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은 이미 춤판으로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각시탈이 퇴장하자 넉살 좋은 백정탈이 나온다. 도끼와 칼을 들고 마당을 어슬렁거리며 구경꾼들에게 조소와 위트를 보낸다. 춤을 추는가 싶더니 일순 고개를 숙인다. 섬뜩한 광채가 탈 아래턱을 스친다. 순식간에 소머리를 후려친다. 구경꾼들이 비명을 지르는데 어느새 백정탈은 몽두리춤을 추며 "양기에 좋은 쇠불알 사시소." 라며 능청을 떤다. 불촉천민이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일까? 눈가에 웃음마저 짙은 비애가 묻어 있다. 미간을 타고 스치는 칼자국과 날선 주름이 그의 거친 생애를 말해주는 듯 하다. 고개를 들면 호탕한 사내의 웃음이요, 고개를 숙이면 비장한 검투사가 되는 것이 백정탈의 숙명이다.
애잔한 태평소 가락이 몇 방울의 비를 부를 즈음, 때맞추어 할미탈의 구슬픈 베틀가가 마당을 적신다. 돌연 구경꾼들이 숙연해진다. 낡은 베틀에 패랭이꽃 같은 세월을 서리서리 감는다. "춘아 춘아 옥단춘아" 로 시작되는 할미탈의 느린 산조가 움푹 패인 탈의 입모양과 묘한 일치를이루면서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고추같은 시집살이에 찔레꽃 따 먹으며 명지고개 긴 한숨으로 넘었다던 어머니의 일생을 지금 저 할미탈이 읊고 있는 것일까? 삶이 힘들 때면 진양조 한풀이로 넘고, 신명이라도 뻗치면 중중모리 몸춤으로 넘어가던..... 여인네들의 삶이란 그렇게 서릿발 같은 인생길 굽이굽이 넘어 온 게로구나. 깊게 패인 주름탈 위로 휑하니 세월만 달아나는구나.
젖은 햇살 속으로 몇 줄기의 여우비가 내린다. 이런 날을 두고 "호랑이 장가가는 날." 이라고 했던가 호랑이 대신 산중의 스님이 나타났다. '꾸구럭꾸구럭' 풋개구리 독경소리로 구경꾼들의 웃음을 바리 가득 탁발한다. 도롱상투를 쓰고 장삼자락을 휘날리며 "부네"를 휘롱한다. 실눈에 헤벌린 입 모양이 이미 세속을 부지기수로 넘나들었을 성 싶다. 오줌 눈 자리에서 오금춤을 추는 부네의 요염한 교태에 그만 몸이 먼저 반응한 모양이다. 이미 몸은 달아 선계도 육바라밀도 부네의 치맛자락 밑에 뜬구름이 아닌가 싶다. 기녀에 의해 단단한 금강경 한 줄이 파계되는 순간이다. 구경꾼들의 통쾌한 웃음이 오히려 스님의 일탈을 응원한다. '아하, 스님도 인간이었구나. 스님에게서 탈이란 세속으로 가는 치장이었구나. 밥을 빌어 몸을 보시하고 몸을 빌려 부처에 이르라고 했는데 스님은 몸을 빌려 부네를 업고 줄행랑을 치는구나. 쌍화점이나 목자득국이 그냥 생긴 노래는 아니었구나.' 이런 생각에 절로 실소가 터져 나왔지만 오히려 마음은 개운했다.
맞은편에 히잡을 두른 외국여자들이 무언가 귓속말로 소근거린다. 노인 두 분이 춤판이 바뀌는 틈을 타 어깨를 들썩이며 배꼽춤을 춘다. 아이들이 까르르 넘어간다. 우리민족은 정말 '흥'이라는 유전자라도 가진 것일까? 남녀노소 모두가 덩실덩실 춤판을 달군다. "둥둥둥~" 여름들판의 새들을 날리고 만상의 풍요를 부른다.
하회탈이 선대의 모든 계층을 포함하고 있다면 지금 구경꾼들 역시 모든 계층을 망라하고 있다. 십대들만 모인 공연장이나 중년들만 선호하는 음악회와는 그 성격이 사뭇 다르다. 아이들부터 팔순의 할머니까지, 눈 까만 동양인부터 코큰 서양인까지, 하회탈은 그렇게 세상을 북새질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을 하나로 묶고 있다.
춤판은 어느새 파장으로 치닫고 있다. 징소리에 맞추어 도포자락 휘날리며 양반탈이 등장한다. 탈 아래로 곧게 뻗은 수염의 허풍스러움이 팔월 염천을 희롱한다. 탈 중의 탈이 분명하다. 산천초목의 기운을 다 빨아먹은 듯 상의 기운이 호방하다. 육간대청에서 어험~하면 대문 앞 장송도 머리를 조아릴 기세다. 진지성과 풍류, 근엄함과 호방함을 탈 하나에 모두 담고 있다. 어쩌면 저 눈썹 아래로 흐르는 완만한 곡선이 이 마을 하회를 휘돌아 가는 강심에 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치맛자락처럼 휘늘어진 저 강물의 유장한 가락이 하회탈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인지도 모른다.
껄껄거리는 양반탈의 여유를 시기라도 하듯 작달막한 선비탈이 도끼눈을 흘긴다. 궁색한 티가 탈의 눈 꼬리에 꾀죄죄하게 붙어 있다. 무언가 불만이 있는 듯 연신 잔기침을 한다. 굴뚝에 연기가 오르지 않아도 천하태평 글만 읽는 사람이 내가 아는 선비인데 지금 저 선비탈은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없다. 중탈이 아예 드러내 놓고 인간의 이중성을 가감없이 보였다면, 양반탈은 안과 밖이 고묘히 소통한다. 턱의 분리효과로 호방성과 근엄성이 이질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선비탈은 내면의 욕구와 온갖 궁색이 탈을 쓰는 순간에도 표정에 나타난다. 오랜 궁핍 때문일까? 탈이라는 "퍼소나"가 완전하게 작동하지 못하는 인간형이다. 선비는 이미 체면이라는 탈마저 벗어버린 것 같다. 옹색하지만 솔직하다.
비 그친 하늘이 낭창하다. 덩덕쿵~, 세마치장단이 하늘을 울린다. 드디어 맘판이 올랐다. 양반과 선비 사이에 소불알 쟁탈전이 시작된다. 학식을 겨루며 '흠흠'점잖을 떨던 두 양반이 '양기'에 좋다는 백정의 말에 고개를 홱~ 돌린다. 대뜸 백정에게 달라붙어 서로 '내 소불알' 이라며 소불알을 물고 늘어진다.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탈판을 달군다. 선비와 양반의 위선이 불촉천민 백정에 의해 깨어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백정탈 어디에서도 적의는 보이지 않는다. 웃음과 해학만 난무할 뿐이다. 그래서 쌓인 갈등이 완판으로 해소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개인이든 사회든 불만이 쌓이다 보면 종종 엉뚱한 방향으로 탈이난다. 그 '탈'을 막기 위해 하회 사람들은 '탈'을 쓴 것일까? '回'자가 탈을 연상시키는 것도 아이러니지만 엄격한 유가의 본향에 탈판을 깔아 준 양반들의 호방한 여유 또한 미소를 머금케 한다.
앉아 있는 탈의 모습이 모두 다르다. 아이의 탈은 해맑다. 세월 모르는 탈이다. 여학생의 얼굴은 각시탈처럼 곱다. 아직 세월의 두께가 내려앉지 않은 탈이다. 촐랑거리는 초랭이탈도 보이고 광대뼈가 툭 불거진 옹고집탈도 보인다. 여름 땡볕에 검게 그을린 백정탈도 보인다. 아직 움켜쥐어야 할 짐이 많은 탈이다. 뒤쪽 할미탈의 주름은 환하다. 인중으로 몰린 주름이 서글한 등고선을 그리고 있다. 발품과 노역으로 쫄아든 아름다운 훈패임이 틀림없으리라.
사람은 누구나 두 개의 탈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나는 내면으로 향하는 탈이고 하나는 밖으로 드러나는 탈이다. 안은 심성이고 밖은 표정이다. 밖을 지향하는 탈은 위장이 가능하지만 대부분의 탈은 선비탈처럼 쉽게 읽히고 만다. 표정은 심성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자기 심성을 닦는 사람, 감추지 않아도 맑은 심성이 자연스레 드러나는 사람, 그런 사람을 보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만면의 미소를 머금은, 그런 사람을 닮고 싶다. 문득 얼굴로 손이 간다. 나는 어떤 표정일까? 긴 인생의 여정에서 나의 탈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