 사람들에게 나타난 경우들을 생각해 봅시다. 이러한 나타나심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라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은 '신현'(神顯, Theophanies)이라고 합니다. 그때에도 예수님은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이미 예수님께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그 안에서, 그로 말미암아, 그를 통해서 창조되고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이 특별한 임무를 맡기로 정해진 분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성경은 그렇게 성자에게 주어진 이 위대한 임무를 우리 주님께서 친히 실행에 옮겨나가시는 과정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것은 또한 요한계시록 5장에서 요한이 본 환상에 대한 설명도 됩니다. 요한은 그 책들을-역사책들을-펼쳐 보일 만큼 크고 강력한 자가 아무도 없는 것에 대하여 당혹스러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유다 지파의 사자가 앞으로 나서니 하늘 전체가 갈채를 보내는 것 같았습니다. 마침내 역사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그 책들의 인을 떼어 펼쳐 보일 수 있을 만큼 크고 강하신 분이 단 한 분 계셨습니다. 그분은 역사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온 역사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 주어져 있었습니다. 역사는 그분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과 인간과 관련된 모든 일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일임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권세를 받으셨고 모든 육체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통제하고 조정하십니다. 해와 달과 별들과 강들과 시냇물들을 다 다스리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비와 뇌성과 폭우를 보내실 수도 있고 그것들을 물러가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진을 일으키실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통제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일이 다 예수님의 손에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지배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나라들을 주장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아직도 끝까지 만물을 관장할 권세를 갖고 계십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증언하는 대로, 예수님은 그 일을 끝까지 마치셔서 그 나라를 아버지께 돌려드릴 때까지 그 나라를 주장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여기에서 멈추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 영원한 회의에서 성자에게 세상과 그 모든 권세를 넘겨주셨을 뿐 아니라, 특별히 한 백성을 넘겨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요한복음 17:2말씀을 얼마나 자주 묵상해 보셨나요? 그리고 이 엄청난 교리를 이해해 보시려고 얼마나 노력을 하셨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이 구절을 가지고 어떻게이해하셨는지 참 궁금합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예수님께서 그저 "만민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이 한 구절 속에서 우리는 우주의 전체적인 측면과 동시에 어떤 특별한 측면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실로 고차원적인 교리입니다. 너무 고차원적이라서 인간이 스스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교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너무나 고차원적이고 영광스러운 교리이기 때문에, 자기 속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그 앞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경외하는 마음으로, 경이감에 사로잡힌 마음으로 머리를 숙이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아들에게 만민을 다스리는 우주적 권세를 무한정 주셨지만, 특별히 기독교의 구원과 영생의 복락을 누리게 될 백성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성자에게 주신 모든 자들에게 영생을 주셔야만 합니다. 그러나 제가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백성들을 성자에게 주신 이는 다름 아닌 아버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들어와 영생을 얻게 될 이 특정한 백성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자 예수님께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영원한 회의에서 그 모든 사람들을 아들에게 주셨습니다. 그 백성을 선택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6장에 따르면, 그들을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님께로 이끌어오시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님께로 올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 6:37, 40).
여러분은 성경 전체에 바로 이 사실이 일관되게 표현되어 있다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이 백성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특별한 백성을 그 아들에게 주시면서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을 너에게 주노니 너는 나를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라"(I give them to you for you to save them for me).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이것이 바로 그 영원한 위대한 회의의 또 다른 결정 사항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그것보다 훨씬 더 특별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성자가 해야 할 특별한 일을 지정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저는 이 점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제안하는 바입니다. 우리 한번 이것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그러나 제가 이 시점에서 강조하는 핵심은 이 개인들을 구원하는 일을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셨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니 하신다는 말씀을 자주 하신 것입니다. 사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제게 보여 주시고 하라고 주신 일만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 그 일을 하라고 주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온 것입니다. 아들을 보내신이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 아들을 내어 주시되 그에게 구원할 능력을 함께 주셨습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에게 말씀 드립니다. 이 모든 일의 최종 목적은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참 유일하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고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세상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이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영광의 교리와 영원 속에서 세워진 구원의 계획을 별로 중요시하지 않은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습니까? 복음적인 그리스도인 여러분, 여러분은 이 일에 대해서 얼마나 자주 묵상해 보았습니까? 여러분은 혹시 이 영광스러운 계획을 묵상하지 않은 상태에서 구원에 대한 이런 저런 면들을 판단하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바로 이 점이 우리가 그렇게 피상적 믿음을 갖게 되는 이유입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게 역경이 닥쳐올 때 우리의 믿음이 그렇게도 마구 흔들리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믿음에는 광범위한 기초가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 속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표현함으로써 이 메시지를 요약해 보고자 합니다. 제가 이 교리로부터 유추하는 바는 영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시고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우리를 위해서 한 가지 계획을 세워놓으셨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여러분에게 불충분하다면 저는 정말 절망입니다. 제가 여기서 발견하는 놀라운 사실은, 영원하신 절대자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것, 그리고 그분이 이미 창세 전에 나를 생각하셨다는 것, 내가 태어나기 전에 뿐만 아니라 그가 세상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나를 아셨다는 것, 즉 이 영원하신 절대자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 나 같은 개인에게 대단한 관심을 영원히 갖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성육신 사건, 십자가 사건, 그리고 부활과 승천, 그리고 지금 하나님 우편에서 성자께서 다스리시는 일등 이 모든 것들을 포함한 이 놀라운 계획을 구상하셨을 때 하나님이 바로 나를 염두에 두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 얼마나 엄청난 사상입니까! 그리고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사상입니까!
여기에서 또 한 가지 끌어 내고 싶은 요점은 이것입니다. 즉 하나님이나를 받아들여 주신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내 죄를 용서하신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셨다는 사실에는 불확실한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 들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나는 이 세상 그 누구든지 그 어떤 것이든지 그 계획 속에 들어 있는 나를 좌절시키지 못할 것임을 압니다. 많은 분들이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과 그것이 세상에 미친 영향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떤 정치가들도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들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빼놓고는 영국 역사를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일을 빼놓고는 미국 역사도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영국과 미국은 둘 다 그 종교개혁 속에서 기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그 종교개혁이 실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이 나타내는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 위대한 진리가 절대적이고 확실한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참으로 무지합니다.
여러분은 미국 대륙에 최초로 건너간 청교도들(Pilgrim Fathers)이 왜 그런 시도를 하였으며 또 어떻게 대서양을 횡단하는 데 성공했는지 그 이유를 아십니까? 그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포함해서 심지어 훨씬 더 어려운 일들까지도 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를 확실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파기될 수도 실패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계획은 하나님만큼이나 절대적인 계획입니다. 하나님은 시작도 아시고 마지막도 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런 일은 인간으로서는 감히 생각조차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러므로 다음 결론은 이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특별히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이 모든 일을 행하셨다면, 우리는 그것이 완성될 때까지 반드시 계속될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주장의 핵심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2).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8:10). 나는 이 사실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나를 위하여 갈보리의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실 정도로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내게 어떤 어려움과 시험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나를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스스로 두려워할 것은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은 만민을 다스릴 모든 권세를 받으신 분에게 속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은 이 사실 알고 인식한다면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손안에 계신 것입니다. 주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 존재와 자연의 모든 만상을 통치하시며 심지어 마귀도 통제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습니다. 왕권과 지배권과 정사들과 권세들이 다 예수님께 복종합니다. 그러므로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전능하신 손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과, 예수님의 강한 팔이 우리를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과 모든 육체가 예수님의 권세 아래 있으며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의 모든 권세가 다 예수님께 주어졌다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어려움과 당혹감에 빠질 때, 모든 주변 환경이 여러분에게 대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절망이 될 때,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어떤 말을 하기 전에 예수님의 권세와 권능을 먼저 기억하십시오.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여러분을 조성하신 그분이 그와 같은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그분이 여러분을 안전하게 지키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사람이나 짐승이나 자연의 힘이나 지옥의 권세를 두려워한다는 말입니까? 그저 예수님을 신뢰하십시오. 예수님은 여러분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여러분을 위해 죽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위하시는 그분의 능력은 무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