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박정희 그는 누구인가? [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
정치가, 군인.
호 : 중수
활동분야 : 군사, 정치
출생지 : 경북 선산
주요저서 :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민족의 저력》
경북 선산(善山) 출생. 가난한 농부인 박성빈(朴成彬)과 백남의(白南義) 사이에서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만주의 신경(新京:現 長春)군관학교를 거쳐 1944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8 ・15광복 이전까지 주로 관동군에 배속되어 중위로 복무하였다.
광복 이후 귀국하여 국군 창설에 참여하였으며,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제2기로 졸업하고 대위로 임관하였다. 그 후 육군포병학교장, 제5사단장, 제7사단장, 제1군 참모장, 제6관구 사령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제2군 부사령관 등을 역임하였다. 1949년 사상 관련사건에 연루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된 적도 있었다. 당시 신문보도에 의하면 여수 ・순천사건 관련공산주의 혐의자로 되어 있는데,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으나 구명운동에 의해 복역은 면제되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을 주도하고 7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었으며 1962년 대통령권한대행을 역임, 1963년 육군대장으로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이어 민주공화당 총재에 추대되었고, 그 해 12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1967년 재선된 후 장기집권을 위하여 1969년 3선개헌을 통과시켰다. 제3공화국 재임동안 '한・일국교정상화'와 '월남파병문제'를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하였다. 1972년 국회 및 정당해산을 발표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유신정권인 제4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유신시대 초기에는 새마을운동의 전국민적 전개로 농어촌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였고, 제5차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 완성으로 국민들의 절대적 빈곤을 해결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하였다. 그러나 상대적 빈곤의 심화와 장기집권에 따른 부작용, 국민들의 반유신 민주화운동으로 그에 대한 지지도가 약화되자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정권을 유지하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인 ・지식인 ・학생 ・종교인이 중심이 된 민주화운동과 경제개발에서 소외된 노동자 ・농민의 생존권확보운동은 더욱 드세졌다. 이러한 가운데서 내치(內治)의 어려움을 통일문제로 돌파하고자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을 민족통일의 3대원칙으로 규정한 1972년 7・4남북공동성명과 1973년 6・23선언이라 불리는 '평화통일외교정책'(할슈타인원칙의 폐기)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의 획기성에도 불구하고 실제 정책면에서는 북한의 비협조와 당시의 국제정세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74년 8월에는 그의 부인 육영수가 북한의 지령을 받은 조총련계 문세광(文世光)에게 저격당해 사망하였다. 이러한 정권의 위기는 결국 ‘부마사태(釜馬事態)’를 야기시켰으며,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만찬석상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의 저격으로 급서(急逝)하였다.
저서로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 《민족의 저력》 《민족중흥의 길》 《국가와 혁명과 나》 《지도자의 길》 《연설문집》 등이 있다.
2. 박정희의 친일에 대한 내용
① 일제에 대한 충성심이 태동하다.
만주군관학교 2기생으로 자원입학(1940년 4월 4일). 다카기 마사오(박정희) 나이 23세. 입교 동기생으로 240중 조선인 12명. 입학 성적은 15등이었다.
②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일제 충성심으로 무장하다.
만주군관학교를 투철한 친일정신과 열성적 훈련으로 수석 졸업의 영광을 차지한다.
수석졸업의 영광으로 금시계를 선물로 받고 졸업생 대표로 천황찬양으로 가득한 답사를 읽었다.
당시 친일신문〈만선일보 1942. 3. 24〉기사 일부를 인용하면...
「… 빛나는 우등생 오카이(日系), 고야마(日系), 다카기(鮮系-박정희)
등 5명에게 각각 은사상증의 전달이 잇고 폐식하였다.」
만주군관학교 출신의 조선인은 대략 제1기~제7기까지
50여명 정도인데 만군 출신들은 훗날 대통령, 국회의장, 국무총리,
국방장관, 군참모총장, 해병대사령관, 군사령관, 군단장, 연대장, 고급
참모등 정부와 군의 요직에서 나라를 이끌어 가는 중요 인물이 된다.
다카기 마사오(박정희)를 지도했던 한 일본인 장교의 말을 들어보면
다카기 마사오(박정희)가 어느 정도 몸과 마음을
철투철미 하게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하고자 하였나를 알 수 있다.
「 매년 가을이 되면 군관학교에는 생도 전원이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행군연습을 실시했다. 박정희는 그때 내가 맡은
소대의 제1분대장이었는데, 다른 분대장과는 달리 기합이 들어 있었고,
의욕도 대단했다. 진지공격 연습 같은 때 대단히 어려운 임무가
부여 되더라도 박정희는 그 임무를 달성하려는 의욕으로 꽉 차있었다.
박정희는 말수가 적고 속에 투지를 감춘 사나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라고 진술하고 있다.
③ 완전한 일본인이 되다.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관례대로 우등생에게 주어지는
일본육사 특전의 혜택을 누리게 된다. 다카기 마사오(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입학하려고 군관학교 시절 남들보다 철저한
황군정신으로 몸과 마음을 닦고 열심히 공부한 것이다.
일본 육사에서도 진지한 학습태도로 모범생이란 평을 받고
3등이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한다.
조선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일본 육군 대신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이로써 박정희는 완전한 일본인(다카기 마사오)이 되었다.
아니 대일본제국의 군인이 되었다.
훗날 다카기 마사오(박정희)가 10.26으로 죽었을 때
주한 일본대사관에서 한 일본외교관은 이러한 말을 했다.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 라고 하였다.
④ 항일세력의(독립군) 토벌 작전에 110회나 참가하다.
소위 다카기 마사오(박정희)는 일본 본토의 마쓰야마 제 14연대에
처음 배속을 받았으나 진정한 일본군인을 참작하여 만주 제8연대의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모란강 부근의 영안으로 전출되었다가
화북지방의 열하 보병 제8군단에 배속된다.
영안지방 →간도에서 활약한 한인 독립군부대가 북만주로 이동할 때와
노령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서쪽으로 진출할 때에 주둔하던 요충지였다.
열하지구 ⇒ 일본군에 대한 항일 투쟁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다.
항일세력은 팔로군, 군부군, 광복군, 조선의용군, 소규모의 게릴라
(유격대) 등이었다.
다카기 마사오(박정희)는 이곳에 임관한지 1년만에 중위로 진급한다.
군의 편제상 소대장은 최전선에 배치된다.
여기에서 다카기 마사오(박정희)는 열성적으로 항일부대를
토벌했던 공로로 승진이 빨랐던 것이다.
⑤ 일본군의 특수부대(철석부대) 산하의 간도특설대 활약
일본은 만주 서남부와 중국북부에 투입할 용맹한 부대를 선발하여
특수부대(철석부대)를 만든다. 여기에 조선인 부대인
[간도특설대]도 선발되는 영광(?)을 얻는데
그 속에 다카기 마사오(박정희), 이주일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다카기 마사오(박정희)는 중국북지(열하성 만리장성 남방 평곡-북경 동북방)로
투입되어 항일 세력과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여기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소수민족들의 특수부대는 많았다.
조선인의 간도특설대, 러시아인의 찬야부대, 몽고인의 기야부대,
회교인의 회교부대, 오르치온족의 공작대 등이 있었는데....
간도특설대가 가장 강력했다고 한다. 한가지 예를 들면
「일본군, 만주군이 못해내는 작전을 간도특설대가 가서는
거뜬히 해치우곤 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조선인 공적평가에
인색한 일본인들도 간도특설대에 대해서는 "상승의 조선인부대"
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다카기 마사오(박정희)가 소속한 특수부대(간도특설대) 요원들이
얼마만큼 항일군의 토벌에 커다란 공을 세웠는지를 대변해주는 이야기이다.
⑥ 변신의 달인 다카기 마사오(박정희)
보통학교 교사에서 만주군 지원 입대...
만주군관학교의 수석졸업과 금시계의 영광...
3등으로 졸업한 일본육사 생활도...
만주에서 관동군으로 복무하며 항일세력을 토벌하던 생활도....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날아가 버린다. 친일파 아니 일본인
다카기 마사오(박정희)는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는 어떤 행동을
하였을까? 패잔병의 낭패감을 맛보며 절망에 빠진 것도 잠시였다.
다카기 마사오(박정희)는 곧바로 변신을 시도한다.
일본군복을 벗어 던지고 민간복으로 같아 입고 만주군의 부대를
탈영하여 피난민으로 가장하여 피난민 대열에 끼어 들어 북경으로
들어가 광복군에 합류한다.
우리는 여기서 유리한 상황에만 빌붙는 기생충 같은 기회주의자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이것뿐만 아니다.
후일 다카기 마사오(박정희)는 좌익계열의 장교가 되지만
여순 사건으로 불리해지자 천명이 넘는 동료들을 밀고하여
죽음으로 몰아 넣고 자기만 살아 남는다.
또한 이후에 다시 우익장교가 된다. 그리고 다시 반공주의자로
변신하여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다 보여주고 기회주의자란 무엇인가를
완벽하게 보여 준 인물이었다.
속성이 이런 인간이니 일본 패망 후 곧 바로 광복군으로 위장하여
합류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을 적극적으로 토벌하던 일본의 진짜군인
다카기 마사오(박정희)가 광복군 흉내를 낸 것이다.
구토가 나는 다카기 마사오(박정희)의 행동이다.
⑦ 일본군인 생활에 대한 다카기 마사오(박정희)의 향수
만주군관학교⇒일본육사⇒관동군으로 이어진 다카기 마사오(박정희)의
복무기간은 5년 정도이다. 다카기 마사오(박정희)의 나이 23세에서
28세까지의 기간이다.
하지만 이 기간동안 다카기 마사오(박정희)는 몸과 마음을
환골탈퇴하여 일본인 일본군인이 되어 정서체계와 사고방식 등
모두 일본놈 그 자체였다. 그 증거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나타난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뒤에도 틈만 나면 주일 대사관을 통하여
입수한 일본 사무라이 영화를 관람하고 일본 검도를 즐기는 것이
다카기 마사오(박정희)의 취미 생활이었다.
또한 당시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씨 등과 청와대에서 술을 마시며
일본천황의 교육칙어를 번갈아 외우는 내기나 시합을 하곤 했다.
다카기 마사오(박정희)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지독한 향수를 엿 볼 수 있다.
그래도 이런 것은 얌전한 행위에 속했다.
다음 글을 읽어 보자 압권이다.
[중앙일보. 1991. 12. 14]
[ ..... 계엄선포 한 달 전쯤인가(1971. 10. 17 계엄이 선포되었다) 박대
통령이 나를 불러요.(여기서 '나'는 강창성 전보안사령관)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대통령은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죽장화에 점퍼차림인데 말채찍을 들고 있었어요.
박대통령은 가끔 이런 복장을 즐기곤 했지요. 만주군 장교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다카기 마사오 중위로 정일권 대위 등과 함께
일본군으로서 말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박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할 때면 그분은 항상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
이런 미친 인간이 18년간 우리의 대통령이었다.
그는 통치 기간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을 인재로 등용하여 나라를
좀먹고 민족정기를 회복할 수 없도록 망쳐 놓았다.
⑧ 다카기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 5.16후 우방 각국에 친선사절을 보냈는데 제일 먼저 보낸 곳은?
답 : 일본
-. 다카기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먼저 방문한 나라는?
답 : 일본
-. 최초로 대외정책을 밝힌 기자회견의 주제는?
답 : 한・일 교섭의 재개.
-. 다카기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의 망언
일본 방문중 동경의 한 요정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여 동석했던
일본인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 나는 정치도, 경제도, 모르는 군인이지만 명치유신 당시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지사들의, 나라를 위한 정열만큼은 잘 알고 있다.
그들 지사와 같은 기분으로 해볼 생각이다.....] 라고 말하였다. 그것도
유창한 일본어로 말이다.
1963년 12월 17일 다카기 마사오(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일본의 자민당 부총재 오노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은 걸작의
말을 한다.
[....박정희 대통령과는 부자 사이 같은 관계로서 아들의 경축일을
보러 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즐겁다..」라고 하였다.
사실 자민당의 보수 세력은 박정희와 군대생활을 같이 했던
일본제국의 동료 및 상관들이었다.
⑨ 다카기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2
일본군국주의 세력의 정신적 유대는 대일 굴욕회담을 (한일협정)
성사시킨다. 여기서 식민지 지배 피해에 대한 거의 모든 권리와
주장을 포기한다. 또한 1973년 서울 지하철 차량부정도입 사건을
저지른다. 일본에서 지하철차량 186량에 대한 매매계약을
체결하였는데 일본에서 3,204만엔하는 가격을 6,350만엔이란
두 배 정도나 비싼 가격으로 계약하였다.
이것은 만주군 출신 선배들의 로비와 정치자금의 리베이트가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3.박정희와 5.16은 우리 민족 아닌 미국이 원한 것이었다.
미국의 입장을 몇 명의 고위층 인사의 말을 빌어 쓰겠습니다.
CIA장관(5.16 당시) 덜러스의 말입니다.
" 내가 재임중에 CIA의 해외활동으로서 가장 성공을 거둔 것은
이 혁명(5.16을 말함)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일부 지도자가 지지하고
있던 장면 내각은 부패하였고 이승만 정권을 타도한 민중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였습니다. 위태로운 순간이었습니다. 만일 미국이
무엇인가를 하지 않았더라면 민중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에 현옥되어
남북통일을 요구하는 폭도들을 지원하였을지도 모릅니다."
라고 하였지요.
간단히 말해서 자기가 CIA 장관으로 있을 때 5.16 군사반란을 조작
하였고 지원하였다는 것이지요. 박정희 정권의 시작이 이러하니
죽는 날까지 예속(신식민지)을 벗어 날 수 없었지요.
물론 지금도 미국의 51번째 주나 다름없는 상황이지만 말입니다.
또한 미국은 5.16 군사반란 후 박정희를 백악관으로 호출하여
5.16에 대한 지지와 경제・군사적 원조를 약속해 줍니다.
물론 박정희는 고마워서 몸 둘 바를 몰랐지요.
다음은 케네디가 밝힌 입장의 요지입니다.
「 한국에 대한 미국의 경제・군사 원조를 더욱 강화 할 것에 언약
했고... 미국정부가 한국에 대한 가능한 모든 경제 원조 및 협력을
계속할 것을 약속 하였다..... 」
다시 말하면
국민들(민중)이 일어나서 민주주의 열기가 고조되고 동강난 민족을
하나로 통일하는 기운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자국의 이익이
소멸되는 걱정으로 군대의 힘으로 정권을 탈취하게 음으로 양으로
박정희를 조정하거나 도와 성공하게 해놓고 우리민족의 역사가
어찌되든 말든 미국에 득이 되고 이용 가치가 있는 박정희를
두둔하고 나선 것이지요.
케네디의 말에서 보듯이 원조 경제의 형태는 더욱 깊어져
새로운 신식민지 체제(예속과 종속을 벗어나지 못하게)를
확고하게 구축하게 됩니다.
민족자본을 배제하고 원조를 통한 경제발전의 모색과
독재정권으로부터 비롯되는 자본시장의 논리를 부정하며
기업과 시장을 국가에서(정부) 적극 개입/통제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경제는 시장경제의 논리 즉
자율경쟁의 적응성을 상실하여 성장하게 되지요.
1990년대부터 미국을 진원지로 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물결속에서 박정희식 경제 성장의 모형은
시험대에 오르게 됩니다. 미국의 절대적 원조와
자본주의 시장 논리를 부정하며 겉모습만 키워온(성장한)
우리의 경제는 10년을 버티지 못하고
IMF에 고개를 숙이고 꼬꾸라지고 맙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오랜 시간동안 경제적 예속으로 인한 결과로
한국 경제는 미국화로 변해버렸습니다.
특히 IMF 이후에는 한국경제의 미국화 현상과 종속화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물론 미국의 종속화는 비단 경제 분야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지요.
우리의 제도와 풍습, 언어와 정신 문화도 주체성을 상실하여 심하게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예속 정권 속에서 배출된 경제관련 학자나 박사는
전체의 70%정도가 미국에서 학위를 받았지요.
그래야 귀국해서 인정받고 먹고 살 것 같았으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자기 혼자는 살았을지 모르나 민족과 국가를
위험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유식함을 바탕으로
미국식 자본주의를 우리 경제 발전 모델로 어설프게 수용하기에
바빴습니다. 미국의 요구대로 겉모습만 키운 경제에 금융시장을
비롯하여 모든 빗장을 풀었지요. 결과가 어떻습니까?
미국의 다우존스, 나스닥 지수가 폭락하자 세계 각국의 증시는 곧바로
악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우리 나라는 증시뿐만 아니라 모든 경제가
휘청거렸습니다. 뉴욕에 있는 나비의 날개 짓이 서울에서는 폭풍이
된다는 카오스 이론이 현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현재의 우리 경제는 " 미국이 재채기를 하면 독감에 걸려 심하게 않아
눕는 체질 "이 되어 버렸습니다. 미국 경제가 침체에 빠지며 우리 경제
는 그 이상으로 위기를 맞이할 것입니다.
이 모든 문제점의 뿌리가 박정희 정권에 있다고 봅니다.
미국의 귀염둥이 였던 박정희는 이용 가치가 끝나 통쾌하게(?)
그들의(미국) 음모에 의해 죽어버리게 됩니다.
이것을 두고 혹자들은 박정희가 민족주의나 자주적 국가를
실현하려다 미국의 손에 아깝게 돌아가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불성설입니다. 국민들(민중)의 저항이 집권 때부터
계속되어 왔던 바 민중들의 역량이 축척 되었고
급기야 부마항쟁을 유발시키고 전국적으로 독재 타도의 열기가
노도처럼 퍼져가고 있을 때 미국은 이용가치가 끝난 박정희가
고분한 맛이 없어지니 잘 되었구나 하였지요.
그리고 민중들의 저항에 위험을 느끼고 두려웠던 나머지
박정희로는 더 이상 안된다는 것을 깨닫고 그를 버리게 됩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선 우리의 영웅인 박장군쯤은 식은 죽 먹기
였습니다. 박정희는 예속자본주의 경제의 뿌리를 심어준 인물입니다.
당시의 존슨 부통령은 군사정권을 매우 찬양하였고..
국무장관 러스크는
" 미국은 많은 미군과 더불어 당신들의 편에 서 있다. "고 하였으며
주한미국대사 버커는
" 군사 독재는 국내의 혼란을 방지하여 파벌 싸움으로부터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다. " 라고 하였고
주한 미군 사령관 밴플리트는
" 군사 쿠테타는 한국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변이었다. " 라고
열광적으로 찬사를 하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