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답게 사는 세상 이야기 '인권' 1월호 중에서....

[남창기]

[국가인권위를 찾는 사람들] 배움의 문턱을 넘어서 | 육성철

“장애인 한 명의 교육권을 위해 1억7000만원을 쓴다.”
‘장애인의 천국’이라 하는 미국의 얘기가 아니다. 수많은 장애인이 희생을 하고 나서야 지하철 엘리베이터와 저상버스를 도입한 서울시의 얘기도 아니다. 이것은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중학교에서 벌어진 실제상황이다. 서른이 넘어 중학교에 입학한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 송인 호(32) 씨는 바로 이 놀라운 ‘사건’의 주인공이다.


아침 등교시간. 영주중학교 교문으로 몰려드는 자전거 부대 속에 수동 휠체어가 하나 보인다. 송인호 씨는 얼마 전 타고 다니던 전동휠체어가 고장나서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학교에 갈 수 있다. 마음 같아서는 전동휠체어를 얼른 고쳐 주고 싶지만 부속 수수료 30만원을 구하기가 만만치 않다는 게 아버지의 하소연이다. 아버지는 20년 넘게 시장골목에서 방앗간을 운영해 왔는데, 요즘처럼 장사가 안 된 적은 없었다며 한숨을 토해 낸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가방을 챙겨들고 등교를 재촉하는 아들. 아버지는 그런 자식을 보면서 한편으로 대견해하면서도 죄책감에 빠져들곤 한다. 딸 넷을 낳고 다섯 번째로 얻은 아들의 장애가 부모의 잘못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송씨의 아버지는 아들이 열 살이 될 때까지 집 밖을 나서지 못했다며 자신을 자책했다. 그러나 이젠 아들에게도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이것이 아버지가 날마다 병마에 찌든 몸을 곧추 세우며 휠체어를 미는 이유다.
학교를 영영 모를 수도 있었던 송인호 씨는 1년 전 집 근처의 사회복지관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이곳에서 공부하며 초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중고 전동휠체어도 얻었다. 공부는 그에게 세계를 보여 주었고, 전동휠체어는 그의 손발이 되어 주었다. 이때부터 송씨는 문턱이 닳도록 교육청을 드나들면서 중학교 진학을 모색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던가? 그에게도 마침내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2005년 3월 2일. 송씨는 영주중학교 입학식에 참석했다. 꿈 같은 현실이었으나 자축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는 담임교사를 따라 교실을 둘러보고 몹시 실망했다. 학교측에서는 입구에 철판 경사로를 만들고 보조교사까지 채용했지만, 혼자서 움직이는 게 불가능한 송씨에게는 턱없이 부족한 시설이었다. 더구나 3층의 컴퓨터실, 별관의 음악실과 도서실, 후동의 미술실 등은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날 저녁 송씨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아버지가 사 준 컴퓨터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바깥세상과 자유롭게 소통하는 창이다. 비록 심한 강직현상 신체의 일부에 불필요한 힘을 가하는 현상 때문에 손가락 대신 발가락으로 자판을 두드려야 하지만, 그의 글은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그는 방송뉴스 등을 통해 평소 알고 있던 국가인권위원회 홈페이지에 접속한 뒤 “장애인의 교육받을 권리가 침해당하고 있다”고 썼다.
송씨가 국가인권위에 진정을 접수했다는 소식은 금세 영주중학교에 전해졌다. 이를 두고 학교측에서는 나름대로 노력했는데 서운하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이번 기회에 장애인 통합교육을 모범적으로 실천하자는 주장이 더 많았다. 여기에는 갓 부임한 강성해 교장의 노력이 컸다. 강 교장은 “우리가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싶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요구하니까 교육청에서도 많이 배려해 준 것 같다”고 말했다.

국가인권위가 송씨의 진정사건을 조사하는 동안 영주중학교에서는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났다. 시도교육청이 영주중학교의 장애인 편의시설 공사계획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8100여 만원을 지원한 것이다. 내년 초쯤 공사가 끝나면 송씨는 엘리베이터와 경사로를 이용해 음악실이나 컴퓨터실에 들어갈 수 있고, 화장실 이용에 따르는 불편함도 겪지 않게 된다. 국가인권위는 이러한 점을 충분히 고려해 2005년 9월 송씨의 진정사건을 학교측과의 합의로 마무리했다.
송씨는 지난 몇 달간 학교에서 벌어진 일들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방안에서만 머물렀던 생활에서 벗어난 것아 엊그제 같은데, 이젠 선생님과 함께 문화유적지를 돌아다니며 현장수업을 하고 있다. 처음엔 서먹서먹했던 조카뻘 되는 급우들도 지금은 ‘큰형님’이라 부르면서 장난까지 친다. 쉬는 시간에 송씨에게 다가가 “공부하는 게 재미있느냐?”고 묻자, 고개를 끄덕이며 한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한다.
송씨에게 학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송씨를 돕고 있는 이미영 보조교사는 남들처럼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송씨에게는 기쁨이라고 말한다. 비록 글을 읽는 속도가 느려 시험시간마다 어려움을 겪지만, 최선을 다해 답안을 쓰는 과정 자체에서 큰 만족을 느끼는 것 같다고 한다. 송씨가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아마도 타고난 낙천적 성격이 아닐까 싶다. 그는 요즘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내가 대학 가면 돈 많이 벌어서 아버지 먹여 살릴 거예요.”

송씨가 학교 다니는 재미에 푹 빠져들 무렵 시도교육청은 영주중학교 본관과 후동을 연결하는 이동통로 공사에 8700여 만원을 추가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되면 송씨는 계단을 통하지 않고 영주중학교의 모든 교실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송씨의 담임이자 특수학급 교사인 이태영 교사는 “내년엔 물리치료사도 배정될 것”이라며 또 하나의 희소식을 전했다.
송씨의 입학은 영주중학교의 시설만 바꿔 놓은 게 아니다. 강성해 교장은 송씨 문제를 겪으면서 장애인 인권에 새롭게 눈떴다고 한다. 그는 얼마 전 국립특수교육원에서 열린 특수교육관리자과정을 수강하기도 했는데, 그의 수강 소감은 인권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느끼게 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예비 장애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인들을 배려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기도 하죠. 처음 국가인권위에서 조사할 때는 한 사람을 위해 그렇게 큰 공사를 해야 하는가를 고민했지만, 지금은 그동안 못했으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국가인권위를 통해서 ‘장애인’의 반대말이 ‘정상인’이 아니라 ‘비장애인’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을 고맙게 여기고 있습니다.”


★육성철 님은 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관실에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