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95)> 숙종 1 - 경신환국(庚申換局)(1)
서인과 남인이 치열하게 대립하던 숙종대 초반의 정국에서
정국을 이끌어간 인물은 공작정치의 달인 김석주입니다.
서인의 대표적 명문가 출신에 현종, 숙종의 가까운 외척이기도 한 김석주는
송시열을 스승으로 모신 서인 출신이었으나, 송시열이 김석주의 조부인 김육(대동법 추진)과 반목하는 바람에 송시열과 관계가 좋지
않아졌습니다.
김석주는 한직에 머무르다 현종 말년의 2차 예송 논쟁에서 서인임에도 자신의 스승인 서인의 거두 송시열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결국 숙종이 즉위하면서 남인 정권이 권력을 잡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14세의 소년 임금 숙종은 즉위 후 곧 과거
예송 논쟁에서 송시열이 했던 주장은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송시열 등 서인들을 줄줄이 내쳤고, 이로써 인조반정 이후
50여 년 간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남인들이 허적 등을 중심으로 하여 세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강력한 소년군주 숙종의 지원에다
김석주의 은밀한 공작을 발판 삼아 집권을 하게 된 남인세력은 오래지 않아 송시열 등 서인에 대한 강한 처벌을 요구하는 측과 비교적 온건한 측으로
갈리게 되었는데, 전자의 사람들을 청남(淸南)이라 불렀고, 후자측 사람들을 탁남(濁南)이라 불렀습니다.(남인의 분열)
권력을 잡은
남인은 너무 오래간만의 집권이어서 그랬는지 힘이 강해지고 도가 지나치면 임금의 의심과 버림이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안일에 젖기
시작했습니다.
내일도 오늘과 같으리라는 무사안일이 불러온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한편 소년 숙종은 성장해가면서 권력에
눈이 트여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서인을 악으로 간주하고 남인에게 힘을 주었으나 남인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면 결국 임금도
어찌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숙종이 이런 생각을 하기까지에는 김석주의 처세와 공작의 힘이 컸습니다.
원래 서인 출신인 김석주는 남인 정권 탄생에 기여했지만 허적이 이끄는 남인 정국을 그대로 두고 볼 생각은 당초부터 전혀
없었습니다.
김석주는 뛰어난 처신으로 자신은 근왕파라는 것을 숙종에게 강하게 인식시키는 한편 허적 등 남인에 대한 숙종의 경계심을
한껏 자극시켰습니다.
담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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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96)> 숙종 2 - 경신환국(庚申換局)(2)
1680년(숙종 6년) 2월, 남인의 리더 영의정
허적은 조부의 시호를 받은 것을 축하해 대신들을 불러 축하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날은 비가 많이 내렸는데, 숙종은 허적을 위해
왕의 잔치 때 쓰는 유악(기름 먹인 장막)과 차일을 영상에게 갖다 주라는 지시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허적은 이미 유악과 차일을 갖다
쓰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를 안 숙종은 "과인의 허락도 없이 임금의 물건을 가져갔단 말이냐. 한명회도 못한 짓을 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라며 대노했습니다.
숙종은 그날로 남인이 맡고 있던 훈련대장, 총융사 등의 병권에 관한 요직을 서인측 인사로 물갈이해버렸고,
승지와 대간마저 대거 서인으로 교체했습니다.
이어서 남인인 좌의정, 우의정, 대사헌이 사직 소를 올리자 즉시 이를
수리해버렸습니다.
또 새로 제수된 서인 대간들이 남인의 비위를 들먹이며 파직과 유배할 것을 아뢰자 숙종은 이를 모두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전격적으로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이 교체된 사건을 "경신환국"이라 합니다.
그러나 경신환국의
원인으로 늘 제시되는 이러한 유악사건은 갑작스런 환국을 만들어내기 위한 소설이라고 보여집니다.
허적의 잔치는 숙종이 이미 아낌없는
지원을 한 상황에서 벌어진 것이고, 특히 임금의 유악을 말도 없이 가져다 쓰는 일은 매우 신중한 허적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경신환국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김석주가 오래도록 준비한 드라마였고, 김석주의 노련한 공작에 세뇌된 숙종의
전격적 뒤집기 한판이었습니다.
김석주는 곧이어 정원로 등에게 허견(남인 실세)이 종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의 아들들로, ‘삼복’이라 불이었음)과 함께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하게 하였습니다.
일찍이 정원로의 집에서 허견과 삼복이 모인
일이 있었는데, 이 때 복평군이 허견에게 “왕은 곧 돌아가실 것이오. 그대의 아비는 나를 왕으로 세우려 했는데 나는 곧 병조판서가 될 것이오.
그대와 피를 나누어 마셔 맹세하고 함께 의논하여 서인을 몰아냅시다”라고 말한 것을 김석주가 정원로로 하여금 고변하게 한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남인의 실세 허적과 허견 그리고 삼복(三福)은 모두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김석주가
주도한 정치 공작은 결과적으로 남인 축출, 서인 득세의 권력 교체를 가져왔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김석주가 확실한 증거 없이 역모 사건을 조작한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담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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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국*에 대한 공부.
조선 숙종 때의 정치적 상황으로 갑작스럽게 정권이 교체되는 국면이라는 뜻.
당시 서인과 남인은 치열한
붕당 정치를 벌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권 강화를 도모한 숙종이 일방적으로 지배
세력을 교체해 버리곤 했는데, 이를 환국이라
한다. 환국은 총3번 발생 했는데...
1.경신환국; 1680(숙종3년)서인집권 2.기사환국;1689 (숙종15년)
남인집권
3.갑술환국;1695 (숙종 20년) 서인집권, 환국으로 남->서->남-서인 집권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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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97)> 숙종 3 - 서인의 복귀와 노론,소론 분열
전회에서 본 경신환국의 연출자는 김석주이지만,
결국 남인이 떠난 자리를 채운 건 서인이었습니다.
서인은 곧바로 잃어버린 6년의 복구에 나서, 먼저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복권시켰습니다. 임금도, 대비도 높이 받들고, 영상 이하 대신들도 모두 다 제자들이니, 송시열은 예전의 그 권위를 모두 되찾았다 할 만
했습니다.
송시열의 유배생활은 사형수의 하루하루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남인들은 틈만 나면 자신의 목숨을 원했고, 결단이 빠른
왕이 언제 ‘아뢴 대로 하시오’라고 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남인 정권을 몰아낸 김석주는 구원자나 다름이 없었고, 이런
이유로 송시열은 여러 방면에서 김석주와 뜻을 같이 했습니다.
최강 권력자의 꿈을 이룬 김석주는 남인의 복귀 가능성을 우려해 남인을
사실상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우고, 어영대장 김익훈을 파트너로 삼아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김익훈은 남인들을 역모로 엮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무리수를 둔 것이 문제가 되었는데, 이 때 외척의 발호와 공작정치에 크게 염증을 느낀 서인측 신진사류들은 증거도 없이 사건을 만든
김익훈을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하게 펼쳤습니다.
이러한 순간에 서인들의 주목을 받으며 등장한 송시열은 김익훈을 싸고돌며 그
처벌을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송시열의 한 마디로 사태가 잠잠해졌겠지만, 송시열이 김석주로 인해 변했다고 생각한
신진사류들이 이번에는 반발했고, 이때 사림에서 송시열 다음으로 존경을 받던 박세채가 소를 올려 신진사류들을 옹호했습니다.
이에
신진사류들이 박세채를 떠받들었고, 박세채는 일약 신진사류들의 영수로 떠오르게 되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소론이라 불렀고, 송시열을 따르는 이들을
노론이라 불렀습니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가 된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선조 때 동인, 서인으로 파당이 형성되었다가,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파하고, 남인이 청남과 탁남으로 분파했으며,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한 것입니다.
한편 공작정치의 달인
김석주는 자신과 송시열에 반대한 박세채를 겨냥해 세찬 공격을 하던 중 51세를 일기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빠른 죽음이
그에게 다행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방자함이 그를 어떤 불행에 빠트렸을지 넉넉하게 예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담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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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98)> 숙종 4 - 숙종의 여인 장희빈
숙종 6년에 왕비 인경황후가 세상을 뜨고, 그 이듬해에 새로
왕비를 들이니 이 사람이 노론 핵심인사인 민유중의 딸 인현황후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인현황후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이 있었으니, 이 사람이 뒤에 장희빈으로 불리게 된 여인 장씨입니다.
장희빈(아직 희빈이 아니나 편의상 장희빈이라
함)은 1659년 장경의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널리 알려진 대로 그 오빠이자 맏아들은 장희재입니다.
장희빈의 가계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숙부가 역관 장현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역관은 중인이었지만 상당한 부를 축적했고, 그것을 매개로 권력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었는데, 장현은 남인들과 매우 친밀한 사이였습니다.
장희빈의 어릴 적 환경은 비빈의 자리에 오른 것에 비하면 매우 한미하다 할만
했는데, 이러한 배경의 여인이 입궁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안온한 환경이 여유와 평화를 준다면, 험난한 조건은 그것을
이겨낼 의지와 강단을 부여할 수 있는데, 장차 나타나는 장희빈의 행동과 품성은 이런 환경과 무관치 않다
하겠습니다.
“숙종실록”에는, 장희빈의 어머니 윤씨는 우의정 조사석 처가의 종이었는데, 조사석과 사통(私通)한 사이였고, 조사석은
인조의 후궁 조귀인의 손자 동평군에게 정부(情婦)의 딸을 입궁시켜 달라고 부탁했으며, 그런 요청에 따라 장희빈이 나인으로 입궁했는데, 그녀는
미모가 특출 나게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희빈은 인경황후가 죽은 그 해 21세의 나이에 처음 숙종의 성은을 입었고,
이때부터 이미 큰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장희빈의 꿈은 바로 이루어지지는 못했습니다. 당파적 색채가 강한 왕대비 명성왕후가
장희빈으로 인해 남인이 진출할 수도 있다고 보아 그녀를 내쫓았기 때문이었다.
그 이듬해인 1681년 노론 핵심 가문 출신의
인현왕후가 왕비로 책봉되었습니다. 나이는 장희빈이 8세 위였습니다.
장희빈을 내쫓은 왕대비 명성왕후가 죽자 장희빈에게도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인현왕후가 명문가 출신의 현숙한 여인답게 숙종에게 “성상의 은혜를 입은 여인을 사가에 둘 수 없으니 불러들이소서”라는 청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숙종은 장희빈을 불렀습니다.(얼씨구나~) 이 때 장희빈의 나이 25세였습니다.
담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