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 ③
* 임오군란(1882)의 결과
개항 후 일본 상인의 대량 수입으로 점차 쌀이 부족해진데다가, 때마침 1882년에 극심한 흉년이 들어 쌀값이 폭등하였다. 이로 인해 서울의 하층민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고, 일본에 대한 반감이 커져 갔다.
한편, 신식 군대인 별기군에 비하여 구식 군인들에 대한 대우는 매우 열악하였다. 심지어 민씨 일파 등 집권층의 부패로 구식 군인에게 13개월 만에 월급으로 지급한 쌀에는 겨와 모래가 섞여 있었다. 이에 그렇지 않아도 정부의 개화 정책 추진에 불만을 품었던 구식 군인들은 마침내 선혜청을 습격하며 임오군란을 일으켰다(1882.6).
구식 군인들은 흥선 대원군을 찾아가 지지를 요청했으며, 정부 고관들의 집을 부수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였다. 이 와중에 별기군의 일본인 교관이 죽었다.
그 후 서울의 하층민들이 가세하여 세력이 더욱 커지자, 구식 군인들은 왕궁을 습격하고 민씨 일파 등 고위 관리들을 처단하였다.군인들이 궁궐에까지 침입하자 민비는 종적을 감췄고(장호원 피신) 고종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흥선 대원군에게 정권을 맡겼다.
그러나 민씨 일파로부터 군대 파견을 요청받은 청은 일본의 무력 개입을 막기 위해 신속하게 군대를 출동시켜 군란을 진압했으며, 군란의 책임을 물어 흥선 대원군을 자국으로 납치해 갔다.
또한 청은 군대를 주둔시키며,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고문 파견: 마건창, 묄렌도르프)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1882.8)을 체결하여 양화진을 통한 한성개잔권과 내지통상권을 얻어 도성의 시장과 개항장 밖 내륙 시장까지도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일본은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군란의 책임을 물었다. 이에 굴복한 정부는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여 사과 사절단의 파견, 주모자 처벌, 배상금 지불, 공사관 경비를 위한 군대 주둔 등 일본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① 동학농민운동(1894) 당시 6월 정부와 농민군은 전주에서 화약을 맺고 폐단이 많은 정치를 개혁하기로 합의하였다(전주화약). 이후 농민군은 각지에 자치행정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여 개혁을 실천해 나갔다.
② 동학농민운동에서 나타난 농민의 불만과 개혁 요구, 일본의 조선 지배를 용이하기 위한 의도가 맞물어져 갑오개혁이 추진되었다(1894.7).
④ 을미사변(1895.10, 일본의 민비 시해) 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1년 동안 피신하였다(아관 파천, 1896.2~1897.2). 이 기간 동안 열강의 이권침탈이 심해지며 자주권이 크게 손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