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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1(목)~2019.1.2(수) 기간에 정봉영과 장조카 정병권의 주고 받은 카카오톡 대화록 중 정봉영 분만(질문에 대한 답변 형식) 발췌하여 게재한다.(분량이 많아 정병권 분은 게재를 생략하였다)
카카오톡 가족사 대화록도 열정과 성의가 있어야 가능하다. 원문을 한 번 읽고 카카오톡 대화방에서 그냥 지워버린다면 작성한 노고가 너무나 아깝기 때문이다.
오래되어 기억에 한도가 있기에 잘 못 기술된 것은 '註'를 달아 보완할 예정이다. 원문은 최대한 보전할 것이다.
상기의 가족사 이야기《1》~《4》는 '가지 많은 큰나무(巨木) 바람 잘 날 없다'는 옛 속담처럼 형제가 많은 집안이라면 다 그러하다. 보편적인 가족사 측면에서 읽어주기 바란다.
※《1》~《22》번까지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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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역만리 타국에서 돈벌이 직장,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주는 페이만큼 공로(밥값)를 세워야 한다.
3개월 현지 수습기간 동안 잘 적응하여 일을 잘 치러내기 바란다.
일본어 실력을 잘 활용하여 좋은 성과를 내기 바란다.
열대나라 외국생활, 나이도 있고하니 항상 건강에 유념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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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네. 카톡 문자로도 베트남에서도 가능하니 참 편리하네.
《2》
이국만리 열대나라에서 몸성히 잘 근무하기를 바라네.
골짝의 위토와 선산은 '초계정씨 함안유은후손종중' 소유로 이번에 '초계(팔계)정씨 함안경충종중' 합 2개를 내가 문중에 헌납 기증했다네(아무나 하는 일이 아님)
'유은재'와 이번의 '초계정씨 함안유은후손종중' 표지석은 유현리 333 답과 산쪽의 달성서씨 문중의 소유의 유현리 334 전 사이의 6m 도로에 위치하니(세워졌으니) 걱정 안 해도 될 것이니, 근무나 잘하기 바란다.
'농파정사'는 사랑채 현판 앞에 세워졌을 뿐더러, 이것도 엄밀히는 우물에서 꺽어지는 소로(골목길)에 위치하니, 장손은 염려를 접고 외국에서 몸 성히 열심히 근무하기를 바란다.
다음 도면 지적도 사진 참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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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도와 사도가 있는데 사도는 개인이 사용하기 위하여 지목 변경한 소유 도로이고, 상기 도로는 선돌에서 우거리고개까지 연결되는 80년 전 일제시대 때의 지번 공도이다.
《3》
돈 있어 길 측량 해보는 것은 자유나
쓸데없이 돈만 한국국토정보공사(舊대한지적공사) 보태주게 된다.
계약을 해버렸다면 계약금 포기하고 그만 두기 바란다.
고집에 망한디는 옛말 속담이 있다.
한 50~70만원 깨진다.
그 돈 있으면 질부 오리털 패딩 옷이나 한 벌 사 주거나 김장돈에나 보태기 바란다.
아니면, 앞으로 올 92세(2019년) 큰형수 대비 쌍분 준비 산소 석비에 보태라.
신촌 태영 삼촌한테 가면 최신 함안군 도면책이 있다.
그것 보면된다. 무슨 측량이 필요한가? 뻔한 일이다.
현재 5~6m 공도와 1~2m 도랑(하천)이 겹쳐져 있다.
경충재(1975년 준공)가 공도를 막아서서 대문 앞으로 우회로를 만들었다. 당시 허용된 것이다. 43년 전의 일이다.
현재는 마당으로 우회하여 지나간다.
참고 바란다.
양지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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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들더러 행정처분을 하다니 김이박의 자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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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량비 있으면 할아버지를 위하여 쓰는 것이 인간의 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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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락 할아버지나 정영조 父를 위하여 개인돈으로 공덕(공적)을 쌓아보라.
선산 등에 표지석 등 종중의 돌을 세우면 이름을 열 번이나 새겨주마.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은 있다.''
나는 사촌이 아닌 삼촌이다. 왜 그러나???
《4》
내가 RQTC 소위 전방 근무 한푼도 안 쓰고, 월급 1년 6개월 전부를 저축하여 부산 정영조 형님에 보낸 동생이다.
내 나이 그때 24~25세 때다.
내일 당장 살아계실 때 부산 수정동 안맹수 형수한테 가서 확인하자.
요즈음 화폐로(소위 월급 기준) 2천만원이 넘는다.
너는 그렇게 해 본적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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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 1972.3.1~1974.6.30 기간의 육군 소위, 중위 월급은 10,000~15,970원으로 약 16,000원, 2명의 동기생이 기억하여 확인해 주었다. 당시는 박정희 10월유신시대(1972.10.17~)로 베트남전쟁(1955.11.1~1975.4.30) 참전시기(1964년 9월 ; 제1차 베트남 파병~계속)와 겹친다.
나는 ROTC 10기생이다. 현재의 소위 봉급 수령액 191만원과 대비시 1:119.6 비율이 된다. 당시는 월남전 참전으로 남북긴장상태 대치로 군대 기강과 훈련도 거셌다.
註 <2> ; 소위 월급 얼마나 주는지 검색해보니 요즈음은 많이도 주네?(2019년 1월 기준)
기본급 - 165.4만원
직급보조비 - 12.5만원
정액급식비 - 13만원
으로 월 191만원은 고정(기타 수당 제외)으로 나온다.
191만원×1년 6개월=3,438만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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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당장 수정동 올라 가자.
큰형수님(91세, 1928년생)이 아직 정신이 맑으니 확인해 두어야 겠다.
배은망덕도 유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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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돌더러 시비한다면 말캉 헛제사다. 거짓 제사다.
찬물 한 잔도 정신이 깃들고 孝정신이 있어야 한다.
제사 지내지 말도록 해라. 안 해도 된다. 각자 산소 찾아보면 된다.
나는 올해(2019년)부터는 산소에 가서 술 한 잔 올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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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 할아버지 1912년 생으로 84세로 1995.3.2(양) 별세 이후 23년간 매년 빠짐 없이 5만원씩 115만원 송금했다.
귀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으나, 귀신이 자신 것이(음식) 없으니, 정성으로 적은 돈이 아니다.
그럼 여형제들 父(영조 형님) 제사에 윤선, 경희, 미경은 인천까지 매년 오고 있는가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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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돌을 가지고 시비를 걸다니 소가 웃고 개가 웃을 것이다.
《5》
현 함안 휴게소 진입로 입구에 위치한 정광식 명의 건장골 밭(정병달 가져간 선산 바로 아래 위치했음) 1,500여 평(옛날 보리, 참외, 콩, 담배 등 재배, 내가 진주농대에서 가져온 포도밭 조성 묘목도 식재했다)을 북면에서 이주해 온 권익룡(복숭아 과수원으로 조성)한테 처분하여 인천 부평 아파트 사는데 보탰다.
권익룡은 울산 정성문 장인의 친조카가 되고, 성문이 중매도 했다. 현재 신촌 거주로 5년 후 고속도로가 직선화로 편입 되면서 수용되어 권익룡은 거금을 보상 받기도 했다.
유은 할아버지가 왜난리(애난리) 유현리 1083번지 논 3마지기 600평을 소 판 돈(나이들어 키우던 소를 정리함)으로 사서(1976년 매입) 제사 지낼 장손자 명의료 해 주었다. 그때 할아버지 나이가 65세 였다. 할아버지가 장손자라 그렇게 명의까지 달아주었다.
내가 당시 집에서 출근 법수중 교사(3년 재직)였기에 기억한다.
그것도 팔아갔다.
유은 할아버지는 제사밥 얻어 먹을 도리를 하신 어른이다. 참 대단한 이른이신데 훗날 돌(자연석비) 시비로 손자로부터 대접을 못 받다니??
장손 상기 2건 토지매매 사실을 아는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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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 당시 도시 아파트 평당 분양가 120~150만원 내외, 34~36평 기준(130만원)으로 4,420~4,680만원으로 밭 1500평이면 충분히 살 수 있었던 금액으로 보여진다.(할아버지 음덕이다)
《6》
내가 진주에서 대학 4년을 할 때
국립으로 등록금이 사립의 1/3~1/4 수준으로 20,000~25,000이고,
하숙 5개월, 자취 3년 7개월(1968~1971)
잡비 용돈도 없어 집에 쌀 가지려 올 때는 도둑 기차를 타기도 했다. 진주역에서 개양역까지 1구간 표를 끊어 군북까지 온다거나, 군북역에서 이반성까지 1구간 표를 끊어 진주까지 가다가 역무원에 붙잡혀서 ''대학생이 그래서 되겠냐?''며 곤혹을 치룬 적도 있었다.
쌀은 매년 물에 담겨져서(남강물 홍수로) 냄새가 나는 쌀이었다.
같이 자취하는 함안 칠원 출신 주동식은 매번 자기 쌀은 좋은데, 내 쌀은 밥이 퍼석하고 냄새가 난다는 불평을 들으며 자취를 했다.
내가 용돈이 없어 탁구, 당구, 바둑, 장기, 화투를 몰랐다.
그래도 농학사, 교직과정 2급정교사(사범대학 격), ROTC(장교 과정)도 3, 4학년 때까지 3종류를 이수했다.
내가 장교를 갔기에 경문이가 그걸 보고서 육사에도 진학했다. 경문이는 진주에서 2년간 내 처가집(범철 외갓집)에서 하숙하기도 했다(쌀만 대는 하숙)
희태는 육사에 가기 위하여 고3때 내가 잇발 교정과 치료도 해 주었다.
승표는 장가들 때 반지동 주공아파트 새집을 반값에 임대하기도 했다.
조카는 매번 택시로 풍족하게 동아대학을 다녀서 시골의 내 형편이 용돈이 풍족한 줄 아는 모양이지?
형님들 한테 용돈 받은 적 한 번도 없다. 그 당시에는 그런 시대도 아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용돈은 생전에 할 만큼 한 아들이다. 그 돈이 앞집 중고 다니는 조카들 학비로 흘러 들어갔지만...
나에 대하여 더 더~ 알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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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 1968~1971년 시대의 자취생활은 요즈음의 오피스텔, 원룸 자취생활과 완전 다르다. 신세대가 알게 기술한다.
밥은 연탄불 냄비나 석유곤로를 사용했다. 전기밥솥도 그 시대에는 없었다. 쌀은 돌이 있어 조리를 사용해아 하고, 국은 된장을 풀어 멸치 10마리 정도에 콩나물과 두부 혹은 오댕이 전부이고, 서울에는 몰라도 지방에는 반찬가게도 없었다. 그 시대의 자취생활상이다. 그런 속에서 3~4학년 학군훈련(ROTC)을 받았다.
註 <2> ; 국립 진주농과대학(당시는 단과대학으로 현재는 국립 경상대학교로 종합대학)
4년 학창시절 동안 농어촌 7~10일 봉사활동을 5곳(1969~1971)이나 갔다. 당시 봉사활동도 열심히 했다.
진주시 대곡면 설매리 상촌마을 일대(1학년 여름 ; 1968년 8월)
함안군 대산면 옥열리 효사마을 일원(2학년 겨울 ; 1969년 12월)
하동군 횡천면 애치리 애치마을 일대(3학년 겨울 ; 1970년 12월)
함안군 군북면 유현리 덕재마을 일원(3학년 겨울 ; 1971년 1월)
산청군 오부면 양촌리 음촌 양촌마을 일원(4학년 겨울 ; 1971년 12월)
註 <3> ; 1971년 1월 3학년 말 진주농대 성자회 20여 명을 이끌고 군북면 유현리 고향에 10일간 농촌봉사활동을 했다. 큰형님 동창되는 아랫덕재 이병길(1928년생, 형님보다 1살 위)씨에 부탁하여 재령이씨 재실을 빌려서 침식을 했다. 당시 대학생들이 단체로 봉사활동을 왔다고 유현리가 떠들석했다.
당시 아버지께 ''덕재 재령이씨는 재실을 지어 짜고 사는데, 우리 집안(초계정씨)는 재실 하나 없습니다. 친구들 한테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의 대화가 있었다. 당시 이 말에 아버지와 정삼영 형님이 충격을 받았다고 소회한 적이 있다.
경충재는 1971년부터 의논이 발의되어 1974년에 착공하여 1975년에 준공되고, 담장, 현판, 판액 4개 등을 갖추어 함안 의령 향교 유림을 초청하여 1977년 4월 5일에 정식 제호 현판식을 가졌다.
사실을 기록으로 남긴다.
《7》
내가 7살에 초등 입학하여 함안중 3학년 15살 때, 박정희시대라 유은 아버지께서 취직이 잘 된다며 공고를 가야한다 하여 부산 경남공고에 입학원서를 내었는데, 어린 시동생을 부치려 하니 처음부터 아예 눈치 코치밥이라,
시험을 본시험과 체력장을 2일에 걸쳐 하는데, 범내골인가 서면 쪽에 길도 모르는 촌놈이 경남공고로 혼자서 걸어 물어서 찾아 가는데 늦게 출발했는지?(떨어지라고?) 2번이나 지각하여 허겁지겁 시험을 보느라 꼬시게 낙방(함안 중의 반에서 3~5등 안에 들었는데도)
16살 때 함안 집에서 진주사람 청년 머슴과 1년간 농사 짓다가(소 풀베기, 물두레박 누르기, 보리밭, 콩밭메기, 벼논메기, 밤에 유은아버지와 참외 원두막 같이 자기 등 등)
1년 후 17살에 함안농고에 입학, 함안중, 함안농고 6년을 고불고불한 봉산이고개 9km(현재는 직선화 된 아스팔트 도로다)를 걸어서 다녔다.
돈이 없어 보충수업비를 못내어 남아서 공부하는 보충수업을 못했지만, 20리 길을 걸으면서 책을 보고(외우고), 밤에는 호롱불(전기는 1972년 김대금 할머니 별세 무렵 들어왔다) 밑에서 공부하여 독학으로(농고는 국, 영, 수 과목 시간이 적고, 농과 과목 위주다) 공부하다시피 하여 10여 명이 진주농대에 응시했으나 나 혼자 합격(1968년)했다.
현재 그 기본 실력과 내공이 있기에 블로그와 카페 글도 300여 편 이상이나 쓰고 있는 중이다.
진주농대 재학 중에는 자취 쌀 1말을 2줄로 어께에 메고서 6km의 군북역까지 운반하는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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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 ; 1964년 1월 부산 경남공고 응시할 때 나를 다리고 갔던 아버지(정현락) 연세 53세, 큰형님(정영조)은 36세, 큰형수(안맹수)는 37세였다. 형님 부부는 나이가 30대였다. 당시만 해도 어른으로 아버지의 영(領)이 섰기에 자식으로 면전에서는 거역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젊으실 때의 아버지는 권위가 있는 무서운 존재였다.
註 <2> ; 부산에 시험치러 가면서 반에서 3~5등은 했지만 참고서 1권 없이 3학년 헌책(상급생에게 구입한 책)과 3학년 노트가 전부였다. 참 옛날 이야기이다. 당시 참고서가 있고 없고가 성적순이었다.
註 <3> ; 당시 1964년에는 질녀 정윤선이는 할아버지 집에서 함안여중 3학년에 진급했기에 졸업하고(마치고) 부산에 간다(합류)한다 하여 시골 유현에서 함안 가야 함안여중까지 고불고불한 봉산이고개(현재는 직선 아스팔트 도로가 났다)를 넘어 30리가 족히 되는 12km를 걸어서 통학했다. 당시 지참하는 도시락은 쌀과 보리쌀이 1:2 비율이다.
註 <4> ; 울산 정윤선의 함안여중 3년간(1962~1964, 14~16세) 30리길 통학은 살아가는 인생 행로에서 엄청난 각인(刻印)이 되었을 것이다. 부산 도회지에서 자라 4학년까지 다니다 갑짜기 함안으로로 내려와 시골에서 5~6학년을 다니고, 다시 30리길 함안여중 3년을 다녔기에 함안의 농촌생활 5년은 좋은 추억이면서도 마음이나 기억 속에 뚜렷하게 새겨지는 옛추억이 될 것이다. 큰형님 2남3녀 중에서 함안에서 할아버지(정현락), 할머니(조복희)와 5년을 같이 살았기에 조부모에 대하여 가장 잘 아는 큰손녀이기도 하다. 어린시기 5년의 추억은 70~100살이 되어도 잊지 못한다. 어렵고 힘들었지만 좋은 추억들이 되길 바란다.
註 <5> ; 인연이란 게 있다. 정윤선이 유현초등과 함안여중 친구로 유현 봉산마을에 정명순이라는 친구가 있다. 같이 30리길을 걸어서 통학했다. 단짝이라 보면 된다. 정명순은 함안여중을 졸업하고 함안농고(당시 남녀공학)에 진학했고, 정윤선은 함안여중을 졸업후 부산으로 올라가 아버지(정영조) 쌀장사 점원(17세 때)으로 투입되었다.
註 <6> ; 정명순의 아버지가 봉산 정두식(우리와 다른 진양정씨다) 줄대밭(유현리 1025 ; 잡종지 1,295 평)의 원주인이다. 정영조 형님은 쌀장사 점원 투입으로(당시 큰형수의 질환 치료 연유도 겹쳤다) 돈벌기 바빠서 부산에 여고가 많았지만 정윤선의 여고 진학을 못 시켰지만, 정두식은 줄대밭을 헐값에 팔아 자기 장남 정대수(정갑영 형님 고향 동기생)를 박사로 만들어 동아대 교수가 되게 하고, 시골에서 정명순을 함안농고에 진학시켰다. 정윤선의 친구 정명순이가 시집가서 잘 사는지는 모른다. 다만 정두식의 줄대밭 잡종지는 나중에 거금으로 팔아 정병태의 자립 기금에 투입되었다. 정병태가 이런 큰누나 정윤선의 옛날 헌신 이력(희생)을 알고나 있으려나?
註 <7> ; 큰형님(정영조)를 비롯한 7남1녀는 유은(정현락의 號) 아버지의 엄한 가르침 속에 결혼과 분가로 우애가 돈독했다. 큰형님이 막내 정병태(소아마비 장애)를 경희한의대로 보내어 한의사로 만들어 개업시키는 인생 여정에서 남다른 자식 사랑으로 올인(all in ; 한 가지 일에 모든 힘을 쏟아 부음)하고 있었다.
이 무렵에 평촌마을 경충재 건립, 수재공 비석 건립, 동생의 가로등 부탁 건, 마을 도로 확장비 부탁 건 등에 소홀했거나 번번이 거절하거나 외면한 감이 있었다. 이때 큰형님(정영조)과 셋째 형님 정삼영과의 이해충돌이 있었다. 이해 충돌 내용은 정병권과 정병태의 카페 글 여러 곳에서 언급된 바가 있다. 형제간의 의(義)를 상해(희생해) 가면서까지 작은 아들을 뒷바라지한 아버지(정영조)의 은공(恩功)은 정병태가 잘 아리라 본다... 정병태가 작성했다는(정병권 제공한) 삼촌을 심하게 탓하는(비난하는) 글 내용은 크게 잘 못된 것이다.
이해 충돌의 인연이란 이렇게 돌고 도는 것이기에 기록으로 남긴다.
《8》
2018.12.10 자로
경계복원 측량성과도를 돈 들여 확인해 본다하니,
하도록 내버려 둔 것으로
내가 1993.10.23 초계정씨함안경충종중 설립 당시 종중 땅 29필지를 등록할 때,
내가 분할 측량을 직접 수행했기에 뻔한 것이다.
당시 부동산 특별조치법으로 일괄 정리했다.
정구룡비석도 이판기 답에서 분할(유현리 459 - 2) 하는 등 포함 전부 내가 수행했다.
당시 모개등 뒷산 산 78 - 3(8,353평)도 내가 남양홍씨 문중으로부터 분할을 수행했다.
가야읍 혈곡리 산23 - 3(2,005평) 마찬가지.
정영조 ; 333답(현재 마당)
경충재 재실 ; 333 - 1답(정영조에서 정리)
정삼영 집 ; 331 - 1대지(정영조에서 정리), 333 - 2답(정영조에서 정리), 332 - 1답(이판기 소유에서 정리)
이판기 집 ; 331- 2대지(정영조에서 정리), 333 - 3답(정영조에서 정리), 332답(원래 이판기 소유, 현재 마당)
당시 정광식 할아버지 생존, 정삼영 계셨지만 내가 부산 정영조 형님으로 부터 전권 위임받아 농지위원 3명 2회차(측량 1회, 소유권 1회) 도장 받아(매도 매수 절차 생략, 조치법은 등기절차가 단순 간단) 내가 모두 정리했다.
이번 일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았지, 내가 한 건데 세월이 25년 전이지만 내력을 다 안다.
333답은 경충종중에 아버지(정광식)가 기증했으니 조치법으로 바로 넘기면 간단하다고 하니(내가),
영조 형님, ''우리가 마당을 쓰고 있는데 전체 덩어리로 넘기는 거는 너무 많은 것 아니가?'' 하길래(전화상)
나도 이왕 마당으로 사용하는 것, 우리 소유로 두어도 경충재에서 공용으로 쓸 수 있기에,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형님 의견을 존중하여 분할측량 비용은 추가로 들지만 분할을 하여, 현상태의 경충재 담장을 경계로 자른다는 것이 현 측량 성과도 그대로 경충재 대문 앞까지 송곳처럼 쪼빗하게 지적도가 나오게 된 경위이다.
너무 내용이 환하기에 내가 다른 일로 바빠서 답변을 못했다.
내가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사방에서 행사 초청이 온다. 오늘도 왔다.
註 ; 산판매도증 고문서를 가지고 1994년 조치법 시행 때, 남양홍씨 문중과 법적으로 다투어 1971.12.20 분할된 임야대장이 없이 잘 못 등기된 유현리 산 78 - 3 면적 20727m²(2정9무보 : 6270평)을 경정(정정의 뜻)하여 산판매도증 계약서 영수증 대로 분할 측량을 하여(농지위원 3인의 보증을 받아) 유현리 산 78 - 3으로 새 번지를 부여하고, 1994.4.27 등기원인 신청착오, 토지표시 경정으로 6886m²(2083평)을 더 찾아 유현리 산 78 - 3의 임야대장 면적은 27613m²(8353평)이 되었다.
이미지 사진 하단에 광복(해방)되기 2년 전인 1943(소화 18) 8.27 자(정광식 32세 때) '산판매도증' 고문서 2장을 첨부한다.
《9》
2018.12.12자,
함안군청 공도(소로)와 구(하천, 도랑) 담당 관계자(담당계)가 내게 전화가 왔기에 2회차 통화를 했다.
나의 주장 대화 요지,
''군청에서 왜 유현리 평촌마을은 도로확장을 해주지 않나? 군북면의 다른 마을들은 다 되어 있다''
''현재 자연석 석비 2개가 사용하지 않는 소로와 구(도랑)의 둑에 걸쳐있는데, 도로를 닦아주면(확장해주면) 언제라도 군행정에 협조할 수 있다''
''먼저 함안군에서 낙후된 마을 진입 도로부터 관심을 갖고 해달라''
되레(역으로) 함안군 도로 관계자에게 질책성 민원을 제기하였다.
이것이 2회차 대화의 내용의 요지이다.
《10》
《''부산 수정동에서 아버지 멱살을 끌고 온동내 사람이 보는 곳에서 끌고 도로밖 까지 끌고 나와 자기 형을 죽인다고 엄청난 못땐 추태를 부린 고인이된 정갑영 삼촌''》
상기 내용은 절대 사실이 아니다. 누가 그러던가?
수정동 집 제사 때 고성과 언쟁이 있어(영조 형님) 갑영 형님이 같이 언성을 높이는 과정에 병태가 갑짜기 일어서서 갑영 형님에게 대든 사실이 있을 뿐이다. 당시 제사 참석자가 모두가 목격한 사실이다.
정유은 아버지 첫제사를 마치고 일어난 일이라 정확히 기억한다.
다리가 불편한 병태의 우발적 행동에 내가 당시 놀라기도 했다. 그것이 전부이다. 정병태의 우발적 돌출 행동을 목격했기에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지만 내용 기재는 생략한다.
상기 병권이가 말한 것은 부풀린 와전이다.
《11》
옛날 할아버지 세대는 장자가 대를 이어 후대로 제사, 묘사를 모신다고 하여 골짝의 대략 반은 정광식, 반은 정영조 명의로 되어 있었다(달아주었다)
오늘날은 장자 개인으로 내려가면 사유재산이 되기에 동네 집터까지 포함하여 처음에는 '초계정씨 유은 후손종중'이 설립된 거다.
당시 들판의 논(현재, 태영이 논 아래 있는 전답, 정윤선 등 딸네 논까지)이 정광식 명의로 되어 있었기에 장자 정영조로 협의 상속(인감증명과 도장 찍는)하는 과정에 순순히 골짝은 8남매 종중인 유은종중으로 이양된 것이다.
다만, 동네 집터(현재 병권 상속 4필지)는 영조형님 말 그대로이다.
''병권이를 너거(동생들) 못 믿겠나?''
''그럴 놈이 절대 아니다(사유재산으로 주장할 놈이 아니다란 말)
''장손이 제사를 모시는데, 장자 노릇하게 동네 집터만은 그대로 두는 것이 어떻겠나?''
''개인으로 내려간다 해서 할아버지 집터인데 팔아먹을 놈은 아니다''
''내가 죽으면 병권이 그놈이 제 애비를 알아줄거다.''(장손 노릇하게 이렇게 챙겨준 제 아버지를)
그래서 동네 집터 4개는 우리가 양해되어 들판 논의 협의상속(정광식에서 정영조로)이 원만히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것이 유은종중 설립의 전말 전부이다.
註 ; 장손으로 실질적인 대표가 되는 '초계정씨 함안유은후손종중'에 대한 관심은 없고, 내 개인의 사유재산 분류에만 집착하고 있다. 유은 할아버지의 본가(사실 초라한 한옥이지만)와 증조할아버지의 부속 사랑채 농파정사(農坡精舍)는 장손으로 계승(상속)된 사유재산일지라도 '초계정씨 함안유은후손종중'의 본적지임을 알아야 한다. 7남1녀를 낳고 키운 8남매의 요람이다.
《12》
법수면 우거리 산 5,550평과 유현리 361전(약 300여 평)은 초등학교도 안 나온 무학의 누님 정을남에게 송아지 1마리 포함을 주었는데, 자형 안정숙이 명의를 옮기지 않고 땔나무 산으로 관리하다가, 아이들 교육비 관계로 정삼영 헐값에 다시 팔았다.
다시 정삼영 형님은 밤나무를 식재할 요량으로 매입하여(5년 정도 소유), 내가 당시 법수중 교사 3년을 했는데 역시 아이들 교육비로 2년분 내 월급을 차용했는데 갚지 못하고, 이 산을 그 대신으로 내게 떠 넘기게 되었다.
명의는 정광식 그대로 였기에 내가 서면 소재 부동산의 소개로 1992.1.31 자, 부산 사람 여자 2인에게 당시 돈 30,500,000원에 매매한 것이다.
여자 1인은 국제시장에서 장사, 다른 1인은 괴정에서 미장원을 하는 여자였다.
명의가 정광식 아버지 그대로 였기에 100만원 용돈 드리고, 우거리 누나 200만원, 4년 전 신세계요양원에 계시는 누님에게 추가 100만원을 안남영에게 송금했다.
내용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뭐뭐 한다 카더라'' 하며 줏어담는 말은 진실과 사실에 입각해서 말해야 한다.
병권이도 아버지 쌀장사 도우려 점원하느라 중학교만 나온 울산 정윤선 누나에게 마음이라도 잘 하기 바란다.
註 ; 경조사 금전출납 노트 확인 한 바, 2014.12.24 신세계요양원 정을남 문병 100만원 안남영 송금 기재.
《13》
《''누가 감히 나에게 사촌 어쩌구, 왕따, 자기네 들이 한 게 뭐있다고 2대에 걸처 상속된 사유재산권에 할아버지 핑게대며 아무도 나에게 그러한 어리석은 말을 할사람도 없고,자격도 없습니다.
아버지가 상속받고, 아버지 아들인 내가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상속된 사유재산에 조상의 이름을 들추며 못할 짓을 해놓고서 오히려 나에게 훈계 하다니, 아버지 (정영조)에게 받은 은혜도 모르는 배은 망덕도 유분수지 어따데고 말도 엉터리 협박을 하십니까~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니까 또 다시 못땐 협작들을 하며 불법적인 돌맹이를 집앞에 세워 내가 살고 있는집에 앞에 비석을 세우고 뭐라고요 보기 좋다고요? 보기 좋으면 삼촌집 앞에 돌맹이 가져다 세우세요~''》
♤♤♤
나이 차이는 4살이지만 삼촌에게 말하는 언사는 고쳐야 한다. 4살은 그렇다 치고,
10살 차이나는 서울 창영 삼촌한테도 상기 내용의 불손한 언사를 쓴다고 내개 전해왔다.
언행에는 장유유서(長幼有序)로 노소(老少)가 있고 엄격한 차례와 순서와 질서가 있다. 찬물도 순서가 있다는 말이다. 오륜의 하나이다.
삼촌(숙부) 더러, ''당신이나 잘 하세요'' 하며 막무가내로 나오니 나도 할 말을 접는다.
대화의 의미가 없다. 서울 창영 삼촌에게서 온 카톡 문자와 같은 맥락 언사이기에 함께 게재한다.
《14》
평촌 들어오는 길이 좁아 덕재마을 갈림길에서 개인의 토지 논만 수용되면, 군에서(군북면장이 당시 갑장으로 친구) 시멘트 포장을 해주겠다는 확약을 받고서,
동네 입구의 정삼영, 이판기 논은 무상 제공(약 400m)
수재공 비석 아래 신촌 육맹수(당시 생존) 논 편입(약 40~50m)은 당시 돈 50만원 지불로 합의를 보아,
당시 5~7년간 부산에서 내왕하며 터밭을 일구던 영조형님에 부탁을 했는데(50만원 건, 마을을 위한 건설적인 제안)
선뜻 들어줄만도 한데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하자 술을 자시는 분이라, 영조 형님과 언쟁을 하는 과정에 형수님이 중재를 안 하고 한편이 되어 쫑쫑쫑 거드는 과정에 일어난 일이다.
낫(칼은 아니다)은 은행나무 밑의 땔나무를 부엌으로 나르는 낫을 지참했을 뿐이지, 사람 위협용이 절대 아니다.
큰형수님이 보기에는 시동생이(삼영 형님)이 술을 자셨고 낫을 들었으니 그렇게 보여서 말 한 것 같다.
삼영형님, 술은 좀 자셨지만, 낫으로 사람을 위협하는 사람이 절대 아니다. 내용이 부풀려서 과장 와전 되었을 뿐이다. 그런 행동의 무지막지 아버지라면 자식 농사가 바로 되었겠나?
내가 시골에 자주 왕래하다보니 삼영형님 성격을 형제 중에서는 유현에서 부댓끼며 사는 태영 동생과 함께 가장 잘 아는 편이다. 술을 너무 좋아하는 것, 딱 하나 결점(흠)이었을 뿐이다. 할머니를 닮아서인지 인간성은 선량했다.
상기 오해는 잘 못 되었으니 바로 잡기 바란다.
《15》
점심 때 애들(범철네) 가족하고 식사하고 들어와서,
지난달 11.7 이후 팔을 들지 못할 정도의 견통이 와서 한달 열흘이 지났으나 병원 3번, 사우나 열탕 5번 보다 침대 모서리에 누워 팔회전 운동이 가장 효과가 좋아 계속 운동 중이다.
침대에서 운동하다가 잠시 잠이 들어 조금전 일어났다.
모처럼 좋은 말 했네?
''장조카에게 힘을 실어주고 더욱 가깝게 지내야 한다''고 옳은 말이다.
나도 돈 들여 돌을 세운 것도 부모에 대한 정성이 있어서 한 거지, 장조카 사유재산을 방해하려는 의도는 절대 아니다. 이 점을 알아주기 바란다.
제사는 매년 지내지만 귀신이 밥 한 공기 자시는 것이 아니고, 그것도 하나의 정성이다. 찬물 정한수 한 그릇도 정성이 있으면 된다고 했다.
정현락 아버지가 1912년 생으로 생존시 107세가 되고, 84세 때인 1995.3.2(음 2.2)별세 했다.
제사 회수로는 23년이 흘렀다. 오래되어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20여 년 전에 인천 장조카가 제사를 맡아 줄곧 지내왔다.
처음 2007년까지 13년간은 할아버지 정현락 제사 음 2.1과 할머니 조복희 제사 음 3.10로 각각 2번 지내기도 했다. 2008년부터 합제사(합사 ; 정창영 금전출납부 근거)로 모셨다. 할아버지와 동갑인 할머니는 82세에 별세했으니 제사 횟수로는 25년째 모신 셈이다.
그동안 최귀옥 질부가 수고하고 고생한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서울 창영 형님과 상의도 했지만, 큰형님과 장조카가 긴세윌 23년이나 제사를 모셨으니 이제는 무거운 짐을 들어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오늘 카톡을 보내는 날이 2018.12.16(일)로 무술년(戊戌年 : 개띠해)도 15일을 남겨두고 있다.
마침 15일 후에는 2019년 기해년(己亥年 : 돼지 띠해)을 맞이한다.
2019년 새해 설날은 2.5(음 1 1)로 닥아온다. 2019년부터는 제사를 23년간이나 모셨으니, 묘사를 올리는 것이 어떨까 생각된다.
유은종중 기금이 약 800만원이 있기에 묘사 올리는데는 충분하고, 부족하면 후손 중에서 개적인 성의로 출연하여 보충하면 되리라 생각된다.
창영형님과 나의 의견이니, 장조카의 의견을 받아들여 새해부터는 그렇게 했으면 한다.
우리가 일방적으로 정한다 할까봐서 일단 의견을 묻는다.
제사와 묘사는 조상에 대한 하나의 정성이다.
나는 매번 함안에 내려가면 산소를 꼭 둘러본다. 5분이면 되니까 빠진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내가 함안 산소에 한 번 내려가서 후손을 대리하여 그렇게 한다고 고하면 된다(보고하면 된다) 하나의 형식이지만 소리내어 말하면 된다.
23년이나 제사를 드렸으니, 이제는 묘사를 올려도 되리라 본다.
장조카의 동의하면 새해 2019년부터 그렇게 했으면 한다.
현명한 의견을 구한다.
註 ; 두서없이 작성하느라 오자, 탈자가 있을 수 있음.
《16》
상기 사진은 지난 12.10(월) 함안 내려갔을 때 산소를 잠시 둘러보고 오전 햇볕이 좋아 찍은 사진이다.(마침 갤러리에 보관 되어 있었다)
장조카의 특별한 이견(다른 의견)이 없어 동의한 것으로 보아,
2019년 기해년부터는 묘사를 올리는 것으로 한다.
유은 할아버지가 1912년 생으로 2019년에는 108세 되니 불교에서는 108배 숫자를 중하게 여기더군,
묘사 첫 시작 년도(자손 풍성 황금 돼지 해)도 좋은 것 같다.
내가 조만간 함안에 한 번 내려가 산소에서 그렇게 모신다고 말로서(옛날 예:禮이지만) 고(告)할 예정이다.
설날 제사부터도 묘사로 대체하니 없는 것이다(생략이다)
장조카와 질부는 그리아시게.
좌장인 서울 창영형님께도 같이 문자 내용을 카톡을 보낸다네.
《17》
종중등록증명 상의
초계정씨유은후손종중의
신규등록 1995.4.3
대표자 정태영은 신규등록(구비 서류제출 때) 당시의
최초 대표자일뿐 별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당시 영조 형님이 가장 나이가 적은 정태영으로 하라고 하였기에 그랬을 뿐이다)
대표자는 생존자로 대대로 변경되어 내려갈 뿐이다.
1995년 시점의 법으로 임야, 묘지, 대지는 종중 취득이 가능하나, 답(논), 전(밭)은 불가능했다.
묘지, 유현리 346 - 1,
임야 5건, 유현리 산78 - 3, 341(옛 삼밭), 345(옛 고구마밭), 356(우거리 가는 곳), 357(우거리 가는 곳) 합 6개는 지목이 묘지, 임야이기에 대표자를 정갑영으로 했을 뿐이다.
원래 작고하면 생존자로 바꿔야 하지만 대표자 명의 변경에 돈이 들기에 그냥 두고 있을 뿐이다.
옛날 정갑영으로 최초 하기 전에 대지 3건(333답 1건은 답이라 불가)을 수용하면 전부 대표자를 장손 정병권으로 하려고 했는데 포함 동의(미정 유보함)가 안 되어 그렇게 된 것이다.
현재 대표자 정갑영에서 정병권으료 비용이 들지만 어제든 변경은 가능하다.
참고 바란다.
지금 점심 식사 약속이 있어 두서없이 적는다.
《18》
상기 카톡에서
《''최초 대표자 정태영''
''관리 실력자 정갑영''
''마음대로 운영 행사자 정봉영''》이라
했기에, 종중 등기처리 전말(처음과 끝 내용)을 있는 그대로 설명한 것이다. ''마음대로 운영 행사자''가 아니고, 영조 형님 명을 받아 엄청 수고한 사람이다.(수고 했다는 칭찬은 못할 망정 딴소리는 좀 심하다)
영조 형님이 지시를 받아 평이사로 일을 마무리 했을 뿐이다.
등기를 하려면 종중설립에서 부터(여기도 서류 4가지 구비서류와 인감증명 3인 이상) 종중의 정관(회칙), 이사회 임원명부, 회의록 결의서, 등기할 부동산 목록(재산 목록), 3인 이상의 인감증명 등이 구비되어야 한다. 2중의 수고를 했다.
멋대로의 이름이 아니다, 등기소에서 통과된 것이다.
영조 형님의 도장도 모두 안 들어가면 안 된다.
영조 형님 왈, 동네터 3개는 병권이 대에 가서 그때 논의하기로 하고 ''미정 유보''된 것이다.(''그럴 놈이 아니다'' 받아들여)
포함되고 안 되고는 병권의 자유의사다. 현재는 엄연히 개인 재산 상태다. 법적으로 개인 권리 행사를 한다. 도의 법도보다 소유권이 우선이다. 제3자 처분도 가능하다. 우리는 그냥 처다볼 수 밖에 없다.(바른 말 하니 또 오해 말길)
당시 내용을 설명했을 뿐이다.
알게 내용을 사실대로 설명했는데 화를 내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상기 카톡에 내용을 알기에 답을 했을 뿐이다. 질문에 답한 것은 잘 못이 아니다.
내가 현재 종중의 총무가 아니다.
총무(현재 총무, 정황부)도 아니기에 답할 필요도 없지만 내게 카톡으로 질의가 왔기에 답을 했음을 밝혀둔다.
세상 만사를 부정적으로 보면 끝이 없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크게 넓게, 소아(小我) 보다는 대아(大我)를 주문한다.
《19》
창원도청과 국립창원대학교 뒷산(배산:背山)인 정병산(精兵山) 제2봉에 표지석이 없어 내가 자비로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인 2000.1.1에 세운 ''속명(俗名) 내정병봉(內精兵峰), 고명(古名) 내봉림봉(內鳳林峯) 493m''을 세운 사람이다.
경남 수부도시 내노라 하는 창원시민 110만 인구 중에서 좋은 일 했다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돌연변이)은 여태껏 단 1명도 없었음을 밝혀둔다.
초계정씨 대문중 전체에서도 사소한(작은) 일이라도 나같은 일을 한 사람이 없는 줄로 안다.
보통사람으로 살지라도 크고 넓고 밝고 긍정적이고 거시안적으로 미래와 희망을 품고 살기를 주문한다.
《20》
《''항상 말투가 유림이 어쩌고 향교가 어쩌고, 현대사회에 이야기를 고풍으로 이야기 하면서 옛날 문자쓰고 정서적으로 대화의 용어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지금 조선시대 서당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아니므로 시대에 맞지않는 선비 이야길 하면서 내로남불의 형태와 훈계가 마음에 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현대교육을 받은 삼촌이 항상 유림,향교,재례, 조상들 이야기만하고 하루 종일 빠져 있는 모습이 안타깝고, 지겹습니다.''》
♤♤♤
할아버지(정현락)가 함안향교, 의령향교와 각 유림회관에 출석했다는 말이다.
상기는 김해향교와 유림회관 참관기이다.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닌데,
할아버지 더러 ''유림과 교우 어쩌고 저쩌고, 유치한 짓''이라니?
상기 김해향교와 유림회관 글을 읽어보기 바란다.
이 사람들이 ''유치한 짓'' 하는 사람들인가?
각 시군의 향교는 문화체육부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아 현재도 존속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지금으로부터 24년 전 옛 사람으로 출입했다는데, ''유치한 짓''으로 매도한다는 것은 상식 부족과 전통을 아예 무시하는 형태이다.
♤♤♤
상기 행사에 시장, 시의회 의장, 국회의원, 시의원, 교수 츨신 박사, 은퇴한 고위직 행정, 사법, 경찰, 교직, 군인들도 참관한다.
'유치한 짓'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번에 김포공항에서 갑질하여 낭패를 본 김해을지구 국회의원 김정호도 이 어른들 앞에서 큰절을 하기도 했다.
다음 사진 2장이다.
♤♤♤
《''방금 보내신것 보지 않고 바로 삭제했습니다.
삼촌의 고풍스런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 창원박물대학 친구나, 그렇게 올리고 싶으면 단체가 보는 민초나라나, 카페에 올려 자랑하십시요.
제가 필요할때 가끔들어가 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카톡에 보내지 마세요. 지겹습니다.''》
《21》
카톡 대화가 '초계정씨 함안유은후손종중'에 관한 가족사이기에 기족사의 주인공이 정유은 아버지이다. 1912년생으로 한일합방(1910) 2년 후에 태어난 옛날 분으로 근대교육을 받지 않아 그 시대상을 논하다 보니, 유림과 향교 등이 언급된 것이다.
나는 세계테마기행, 한국기행, 걸어서 세계속으로, 영상앨범 산, 특파원 보고 세계는 지금 스페셜,, 역사저널 그날, 글로벌 다큐멘터리 등을 즐겨 보고, 시사 프로 종편과 신문도 중앙지와 지방지 2개를 본다. 그리 고리타분한 사람이 아니다.
신문 2개(중앙지 15,000원 1개에 지방지 1개는 공짜로 따라온다)를 보기에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할일이 없어 심심하다고 하는 주변의 우리 세대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루에 주요기사 3~5개만 봐도 본전이 빠진다
요즈음 아들 세대에 비하여는 보수적이고 옛날 사람이라 하겠지만, 그런대로 斬新(참신)한 사람이고, 진보적인(새로운) 사람이다.
《22》
종교(불교 등)의 믿음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대구 팔공산 갓바위는 수능을 앞둔 부모님의 소문난 대박 기도처이다.
팔공산을 오르는 돌계단이 갓바위에 물었다지.
돌부처 너와 돌계단인 나는 같은 돌인데, 왜 수백만의 사람들이 나는 밟고 지나가고, 너는 무엇이기에 수천의 사람들이 매일마다 찾아와서 108배 절을 하냐? 하였더니,
갓바위 돌부처 왈, 너의 말처럼 너와 나는 같은 팔공산 돌이 맞다.
그러나 너는 그냥 돌이고 나는 사람들이 때리는 수만번의 정을 맞으며 고통을 견뎌서 부처 형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내게 와서 절(拜)를 한다.
항상 매사에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으로 살아간다면 저절로 복(福)은 찾아오게 된다(굴러들어온다)
할아버지 표지석 기념비 3개도 상기처럼 보면 된다. 민간 풍속으로는 비보석(탑), 양밥석, 액땜석(액막이, 부적, 방술, 술법) 등으로 비유된다.
아버지 35세 때인 1946.6.3에 법수면 우거리 산82 번지 18347㎡(5050평)을 군북면 장지리 거주 남양홍씨 홍시종(洪時鍾)의 아들 홍상범(洪象範)씨로 부터 매입 했다. 일제시대에는 땔나무(화목)가 귀하여 산이 필요했다.
함안군 법수면 우거리 산82번지 18,347m²(5,540평)의 1992.1.31 부동산매매계약서 매매대금 금삼천오십만원(₩30,500,000)
매도인(등기 소유주) 정광식 代 정봉영이다.
26년전 계약서가 버리지 않고 마침 스크랩철에 보관되어 있었기에 기념 기록으로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