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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 열--
나는 어렵고 힘든
삶의 고비를 넘길 때마다
속으로 중얼거리곤 했다.
나는 지금 내 전기(傳記)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쓰고 있다……
= Dear readers..
李文烈 은 우리 근대소설문학의 한 독특한 체험이다. 그리 길지 않은 그의 문단적 연륜을 엶
두에 둘 때, 그가 보여준 성과는 그것만으로도 경탄을 넘어설 뿐 아니라 오히려 한국문학의 미
래에 대한 순정한 두려움으로 우리를 기대케 한다.
흔히 낭만주의 라고 불려지는 그의 문학에 대한 단언은 그러므로 우리가 李文烈 에게 얼마
나 인색했는지를 스스로 드러내는 작은 찬사에 불과했다.
이 책은 그의 방대한 문학세계의 핵심적인 부분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고 싶은 욕구에서 의도적
으로 만들게 된 첫 번째 책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의 문학을 이루게 된 배경과 주변적 관심
에 초점을 맞추고자 했다.
그의 젊은 시절은 한 곳에 3년을 머물며 산 적이 없다. 그것은 그의 문학에 무엇이었을까. 땅
위의 것에, 풍속과 윤리에 우리 사회 모두가 몰두해 있을 때 그는 어째서 신(新)을 발언했을까.
우리가 자유에 대한 혹은 근대사에 대한 정공법적 접근에 시달릴 때 그가 보여준 방법론적 모
색은 우리 문학에 무엇을 주었을까.
추측컨대 그의 문학과 삶은, 우리와 함께 보다 완전한 삶에 이르고자 희망한, 더불어 길을 떠
나자고 권유한 열정어린 목소리로 보인다.
이 책은 이문열문학의 함축이고자 노력하면서 편집된 책이다. 잠언·문학적 반자전(半自傳)·
세계를 보는 눈 등 육성을 중심으로 그의 세계관에 다가가고자 노력했다.
작가는 이 책을 위해 원고를 찾고, 빛바랜 메모지를 뒤적이면서도 굳이 시기의 빠름을 걱정했
지만, 우리로서는 오히려 때늦은 느낌을 갖는다.
원고의 마지막 교정을 끝낸 다음 책의 제목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것은 삶에 대한 깊은
『사색』이었다.
1991년 7월....
제1부
하지만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
젊은 그대들에게 띄우는 편지
…한 벌의 고급 블라우스를 사들이는 것일지라도, 그 한 벌 값에 해당하는 임금을 벌기 위해 몇
날 혹은 몇 달이고 비위생적인 작업장에서 일하고 있는 자매들을 떠올릴 수 없다면 그것은 단순
한 둔감 이상의 이기(利己)이며, 설령 그대들이 이웃에게 곧바로 일용할 양식을 내어주고 있더라
도 진정한 애정과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정신적인 허영이나 사치, 다시 말해 이기의 한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이름 모를 누이여
생각하고, 쓰는 일에 꽤 오랜 기간과 열정과 성의를 바쳐왔지만, 언제나 이런 종류의 글은 내게
곤혹과 피로를 준다. 아직 내 나이는 삶의 참뜻을 속속들이 맛보았다고 말하기에는 충분하지 못
하여 내 체험과 사려도 남에게 교훈을 줄 만큼은 되지 못하고, 또 해박한 지식이나 심오한 학설
을 전할 만큼 고구(考究)에 잠겨 본 바도 없다. 더군다나 그런 것들이라면 나보다 몇배 훌륭한
스승들이며 위대한 저술들이 있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몇 달 전에 나는 그 어떤 흥취에선지 그대들
에게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청탁을 받아들인 바 있다. 그 뒤 나는 그 성급한 수
락을 깊이 후회하면서도 이 글의 형식과 내용에 대해 여러 가지로 궁리해 보았다. 그 결과 생각
해 낸 것이 바로, 이름도 모르고 만난 적도 없는 그대들을 모두 손 아래 누이로 보고, 이 허심탄
회한, 그러나 자칫 지루하고 막연할지도 모르는 편지를 내는 일이었다.
약속은 이행되어야 한다.
이름 모를 누이여.
나는 오래 전부터 그대들 사이에 세상에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없으며, 영원이나 절대나 완
성은 물론, 진실이며 아름다움조차도 필경엔 주관적인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널리 받아
들여지고 있음을 우려해 왔다. 우리 시대의 한 특징인 가치관의 혼란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예로
서 짐작컨대 그것은 가치의 결핍에서가 아니라 지나친 풍요에서 왔다.
돌이켜 보면, 우리에게도 모든 것이 단순하고 자명했던 시절이 있었다. 어떤 시대에는 신(新)이
절대적인 가치였고, 완성이었고, 영원이었다. 우리는 아무런 선택의 필요 없이도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있었고, 우리의 삶도 단순히 그것에 맞게 채워가면 그 뿐이었다. 또 어떤 시대에는 국가가
신(新)을 대신하기도 했고, 다르게는 이성이나 특정한 이념이 절대의 가치로 군림한 적도 있었
다.
그런데 이 시대에 들어서면서 갑작스런 가치의 폭발이 있었다. 수많은 가치가 저마다의 주장을
가지고 똑같이 큰 목소리로 우리에게 승인을 요구했다. 그중 어떤 것은 전시대에는 다른 강력한
가치에 종속돼 있던 것이기도 하고 어떤 것은 부인되어 있기도 했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지금 시끄럽
게 자기를 주장하는 그 모든 가치들도 새로이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자신만만하고 힘있던, 그러나 그만큼 오류와 편견에 빠져있던 판관(判官)일 뿐이다. 평판(平板)
위에 올려진 여러 가치 앞에서 우리 스스로 선택의 주인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물론 선택은 어렵다. 더구나 우리의 삶을 인도할 중요한 것이, 이토록 다양하게 펼쳐져 있다는
것은 그 선택을 단순한 혼란 이상의 고통으로 만든다. 그러나 선택 혼란이나 고통이 가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감히 그대들에게 말한다. 세상에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
도 있으며, 진실과 아름다움은 물론 영원도, 절대도, 완성도, 존재한다고. 그리고 또한 말한다.
그것이 존재한다고 믿는 자는 반드시 그것을 얻게 되리라고.
이름 모를 누이여.
이 또한 앞서의 단정을 부연하는 것이 될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대들이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하
고, 자신의 두 발로 서기를 포기한 것 같은 의구를 버릴 수가 없다. 그대들이 언제나 기다리는
것은 타자(他者)로부터의 신호 이며, 찾는 것은 완제품과 같은 결정이다. 그러나 불행이도 오는
것은 대부분 엉터리 신호이거나 과대 포장된 불량품이었다. 나는 그대들이 갖가지 상품적인 이데
올로기나 진실의 탈을 쓴 독선에 분별없이 빠져드는 것을 보았다. 화려한 언어의 탈을 벗기면 한
줌의 감상과 동물적인 육욕밖에 눈에 띄지 않는 책들을 즐겨 취하는 것을 보았고, 낡은 사상들을
자기의 것인 양 변조해서 아무런 동정이나 연민도 없이 단순히 신기하다는 이유만으로 사회 밑바
닥의 참혹한 얘기나 즐기고, 더러는 자신의 부패한 애정편력이나, 깊이도 성실성도 다같이 의심
되는 종교적 체험을 과장스레 떠벌인 장르 불명의 책을 끼고 다니는 것도 보았다. 진정으로 유익
한 타자로부터의 신호 를 받아들이기 위해 바쳐야 할 노력과 성의를 아낀 탓으로, 까닭없이 가
슴 섬뜩해지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대들이 노력과 성의를 아끼지 않는다 해도 결국 타자로부터 오는 것은 타자의 것일 뿐
이다. 상품과는 달라서 모든 정신 활동의 소산에는 그대로 우리의 삶에 적용시킬 수 있는 완제품
은 없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기껏 양질의 재료이며, 그것들 자신의 사유로 가공된 후에야
삶을 위해 어떤 빛을 발할 수 있다. 그리고 그대들을 지칭하는 지성인이란 말은 보석이나 사치한
의상처럼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 바로 그런 양질의 재료를 선별하는 안목과 그 재료를 자신의
삶에 유익한 어떤 것으로 가공하는 능력을 남보다 좀더 연마한 사람들이란 뜻이다.
이름 모를 누이여.
또 나는 그대들이 선악이라든가 도덕 혹은 윤리 같은 말들에 점점 둔감해지는 것 같은 징후에
씁쓸해 한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는 강 저편 언덕에서는 죄악이 되는 일이 이편 언덕에서는 자랑
이 되는 수가 있고, 재난은 선악을 불문하고 우리를 찾아들며, 옳음과 곧음이 마침내는 이기게
되리라는 믿음은 어디서나 의심받고 있지만, 나는 그대들에게서까지 그같은 징후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
생각하면 인류의 출발을 백만년 전으로 잡는다해도 병들어 죽거나 늙어 죽은 동료의 시체를 뜯
어 먹거나 들판에 버리지 않고 정중히 묻어주는 데 무려 구십 칠만 년이 걸렸을 만큼 우리들 도
덕감의 진보는 느렸다. 그러나 나는 믿고 싶다. 불이나 언어나 도구의 사용 못지 않게 인류의 오
늘날을 가져온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느린 대로 그런 도덕감의 진보일 것이라고, 그리고 어떤
시대가 특별히 불행했던 것은 그 시대의 도덕감이 마비된 탓이었지, 그 시대가 불행해서 인류의
도덕감이 마비되었던 것은 아니라고.
이름 모를 누이여.
그리하여 나는 점차 그대들의 정신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워가는 거대한 이기(利己)를 확인하게
되면 우울해지기까지 한다. 사실 이기가 합리 혹은 개성 등의 이름으로 자신을 미화한지는 오래
되었고, 최근에 이르러서는 더욱 찬란한 구실과 설득력있는 변명을 장만하여 우리 정신을 유혹하
고 있다. 그대들보다 더욱 성숙되고 지혜로워야 할 사람들조차 거기에 감염되어, 주기보다는 받
기에, 봉사하기보다는 봉사 받는 데에 더 큰 관심과 기대를 나타내는 이런 시대에, 유독 그대들
에게만 그런 이익이 많고 편한 사고방식을 포기하도록 바라는 것은 무리일는지도 모른다. 또 그
대들 중 대부분은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지적에 발끈할 것이고, 더러는 적극적으로 어떤 봉사활동
에 참여하고 있음을 반증으로 내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다만 합리적이고 개성적으로 행동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도 대개는 다만 이기적인 행동을 하고 있었을 뿐이며, 때로는 봉사하고 헌신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을 때조차도 그것은 결국 자신을 위해 행동하고 있었음에 지나지 않은 경우도 있
다는 것을. 예를 들어, 양친의 경제력이 허용된 범위 안에서 한 벌의 고급 블라우스를 사들이는
것일지라도, 그 한 벌 값에 해당하는 임금을 벌기 위해 몇 날 혹은 몇 달이고 비위생적인 작업장
에서 일하고 있는 자매들을 떠올릴 수 없다면 그것은 단순한 둔감 이상의 이기이며, 설령 그대들
이 이웃에게 곧바로 일용할 양식을 내어주고 있더라도 진정한 애정과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면 그
것은 정신적인 허영이나 사치, 다시 말해 이기(利己)의 한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이름 모를 누이여.
그 다음 도덕감의 마비와 관련 되어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그대들에게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성(性)에 대한 그릇된 해설과 오도(誤導)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성(性)은 자연의 일부
이다. 그러므로 자유로워야 한다 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한다. 성적인 자유란 곧 개방이다 라고.
그러나 조금만 유의해 살피면 거기에는 논리 자체가 잘 맞아떨어지지 않음을 쉽게 볼 수 있다.
첫째로 자연과 자유라는 개념의 관련이다. 도대체 자연은 자유로와야 한다든가 억제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은 어떻게 나온 거일까? 내가 보기에 인간의 문화는 언제나 자연을 억제하고 조절하
는 가운데에게 이루어졌고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여러 가지 혜택 또한 대부분 억제되고 조
절된 자연에서 얻어졌다. 그런데도 다른 모든 것은 그대로 누리려 하면서 유독 성(性)만은 저 거
칠고 무분별한 자연 상태로 돌아가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둘째로는 자유롸 개방의 관련이다. 자
유라는 것과 즉흥적이고 무원칙한 개방이라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필연적인 연결이 없다. 그런데
도 그것이 설득력을 가지고 이 사회에 유포되어 있음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지나친 단순화의 흠
은 있지만, 그것은 그것을 주장함으로써 이득을 얻는 사람에 의해 조작된 논리가 아닐까 하는 의
심이 든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일까? 이 역시 표면적인 관찰일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남자일 것
이라는 의심은 버릴 수 없다. 어떤 지역, 어떤 문화 형태에서이건 성적인 문제에 관한 한 아직도
남자는 유리한 입장에 있다. 특히 우리처럼 여전히 전통적 사회의 인습과 윤리관이 강하게 남아
있는 곳에서는 십중팔구 피해를 입는 쪽은 여자가 되고 만다. 일견 모든 것이 허용된 것 같은 서
구에 있어서도 결과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인형의 집을 떠난 노라 가 행복해졌다는 뒷소식을
듣지 못했고, 채터리 부인 이나 더 많은 성적인 투쟁으로 명설을 드날린 여인들도 그로 인해 행
복을 쟁취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만약 그곳에서 여성의 지위가 이곳보다 높아졌다면 그것은 다른 방면에서의 성과이지 성(性)의
해방에서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양보할 기분이 없다. 그대들이 진심으로 섬뜩하게 상기
해 보아야 할 일이다.
이름 모를 누이여.
그 밖에 나는 또 그대들이 지나치게 물질적이고 향락적인 문화에 쏠려들고 있음을 근심한다. 지
난 이십년간 쉴새없이 잘 살아보자 라는 구호로 그대들의 정신을 길러왔고, 그것이 어느 정도
성취된 후에는 소비의 미덕만을 과장스레 떠벌여온 기성세대가 일차적인 책임을 져야 할 것이지
만, 그렇다고 그대들까지 변명되지는 않는다. 좀 구식의 비유일는지는 몰라도 화려한 의상과 찬
란한 보석은 언젠가 땅위에 남겨두고 가야하고, 편안하고 잘 먹여 가꾼 육신도 끝내는 흙 속의
벌레들에게 내주어야 한다. 어떤 이는 한 번 뿐인 삶을 내세워 스스로를 변명하지만, 한 번 뿐인
삶이기에 우리는 더욱 가치 있는 일에 써야하지 않겠는가?
이름 모를 누이여.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 지나치게 노성(老成)한 목소리로 이야기하였을는지 모른다. 그것도 그대
들 중 극소수의 예를 마치 그대들 모두가 빠져 있는 끔찍한 잘못이나 되는 것처럼 은근히 나무라
가며, 거기다가 아직은 이미 한 얘기의 곱절이나 더 할 얘기가 남아있다면 그대들 대부분은 아마
도 나에게 분개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내게도 변명은 있다. 그대들의 아름다움과 지혜로움과 상냥함에 대해 감탄하는 일은 나
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대들을 위해서 피했다. 바보만이 칭찬을 나무람보다 기뻐할 것이기 때문이
다. 또 나는 표현에 있어서 지나치게 엄격하고 강요적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내 말의 권위를 위
해서가 아니라, 그대들이 이 시대, 이 사회에 가치 있는 존재이기에 언제나 기억해야 할 의무를
상기시키기 위해서였다.
사람은 저마다의 짐이 가장 무겁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그대들이 이 사회에서 혜택받은 계층
에 속한다는 것은 그것을 누릴 권리가 아니라, 바르게 써야 할 의무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나는 다만 그걸 상기시키기 위해 필요이상 낮을 찌푸리고 목소리를 굳게 하였을 뿐이며,
그대들에 대한 애정과 기대는 이 사회 누구보다도 못지않다.
함께 걸어 가야 할 당신에게
부정(否定)과 물음의 사도(使徒)
반도의 남쪽 끝 어디에선가 이미 육 년째 문학수업에만 전념하고 있다는 당신은 오늘 물음으로
가득찬 편지를 내게 보내 오셨습니다. 물론 그 물음들은 대부분이 수많은 문학이론서에서 여러
가지 말과 논리로 답해져 있고, 또 그렇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도 아직 나는 어떤 결론적인 말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물음은 진지하였고, 때로는 당신이 빠져 있
는 내면의 격렬한 싸움까지 희미한 열기로 전하여 와, 답장을 거부할 어떠한 변명도 떠오르지 않
기에 외람된 줄 알면서도 이 글을 씁니다. 이미 한 봉우리에 도당한 자 로서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길 위에 선 자 로서 그리고 한 권위의 목소리로서가 아니라 동도(同道)간의 사적(私的)인
토로로서, 감히 당신의 물음에 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글을 통해 당신에게 전해지는
것이 기껏 나의 자기부정(自己否定)과도 흡사한 아픔뿐이며, 당신이 얻을 수 있는 것도 어떤 해
결이 아니라 새로운 물음일 뿐이더라도 너무 나를 비난하려 들지는 마십시오. 어쩌면 그 부정(否
定)과 물음만이 보다 우리에게 가까운 진실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앙드레 말로가 그의 자
신에 찬 예술 철학인 「침묵의 소리」를 내놓았을 때 가장 신중한 평론가들까지도 말로는 이미
끝났다 라고 했다는 말을 언제나 섬뜩하게 기억하곤 합니다.
오늘 내가 특히 답하고자 하는 것은 당신이 던진 몇 가지 물음 가운데서도 지난 오 년 동안 이
미 여러 곳에서 받아왔지만 내가 의식적으로 대답을 미뤄 온 물음입니다. 보다 젊던 날에 마땅히
치렀어야 할 통과의례(通過儀禮) 가운데 하나였는데도 어쩌다 지나쳐 와 버린 탓에 이미 한 작가
로 불리게 된 지금에 와서야 원래보다 몇 배나 더 무거운 셈을 치르고 넘어가야 할 물음―― 왜
쓰는가? 였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그 기본적인 물음, 수천 수백의 책과 수많은 천재들이 이 답변하고 해명한, 그래
서 오히려 평범한 그 물음에 내가 이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이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
나 솔직히 말해 그 물음은 내 습작시대의 경험에서는 없던 일이고 그 때문에 내게는 중요한 의미
를 띠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모든 것이 너무나 자명해 의문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자명하다고 말한 것은 쓰는 일 에 대한 긍정적인 뜻은 아닙니다. 어린 내
정신을 지배했고 지금도 이따금씩 묵은 상처처럼 어떤 아픔을 일으키는 것은 쓴다는 행위에 대한
부끄러움과 죄의식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도 문학의 자기 변호와 자기 미화에 익숙해 있어 한 기
성작가의 입에서 나오는 이 부끄러움과 죄의식이란 말은 자칫 기이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만, 나는 조금도 감정의 과장 없이 내 진실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반복적인 교육과 환경의 산물임을 우리는 믿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자신
의 순수한 사유에 의해서 형성하였다고 믿는 관념 또는 그것들의 집적으로 이루어진 어떤 대단한
이상도 가만히 살펴보면 그 뿌리는 지난 시대 어떤 천재의 말과 글 속에 있고 그 잎과 줄기는 누
군가에 의해 되풀이된 강조와 우리가 성장한 사회의 무형적인 압력에 의해 자라난 것을 쉽게 추
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내가 받아온 교육과 자라난 환경은 쓴다는 일――특
히 현대적인 의미의 문학――에 그리 우호적인 것은 못되었습니다. 일찍부터 고향을 떠나 낯선
도시들을 떠돌며 살았지만, 정신적인 교육환경은 전통적이고 소박한 유가(儒家)의 사상이었기 때
문입니다.
유가에 대한 이해는 물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 내가 고향을 통해 습득한 것은 언
제나 공명(功名)이나 천하경륜(天下經綸)이란 말과 관련을 가진 것이고, 거기에 대해서는 공자
자신도 선비가 덕을 쌓고 학문을 닦는 것은 상인이 좋은 구슬을 가지고 팔리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 고 한 말이나 무도한 반란자라도 자신의 경륜을 펴게 해 주면 달려가 도우려고 한 것으로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자연히 도덕이나 문학은 수단적인 위치로 전락하고 예
(藝)나 기(技)는 다시 그 하위에 놓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다시 말해, 문학이 학문이든 예술
이든 그 자체가 완성된 가치 형태를 띨 수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장지학(詞章之學)이란 기껏 선비의 장식물로 여겨지거나 배움의 시작인 소학(小學)에서 범문
사(凡文事) 일향호착 개탈지(一向好着 皆奪志) 라 하여 장부가 문사(文事)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
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문단의 말석에라도 작가로서 이름을 얹을 수 있게 되었는가――나에 대한 이런
의문이 이제 당신에게 일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거기에 대한 대답이야말로 처음 물
음――왜 쓰는가――의 진정한 대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언젠가 나는 어떤 대담에서 거기에 대
답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작가가 된 것이 아니라 되어져 버렸다고, 오히려 내가 작가가 되기
직전까지 도망치려고 애썼던 것은 바로 그 불길한 운명――쓰며 살게 되리라는 운명에서였다고,
이십대 중반까지 사법시험에 매달려 있었다거나 그 뒤로 전전한 여러 가지 직업으로 보면 얼핏
온당한 대답 같았지만 실은 아니었습니다. 그 부끄러움과 죄의식을 뛰어넘어, 어쩌면 내가 선택
한 가치가 보다 고급한 가치의 한 종속물일지도 모른다는 의혹과 쓰라림에도 불구하고 내가 결국
은 쓴다는 것을 나의 일로 택한 데에는 그만한 동기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도 쓸쓸하고 괴로운 것은 그 동기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세였습니다.
나는 그것이 뒷날의 자기방어를 위한 기본장비라는 것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또 경우에 따라
서는 장차 내가 구축할 세계의 질과 깊이를 더할 수 있는 하나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는 데에
거의 유의함이 없이, 한 번의 탈출에 실패하고 다시 문학으로 돌아오게 될 때마다 참회하는 기분
으로 문학 자체의 연마에만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내가 받아온 교육과 자라온 환경에 대
한 반발이었겠지만, 실로 무모한 열정이었습니다. 내 영혼을 물어뜯는 부끄러움과 죄의식만큼이
나 맹렬하게 나는 세상의 지식과 힘있고 아름다운 문장과 깊이 있는 정신의 함양에 탐욕을 부렸
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그 교육과 환경의 강요에 떠밀리어 쓴다는 일을 버리게 될 때는
또 온갖 극렬한 부인(否認)과 반이론(反理論)으로 새로운 가치를 향해 떠나게 되어 오히려 갈수
록 무성해지는 것은 쓴다는 일에 대한 부정과 반이론뿐이었습니다. 내가 어디선가 쓴다는 것을
두고 불길한 운명 또는 천형(天刑)이란 말을 한 것은 아마도 그런 기묘한 애증(愛憎)을 두고 한
말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왜 쓰는가에 대한 추상적인 답변이나 회피로 어물어물 넘겨버릴 수 없는
때에 이른 것 같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주관적인 체험이나 그 사적(私的) 토로에 불과하더라도
이제는 내가 왜 쓰는가에 대해 구체적인 이유를 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먼저 내가 찾
아낸 것은 소극적 보상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위로 나아가도록 설득하는 보상의 종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적극적
인 보상으로서의 어떤 가치 획득이고 다른 하나는 소극적인 보상으로서의 자기 유기입니다. 쓴다
는 행위에 있어서도 예상되는 보상의 종류는 그 둘 가운데 하나일 것이며 일반적으로 문학의 옹
호자들이 즐겨 취하는 입장은 적극적인 보상의 존재를 입증하는 쪽입니다. 예컨대 아름다움이나
참됨, 옳음, 성스러움 이런 것들 중의 하나 또는 그 이상을 쓴다는 일일 통해 구현할 수 있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그런데――아마 이해력의 결핍 또는 지지성의 결여 탓이겠지만――나는 그들의 논리를 빌어 남
을 설득할 수는 있어도 자신을 설득하는 데는 늘 실패해 왔습니다. 한 직업작가로 들어앉은 요즈
음에 느끼듯 사회적·경제적 욕구를 가진 한 인간으로서 그 방면의 현실적인 보상이라면 차라리
낯을 붉혀 가면서라도 시인할지언정 정신적인 보상이라면 나로서는 아무래도 소극적인 입장을 지
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습작시대는 물론 지금도 나의 쓰는 행위가 주로 의지하는
바는 그것이 무엇을 내게 주기 때문이 아니라 내 존재에 필요한 최소한을 지키기 위해서인 것입
니다. 더욱 즐겁기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덜 괴롭기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문학을 낙관을 위
한 낙관만으로는 걸널 수 없는 내 비관주의의 바다에 드물게 남겨진, 그리고 어쩌다 내가 가장
가까워 쉽게 헤어가게 된 섬이며, 쓴다는 것은 바로 거기에 절망적으로 매달리는 행위일 뿐입니
다. 좀 과장스럽긴 하지만 나는 때로 이런 자문(自問)에 빠질 때조차 있습니다. 곧 죽게 되리라
는 불안과 이제 더는 쓸 수 없게 되리라는 불안 가운데서 어느 쪽이 내게 더 두려운 것일까하고.
하지만 이런 주관적인 진술만으로는 아직 당신의 물음에 대한 충분한 대답은 못될 것입니다. 우
리는 모두가 개별적(個別的)·현재적(現在的) 존재인 동시에 사회적·역사적 존재이기도 한 때문
입니다. 왜 쓰는가에 대해 답변도 그런 우리 존재의 여러 측면에 대한 고려 없이는 필경 부분적
인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고백한 대로, 지난 날 나는 쓴다는 일과 사회적·역사적 상황과의 관련에 대해서
는 그 일의 무용(無用)함과 허망됨에 대한 신랄한 반이론(反理論)만 편의적으로 이용했을 뿐, 가
치 승인 또는 자기 옹호에는 소홀했습니다. 이를테면, 세상에는 보다 근원적이고 실제적인 것들
의 결핍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많은데 문학적인 생산은 그런 결핍과는 거의 무관하다는 점, 이 땅
위에서 수없이 벌어지는 잔혹행위와 불의에 대해서도 사실상 무력하며, 그리하여 일쑤 당대의 사
회에서는 강자(强者)의 장식과 약자(弱者)의 아편이고 역사의 무대에서는 언제나 어릿광대나 조
연에 불과하다는 점 따위 쓴다는 일의 부정에는 구체적이면서도 긍정에는 언제나 본능적이고 막
연하고 아무런 근거도 제시 못하는 신념으로만 대했던 것입니다. 굳이 나를 변명하자면 그 시절
의 내게는 그만큼 쓴다는 일에 대한 개별적·주관적 가치 승인의 문제가 시급했다는 정도일까요.
따라서 이제 내가 얘기하려는 몇 가지는 한 기성작가가 된 후에 자기 승인 또는 자기 방어의 필
요에 몰려 찾아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미리 말해두고 싶습니다.
역사적·사회적 존재로서의 우리가 왜 쓰는가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그 대답을
바로 그 역사와 사회에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남겨진 여러 제도와 고안(考案)을 역사와 각 시대의 사회가 필요에 의해 그 존
재를 승인한 것으로 가정하면, 문학의 자기승인이나 자기 옹호의 노력은 새삼스럽고 자칫 불필요
하게까지 느껴집니다. 문학은 우리가 이 시대에 들어와 갑자기 발명하거나 생각해낸 것이 아니며
이미 수천년 한 제도 또는 고안으로 역사와 사회로부터 가치를 승인받아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결은 비록 손쉽기는 하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깊이 살피면 다같
이 문학이라고 불리는 것일지라도 시대와 사회 상황에 따라서 그 형태와 역할을 달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서도 시대와 사회 상황을 관통하는 어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요소만을 강조하는 입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존재는 유한하고 현재적(現在的),
때로는 본질적인 요소까지도 우리가 던져진 시대와 상황에 제약됩니다. 따라서 문학에 있어서도
모든 사회와 역사를 초월하는 어떤 영원보편성의 추구라는 지난 시대의 환상적인 논리에 무리하
게 매달리는 쪽보다는, 역사와 사회라는 말을 우리시대와 상황이라는 말로 축소하여 쓴다는 일
과 연관시키는 쪽이 온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를 파악하는 입장은 대개 두 가지의 상반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습니
다. 그 하나는 분화(分化)의 과정이며, 다른 하나는 통합의 과정으로, 한 학문 내부에서 볼 때는
이른바 미시적(微視的)이라는 것과 거시적(巨視的)이라는 것에 상응될 수 있는 방향입니다.
우리 시대의 특징을 분화(分化)로 보는 입장은 서구의 산업 사회와 연관을 맺고 있는 듯 보입니
다. 그 한 예로 리그즈(Riggs)가 사회의 발전 모형을 융합사회와 프리즘적 사회 그리고 분화사회
의 삼단계로 나누고, 그 가장 최종단계인 분화사회를 서구의 산업사회에 대응시킨 것을 들 수 있
겠습니다. 물론 그가 거기서 설명하고자 한 것은 현대사회의 기능 분화 또는 직능인(職能人)에
관한 것일 테지만 나는 그 모형이 사회의 가치일반에도 통용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즉 전통
적인 사회에서는 여러 가치(價値)들이 융합된 형태로 존재하지만 사회의 발전과 아울러 모든 가
치는 자신의 영역을 가지고 분화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가치들의 존재 방식도 융합사회에서는
수직(垂直)·상하(上下)의 구조로 소수에게 집중되어 있지만 분화사회에서는 수평(水平)·대등
(對等)으로 수많은 엘리트군(群)에게 분산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가치 융합의 극단한 예는
정치적 군장(軍長)과 종교적 수장(首長)을 겸하고 있는 고대의 군주로서 사회의 여러 가치(價値)
는 그에게 독점또는 종속되어 있는 것이고, 가치 분화의 손쉬운 예로는 쪼개진 각 분야의 전문가
애 불과한 현대의 영웅들로서 그들이 수많은 다른 영웅들과 나누어 갖고 있는 것은 일단 평등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사회의 여러 가치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걸 들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문학을 사회의 여러 가치 가운데 하나로 보고 우리 시대를 분화의 시대 또는 그 과정에
있는 시대로 파악한다면 적어도 두 가지는 명백해집니다. 그 하나는 은연중에 뿌리깊게 자란 우
월감의 포기,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선택한 가치가 지상(至上)일 것이라는 신성한 환상이나 의미
화(意味化)의 포기입니다. 지난 날의 수많은 문학적 영웅들이 때로는 수난과도 같은 이 길을 가
면서도 쉽게 죄절되거나 체념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거기서 온 어떤 숭고한 사명감이었
음을 상기할 때, 또 그것의 포기로 인해 우리가 문학한다는 것은 시내버스를 몰거나 거리에 노점
을 열고 나앉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현대 사회의 수많은 기능 가운데 하나에 불과함을 시인해야
하는 것으로그 우월감의 포기는 분명 한 커다란 쓰라림이 될 것입니다. 입으로는 서슴없이 자신
이 천민(賤民)임을 자처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노동도 자신이 쓰는 행위보다는 더 고귀하
다고 단언하는 이들의 경우에도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런 종류의 우월감에서 온 자부심 때문일 것이라는 의심을 나는 버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현대
와 같은 분화사회(分化社會)에서 인정되는 가치 상호간의 대등(對等)과 독립은 또한 우리에게 위
로와 격려의 역할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선택한 가치보다 하위(下位)의 가치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위(上位) 가치도 인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그리하여 이제는 우리의 쓰는
행위가 다른 무엇에 종속되거나 바쳐질 필요가 없으며 우리 자체가 목적이라는 것은 긴 문학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 분명 귀한 위로와 격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나는 우리가 쓴다는 일이
끊임없이 무엇엔가에 바쳐져 왔으며 문학은 다른 상위 가치의 시녀로 봉사해 온 듯한 혐의를 아
직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대(古代)의 신(神)들이 힘을 가졌던 시절에는 신화(神話)
와 전설에 바쳐졌으며, 영웅들의 시대에는 그들의 무용담(武勇談)에, 군주들의 시대에는 궁정문
학으로, 귀족들의 시대에는 귀족문학으로, 그리고 부르조아의 발흥과 더불어는 그들 부르조아에
게 바쳐졌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견해입니다. 모두 그 시대의 가장 강한 자에게 바쳐졌다는 뜻으
로――나의 그런 생각은 프롤레타리아문학이나 민중문학에고 변함없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프롤
레타리아는 이미 지구 반쪽을 지배하는 강자였고, 민중도 벌써 형식상으로는 강자로 간주되거나
적어도 잠재적인 강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강자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이, 그리
고 정치나 종교 같은 어떤 폭력적인 힘을 지닌 다른 인접가치의 간섭 없이 자기 목적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는 그것이 한 이상이라도 바람직하지 않습니까? 거기다가 서구사회의 일부는 그런
발전을 이룩했고, 우리도 그런 사회를 지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며 결국은 도달하게 되리라는 전망
이 있다면 우리는 실로 전시대의 사람들이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위로와 격려를 받고 있다고 해
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이 경우, 즉 우리의 역사적·시대적 상황을 분화(分化)나 그 과정으로 파악할 때, 왜 쓰는가의
해답도 어느 정도는 구체적인 범위를 가지게 됩니다. 자기 목적의 추구라는 본질적인 특성에 의
지해 이미 있어온 몇가지 논의를 비는 것만으로도 해답의 상당한 부분이 얻어질 수 있기 때문입
니다. 경향문학 또는 목적문학에 상반되는 뜻으로서의 순수문학이나, 예술지상주의, 유미주의(唯
美主義)의 논의들이 바로 우리가 해답의 일부를 빌어올 수 있는 예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
서는 어떤 시대상황이 우리에게 쓰는 것 이외의 행동을 요구한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문학
의 자기 목적 추구를 방해하는 요소의 제거나, 보다 용이하게 자기 목적을 추구할 수 있는 환경
으로서의 개선을 위한 것에 그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를 이해하는 태도 가운데는 앞서 말한 분화(分化)와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쪽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회 분화는 결코 발전으로 파악될 수는 없으며, 이상(理想)일 수는 더욱
없고, 다만 공해와 인간소외 밖에 선사하지 못한 산업사회가 자기 보존을 위해 이 사회에 강요한
하나의 모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그리하여 필요한 것은 오히려 통합이
며, 하나의 상위(上位)가치――예컨대 자유, 평등, 정의 따위나 소박하게 표현하면 인간의 행복
을 위한 조건――를 향한 공동의 봉사가 이 시대의 요청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논의에 따르면, 원래 사회의 여러 가치로부터 독립한 가치란 존재할 수도 없고, 어떤 분야
도 고유한 자기 목적을 인정받을 수는 없게 됩니다. 쓴다는 말도 예외는 아니어서, 만약 시대상
황의 요구가 있으면 아름다움에 대한 사적(私的)인 욕구나 본능적인 유희 충동 또는 당장 그 규
명이나 이해가 시급하지도 않고, 뚜렷한 결말도 지을 수가 없는 사변적인 문제에 빠져드는 경향
따위는 당연히 절제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가능해집니다. 아니 그 이상 작가가 그런 일에 빠져드
는 것은 개어 있어야 할 대중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잠들게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아편 밀매 행위
이며, 하나의 정신적인 수음(手淫)이고, 이웃과 형제의 삶을 위해 방조하는 죄악이라고 말할 수
도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종류의 주장은 우리 시대 이 사회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통합의 가장 체계적인 모형은 백여 년 전 마르크스 저작들에게서 잘 볼 수가 있
고, 지금도 그의 이론에 따라 혁명을 이룩한 나라에서는 비교적 충실하게 실천되고 있는 것입니
다. 문학도 마찬가지, 비록 작가의 의식적인 선택이라기 보다는 관제(官製)에 가까운 것이지만,
사회의 공동선(共同善)에 대한 봉사라는 면에서 통합된 가치체계에 종속된 하위(下位) 가치에 불
과한 것 같은 인상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그밖에 제3세계라고 불리는 일련의 불운한 국가
군(國家群)에서도 이러한 종류의 논의는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비록
그들의 지향이나 이상은 사회주의 국가들과 다를지라도 문학이 어떤 상위 가치(上位價値) 또는
공동선(共同善)을 향한 노력으로 파악되고 있는 데는 크게 다른 것 같지 않은 느낌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입장을 취하게 되면 왜 쓰는가에 대한 대답은 저절로 명료해집니다. 공동선의 실
현을 위한 신성한 노력으로 정의되거나, 굳이 자주성을 유지하려면 예술한다는 것은 악과 싸운
다는 뜻이다 라는 자기 목적의 무리한 전위(轉位)에 의지한 어떤 대답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껏 내가 왜 쓰는가에 대한 물음에 공적(公的)인 답변을 하는데, 의지했던 역사와 사
회, 즉 시대와 상황에 대한 이해는 앞서의 분화사회(分化社會)였습니다. 지금은 한 과도기이며,
언젠가는 우리에게도 그런 사회가 오리라고 보는 낙관론에서라기보다는 한 이상(理想)으로서 그
런 분화사회를 향한 의식의 진보를 유도하거나 격려한다는 정도였습니다. 문학이 정치를 부인하
지 않고 정치가 문학을 억압하지 않는 사회, 문학이 경제를 단죄하지 않고 경제가 문학을 경멸하
지 않는 사회, 문학이 학문을 비웃지 않고 학문이 학문을 무시하지 않는 사회, 그러면서도 조화
롭고 풍요하게 발전하는 사회――어떤 근본적인 변혁 없이도 실현 가능성만 있다면 한 이상으로
서는 별로 나무랄 데 없는 사회일 것입니다.
하지만 젊은 벗이여, 나는 여기서 또 하나 부끄럽고도 쓸쓸한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내가 그런 입장을 택한 동기로서, 이번에도 내 선택은 적극적이 아니라 소극적이었다는 점
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저편보다 이편이 좋아서가 아니라, 저편보다는 이편이 덜 싫었기 때문이
었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그 싫어함도 대부분은 어떤 냉철한 논리에서가 아니라 감정적인 반발에
가까웠습니다.
아직은 뚜렷한 입장을 결정하지 않은 듯한 당신에게 행여 도움이 될까 하여 밝히는 바이지만,
내가 사회의 여러 기능 또는 가치를 통합적으로 파악하려는 입장에 반발한 첫 번째 이유는 자존
심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선택한 가치가 그 자체로 완성된 것이며 절대적이지 않고, 다른 가치에
종속하거나 수단화된다는 것이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래 사회에서 격리되다시피 살아온 자
에게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일종의 완전주의일지도 모르지만, 쓴다는 것은 평생의 일로 선택한
이에게는 또한 당현할지도 모르는 자존심입니다.
그 다음 내가 또 싫어했던 것은 그들의 독선과 우둔이었습니다. 정의(正義)나 양심 같은 누구도
선뜻 저항할 수 없는 지팡이에 의지해 문학에서의 가치를 독점한 그들의 서슴없는 단죄와 비난에
마땅히 의견을 함께 한 이들까지도 서슴 깊이 원한을 품고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을 나는 종
종 보아왔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쪽으로 사회를 개선할 의지를 품고 있
었다면, 필요한 것은 단죄와 비난으로 쓸데없는 적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권유와 설득으로 더
많은 동반자를 만드는 일일 것이란 점에서 나는 감히 독선이란 말에다 우둔까지를 덧붙이는 것입
니다.
세 번째는 이따금씩 맹목으로 느껴질만큼 극단한 양상을 띠는 그들의 획일주의와 단순화입니다.
확실히 그들의 주장은 이 사회의 소금입니다. 맛이 으뜸이라는 뜻에서도 그렇고 부패를 방지산다
는 뜻에서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소금이 모든 곳에 다 쓰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맛의 으
뜸이라고 해도 미싯가루나 커피나 딸기에 소금을 쳐 먹을 수는 없고, 부패를 막는다고 해도 때로
는 술이나 엿처럼 넒은 의미의 부패에 의지해야만 되는 음식도 있습니다. 어떤 것이 중요하다는
것과 그게 바로 전부라는 말은 반드시 구별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또 석연치 않은 것은 예술(문학도 포함된다고 보아)의 본질에 대한 해석입니다. 내가
이해한 바로, 그들과 의견을 같이한다고 추측되는 사람의 말 가운데 우리가 예술한다는 것은 악
과 싸운다는 뜻이다 라는 것이 있는데, 그 말은 한 비유로서는 어떨는지 몰라도 예술행위를 정의
한 것으로는 바르지도 맞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지만, 만약 당신이 오늘 밤 거리에 칼을 품고 나가 죄없는 사람을 하나만
찔러죽인다면 내일 아침으로 당신이 가장 높이 평가하는『까라마조프가(家)의 형제들』같은 작품
을 쓸 수 있을 만한 영감이 떠오른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당신이 진정으로 예술적인 성취에 야망
을 가졌다면 당신을 충동하는 강한 유혹만은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앞서 인용한 말에서
악(惡)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몰라도 예술이 본질적으로 반드시 악의 반대개념인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하는 데는 어느 정도 근거가 될 수도 있으리라 생각되는 가정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라고 생각은 변합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솔직하게 그들에 대한 불만을 털어
놓을 수 있는 것도, 어쩌면 이제는 그것들이 더 이상 나에게 불만이 아닌 까닭인지도 모르겠습니
다.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사인의식(私人意識)에서 조금 벗어난다는 말 같기도 합니다.
이제 내 나이는 서양식으로 쳐도 몇 달 안돼 서른 다섯을 넘어섭니다. 평균 수명이 연장돼 일흔
으로 보더라도 어느새 나는 시작보다 끝쪽으로, 젊음보다는 늙음 쪽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입니
다. 문득 역사란 것이 활자 뒤에 숨은 유령 같은 것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어떤 것으로 느껴지
며, 사회 또한 나와 무관한 이들이 나름의 이익을 다투는 강 건너의 난전이 아니라 이미 함게 올
라있어 표류도 난파도 함께 해야 할 거대한 배처럼 느껴집니다.
뚜렷한 이유를 모르면서도 이제 더는 노래부르기 위한 노래,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는 안될 것
같은 기분이고, 늙은 유미주의자(唯美主義者)나 예술지상론자도 어쩐지 염치없는 존재로 상상됩
니다. 그처럼 견고하게 생각되던 가치(價値)의 돌성도 더는 미덥지 않고, 거의 자명한 것처럼 보
이던 문학의 자기 목적도 방관자가 스스로를 해명하기 위해 지어낸 허구가 아닌가 하는 의심 속
에 점점 애매해져 갑니다.
하지만 이런 여러 변화가 지금까지 내가 취해 왔던 입장의 포기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것들은
오늘날 우리가 던져진 시대와 상황이 문학을 자기 목적 속에 안주(安住)시키기에는 별로 유리하
지 못한데서 온 일시적인 혼란일 수도 있고, 또는 이쪽은 번성하는데 저편은 고통과 불리(不利)
를 입고 있다는데서 온 감정상의 갈등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내게 올 궁극의
변화는 취해 왔던 입장을 포기할 가능성 못지 않게 더욱 완벽한 논리와 신념으로 지난 입장을 고
수하게 되는 쪽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근래 내가 공공연히 작품 발표를 쉬겠다고 말한 그 몇 년
간에 해결해야 할 중요한 일들 가운데는 분명 여기에 대한 검토도 들어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경애하는 젊은 벗이여, 왜 쓰는가에 대한 나의 대답은 아직 내 스스로에게도 완결되지 못한 셈입
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다시 한 번 아직 길 위에 선 자(者) 로서의 내 위치와 아울러 이 편
지의 사적(私的)인 성질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물음에 명료한 답이 되지 못해 죄송
합니다. 건투하십시오.
제2부
두고 온 그 세계
내 삶의 이야기
…뚜렷한 이유는 모르지만, 무언가 심상치 않은 저주를 짊어진 듯 여겨지는 그 몽롱한 언어의 조
종사로 내 삶이 끝장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일찍부터 나를 사로잡아, 나는 젊은 날의
많은 부분을 그 운명을 거부하기 위한 싸움으로 보냈다.
하지만 날 저문 길 위에서 나그네가 그 고향집을 그리워 하듯이, 장한 결심으로 떠났던 새로운
길에 작은 좌절의 징후만 보여도 나는 두고 온 그 세계를 참회하듯 떠올렸으며, 비록 주관적인
권리처럼 그 세계로 당당하게 되돌아 가곤 했다.…
아름다움의 이데아
밀양에서의 내 어린 날들은 대략 국민학교 졸업을 앞뒤로 해서 전혀 다른 빛깔과 느낌의 두 부
분으로 나뉘어진다. 앞의 두 해는――아아, 어른된 지금에 와서도 추억만으로 가슴 뛴다, 그때
삶은 희망으로 밝았으며 세상은 기쁨으로 빛났었다. 놀이와 꿈 속에서 내 유년(幼年)은 꽃피었
고, 바로 그 꽃그늘에서 그 뒤 내 삶을 이끌어준 모든 아름다움의 이데아가 자랐다. 비록 한 애
늙은이의 환상이나 착각에 지나지 않을는지 몰라도 거기에는 세월의 비바람에 바래지지 않을 첫
사랑이 있으며 더러는 오늘가지 벗으로 남고 더러는 기억의 어둠속에서만 반짝이긴 해도 또한 이
한 살이〔生〕가 끝날 때까지는 결코 잊혀질 리 없는 코흘리개 동무들이 있다 떠난 뒤 몇 번이나
되찾은 적이 있지만 밀양의 기억은 언제나 삼십년 저 쪽만을 고집하는 것도 어쩌면 그게 꽃다운
그날의 배경이었기 때문이 아닐는지.
먼저 떠오른다. 그 맑고 푸르던 남천강(南川江). 사람은 같은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지
만, 나는 아련한 꿈속에서 또는 그리움 속에서 수없이 그때의 그 강물에 내 발을 담궜다. 봄 눈
녹아 흐르는 찬 여울 살에, 모랫벌을 얕고 넓게 지나느라 뜨거워져 강을 거슬러 올라오던 은어
떼를 이따금씩 혼절시키던 여름의 느린 목에,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까닭 없이 슬퍼지던
가을의 교각(橋脚) 곁 그 맑은 웅덩이에, 이미 유리 같은 살얼음이 끼기 시작하던 그 발저린 겨
울 물굽이에. 세월은 구름처럼 허망히 흘러가 버렸으나 내 발을 감싸는 물살은 언제나 예전의 그
물살이었다.
또 나는 아직도 알 듯하다. 어느 모랫벌 어디쯤에 가면 모래 속에 얕게 숨은 모래무지를 운 좋
게 밟아 어린 손아귀에는 뿌듯하던 그 모래무지들을 잡아낼 수 있으며, 8월 초순의 어느 느린 목
에 죽은 것처럼 하얗게 배를 뒤집고 가라앉아 있어도 주워다 찬물동이에 넣기만 하면 곧 생기차
게 되살아나는 은어 떼가 있는 곳인지를. 어떤 여울살에 파리낚시를 던지면 검은 등에 희고 반짝
이는 배의 비늘로 맵시로는 단연 으뜸이던 참피라미들과 무지개빛 화려한 무늬를 자랑하던 먹치
들을 낚아올릴 수 있고, 어떤 여울목에 다슬기를 짓찧어 넣은 사발을 묻으면 지느러미 고운 가살
치와 배불뚝이 쫑매리를 담아낼 수 있는지를.
어떤 굽이에 가면 강물이 비껴 흘러 웅덩이나 다름없이 괸 물이 있고, 그곳 어디에 물풀들이 무
성히 자라, 떠올리면 공연히 기분 좋은 붕어들과 길을 잘못 든 가물치 새끼가 숨어 있는지를. 뻥
구리 텡가리 노지름쟁이 수수꿀레미 버들피리 납주레미 눈치 밀피리 꺽다구 문디고기――아동용
의 동물사전쯤으로는 그 표준어 이름을 알기 어려운 그곳의 숱한 물고기들이 어떤 돌틈에 알을
술고 메(물고기집)을 파는지를.
그 강물을 따라 양편으로 길게 흐르던 둑길도 거기 깃들이고 살던 작은 목숨들과 더불어 속절
없는 삼십년을 이겨내고 기억속에 살아있다. 그 둑길의 강 쪽 등성이와 거기 이어진 습기찬 풀밭
에서는 꼬리를 끊고 달아나던 게 늘상 신기하던 도마뱀이며 껍질을 벗겨 구워놓으면 먹음직해뵈
도 비위 약한 탓에 끝내 먹어보지는 못한 살찐 다리를 가진 떡개구리들, 그리고 저만치 질경이
이파리 위에 앉아 있어도 왠지 밝게 될까 가슴죄던 청개구리와 건드리기만 해도 죽은 듯 몸을 까
뒤집어 알록달록 배를 드러내던 비단개구리가 비교적 몸집큰 식구들이었다.
거기 비해 둑길의 마을 쪽 등성이는 좀더 다양했다. 둑길을 건너 온 앞서의 양서류(兩棲類)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물 걱정 없는 그쪽에 굴을 파고 사는 들쥐와 뱀들에다 작은 덤불에 둥지를
튼 멧새들까지 있었다. 방아깨비 송장메뚜기 여치 사마귀 풀무치 풍뎅이 쇠똥구리며 크고 작은
이름 모를 나방들은 이쪽저쪽 편리한대로 오가며 살았다. 장마철이 되어 불어난 강물로 강 쪽의
풀밭이 잠겨들기 시작하면 물가에 살던 다른 많은 날것들과 함께 강둑 위로만 몰려 오글거리던
그들이 원인 모르게 애처로와 보였다. 그리고 새〔鳥〕들만은 못한대로 우리의 손이 닿는 날 것
중에서는 가장 멋지고 탐나던 그 왕잠자리들.
나는 긴긴 여름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그 수컷들로 봐서는 간교하고 비열하기 짝이 없는 미인계
(美人計)에 열중하곤 했다. 별 쓸데도 없이 열 손가락 사이를 채워야 한다는 고집 하나로 실에
다리가 묶인 암컷이 지쳐 날개짓도 못할 때까지 실 끝을 쥔 손을 휘둘러댔고, 어떤 때 끝내 암놈
을 잡지 못했을 때는 수컷의 날개며 몸통에 호박꽃 가루를 노랗게 발라 짝없이 떠도는 외로운 수
컷의 사랑에 허기진 맹목을 노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작은 목숨들보다 더 강한 인상으로 내 머릿속에 새겨진 것은 역시 그 둑길에서 보게
되는 사람들이었다. 밀양에서 사랑을 해본 적이 있는 사람 중에 시원한 강바람과 짙은 풀 향기의
여름밤 강둑길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아직은 50년대의 보수(保守)가 완강히 버티고 있을 때였
지만 어떤 대담한 마을의 로메로와 율리아는 아직 해가 지기도 전에 팔짱을 끼고 그 둑길을 거닐
기도 했다.
해질녘 하루의 물놀이에서 돌아오던 내가 둑길 풀섶에 깨끗한 손수건을 깔고 나란히 앉아 가만
히 놀을 바라보는 그들에게 부러움을 넘어 알지 못할 시새움까지 느꼈다면 그건 나의 지나친 조
숙이었을까.
어느 서리친 늦가을 아침, 턱없이 흥분한 구경꾼들 틈에 끼어 보았던 어떤 불행한 여인들. 영아
살해( 兒殺害) 혐의로 체포되어 그곳으로 끌려온 젊은 남자가 수갑찬 손길로 가리킨 강가 모래
밭에서는 비닐 보자기에 싸인 갓난 아이의 시체가 나왔다. 절로 죽었는지 죽음을 당했는지를 알
아보기 위해 핏덩이나 다름없는 어린 것을 검시(檢屍)하고 있을 때 실성한 듯이 달려와 그 젊은
남자를 부등켜 안고 울던 아가씨. 성난 구경꾼들은 소리높여 그들을 욕하고 침을 뱉었지만 흐느
끼는 그들 불행한 여인들을 바라보던 내 콧마루가 시큰했던 것은 또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제 와서 보면 그게 혁명 전야(前夜)의 한 정표였던 듯도 싶지만, 그 무렵은 젊은 실업자들이
유난히 많았다. 일찍이 청운의 뜻을 품고 큰 도회로 떠났으나 끝내는 상처입고 지쳐 돌아온 이들
이 대부분인 그들은 그곳이 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안식처인 듯 둑길 풀밭에 팔베개를 하고 누
워 떠가는 흰구름만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여자 아이를 대학에 보낸 집이 읍내를 통틀어도 아
직은 열 손안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적던 시절이라 기껏 그곳의 고등학교도 끝장을 보고 혼기(婚
期)가 되기만을 기다리던 아가씨들도 둘 셋씩 짝을 지어 자주 그 둑길을 수놓았다. 저희끼리만
공부한 여고 출신은 짐짓 시침을 떼며, 그리고 남녀 공학인 인문 고등학교나 농잠(農蠶) 고등학
교 출신은 좀 대담하게, 얼굴 희고 손길 고운 그 실업자들을 훔쳐보며 지나쳤는데, 짐작컨대는
그들 사이에서도 많은 새로운 쌍의 연인들이 태어났을 것이다.
그 밖에 그 둑길과 연관되어 떠오르는 사람들로는 가을이 되면 조금이라도 땔감에 보탤까 해서
쇠갈퀴로 잔디 뿌리가 드러나도록 둑길 풀섶을 긁어대던 몸빼 차림의 아주머니들과 염소나 송아
지를 끌고 강변 쪽 풀밭을 어슬렁대던 늙은이들, 그리고 토끼풀을 뜯거나 이런저런 놀이로 뛰어
다니던 아이들이 있다. 모두가 그 무렵의 보편적 빈곤과 이어진, 자칫하면 우중충한 추억의 배경
이 될 모습들이지만, 이 무슨 감정의 고집일까, 내게는 하나같이 뜻깊고 그리운 사람들일 뿐이
다. 그 둑길 강 하류 쪽 끄트머리에는 흔히 문둥이집 이라고 불리던 움막이 두어 채 있었는데,
분별없는 기억의 과장은 그것마저도 턱없는 아름다움으로 덧칠해, 뒷날 그 움막들이 없어진걸 보
자 나는 무슨 소중한 꿈의 일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허전함을 느끼기까지 했다.
뱃다리거리 위쪽으로 둑길이 끝나는 곳에 있던 솔밭과 모직 공장도 내 유년의 작은 무대 가운데
하나였다. 모든 산들이 거의 벌거숭이가 되어 있다시피 한 때인데도 푸르름과 당당함을 자랑하던
그 소나무 숲은 교사(校舍) 부족에 허덕이던 우리들에게 훌륭한 야외 교사(野外校舍)가 되어주었
다. 따뜻한 봄날이나 노염(老炎)이 숙지는 초가을 같은 때, 간막이도 없이 서너 반(班)이 이곳저
곳에 흑판을 걸고 왁작거려야 하는 강당이나 궁색한 판자집 가교사(假校舍)에서의 수업에 지친
선생님들은 곧잘 우리를 그 솔밭으로 끌고 가 거기에 요란한 유년의 추억 일부를 묻어두게 했다.
모직공장은 그 솔밭과 강둑길을 사이에 마주보고 있었다. 해방 전에는 전국에서 알아주던 큰 공
장이었으나, 그때는 함부로 자란 들풀과 잡목 사이에 버려져 있었는데, 한 번 내 유년의 동화적
인 상상력이 끼어들자 그것은 곧 신비스런 중세의 고성(古城)으로 변했다. 끔찍한 몰락의 전설과
함께 괴로운 죽음을 맞아야 했던 그 마지막 영주(領主)의 원통한 넋이 밤마다 굳게 닫힌 문들을
삐걱이며 열고 나와 스산한 잡목숲을 배회했고, 때로는 늙은 마법사가 녹슨 직조기(織組機) 사이
에 향불을 피워놓고 일생을 닦아온 마법의 완성을 서두르고 있기도 했다. 그 후 삶이란 쓰디쓴
시간 때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단정을 내리게 된 뒤조차도 그곳을 지나치다 보면 까닭모를 설렘
에 젖을 때가 있었는데, 어쩌면 그것은 그때껏 내 가슴 한구석에 살아 있던 그 마법사에게 영혼
을 팔아서라도 사고 싶은 그 무엇이 있어서는 아니었던지.
그러나 밀양을 얘기하면서 아무래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강을 가운데 끼고는 그 솔밭과 엇비슷
이 맞보고 있는 영남루와 대숲이다. 영남루는 밀양을 찾는 이에게는 그 어떤 버스 정류소나 기차
역보다 먼저 나타나는 마중꾼이고 떠나는 이에게는 또한 그 마지막 배웅자였다. 그러나 거기 몸
담고 사는 사람에게는 어김없이 그 읍의 중심이어서, 찾아온 손님을 제일 먼저 데려가는 곳도 그
곳이고 자기 자신 먼 곳을 떠돌다 돌아와서도 가장 먼저 찾게 되는 곳도 거기였다. 나에게도 그
것은 마찬 가지여서, 그곳을 들러보지 않고 돌아오게 되면 밀양 자체를 다녀오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는데 그 까닭은 아마도 거기에 서린 유년의 추억들 때문일 것이다. 다른 아이들도
그랬는지 모르지만, 밀양에서의 명절들은 무론 깊고 지루하던 여름 방학의 태반이 영남루의 기억
과 얽혀있다. 누각이나 잔망의 아름다움보다는, 거기 잇대어 있는 대숲과 오래된 참나무붙이가
주된 수종(樹種)을 이루던 뒤편 산이 마땅히 갈 만한 곳도, 좋은 장난감도 갖지 못한 내게는 더
할 나위없이 훌륭한 놀이터가 되어준 것이었다.
먼저 그 대숲. 한 번도 맞닥뜨려 본 적이 없는 관리인과 대숲아래 비탈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
의 눈길을 피해가며 청대를 찌던 때의 가슴조림은 지금에조차도 꿈속에서 온 몸을 진땀으로 적신
다. 마음은 급하고 알맞는 도구는 없이 함부로 꺾은 대를 칼돌로 짓찧다 보면 잘못 찧어 손톱부
터 먼저 새까맣게 멍들기 일쑤였다. 나는 그 대숲에서 합쳐 일곱 대의 청대를 쪄냈고, 그 중에서
도 다섯은 낚시대로, 둘은 활로 만들었는데, 필요하다면 아직도 내가 그 대를 짜낸 곳을 정확히
가리켜낼 수 있을 듯하다.
그 대밭 발치 바위 언덕의 석화(石花)들도 오래오래 잊혀지지 않는 것들 중에 하나다. 화강암인
성싶은 그 바위 언덕 군데군데 연꽃 모양으로 튀어나온 게 바로 석화인데, 그게 절로 생긴 것인
지 사람이 새긴 것인지는 여태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추억으로 치면 보다 생생한 것은 그 대숲 위 영남루와 무봉사(舞鳳寺)와 상수도 가압장
(그때 어린 우리는 그걸 수원지라고 불렀다)을 잇는 삼각형에 드는 참나무붙이 숲이다. 이른 봄
먼저 나를 그리로 불러들이는 것은 그렇게 탐냈으면서도 끝내는 잡아보지 못한 다람쥐들이었다.
뒷날 여자를 성(性)이 고려된 구체적 욕망의 대상으로 보게 된 나이에 이르렀을 때 나는 가끔씩
그녀들을 다람쥐로 비유하곤 했는데, 어쩌면 그런 비유는 그때 그 다람쥐들에게 느낀 원한에 가
까운 야속함이 내 의식 깊이 앙금으로 가라앉았다가 은연중에 표현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나 아닌
지 모르겠다.
뾰죽뾰죽 돋던 참나무의 새순들이 점차 넓은 잎새로 자라 그 숲길이 짙게 그늘지는 여름이 되면
다람쥐를 쫓던 내 열정은 그 숲의 다른 식구들―다람쥐보다는 더 작고 날렵하지만 아둔해서 잡기
는 쉬운 매미와 풍뎅이, 하늘소 따위에게로 방향을 바꾸었다. 눈이 밝고 나무가 조금만 흘려도
알아채는 참매미나 말매미를 잡기 위해서는 말〔馬〕들이 먼저 수난을 당해야 했다. 말총으로 만
든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올가미만이 그들을 잡아낼 수 있는 수단인 까닭이었다. 그 무렵 일감을
기다리는 읍내의 말구루마(말이 끄는 수레)들은 모두 뱃다리거리 밑에 모여 있곤 했는데, 거기서
말총을 얻을 때부터가 이미 모험이었다. 뱃다리 그늘에서 시원한 강바람에 졸고 서 있는 말꼬리
에서 말총을 뽑으면 말들은 그 아픔을 못이겨 소리내어 울거나 뒷발질을 해댔고, 그 소동에 역시
그 부근에서 눈을 붙이고 있다 깨어난 말 임자들이 소리고리 지르며 아이들을 뒤쫓기 마련이었
다.
콩매미 찔찔이 풍뎅이 하늘소 따위는 훨씬 잡기가 수월했다. 시원찮은 망사 매미채면 넉넉하고,
때에 따라서는 옥양목으로 만든 채나 맨손으로도 얼마든지 잡아낼 수 있었다. 특히 우리들에게는
먹풍뎅이라고 불리던 검고 빛나는 등에 몸집이 큰 풍뎅이나, 한 번 잡으면 며칠씩이나 아이들의
부러움을 사던 장수하늘소는 어떻게 잡느냐보다는 어디서 찾아내는가가 더 어려웠다.
가을의 그 숲은 이번에는 갖가지 모습의 도토리로 아이들을 끌여들였다. 꼭지 부분을 칼로 도려
내고 성냥개비를 꽂아 손팽이를 만드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쓸모가 거의 없다시피 한 그 도토리
를 주워 모으는 데 바쳤던 그토록 많은 시간과 노력을 떠올리다 보면, 인간이 종종 빠지게 되는
탐욕이란 고약한 열정이 바로 그런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결국은 방안이나 책가방
만 며칠 어지럽게 하다가 이리저리 버려지고 말 그 도토리를 위해 아이들은 또래들과 다퉈가며
날이 어둡도록 거친 산비탈의 낙엽과 풀섶을 헤집고 다녔다. 가만히 따져보면 지금 내가 집착하
는 여러 가지 일도 기실은 삶의 도토리에 부리는 쓸데없는 탐욕이나 아닌지.
가을의 그 숲이 가지는 또 다른 효용은 대개 추석을 앞뒤로 얼마간은 가게 되는 위험한 화약놀
이를 마음놓고 할수 있는 우리만의 장소로서였다. 그 무렵 국민학교 상급반 아이들은 단순한 딱
총이 아니라 스포크총이란걸 만들어 썼다. 양산대를 잘라 총열(銃列)을 삼고 자전거 살과 휠 사
이를 연결하는 작은 쇠붙이로 약실(藥室)을 대신한 그 총은 소리가 엄청날 뿐만 아니라 약실 끝
에 탄환을 넣으면 제법 사람까지 다치게 할 수 있었다. 또 폭죽도 가게에서 파는 조잡한 것을 그
대로 쓰지 않고 만들었는데, 거리에서 터뜨리면 근처 가게의 유리창이 떨리고 아주머니들이 풀썩
주저앉을 정도였다. 따라서 그런 것을 가지고 놀 때는 사람들과 거리에서 떨어진 곳을 찾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그 숲이 가장 알맞은 장소가 되고 말았다.
겨울이 되면 그 숲은 잠시 아이들에게서 멀어졌다. 줄기와 가지만 앙상한 참나무 숲 산중턱에서
얼어붙은 강을 내려다보기 좋아하는 이상한 취미를 가진 어른들이나 여름밤의 강둑길에서 그리로
옮겨온 젊은 연인들의 차지가 돼버리는 까닭이었다. 특히 눈이라도 오는 날은 밀양의 거의 모든
연인들이 거기 모여 하나뿐이던 영남루의 사진사를 바쁘게 했다.
아랑(阿 )이 목숨으로 지킨 정절의 의미가 뚜렷하지는 않은 대로 대숲 사이에 서 있던 아랑각
(阿 閣)도 나름대로는 내 어린 영혼에 무언가를 말했던 듯싶다. 역시 뒷날의 일이지만, 제법 그
런 일을 키들거리며 주고받을 나이가 되어 밀양을 들렀을 때, 나는 그곳 아가씨들의, 소읍에 흔
히 있기 마련이면서도 듣기에는 언제나 뜻밖인 성적 분방함에 몸시 화를 낸 적이 있다. 아랑제
(阿 祭) 때 행렬의 선두에서 단정한 미소로 손 흔들어 지나가던 그 아랑들에게 느꼈던 어린 날
의 연모가 나를 분개하게 만들었음에 틀림이 없다.
한 번 돌아보기 시작하자 밀양은 점점 가깝고 생생하게 다가오고 그걸 잡아보려는 내 도구는 점
점 무력해진다. 그때는 그대로 하나의 완전한 우주였던 그곳을 이 애매하고 모자라는 말〔言〕과
끝내는 한정이 있기 마련인 시간으로 어떻게 모두 잡아둘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아직 사포(沙浦)의 배와 기러기도 얘기하지 못했고 용두목의 물놀이와 선불의 밤밭, 진늪
의 백송(白松)이며 마음산도 애매한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 반투명의 고운 곱돌(화석)을 주우러
가 동굴 속의 톰 소여를 꿈꾸었던 읍내 광산이며, 한 줌의 쪼대(질 낮은 고령토)를 얻기 위해 한
나절이나 걸어야 했던 그 도자기 공장도 모두가 말로 잡아두기에는 또다른 기회와 열정을 필요로
하는, 내 꽃피는 유년의 뜨락이었다.
그러나―어느 날 문득 꽃은 시들고 빛은 스러졌다. 삶은 실상으로 내 유년을 목조르고, 세상은
어둡고 긴 터널이 되어 내 앞에 입을 벌렸다…….
새지 않는 밤
아아, 나는 마침내 영락하고 말았다. 그 무렵, 그러니까 60년대 말의 서울에서 나 같은 빈털터
리가 안정된 주소를 가진다는 것은 쉽지 않은 행운에 속했다. 그런데 나는 용케 얻은 그 행운조
차 술과 낭비로 망쳐 버리고 다시 거리로 쫓겨난 것이었다. 라디오에서는 벌써 가을이 방매되고
있었지만 한낮의 햇살은 아직도 아스팔트를 녹일 만큼 뜨겁던 그해 구월의 중순이었다.
그 전의 일년 반은 그래도 참 좋은 세월이었다. 무엇보다도 하루 세끼 먹을 것과 누울 잠자리를
근심할 필요가 없었고 비록 하찮은 생각일망정 언제든 그걸 끄적거려 둘 책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억들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는 벌써 여러날째 그 도시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를 터
덜거리며 헤매는 아스팔트 위의 방랑자였다.
물론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내가 두 손 처매 놓고 기다리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도 한때
는 막장으로 굴러 떨어지는 내 생활을 어떻게든 되돌려보려고 애를 썼다. 어느 정도 살림살이가
나아진 형에게 간청해서 하숙비를 송금받으면서도 가정교사로 입주했고 또 따로이는 시간을 쪼개
그를 지도까지 겸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늦어버린 후였다. 조금이라도 값나갈 만한 물건은 모조리 전당포에 가 있었
고, 겨울 옷가지는 시장통 술집에 애서 사모은 책들은 헌책방에 기한부로 팔려 있었다. 친구건
친척이건 손 벌릴 수 있는 곳이면 모조리 돈을 빌어 썼는데, 그것들까지 합치면 이래저래 내가
매워야 할 빚은 오만원에 가까웠다. 하숙비가 한달에 팔천원 하던 시절이니 그 빚이 얼마 만한
무게로 나를 짓눌렀을까는 쉽게 짐작이 간다.
거의 견딜 수 없게 된 객지 생활의 피로와 단 한 번의 사랑놀이도 한 몫을 단단히 했다. 앞의
것은 내 장한 결심을 한 달도 안돼 허물기 시작했고, 뒤의 것은 하필이면 가장 중요한 시기에 내
자신과 열정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만들엉ㅆ다. 거기다가 뒤늦게 내 방탕한 생활――형의 표현을
빌리면――을 전해들은 형이 역시 한달만에 송금을 끊자 나는 속절없이 영락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되었다.
가정교사로 입주해 있던 집에서는 늦은 귀가와 술 때문에 번번히 쫓겨나고 애써 모은 과외그룹
도 불성실한 지도로 흩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할 수 없이 구해 든 하숙집에서조차 돈을 못 내 보
름만에 쫓겨나오자 그때부터 나는 그야말로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
다. 일이 나빠지려고 그랬는지 그해는 여름방학마저 기약없이 늘어져 내 비참은 한결 심했다. 낮
동안은 이 다방 저 다방을 전전하며 이미 더 이상 남아 있지도 않은 구원자를 기다렸고, 이것저
것 다 틀어진 밤은 서울역 대합실로 가서 밤을 보냈다.
그래도 내가 이제 얘기하려는 밤은 그중 운수 좋은 날에 속했다. 그날 낮에 나는 무슨 계시처럼
꽤 큰 출판사에 근무하는 고향 선배 하나를 떠올리고 그를 찾아갔던 것인데 거기서 뜻밖의 행운
을 만났다. 그 선배가 마침 자기를 출판사에서 기획중인 외국 수사물(搜査物) 전집의 번역일 일
부를 나에게 빼내준 것이었다. 어차피 번역자의 이름을 빌려줄 사람은 따로 있을 바에야 번역료
를 절약하자는 뜻이었겠지만, 어쨌든 경험도 없는 내게 그런 일이 떨어진 것은 분명 그 선배의
호의 덕택이었다. 독립된 두 토막의 수사실화로, 내강 원고지 3백장분에 장당 50원――그것도 내
곤궁을 짐작한 그 선배의 배려로 2천원이 선불이었다.
저녁까지 배불리 얻어 먹고 선배와 헤어진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계획다운 계획을 세워 보았다.
그 돈을 선금으로 어디 하숙을 구해보자. 열흘 정도면 일은 끝날 것이고, 그러면 나머지 하숙비
도 낼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미 날은 저문 후여서 그런 하숙집을 구하기에는 너무 늦어 있었
다.
할 수 없이 이튿날 하숙집을 구하기로 작정한 나는 한푼이라도 절약하기 위해 그 날 밤은 청량
리역 부근의 무허가 여인숙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막상 자리를 잡고 누우니 새삼 자시이 처량해
졌다. 지난 날의 떠돌이 시절에도 여러 번 어려운 지경에 빠져 보았지만 그때처럼 참담한 기분을
느꼈던 적은 없었다. 한 평도 못될 것 같은 좁은 방, 이마가 닿을 듯 낮은 천정, 옆방의 기척이
그대로 건너오는 판자벽과 더러운 도배지, 흉칙하게 성기만 드드러지게 그려진 음화(淫 )와 낙
서들, 그나마 백오십원으로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선 한 사람의 동숙자(同宿者)가 더 들어오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그 참담한 기분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일을 시작했다. 몇몇 속어(俗語)를 제외
하면 대개 쉬운 문장인데다 다행스럽게도 그때까지 내가 끌고 다니던 가방에는 제법 큰 영어사전
이 남아 있어 번역은 그럭저럭 할 만했다. 한때 내 글만은 스스로 영역(英譯)하겠다는 대담한 야
심을 가졌던 적이 있는데 그것도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나는 차츰 일에 깊이 빠져들어갔다.
나의 동숙자가 들어온 것은 미연방(美聯邦) 무슨 수사요원이 맨홀에서 중년의 남자 시체를 발견
하는 대목을 번역하고 있을 때였다. 방값을 놓고 한 동안 실랑이 끝에 방문을 들어선 것은 생각
밖에도 겨우 열너덧 정도로 뵈는 소년이었다. 곤드레가 된 술꾼이거나 우락부락한 불량배가 아닌
것이 안심이긴 했지만, 나란히 누워 잘 상대로는 한심할 정도로 꾀죄죄한 차림이었다. 낡고 조그
마한 가방 하나를 들여 놓고 세수라도 하러 가는 모양으로 방문을 나가는 소년을 바라보며 나는
다소 어두운 기분으로 하던 일을 멈추었다.
그때 주인 아낙이 문간에 나타났다. 어딘가 예전에 창녀였거나 그 비슷한 출신인 것 같은 사십
대의 여자였다.
귀중품이 있으면 맡겨요. 저런 애들이 제일 무서우니까.
귀중품이라고는 하나도 가진 게 없었지만 마음 속으로 나는 그런 그녀의 말에 대뜸 동의했다.
주머니에 남은 천 백원을 맡기지 않은 것은 그것이 그처럼 복잡을 떨어가며 지키기에는 너무 작
은 탓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문을 닫기 바쁘게 나는 동전을 제외한 돈 전부를 영한사전의 비닐표
지에 끼우고 점잘 때는 때 묻은 벼개 대신 그걸 이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만큼 나의 동숙자는
다른 사람의 경계심을 자극하는 데가 있었다.
잠시 후에 그 소년이 다시 방안에 들어섰을 때 나는 또 한 번 그런 내 조치가 온당했음을 확인
했다. 이번에는 가까이서 본 녀석의 세파에 깎인 얼굴 때문이었다. 무언가 송구스럽고 불안해 하
는 녀석의 행동도 나에게는 의심스럽기만 했다. 녀석도 그와 같은 내 기분을 알아차렸는지 잠깐
방안을 머뭇거리다가 말없이 자기 이부자리를 폈다. 그리고 거기서 남루한 겉옷을 벗었는데, 무
심코 그런 녀석을 보고 있던 나는 기어이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노랗게 땟국에 젖은 런
닝셔츠에 팬티는 그보다 더 심했다. 나 역시 보름이 넘도록 속옷을 갈아 입지 못했고 양말도 사
흘째 그냥 신고 다니는 신세라 것은 그 순간에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이상한 불쾌감――정말이지 가진 것이나 겉모양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기 위해 나는
얼마나 진지한 노력을 했던가――을 잊기 위해 다시 하던 일로 돌아갔다. 그러나일은 전처럼 손
에 잡히지 않았다. 찾아 보면 번연히 아는 단어가 막히고 대단찮은 관용구가 골탕을 먹였다. 처
음 일을 시작할 때 호기롭게 번호를 매겨 둔 원고지를 자꾸 찢어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성가신
노릇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신경이 곤두서는 것은 녀석이 몸을 뒤채일 때였다. 호청 아래 비닐을 누벼 서
그럭거리는 이불소리, 녀석의 때묻은 몸이 나에게 닿지나 않을까, 이불이 겹쳐지지나 않나――그
러다가 난데없이 콩알만한 이가 줄지어 내 이불 속으로 기어드는 것 같은 느낌으로 온 몸이 근질
거리기까지 했다.
나는 끝내 일을 단념하고 말았다. 실은 낮동안 이리저리 쏘다니느라 피곤하기도 했다. 나는 쓰
던 것은 챙긴 후 처음 마음 먹은대로 영한사전에 수건을 감아 배개로 삼았다. 그리고 나와 대등
한 방값을 치른 그 어린 동숙자에게는 한 마디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불을 껐다.
기대했던 것처럼 잠은 쉽게 와 주지 않았다. 영망이 돼버린 생활, 이를테면 주머니마다 한 장씩
튀어나올 것 같은 전당표 따위가 끊임없이 눈 앞에 어른거렸다. 거기다가 싫다 못해 밉기까지한
동숙자, 이웃방에 든 불결한 남녀의 시시덕거리는 소리, 점점 심해지는 고약한 냄새. 우리의 감
각 중에 취각(臭覺)이 가장 쉽게 마비된다는 생물학적 지식도 거기서는 통하지 않았다.
이윽고 나는 욕지거리라도 뱉고 싶은 기분이 되어 거의 발작적으로 불을 켰다. 이번에도 녀석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서였는데, 녀석도 잠이 오지 않는지 그런 나를 잠깐 의아로운 눈길로 쳐다보
았다. 나는 녀석에 아랑곳 없이 소리나게 일거리를 다시 폈다. 일이 잘 될 리가 없었다. 내가 석
장짼가 넉장짼가 파지(破紙)를 거칠게 구겨 던졌을 때 녀석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저씨는 저 뭐라던가――소설가시죠?
갑작스런 물음이었다.원고지에 쓰는 것을 보고 한 말이었겠지만 나는 왠지 그때부터 조금씩 짜
증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그 목소리가 뜻밖에 맑고 애잔한 여운을 가진 탓이기도 하지만 그보
다는 우선 녀석의 단순한 무지에 대한 측은함 때문이었다.
아니, 지금 번역을 하고 있어. 하지만 어쩌면 앞으로 그렇게 될는지도 모르지.
나는 짧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러세요――?
녀석은 약간 실망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소설가였다면 참 좋았을 텐데……
왜 그러지?
녀석의 실망이 까닭없이 강하게 내 가슴에 닿아 와 나는 조금 부드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녀
석은 내 물음에 다시 물었다.
저――소설가는 정말로 거짓말을 진짜처럼 지어내는 사람들인가요?
글쎄……그렇게도 말할 수 있겠지.
참말은 쓰지 않나요?
그렇지는 않아. 지어냈다는 뜻에서는 거짓말이지만,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참말일 수도 있
어. 또 짓는다는 것 역시 대부분은 실제 있었던 일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지.
나는 어떻게든 픽션의 개념을 녀석이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설명해 보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그러데도 녀석은 어느정도 알아 들은 눈치여서 나는 다시 물었다.
그런데 그건 왜 묻지?
그저요……
그러면서 녀석은 짧은 한숨으로 말끝을 맺고는 돌아누웠다. 아이답지 않게 깊고 절실한 한숨소
리였다. 그걸 듣자 이번에는 내쪽에서 강한 호기심이 일기 시작했다. 녀석은 무엇인가 나를 통해
얘기하고 싶은 것이 있음에 틀림없었다.
아직 어려 보이는데 올해 몇 살이지?
열 다섯이요.
무얼하고 지내니?
신문도 팔고 껌도 팔고――비가 올 때는 우산 같은 것도……
부모님은? 왜 집은 두고 이런 데서 자니?
그러자 녀석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부모님은 없어요. 집도. 실은 아저씨가 소설가라면 그 얘길 하고 싶었어요. 아주 슬픈 얘기예
요, 아주.
그러는 녀석에게는 일순 기다리던 것을 때맞춰 물어 주었다는 기쁨의 표정 같은 것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어떻게 됐길래?
한 번 들어보시겠어요?
그러지.
제 아버지는요, 정말 이상한 분이었어요. 제게는 어머니가 넷이나 돼요……
겉보기와는 달리 거기서부터 녀석은 조리있게 자신의 얘기를 엮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녀석에게
품었던 의심과 혐오감이 차츰 엷어지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원래 아버지는 많이 배우고 재산도 있는 분이었대요. 어머니와 결혼할 때만 해도 큰 집에 살았
고 무슨 회사에 나갔다더군요. 그런데 몇 년만에 어머니가 저를 배자 집을 나가신 후 돌아오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제가 다섯 살때까지 홀로 사시다가 딴 데로 시집가고 저는 할머니에게 맡겨
졌죠.
제가 아버지에게 넘겨진 것은 이듬해였어요. 아버지는 새엄마를 얻어 조금만 점포를 하고 있었
는데, 한동안 저는 거기서 잘 지냈죠. 너무 어려 뚜렷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새엄마도 제게 잘 대
해 준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국민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또 아버지가 없어졌어요. 나중에 안 것
이지만 새엄마가 아기를 배었던 거예요.
그래도 새엄마는 한동안 저를 돌봐 주셨어요. 아버지에게 샀다면서 낯선 사람이 점포를 차지한
후에도 이년 가까이나 그러다가 다른 남자가 생기자 새엄마는 저를 아버지에게로 데려다 주더군
요.
어버지는 시장통 입구에서 초라한 대포집을 하고 있대요. 또 새로운 엄마를 만났더군요. 언제나
요란스런 화장을 하고 목소리는 남자처럼 걸걸했지만 마음씨는 고운 분이었어요. 그 새엄마만 아
니었더면 저는 벌써 쫓겨났을 거예요. 아버지는 그때부터 이유없이 저를 욕하고 때렸거든요. 어
쨌든 국민학교 오학년때까지는 그럭저럭 아버지 밑에서 지냈죠. 그런데 이번에는 그 새엄마가 달
아나 버렸어요. 단골인 생선가게 아저씨와 눈이 맞은 거래요.
그 다음부터는 모든게 엉망이었어요. 아버지는 노상 술에 취해 살면서 나만 보면 당장 죽일 듯
때렸어요. 한 번은 정말 식칼을 들고 저를 쫓아온 적도 있어요. 결국 나는 겁이 나서 부산으로
도망쳤죠. 제 친엄마가 거기 산다는 막연한 소문을 듣고……
그 무렵부터 한 동안은 신문 사회면에서 가끔씩 볼 수 있는 어둡고 우울한 얘기들이었다. 부산
에서 친엄마를 찾지 못한 채 구두닦이패의 똘만이로 고생한 얘기, 고아원에 수용되었다가 못견뎌
도망친 얘기, 다시 앵볼이 패거리에게 끌려갔다가 와초가 감옥에 가자 그들로부터 놓여난 얘
기…….
제가 다시 서울로 돌아온 것은 작년 봄이었어요. 먼저 아버지의 대포집으로 가 보았죠. 주인이
바뀌었더군요. 할 수 없이 저는 또 나쁜 사람들에게 붙들릴까 보아 경찰에 찾아가 사정을 했어
요. 그래서 한동안 개미회(會)에 섞여 일하다가 이제는 이렇게 홀로 지내요.
어느새 밤이 꽤 깊어진 모양이었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술꾼들의 취한 목소리뿐 거리는 조용했
다. 그리 신기하다고는 할 수 없는 녀석의 신세타령이었으나 나는 잠자코 들어 주었다.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아직도 하지 않았다는 듯한 녀석의 표정 때문이었다.
그 뒤에 저는 다시 한 번 아버지를 만났어요. 엿수레를 끌고 있더군요. 그래도 반가와서 인사
를 했더니 놀라기는 해도 여전히 남남처럼 대하더군요. 억지로 집까지 따라가 보았는데 정말로
비참한 생활이었어요. 초라한 사글세 방에 또 새로 얻은 엄마는 뭔가 큰 병을 앓고 누워 있었죠.
마침 제게 가진 게 몇푼 있어 내밀었지만 아버지는 받지 않더군요. 대신 눈물으 흥건한 눈으로
한동안 나를 보더니 놀라운 얘기를 해주었어요. 자기는 진짜로 제 아버지가 아니라고요. 자기는
원래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이래요…….
그제서야 나는 녀석의 아버지가 임신만 하면 아내를 버리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녀석은 계속
했다.
아버지는 제게 또 말했어요. 이제는 더 이상 나를 찾아올 필요가 없다. 네 아버지는 따로 있
으니까. 더구나 나는 지금 이 여자와 함께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이 여자는 죽어서 나를 떠
나면 떠났지 살아서 나를 배신하지는 않을 테니 라고요. 생각하면 그분도 퍽 불쌍한 분이예요.
녀석은 다시 어른스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차츰 기묘한 감동에 빠져들고 있었다. 녀석의
어두운 과거나 그 아버지의 불행보다는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녀석의 마음가짐 때문이
었다. 그러자 녀석에 대한 의심이나 혐오감은 완연히 사라지고 대신 그 때문에 잊고 있었던 나
자신의 비참이 상기되었다. 결국 현실로 보아서는 나 또한 녀석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처지였다.
녀석은 그 뒤로 몇가지 음울한 밑바닥 삶을 이야기했다. 점점 자신의 생각에 깊이 빠져들면서
나는 건성으로 듣고 있었지만, 녀석의 맑고 가라앉은 목소리와 그 잔잔한 여운으로 내게 이상한
동료의식 같은 것을 느끼게 했다.
그래 앞으로는 어쩔 작정이냐?
무얼 말이에요?
어떻게 살아갈 거냔 말이다. 무엇이 되고 싶니?
당장이야 무슨 수가 있겠어요. 그럭저럭 견뎌 보는 거죠.
전혀 열 다섯 소년답지 않은 말투였다. 나는 함부로 감상에 젖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도 까닭모
를 연민에 젖어 물었다.
나중에는?
장사를 해볼까 해요. 이래봬도 그 밑천을 모으는 중이에요. 십만원 차면 무엇이든 해볼 수 있
을 거예요. 한두해만 고생하면 될 것도 같아요.
그러는 녀석의 목소리는 전과 달리 한가닥 생기를 띠고 있었다.
그래서는?
돈을 버는 거죠.
돈을 벌면?
하고 싶은 게 많아요. 무엇보다 그게 반드시 필요한 것에 있도록 하겠어요.
일테면 어떤 곳이냐?
그게 없어 굶는 사람, 떠는 사람, 앓는 사람――뭐 수없이 많죠.
널 위해서 버는 게 아니고?
제가 보니까요, 세상에는 무엇이든 넉넉한 것 같데요. 그게 공평하게 나누어져 있지 않고 한군
데 몰려 있기 때문에 없는 사람은 꼭 필요한 것도 모자라고, 있는 사람은 혼전만전 쓰고도 남아
도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공평이 나누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돈을 다 모아야 한다. 어떤 부자도 그건 안돼.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어요. 우선 한 사람이라도 그렇게 시작하면 누군가가 따라 오겠죠. 그래
서 그런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면 결국 세상 전부가 공평해 질 것 아니겠어요?
그 말을 듣자 나는 문득 녀석에 대한 의혹이 일었다. 아무래도 그와 같은 생각이 녀석 혼자 깨
우친 것으로는 느껴지지 않은 탓이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실은 어떤 형에게 들은 말이에요. 개미회에 있을 때 밤마다 들러 공부를 가르치거나 얘기를 들
려주던 사람이죠. 그는 또 말했어요. 하느님도 국가도 그걸 해주지 ㅇ낳으니 우리 스스로 적은
것부터 하나씩 실천해 가야 한다고.
하지만 무슨 상관이에요? 누구에게 들은 말이건 그걸 진심으로 옳다고 믿고 실천한다면 자기 자
신의 생각이라고 해도 되잖겠어요?
나는 우선 녀석의 돈에 대한 집착이 비뚤어진 보상심리나 천박한 복수용게서 비롯되지 않은 점
에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이어 녀석에 대한 돌연스런 애착에 빠졌다.
공부를 하고 싶지는 않니??
이미 늦은걸요. 그리고 제 기억에는 학교 때의 성적도 시원치 못했어요. 공부하는 일은 거기에
또 알맞은 아이들이 있겠죠.
그래도 배움이라는 건 중요하다.
저도 그러리라 짐작은 해요. 그러나 많이 아는 것이 반드시 사히에 나와서도 제일 잘 사는 것
같지도 않더군요.
학교 성적이 배움의 전부는 아니니까.
세상에 저렇게 학교가 많고 배우는 사람이 늘어도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고……
그런 것이 눈에 뜨일 만큼 금방 드러나는 건 아니지.
그럴지도 모르지만――어쨌든 전 이미 늦은걸요. 제 또래 아이들을 따라 가려면 적어도 오년은
더 공부해야 될 거예요. 그리고서도 그애들보다 나을 자신 또한 별루 없죠.하지만 장사라면 자신
있어요. 다른 애들이 배운 것을 이용하는 일을 나는 돈으로 대신하면 되잖겠어요?
무엇이든 돈으로 대신할 수 있다는 투의 말에 여지껏 개이어온 마음 한 구석이 흐려 왔다. 결국
녀석이 숭배하고 있는 것은 물신(物神)에 불과하구나. 어떤 일없는 소(小) 인텔 리가 녀석에게
제법 그럴 듯한 이념의 껍질을 제공해 주었지만 그것은 언젠가 이 물신의 유혹에 패배하겠지. 이
녀석에게 일러 줘야겠다.삶에 있어서 배움이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학문은 우리에게 무엇
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그리고 녀석의 물신에 대해서도 경고를 해야겠다…….
그러나 그런 내 생각은 뒤이은 녀석의 뜻 아니한 행동으로 주춤했다. 녀석이 문득 몸을 일으켜
윗목에 개어둔 겉옷을 끌어당기더니, 그 윗주머니에서 무언가를 부시럭거리며 꺼냈다.
이것 보세요. 오만 삼천원이 든 저금통장이에요. 순전히 제 힘으로 모았어요. 이만하면 제 또
래 아이들이 영어 단어 몇 천개 외운 것만큼은 되겠죠?
녀석이 그렇게만 말하고 그만 두었더라도 나는 심중의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을 것이다. 내가 걸
은 순탄치 않은 배움의 길을 교훈으로 들려주면서까지. 그러나 그 어린 물신 숭배자는 틈을 주지
않고 주머니에서 다시 다른 것을 꺼냈다. 지전 몇장과 동전 한줌, 그리고 조그만 잡기장이었다.
피로해서 깜박 잊었군요. 오늘 계산을 안했어요.
그리고몽땅연필 한 자루를 꺼내 침을 발라 가며 계산을 하고, 되풀이 돈을 헤었다. 나는 갑자기
멍해지는 기분으로 그런 녀석을 바라보았다. 한참 후에야 녀석은 드디어 계산이 끝났다는 듯 찡
긋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오늘은 겨우 삼백원이에요.
나는 왠지 송연한 기분이 되어 말없이 녀석의 하는 양을 살폈다. 녀석은 꺼낸 것들을 다시 주머
니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지전은 접어서 잡기장과 함께 웃옷 겉주머니에, 저금통장은 속주머니에
넣고 동전은 바랜 카키색 바지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옷을 차근차근 개어서는 머리맡에 밀어
놓았다.
밖이 조용한 걸 부니 열두시가 넘었나 봐요. 전 자야겠어요. 새벽에 조간을 받아야 하걸랑요.
녀석이 이불을 뒤집어 쓰면서 하는 말이었다. 그걸 보며 나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
다. 녀석이 편히 잠들 수 있도록 불을 꺼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스위치로 선을 뻗으
려던 나는 갑작스레 나를 죄어 오는 까닭모를 부끄러움으로 굳어진 채 물었다.
얘, 너 이름이 뭐니?
김 순동이에요. 왜 그러시죠?
너를 다시 만나려면 어떻게 하면 되니?
이 부근 아이들에게 뻔데기를 물어보면 돼요. 제 별명이 뻔데기거든요.
그러고 보니 녀석은 정말로 번데기 같았다. 검고 찌든 피부와 이마에 여러 겹 져 있는 이상하게
골 깊은 주름 때문이 아니라――곧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날게 될, 그래서 당장은 더욱 흉칙하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의미로서의 번데기였다.
내 한 번 찾아가마.
나는 무슨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불쑥 그렇게 말했다. 그래야만 여전히 뚜렷한 원인도 없이 가
슴 속에서만 자라나는 부끄러움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저씨가요?
녀석이 알 수 없다는 눈길로 나를 올려보았다. 나는 짐짓 확고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불을 껐다.
그래 꼭 한 번 찾아가지.
불을 끄고 오래잖아 녀석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쉽게 잠들 수
없었다. 녀석과의 다시 만날 약속에도 불구하고 또 그때 어떻게든 보상을 하리라는 결심에도 불
구하고, 점점 나를 무겁게 짓누르는 그 원인 모를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나는 한동안 부끄러움의 원인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가, 아, 드디어 나는 그 원인을 깨달았다.
나는 거의 주체할 수 없는 흥분 속에 불을 켜고잠든 소년을 흔들었다.
얘, 얘, 자니? 일어나 봐.
무, 무슨 일이세요?
녀석은 다행이도 잠귀가 밝은 편이었다. 두어번 흔들자 휘둥그레 눈을 떴다.
너는 도대체 어째서 그렇게도 쉽게 나를 믿었지?
무슨 말씀이세요?
나를 어떻게 보고 함부로 너의 전재산을 보였니? 가령 말이다, 내일 새벽에라도 너의 통장과
돈을 빼내 달아난다면……
에이, 아저씨두. 난 또 무슨 말이라고, 아무렴 아저씨 같은 분이……
녀석은 아직도 잠에서 덜 깬 얼굴이었지만 비시시 웃었다.
아니다. 사람을 그렇게 함부로 믿어서는 못 쓰는 법이야. 겉만 보고는 알 수가 없어.
저두 사람깨나 겪었다면 겪은 셈이죠. 적어도 아저씨는 아니예요.
나는 왠지 녀석이 무언가 일부러 꾸며대는 느낌이 들었다. 이 어린 놈이――나는 짐짓 정색을
했다.
사람이 따로 없다. 더구나 나는 지금 몹시 궁해. 너의 오만원이면 모든게 쉽게 풀릴 수 있단
말이다.
사람들은 모두 궁해요. 돈은 항상 누구에게나 필요하죠.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말예
요.
그럼 너는 아무나 믿을 수 있단 말이냐? 그렇게도 사람 보는 데 자신이 있어?
나는 거의 분한 기분까지 들며 다그치듯 물었다. 그러자 녀석은 웃음기를 거두고 한동안 나를
말끄러미 쳐다보다가 되물었다.
그럼 아저씨는 지금까지 대략 몇번이나 속고 도둑맞아 보셨어요?
몹시 차분한 어조였다. 그 돌연한 반문에 나는 찔끔했다. 잠깐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이렇다
할 만큼 떠오르는 게 별로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걸 개인적인 행운으로 단정하며 무뚝뚝하게 대
답했다.
큰 것만도 서너번.
몹시 재수가 없으신 편이군요. 믿어 드리죠. 그런데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은 일은요?
다시 말끄러미 올려보는 녀석의 눈이 어쩐지 내 거짓말을 알아채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녀
석이 덧붙인 질문이 나를 더욱 당황스럽게 했다. 그것이야말로 얼른 떠오르는 큰 것만도 서너번
은 넘었다. 하지만 나는 태연을 가장했다.
글세, 그것도 도합 서너번?
이번에는 운이 좋으신 편이군요. 아저씨 나이가 되도록 그 정도의 도움 밖에 받지 않고 견딜
수 있으셨다니 말예요. 어쩌면 기억이 잘못 됐을지도 몰라요. 흔히 남이 도와준 것은 잊기 쉬운
반면 해를 당한 것은 잘 기억되니까요. 하지만 저 같은 것도 차근히만 기억해보면 해꼬지당한 것
보다는 도움받은 적이 많은 것 같아요.
……
거기다가 또 하나 이상한게 있더군요. 사람들은 왜 자기가 겪어보지 않은 일을 남의 말만 듣고
도 그렇게 잘 믿죠? 옆에 도둑맞은 사람이 있으면 마치 자기가 도둑맞은 것처럼 법석을 떨며 세
상을 무조건 의심하려 들죠.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에요.
녀석의 말에는 여전히 꾸밈의 흔적이 있었지만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을 만큼 진지했다. 이번에
는 설득조로 말했다.
그래도 정말로 나쁜 사람들은 있단다.
그것도 그렇죠. 생각해 보세요. 아저씨는 여지껏 한 번도 남을 속이거나 남의 것을 훔친 적이
없으세요?
하기야 그럴 때도 있었겠지. 어쩔 수 없이……
바로 그거예요. 누구든 어쩔 수 없을 때만 나쁜 짓을 하죠. 그리고 실제로도 그런 일의 대부분
은 서로 잊고 용서할 수 있는 정도예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조그만 일을 당해도 그걸 떠벌리고,
남을 미워하고 의심하도록 권해요.
아니야, 분명 용서받지 못할 사람들도 있어.
나의 석득조는 차츰 간청하는 투로 변해 갔다. 녀석과 얘기를 해나가면 나갈수록 번지르르하게
나를 감추고 있는 옷들이 벗겨지고 추악한 내 몸뚱아리가 하나씩 하나씩 겉으로 드러나는 듯한
느낌에 나는 혼란되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는 아랑곳 없이 녀석은 꿋꿋하게 내 말을 받았다.
용서받지 못할 사람들이라구요? 그런 사람들은 세상에 없어요. 그런 사람들이라면 아저씨보단
제가 오히려 더 많이 겪었을 테죠. 그러나 필요없는 친절로 남을 괴롭히는 경우보다 그쪽이 더
드문 것 같아요. 그것도 모두 어쩔 수 없이……
그 말을 듣자 나는 갑자기 암담해졌다. 나야말로 분명 녀석에게 무언가를 당하고 있었지만 어이
없게도 그걸 받아들이는 나의 정조(情調)는 아득한 슬픔이었다. 이윽고 나는 볼품없이 허물어져
내렸다.
얘, 얘――
나는 앞뒤없이, 마치 허우적거리듯 녀석을 불렀다.
너, 나를 용서해 주겠니?
무얼요?
나, 나는 말이다, 네가 의심스러워서 여기다 몇분 안되는 돈을 감췄지……
나는 사전의 비닐 표지를 쥐어뜯다시피 감추어 둔 돈을 꺼내며 진심으로 괴롭게 고백했다.
팔아봤자 오백원도 안될 이 사전도――네가 훔쳐갈까봐 이렇게 베개로 삼고……
녀석은 그런 내가 정말로 뜻밖이라는 표정이었다. 잠시 어리둥절한 눈으로 나를 보다가 쓸쓸하
게 웃었다.
그건 할 수 없는 일이죠. 역 광장에서 사주 보는 할아버지가 그러시는데, 사람은 자기의 관상
에 책임을 져야 한댔어요. 아저씨가 절 그렇게 보셨다면 그건 당연히 제 책임이죠.
정말로 용서해 주겠니?
나는 더욱 절망적으로 물었다.
당연하다고 하잖아요? 세상에 정말로 용서받지 못할 일이 있다면 그건 바로 용서하지 못하는
것 아니겠어요?
나는 그대로 풀썩 주저앉고 싶은 심경이었다. 내 지식과 논리가 그렇게 맥없이 허물어지는 것을
경험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오오, 너. 나는 작은 거리낌도 없이 그 어린 놈을 껴안았다.
――그밤 나는 늦도록 잠들지 못했다. 영원히 새지 않을 것 같은 그 밤의 어둠 속에서 나는 탄
식처럼 중얼거렸다. 허망한 도회여, 허망한 삶이여, 배움이여. 그리고 그런 내 귓가에는 한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다. 육신의 영락(零落)보다 몇배나 더 처참한 영혼의 영락을 슬퍼하는
눈물이었다.
스물다섯 살
스물다섯 그 나이, 나는 그야말로 날건달이었다. 학교는 중퇴, 글도 법공부도 때려치우고 고향
에서 술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일어나는 것은 대개 아침 열 시경이었다. 비어 있기 일쑤인 부엌을 뒤져 아침밥을 몇 숟갈
뜨고 난 후 나는 거리로 나간다. 세수 같은 것은 얼굴에 때가 끼어 낯이 근지러울 정도가 되기
전엔 고려에 없다.
농사철이어서 거리엔 사람이 드물다.
어디로 가나.
나는 한동안 이리저리 궁리를 한다. 그러나 대체로 찾아가게 되는 곳은 공의진료소였다. 거기에
가면 흔하지 않은 말벗이 있었다. 레지던트 로 무의촌에서 의무적으로 공의(公醫) 노릇을 하고
있는 엄종수란 외과의였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 사람 이야기를 좀 하자. 그 얼마후 기약없이 그 사람과 헤어진 나는 오랫
동안 다시 만나지 못해 애태우다가 꼭 10년만인가 다시 만났다. 그는 서울에서 아버지가 의병원
을 물려받아 개업하고 있었는데 서로 옛말을 하며 회포를 푼 적이 있다.
그는 고려대 의대를 졸업하고 스물일곱인가 여덟의 나이로 그곳에서 유배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궁벽진 산골이고 보니 말벗이 제대로 있을 리 없었다. 어떤 우연한 기회에 인사를 나눈
후 둘은 곧잘 어울렸다. 나는 거의 매일 그가 있는 조그만 블록 진료소엘 들렀다.
아침 나절 그 곳에 들러보면 그는 텅빈 진료소에서 담배를 피우기가 십상이었다. 그러다가 들어
서는 나를 보고 반갑게 일어나서 심부름하는 소녀에게 진료소를 맡기고 나와 함께 밖으로 나온
다. 우리가 가는 곳은 어김없이 장터거리의 유일한 다방이었다.
말이 나왔으니까 그 다방 얘기도 좀 하자. 내가 다방이라고 불렀지만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도
회지의 다방과는 거리가 멀었다. 세 평 남짓한 이발소 이층에 좌석 열두어 개와 아가씨는 한 명
이 있었는데 커피를 판다는 것만이 다방이라고 부를수 있는 이유가 될까. 마담은 외지에서 들어
온 삼십대 중반의 이망인이었는데 나에게는 각별하게 대해 주었다. 분명 받을 길이 없는 줄 알면
서도 한 번도 외상차를 거절한 적이 없었으니까. 역시 지금 어디에 사는지 모르지만 고마운 사람
이었다.
그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며 우리는 그날 일정을 계획한다. 천렵을 나설까, 솔순을 따서 슬을 담
글까, 낚시를 갈까 등. 가장 잦은 것은 천렵이었다. 그렇게 결정이 나면 곧 작은 그물과 내 아래
또래인 좀 더 젊은 건달 몇을 찾아낸다. 그리고 소주 몇병과 남비를 준비해 가까운 개울로 나선
다. 내가 무일푼의 날건달이었으니, 어떠한 형태이든 경제적인 부담은 모두 엄종수씨가 맡았다.
모르긴 하지만 그때 공의 수입의 대부분을 나와 탕진했을 것이다.
시골 농번기엔 환자도 적다. 따라서 우리가 잡은 고기로 매운탕을 끓여 오후가 되도록 술잔을
기울여도 좀체로 방해되지 않는다. 때로 진료소에 남아있던 소녀가 급한 환자 때문에 달려올 때
가 있지만 그때도 엄종수씨는 십중팔구 일을 끝내고는 되돌아 왔다.
그러나 아직 그 자리는 천렵이 중심이고 술은 양념이다. 따라서 오후가 되면 약간 얼큰한 채 각
자 자기의 일로 돌아갔다. 엄종수씨는 간간 있는 환자를 받기 위해, 나는 나름대로의 소일거리를
찾아. 때로 나는 진료소까지 따라가 그가 찢어진 살을 꿰매거나 부러진 다리에 석고와 붕대로
기브스 를 하고 있는 것을 구경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내가 가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언덕
위에 있는 홀로 사시는 친척 할머니를 찾아간다. 그 할머니는 그 무렵 고향에서 내게 손가락질
하지 않는 몇 사람 중 하나였다.
나는 일쑤 거기서 늦은 점심을 들고 오후를 보냈다. 넓은 대청에서 낮잠을 자기도 하고, 구식
축음기에 몇 장 없는 경음악판을 얹어보기도 하면서, 그러다가 해가 뉘엿해지면 털고 일어나 집
으로 돌아간다. 언제나 궁한 내게 사위들이 가져다준 담배를 나눠주던 그 할머니의 인정은 십년
이 훨씬 넘은 지금도 따스하다.
너, 담배 있니……?
식구들과 제대로 얼굴을 맞대는 것은 저녁식사시간이 유일하였다. 불만스런 형의 침묵과 근심에
찬 어머니의 눈길 속에서 저녁을 끝내고 나면 나는 다시 진료소로 갔다. 엄종수씨와 내가 가르쳤
지만 그 무렵에는 한몫하는 포커꾼들이 모여들기 때문이었다. 중학교 미술선생, 친척 형님 하나,
새로 온 젊은 순경, 국민학교 교원, 그 넷 중 둘만 모이면 성원은 되었다. 결국 갚지 못하고 말
았지만 밑천은 엄종수씨에게 빌려 나는 그 저녁 게임에 끼어든다. 한판 잘 긁어 제대로 밑천을
돌려줄 때도 있지만 나는 대부분 잃는 편이었다. 한 번은 꼬박 27시간을 카드 를 놓지 앟은 적
도 있다.
포커판이 어우러지지 않은 날은 엄종수씨와 술을 마셨다. 스물다섯 살, 나는 열심히 살았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아니었고, 무명과 빈곤과 어둠 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것 때문에 나는 무섭게
마셔댔고 취하면 원인모를 분노로 세상에 대해 독설과 저주를 퍼붓거나 절망과 슬픔으로 쿨쩍거
렸다. 그럴 때 엄종수씨는 나를 달래면서 말했다.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파초의 푸른 꿈이 있지 않아요?
당시 유행하던 노래였다. 스물다섯 그 나이, 그것은 눈물겨운 세월의 뒤안길 이었다.
그해, 1979년 1월 전후
신춘문예 당선의 감격이 엊그제 있었던 일 같은데 벌써 10년이 지났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고
달프고도 바쁜 세월이었다. 신춘문예 당선은 갈망의 충족이 아니라 새로운 갈망의 시작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전 10년도 고달프고 바빴던 점에서는 그 뒤의 10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69년, 드
디어 나는 길을 문학으로 정한 뒤 나는 자주 반발하고 비틀거리기는 해도 이제 생각해보면 대체
로 열심히 그 길을 걸은 듯하다. 얼핏 보기에는 별나고 또 때로는 내 길과 멀리 떨어진 곳을 방
황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마음 속의 도달점은 늘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내 마지막 직장이 되고만 대구 매일신문사의 입사도 따져보면 내 마음 속의 도달점과 무관
하지 않았다. 1978년, 만 서른 살이 된 나는 마침내 오래 내 삶을 의지할 직장을 잡지 않으면 안
될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렸다. 그때는 모든 직장의 응시 연령 제한이 만30세 이하로 되어 있었는
데다 나는 벌써 어머니와 두 아이, 그리고 아내를 거느린 가장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새로 생긴 어떤 회사와 마침 수습기자 모집을 하고 있던 「매일신문」에 동시에 응시하고
필기시험에서는 그럭저럭 두 곳을 모두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된 것은 두 곳은 면접
시험이 같은 날인 점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곧 선택의 고민에 빠졌는데, 그때 선택의 기준이 된
게 문학이었다. 나중에 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니었지만, 그때로서는 신문쪽이 훨씬 문학에 아까워
보여 월급이 낮은데도 신문사 쪽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첫 한 해는 정신없이 지나갔다. 분주한 수습기간과 새로이 접하게 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노
력으로 문학마저 깜박깜박 잊었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듬해가 되면서 나는 벌써 내가 길을 잘못 들지 않았나 싶은 의구에 빠져들기 시작했
다. 도구〔言語〕의 공통성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결국 문학과는 별개의 가치세계라는게 점차 뚜
렷해진 데다, 설령 내가 그곳에 안주하려 한다 해도 동년배들보다는 거의 5,6년 늦은 출발이 그
걸 불안하게 만들었다. 특히 나이는 두어 살 어리면서 기수(期數)는 오히려 두어 기가 빠른 선배
기자들과의 관계는 어떤 굴욕감을 느끼게 할 때까지 있었다.
하기야 신문사가 내게 준 것도 적지는 않았다. 나는 수습기간 6개월을 빼고는 줄곧 편집부에 근
무했는데, 그때 내게 할당된 것은 하루 한판의 스포츠란 편집과 일주일에 두 번 정도의 특집판
편집이었다. 바꿔 말해, 하루에 기껏해야 두 시간만 일하면 다음에는 일할래야 할 것이 없었다.
그리고 나머지 여유는 자료실과 거기에 비치된 도서로 돌려져, 나는 몇 해만에 제법 푸근한 책읽
기를 즐길 수 있었다.
내가 동아일보의 신춘문예 중편부문 신설의 공고를 보게 된 것도 그 자료실에서였다. 그날도 여
느 날처럼 오전에 판을 끝내고 자료실에 갔는데, 그곳 담당 차장님의 책상 위에 마침내 그 공고
가 크게 박스 처리된 면이 펼쳐진 신문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렇잖아도 이래저래 다시 소설을 써봐야겠다고 마음을 다져오던 내게 그 공고는 참으로 적절한
계기가 되었다. 당시의 평균 문단 데뷔 연령을 많이 넘어서 있던 내게는 중편이란 듬직한 양식과
그 부문이 새롭게 특설되었다는 게 모든 걸 한꺼번에 보상해 줄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날 일직 집으로 돌아온 나는 몇 년만에 내 낡은 원고더미를 다시 뒤져보았다. 그때
내게 중편의 형태로 있던 원고는 『사람의 아들』『그해 겨울』『알타미라(뒷날의 들소)』등이었
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이미 한 번 쓴맛을 본 적이 있었고, 『그해 겨울』과『알타미라』
는 어쩐지 신춘문예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여러 해 신춘문예 당선 작품들을 눈여겨 봐온 나
름의 눈썰미에서였는데, 지금도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다.
가진 것 중에 마땅한 것이 없자, 나는 언뜻 그해 응모를 포기할까도 싶었다. 공고 자체가 늦었
는지 내 눈에 들어온 게 늦어서였는지 그때 이미 신춘문예원고마감일자는 한 달이 채 남아있지
않았다. 전문작가로 행세해 온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기간 가지고 볼 만한 중편 한 편을 만들
자신이 없는 판이니 그 때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런데 약간은 맥이 빠져 원고더미를 원래의 상자에 쑤셔 박던 내게 격렬한 결의와도 같은 충동
이 일어났다. 새로 써보자. 지금껏의 실패는 그것이 결국 맞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자 이내 쓰
고 싶은 소재까지도 떠올랐다. 제대 후에는 결코 입에 담지 않으리라고 맹세했던 군대 얘기였다.
군대 얘기가 내게 그렇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 데는 까닭이 있다. 나는 이런저런 방황 끝에
스물 일곱에, 그것도 결혼한 뒤 입대했는데, 그때의 내 심경은 실로 비참했다. 모든 일이 막히고
꼬여 기진맥진한 몸과 마음으로 도망치듯 때늦은 병역의무를 치르게 된 까닭이었다. 신병으로 더
블백을 들고 처음 자대신고를 하던 날 제대 출발을 하루 앞둔 고참병들이 어른스런 충고를 해주
었는데, 그 애들의 나이는 나보다 두엇씩이나 어렸다. 또 얼마 뒤에는 이사(二士)출신의 중대장
이 왔는데, 그는 바로 고향사람으로 내 여동생의 동기 동창생이었다. 거기다가 야포대(野砲隊)에
전방 근무였으니 직책이 편했다 해도 군대 맛은 제대로 본 셈이었다.
나는 밖에 나가면 군대시절 얘기를 그리운 듯 해대는 쓸개빠진 짓은 않으리라. 이 3년은 그대로
유적(流謫)과 모멸의 세월이었다.――제대해서 부대 정문을 출발하던 아침까지도 나는 그렇게 중
얼거렸다.
그런데 그로부터 겨우 3년밖에 지나지 않아 나는 갑자기 그 시절 얘기를 중편으로 엮어보고 싶
은 충동을 느낀 것이었다. 마음에 맺힌 것이 어지간히 많았던지 소재는 오히려 중편으로는 넘쳐
흐를 정도였다. 구성과 주제 선정도 힘들지 않게 이루어졌고, 한동안 글을 안 써서인지 열정도
있었다.
그로부터 한 20일 나는 그 중편에 몰두해 뭐가 뭔지 모르는 밤낮을 보냈다. 그 동안의 축적이
위력을 발휘한 것인지 아니면 요샛말로 운때가 맞아떨어진 건지 그렇게 술술 글이 풀린 경혐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대학노트에 암호 같은 날려쓰기로 작품을 시작한지 스무날 남짓에 나는 원고
지로 280매 분의 중편 한 편을 완성해냈다.
내가 정작 당락의 문제에 신경을 쓰게 된 것은 당시 인쇄소를 경영하던 작은 형에게 아직도 깨
끗하지 못한 세 번째 원고지를 넘긴 뒤였다. 공타라는, 그 무렵으로 봐서는 흔치 않은 정서(整
書) 방법을 활용하기 위해 원고를 넘기기 전 나는 한 번 더 읽게 되었는데 거기서 몇 가지 문제
점이 보였다.
그 첫째는 문학 외적(文學外的)인 것으로 내가 응모하던 1978년은 유신체제로 보면 말기요, 군
사문화로는 나름대로의 한 절정이었다. 거기에 군대 얘기를, 그것도 부정적이거나 최소한 비우호
적(非友好的)인 시작으로 꾸며 과연 심사를 통과할 수 있을까가 갑자기 걱정되기 시작했다. 뒷날
그 작품은 배포 중지가 되어 5공화국이 끝난 뒤에야 다시 책으로 묶일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아
반드시 기우도 아니었다.
두 번째는 작품 자체의 문제점이었다. 모든 게 대체로 만족스러웠지만, 끝부분에 죽음의 효과를
너무 남용한 게 마음에 걸렸다. 지금도 나는 『새하곡』을 내 작품 중에서 가장 신춘문예적이라
고 보는데 그것은 아마도 강렬한 인상효과에 집착해 죽음을 남용한 끝부분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때로서는 그 어떤 문제점도 손을 대볼 수가 없었다. 첫째 문제는 작품을 포기하지 않
는 한 어딘가는 여전히 남게 될 성질의 것이었고, 두 번째 문제는 꽉 짜인 구성을 크게 허물지
않고는 누구의 죽음도 빼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할 수 없지. 떨어지면 또 한 번 힘든 연습을 한 걸로 치자.――이윽고 나는 그렇게 마음을 굳히
고 걱정되고 불만스런대로 원고를 우송하고 말았다. 원고를 보낼 때의 마음가짐이 그랬던 만큼
당선의 기대 또한 당연히 줄어들었다.
그런데 그해 12월 22일 아침이었다. 전날 과음을 해 쓰린 속으로 한 면의 스포츠란을 편집하고
있는데 선배 기자 한 분이 전화를 건내주며 말했다.
동아일보에서 전화가 왔는데……
만약 그날이 25,6일만 돼도 나는 어느 정도 짐작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22일, 글 보낸 지 열흘
남짓만에 온 전화라 나는 아무래도 신춘문예와 연결이 지어지지 않았다. 그 무렵 동아일보에 근
무하던 친구인가 싶어 수화기를 드니 역시 나처럼 전날 밤의 술기운이 남은 듯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이문열씨요? 중편 당선이 확정되었으니 당선소감 써서 한 번 올라오쇼.
나중에 알고보니 문화부 박병서 기자였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그 당선통지는 기억으로 조립
된 것일 뿐, 그때 내 귀에 들린 말은 이문열 과 당선 두 단어뿐이었다. 내 본명이 아니라 이
문열로 불림으로써 비로소 그 일이 신춘문예와 관련된 것이라는 걸 알았으며, 뒤이어 당선이란
말이 벽력처럼 고막을 후리자 나는 그대로 멍해져버린 것이었다.
그 뒤 꿈같이 보낸 며칠의 감격을 새삼 장황스레 늘어놓는 짓거리는 그만 두자. 주위에서 벌어
졌던 작은 법석도. 다만 한 가지 내가 그 취한 듯한 감격에서 깨어난 날은 말해야겠다.
내가 머리에 찬물을 뒤집어 쓴 듯 그 감격에서 깨어난 것은 첫 번째 청탁을 받았을 때였다. 소
위 재고(在庫) 란 것에 비교적 자신있게 출발한 나였지만, 막살 주려고 보니 자신있게 줄 것이
없었다. 새로 써서 주자니 원고지 한 칸이 운동장만큼이나 넓어 보이고……. 결국은 한동안을 재
고로 버텼지만, 그것들이 하나하나 세상으로 던져질 때의 내 부끄러움과 가슴조임은 그 이전의
기쁨과 감격을 급격히 씻어냈다. 그리하여 여섯 달도 채 지나기 전에 나는 고달픈 작가가 되어
있었다.
헤아려보면 10년 저쪽의 일이지만, 느낌으로는 엊그제 같은 나의 신춘시절이었다.
피·기질·환경·사랑 그리고 소설
무엇이 한 어린 영혼을 들쑤셔, 말과 글의 그 비실제적 효용에 대한 매혹을 기르고,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모방의 열정과 그 허망한 성취에 대한 동경으로 들뜨게 한 것일까. 스스로의 문학적
인 재능에 대한 과장된 절망과 또 그만큼의 터무니 없는 확신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소중한 젊은
날을 탕진하게 한 뒤, 마침내는 별 가망 없는 언어의 장인(匠人)이 되어 남은 긴 세월 스스로를
물어 뜯으며 살아가게 만든 것일까. 이따금씩 독자나 청중 또는 문학 담당기자들로부터, 왜 당신
은 말과 글을 당신의 도구로 선택하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젊은 날 내 재능과 자
질에 대해 그토록 자주 느꼈던 것보다 더 캄캄한 절망을 느끼곤 한다. 실로 그 무엇이 일찍이 내
앞에 펼쳐져 있던 그 숱한 가능성 중에서, 투입(投入)과 산출(産出)의 균형이 현저하게 깨져 있
는 이 감정적 생산의 일을 나의 일로 결정하게 한 것일까. 문단 한 모퉁이에 이름 석 자를 얹은
지도 이미 여러 해가 지났건만, 그리고 그 동안도 거듭되는 그 질문에 그토록 괴로워 하면서 답
을 마련하려 애썼건만, 아직도 나는 여전히 다른 사람이 벌써 말했거나 이런저런 문학 이론서에
씌어진 것 외에는 한 마디도 해줄 말이 없다.
뒤틀리고 부풀어진 언어가 연출하는 이 기묘한 성취의 분야에 관한 한 어이없게도 내가 먼저 품
었던 것은 희망이나 동경이 아니라 불길한 예감이었다. 뚜렷한 이유는 모르지만, 무언가 심상치
않은 저주를 짊어진 듯 여겨지는 그 몽롱한 언어의 조종사로 내 삶이 끝장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는 예감이 일찍 부터 나를 사로잡아, 나는 젊은 날의 많은 부분을 그 운명을 거부하기 위한 싸움
으로 보냈다.
따라서 오히려 내게 더 익숙한 것은 언어의 그 별난 전용(轉用)에 대하 비판과 부정의 논리였
다. 나는 힘들여 그런 생산의 허구성을 공격하고 그 효용성과 가치를 부인했으며, 그런저런 걸
바탕으로 정교하기 그지 없는 반문학(反文學)의 주장들을 짜맞추었다. 스스로를 설득해 보다 유
망한 가치의 길로 접어들게 하려 함이었는데 그때의 내 노력은 자못 진지하고 치열한 데까지 있
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여 버리고 떠난 말과 글의 세계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따로이 스스로를 설득
하거나 권유할 필요가 없었다. 날 저문 길 위에서 나그네가 고향집을 그리워하듯이, 장한 결심으
로 떠났던 새로운 길에 작은 좌절의 징후만 보여도 나는 두고 온 그 세계를 참회하듯 떠올렸으
며, 비록 주관적인 것에 지나지 않더라도 더 나아갈 수 없다는 판단만 서면 무슨 권리처럼 그 세
계로 당당하게 되돌아가곤 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종종 나를 이 오늘로 이끈 것이 피 또는 기질에서 비롯된 어떤 힘이 아닌가
묻는다. 나도 때로는 그런 의심에 동조하는데, 거기에는 확실히 약간의 근거가 있다. 직계조상들
이 남긴 부피 큰 문집(文集)도 그렇거니와 어머니의 추억에 따르면 어울리지 않게도 내 아버지까
지 그런 방향으로의 경사(傾斜)를 보여주고 있다. 곧 자신이 말려든 그 어림없는 싸움에 몰려 지
치고 고달플 때 그는 이따금 대학시절 한동안 탐닉했던 말과 글의 세계에 그대로 주질러 앉지 못
한 걸 한탄했으며, 그와는 달리 그 싸움이 잘 풀려 기가 나고 자신에 차게 될 때도 혁명 투쟁의
장엄한 서사시를 남기리라는 따위 가당찮은 희망을 말하곤 했다고 한다.
결국 그 비슷하게는 삶을 채우지 못했지만, 내 형 또한 죽는 날까지 그 성취를 갈망하고 동경했
던 것 중의 하나는 시(詩)였다. 소년 시절의 끄트머리에 어쩌다 한 번 미소를 보낸 적이 있을
뿐, 끝내 그를 받아들여주기를 거부한 그 비정한 마음의 연인에 대한 그리움은 지금도 때묻고 찌
든 한 권의 필사(筆寫) 시집으로 어설픈 소월풍(素月風)의 가락을 전해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피나 기질 만으로 나의 본능과도 같은 문학 지향성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많이 모자란다. 일찍이 그렇게나 나를 충동질하는 여러 비문학적 열정이나 야망과 견주어보면 그
게얼마나 무리한 설명인가는 금세 드러난다. 내 그런 피나 기질이 틀림없이 예사로운 것은 아니
지만, 그렇다고 내 모든 세속적인 열정과 야망을 온전히 압도해버릴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말과 글은 생각이나 느낌을 담은 그릇, 말과 글의 장인은 먼저 생각과 느낌에서 장인이어야 한
다. 그런데 내 삶의 과정에 특히 생각을 키우고 느낌을 넉넉하게 만드는 어떤 부분이 있어, 마침
내는 나로 하여금 말과 글로 그 생각과 느낌을 펼쳐내지 못하고는 못 배기게 만들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역시 근거 있는 추측이다. 어머니로서는 밝혀주기 싫거나 바로 설명하기 어려웠던,
그리고 초자아의 결여라는 말로는 그 의미를 다 담을 수 없는 아버지의 부재(不在), 알지 못할
불안에서 나중에는 피해망상으로까지 발전해간 연좌제(連坐制)의 그늘, 작은 파산(破産)에서 파
산으로 이어지는 것과 다름없던 가계(家計), 한 곳에서 3년이상을 머문 적이 없을만큼 떠돌이에
가까웠던 생활, 불규칙한데다 중단되기 일쑤였던 학업, 그러면서도 스스로 밥벌이를 해야 할만큼
은 아니어서 학교에 묶여 있던 또래의 아이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많았던 여유――이런 것들은 한
말과 글의 사람을 길러내는 토양으로 매우 그럴 듯해 보인다. 특히 학교를 다니지 않으면서도 빈
둥거리며 책을 읽거나 몽사에 잠길 시간들이 많았다는 것은 나 자신도 내가 오늘에 이르는데 거
이 결정적인 계기를 주었으리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아직 머리가 여물지 않은 여나믄 살의 나이에 적절한 충고나 이끌어주는 스승도 없이 하는 마구
잡이 책읽기는 틀림없이 가볍고 달콤한 얘깃거리가 중심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점점 읽기에 익숙해지면서 갈증은 점점 고급화되기 시작했을 것이며――거기서 마침내 나는 일찍
부터 문학과 대면하게 되었으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모든 아비 없는 아이, 가난뱅이 떠돌이가 다 말과 글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며, 독학의 끝장
이 반드시 한 작가 지망생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다. 분명히 그런 내 성장의 환경이 이 오늘에
중요한 몫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내가 이 쓸쓸하고 하염없는 쓰기를 내 일생의
일거리로 정했다고 단정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너무 일찍 왔고, 또 그만큼 허망히 끝났는데도 가슴 속에서는 남달리 오래 끈 내 첫사랑 또한
한 번쯤은 이 오늘로의 길잡이로 의심해볼 수 있다. 그 뒤의 길고 외로운 세월동안 이상화된 그
것은 나를 땅 위에 없는 것을 사랑하는데 익숙하게 했다. 하지만 비록 특별하다 해도, 사랑이 곧
말과 글의 사람을 만들어낸다고 하는 설명 역시 무리하기는 앞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만약 그렇
다면 세상은 시인과 작가로 넘칠 것이다.
이제쯤은 종합의 미덕을 끌어대, 앞서 말한 모든 것들이 서로의 모자람을 매워가며 나를 오늘의
이 길로 들어서게 했다고 설명해봄직도 하다. 성급한 사람들은 그걸로 모든 것이 풀렸다고 볼 지
모르나, 그래도 아직은 부족하다.
차라리 그 모든 조건보다 내게 더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앞서 말했던 그 예감이다. 까닭은 모
르지만, 일찍부터 무슨 각성처럼 나를 사로잡았던 그 불길한 예감, 내가 결국은 한 몽롱한 언어
의 조종사로서 끝장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그 자체가 오히려 어떤 거역 못할 암시의 힘으
로 나를 이끌어, 오늘날의 이 헤어날 길 없는 말과 글의 진창에다 나를 내팽개친 것은 아닐까.
듣기로 방울뱀은 나무 위에 앉은 다람쥐를 잡기 위해 나무위로 오르는 법이 없다고 한다. 나무
아래서 방울 소리와 함께 독기 품은 눈길로 가만히 올려다 보고만 있으면 불안에 미친 다람쥐가
공연히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뛰어다니다가 제김에 방울뱀의 턱 아래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동
물학자들은 그걸 어떻게 설명하는지 모르지만, 혹 그 다람쥐는 삶의 긴장을 견디다 못해 오히려
스스로 내던진 것은 아닐까. 실은 그것도한 선택이며 나의 선택도 바로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피니, 기질이니, 환경이니, 사랑이니, 하는 것들은 다만 그 불길만 예감을 절망적인 자기 투척
(自己投擲)으로 몰아간 자질구레한 동인(動因)들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진정으로 사랑했던 고향에로의 통로는 오직 기억으로만 존재할 뿐 이 세상의 지도로는 돌아갈
수 없다.
아무도 사라져 아름다운 시간 속으로, 그 자랑스러우면서도 음울한 전설과 장려한 낙일(落日)도
없이 무너져 내린 영광 속으로 돌아갈 수 없고, 현란하여 몽롱한 유년과 구름처럼 허망히 흘러가
버린 젊은 날의 꿈 속으로 돌아갈 수 없으므로, 한때는 열병 같은 희비(喜悲)의 원인이었으되 이
제는 똑같은 빛깔로만 떠오르는 지난 날의 애증과 낭비된 열정으로는 누구도 돌아갈 수 없으며
강풍에 실이 끊겨 가뭇없이 날려가버린 연처럼 그리운 날의 옛 노래도 두 번 다시 찾을 길 없으
므로.
우리들이야말로 진정한 고향을 가졌던 마지막 세대였지만 미처 우리가 늙죽기도 전에 그 고향은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몇 년 전 나는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란 글을 썼는데 그 에필로그는 이렇게 끝나
있다. 그 무렵만 해도 등단 초기여서 고향의 전통적인 가치관과 내가 선택한 가치(문학) 사이의
충돌을 몹시 괴로워 하고 있던 나는 일종의 결별사를 쓰는 심경이었다.
하지만 부모 형제에 대한 정 못지 않게 감정과 의지만으로는 잘라 버릴 수 없는게 또한 고향을
향한 정이다. 결국 그 글은 과장적인 문사의 감상문으로 끝타버리고, 나는 그 뒤에도 몇 번인가
이런저런 핑계로 고향을 드나들었다. 내 초라한 성공에 대한 비웃음이나 끊임없는 상실의 확인에
대한 두려움 보다는 무어라 이름할 수 없는 끈끈한 정과 인연의 끈이 더 질겼다고나 할까.
내 고향은 경상북도 영양군(英陽郡) 석보면(石保面)이다. 안동에서도 1백 20리나 태백산맥으로
파고든 곳으로서 지금은 제법 20리 밖까지 아스팔트가 이어졌지만 한때는 강원 남도란 말이 있을
정도로 오지중의 오지였다.
고향에는 아직도 2백 가구가 넘는 일가들이 살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내 옛집이 있는 원리동
(院里洞)에 그 절반인 백가구 가까운 일가들이 문중을 이루고 있다. 말하자면 전형적인 동족 부
락인 셈이다.
그런 고향을 제대로 소개하려면 아무래도 우리의 성씨인 재령(載寧) 이씨(자기 성에 씨를 붙이지
않는다지만)부터 시작 하는 것이 좋겠다. 재령 이씨는 이른바 월성(月城) 이씨 팔본(八本) 가운데
하나로, 고려조에 이칭(李 ――원래는 조상의 휘(諱)를 함부로 부르는 법이 아니지만 또한 독자의 저항
감을 생각해서 바로 쓴다)이란 분이 문하시중을 지내고 재령군에 봉해지면서 그 자손들이 재령을
본관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구식이긴 하지만 족보를 통해 보면 고려조에는 재령 이씨가 그런대로 행세했던 문벌이었던 것
같다. 공민왕의 부마(사위)인 분도 있고 두문동(杜問洞) 72현(賢)에도 여러 분이 든 걸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씨 조선이 들어서면서, 모은(茅隱) 선조 형제분의 영향으로 한동안 출사(出仕)가
끊어졌다가 세조 말이 되어서야 다시 환로에 나서게 되는데, 그 경과는 자칫 고리타분한 양반 자
랑이 될까 생략한다.
재령 이씨는 양주파(楊州派) 함안파 진주파 청도파 안인파(安仁派) 면천파(沔川派) 밀양파 영해
파(寧海派) 등이 있는데, 석보면에 사는 이들은 대개 통정대부 품계에 오른 이애(李 )란 분을
파조(派祖)로 삼는 영해파의 한 갈래다. 원리동의 우리 문중은 흔히 큰종가 라고 부르는 석계종
가(石溪宗家)와 작은종가 라고 부르는 항재종가(恒齋宗家), 그리고 그냥 큰집 이라 부르는 사
파종가(私派宗家) 몇 집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나의 큰형님은 그 사파종가 가운데 한 집
안의 12대 종손이 된다. 석보로 처음 옮겨 사시게 된 입향조나 입향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시기는 대개 숙종조로 지금으로부터 한 3백 년 전쯤으로 알고 있다.
석보는 물론 영해를 합쳐 보아도 조선조에서의 관운은 그리 좋았던 것 같지 않다. 남인에 속해
숙종조에 잠깐 빛을 본 것 외에는 대개 사람에 묻혀 지냈다. 그러나 한문만은 인근의 대성과 어
깨를 겨룰 만했던 것으로 보인다. 퇴계학통의 중요한 흐름 가운데 하나로 퇴계 이황에서 학봉(鶴
峰) 김성일(金誠一),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밀암(密庵) 이재
(李栽)로 이어지는 선이 있는데, 갈암과 밀암 두분이 모두 우리 영해파에 속한다. 특히 갈암 선
조와 그 바로 웃대인 석계(石溪) 선조, 그리고 그 배위이신 정부인(貞夫人) 장씨(경당 장흥효의
따님)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자면 길지만, 또한 대단찮은 양반 자랑으로 몰릴까 드려워 이쯤에서
성씨 소개를 끝내기로 한다.
대구를 출발한 것이 아홉시 반쯤이었다. 마침 차가 봉고 나인이어서 빈 자리가 남기에 어머님과
큰형님 내외분, 그리고 태어나서는 한 번도 고향에 가 보지 못한 세 살박이 막내딸 기혜도 함께
출발했다. 예전엔 너댓 시간 걸리던 고향길이 이제는 넓고 포장된 도로 덕분에 세 시간이 채 걸
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시간만으로도 나와 고향을 맺고 있는 짧지 않은 세우러과 굽이굽이 얽힌
추억을 되새겨 보기에는 충분했다.
내 고향은 분명 영양군 석보면 원리동이지만 불행히도 나는 그곳에서 태어나는 인연을 갖지 못
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천석 재산을 팔아 허망한 건국사업에 열중하시던 아버님 덕분에 내
가 태어난 곳은 서울 청운동의 지금은 헐려버린 어느 아파트였다. 그리고 그 뒤로도 2년간 나는
서울거리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자락다가 세 살 때 6·25가 터지면서 비로소 어머님의 친정인 영
천을 거쳐 고향에 돌아가게 되었다. 갑자기 가장을 잃고 어린 5남매와 시어머니만 남게 되자 아
직도 팔리지 않고 있던 고가와 전답에 의지하기 위해 어머님께서 주장하신 귀향이었다.
그 첫 번째 귀향에서 나는 대략 4년쯤 고향에 머물렀다. 일곱 살 때 안동으로 옮겨가 그 이듬해
국민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절의 기억은 하도 희미하여 고향은 거의 살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 다음 귀향은 열 세 살때였다. 안동 서울 밀양 등을 떠돌며 살다가, 큰형님
이 궁금해서 제대를 하는 것과 함께 다시 고향에 모여 살아보기로 결정을 본 것이었다. 그 무렵
은 우리 여섯 식구가 이곳저곳에 뿔뿔이 헤어져 고생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특히 나는 학교 때
문에 고아원에서 지내고 있었다.
아직도 빈곤에 찌들어 있던 60년대 초의 사회였던 만큼 고아원 생활은 무척 어려웠다. 그 바람
에 고향은 무슨 구원이나 꿈에 그리던 낙원으로까지 상상되었다. 고향에 돌아감으로써 중학교를
한 학기 다닌 것으로 내 학업이 끝장나 버릴 수도 있다는 위험도 뒤따랐지만, 나는 기쁘게 고향
으로 출발했다. 이미 고가는 팔린 뒤라 다 쓰러져 가는 옛 농막집의 방 한 칸을 치우고 출발했으
나 한 동안은 좋은 세월이었다. 오랜 객지 생활로 인정에 굶주려 있던 내게 갑자기 생긴 듯한 수
많은 일가는 그대로 경이였고, 형제 자매들 곁에서 어머님이 끓여주는 밥을 먹는것도 새삼스런
감격이었다. 그때 형님은 한 2만 평 정도의 야산을 개간하실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그 일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정부의 보조금으로 우리는 1년도 안돼 선선 발치에 2만 평의 밭을 일구었
다. 그 과정에서 도시 생활을 잊고 농군이 된 형님을 따라 나 또한 작은 일꾼이 되어 뙤약볕 아
래 따라다녔지만, 적어도 고아원에 딸린 농원에서의 그 진절머리나던 작업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
었다.
그러나 시련은 곧 왔다. 밭을 일구었다지만 그것은 그저 야산에서 나무와 잡초를 캐내었다는 정
도여서 2만평의 수확이란 게 양식조차 되지 않았다. 아주 심한 경우에는 넣은 종자 만큼의 수확
도 거둬들이지 못할 때가 있었다. 거기다가 거의 중단된 상태인 학업도 문제가 되었다. 중학교는
고등공민학교를 거쳐 검정고시로 해결했지만 고등학교는 그런 방도조차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이래저래 우리는 3년만에 애써 일군 그 땅을 헐값에 처분하고 다시 도회의 하층민으로 돌아갔
다. 나로 보면 두 번째의 실향이었다. 몇 군데 작품에서 비치고 있지만 그 뒤 5년 동안 나는 안
동을 거쳐 부산으로 부산에서 서울로 오락가락 하며 고향과는 무관하게 살았다.
그러다가 내 나이 스무살 때 나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역시 여기저기 다니며 고생하시던
큰 형님이 난데없이 고향 장터 거리에다 여관겸 술집을 여시고 계셨는데, 서울사대를 첫 번째 휴
학하고 떠돌던 내가 그리로 돌아간 것이다. 그 여관겸 술집에 대해선 『그해겨울』에 비교적 비
슷하게 그려져 있다.
그 뒤 다시 고향을 떠날 때까지 10년 가까운 세월을 나는 그곳에서 살았다. 고시공부를 한답시
고 절로 떠돌아 다니고 군대도 다녀오고 했지만, 적어도 이런저런 일이 끝나면 마지막으로돌아가
는 곳이 고향이었다는 점에서 그곳에 살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고향을 세심한 관찰의 눈길
로 보게 된 것도 그 무렵이며,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라는 소설의 소재 대부분을
얻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내가 세 번째로 실향한 것은 군대에서 제대하고 나온 직후였다. 그 사이 나는 장남과 아내를 거
느린 서른 살의 가장이 되어있어 어떻게든 그들을 부양해야 했는데, 고향 같은 곳에서는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온 곳이 대구였다. 그해 겨울에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입선하
고 이태 뒤 「동아일보」에 중편이 당선되고――이런 식으로 시간이 지나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
다.
고향에 도착하니 그럭저럭 점심 때가 되어 있었다. 나는 먼저 우리 옛집을 찾았다. 언덕 위에
자리잡은 대지 5백 평에 40간쯤 되는 고가로 아버님의 위로 9대가 살아온 집이었다. 지은지 이미
2백 년이 넘어 퇴락해 있었지만 아직 기둥이 기울거나 비가 새지는 안는 정도였다.
50년대 중간쯤 할머니의 병구완을 위해 헐값(파는 쪽 입장으로는 언제나 헐값이다)으로 집안에게
넘겼는데, 나는 거기 대해 짧은 추억을 가지고 있다. 아직 예닐곱 살 때였지만 어머니를 따라 팔
린 집에 간 나는 어떤 심술에서였는지 서실(書室) 앞 연못가의 해당화 줄기를 뽑아제끼며 그 집
을 산 집안 어른에게 나름의 항변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뒤로 고향에 들르기만 하면 맨 먼
저 찾는 것이 그 집이었으며, 그 집 마당에서는 또한 반드시 내가 자라 그 집을 되찾으리라는 맹
세를 되뇌곤 했다.
최근까지도 그 집을 지키던 집안 어른은 얼마 전 서울에 있는 내게는 아저씨뻘 되는 아들에게로
옮겨가, 남에게 맡겨둔 집안은 조용했다. 입구(口)자로 된 안채를 둘러보고 나오는데 문간방 문
틀 위에 걸린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해상고택(海上古宅) 이란5대조 좌해공(左海公)의 진적(眞
蹟)이라고 알아온 액자였다. 태어난 곳에까지 좌해태지(左海胎地)란 비석이 설 정도로 영남의 유
림에서는 알려졌다는 분으로 그분의 문집 9권이 간행을 기다리며 아직도 내 방 책장 안에 보관되
어 있다. 원래 그 해상고택 이란 글씨는 바깥 서실에 현관 대신 걸려 있던 것인데, 새로 집주인
이 되신 집안 어른이 거기에는 석간정사(石澗精舍)인가 하는 현판을 새로 새겨 걸고 그것은 문간
방(안채 사랑방)으로 옮겨 단 것이었다. 조상의 글씨가 원래 있을 곳에 있지 못하고 흘대를 당하
는 듯한 느낌에 새삼스레 가슴이 썰렁해졌다. 이 몇 년 도회적인 삶에 익숙해지면서 희미해져버
린 옛결의가 문득 되살아났다. 만약 주인공들과 얘기가 된다면 옛날 판 값의 천배를 주고라도 되
사고 싶은 심경이었다.
그 집 앞뜰에서 보면 통상 갱변(강변) 이라 부르는 넓은 들이 보인가. 지금은 우리 땅이라고는
한 뼘도 안 남았지만 한때는 2백 마지기가 넘는 추수로 우리 재산의 중요한 일부였었다. 이재에
밝으셨던 증조부께서 본시 황무지였던 것을 사람을 사 논으로 뜨신 들인데, 일부는 아버지의 그
요란 뻑적지근한 건국사업에,일부는 토지개혁으로, 그리고 나머지는 국도며 중학교 부지로 우리
소유에서 떠나 버렸던 것이다.
우리 집 옆은 오일도(吳一島) 등과 함께 활약했던 30년대의 시인 이병각(李秉珏)의 생가가 있
다. 젊어 죽어 그리 많은 작품이 남아 있지 않지만 「낙동강」같은 시는 원로시인 가운데는 아직
도 기억사는 분이 많다. 그밖에도 그 언덕을 중심으로 사오십간의 고가가 아홉채쯤 된다. 원래는
열 한 채였다는데, 제일 좋은 집은 6·25전 공비들에 의해 불타고 또 한 집은 무너져 아홉채만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집을 둘러본 다음 나는 뒷재 라고 불리는 고향 뒷산으로 갔다 조그만 산 언덕인데 사람이 깎은
것처럼 평평한 금잔디 밭이 만 평 가까이 펼쳐져 있는 곳이다. 그곳에다 무엇을 짓거나 세우면
우리 문중이 망한다는 전설이 있어 아직도 용케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밭으로도 초지로도 목
장으로도 과수원으로도, 더할 나위없이 좋은 땅인데, 근래 거기다 고등학교를 세운다는 말이 있
어 내가 섭섭해 한 적이 있었다. 소문은 결국 소문으로 그쳤지만, 옛전설을 그 언덕이 본 모습대
로 보존되기를 바라는 조상들의 마음으로 해석해, 언제까지든 그대로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
절하다.
그 다음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개남댁이라는 고가다. 역시 일가 집으로(언덕 위에 있는 골기
와집은 아직도 무조건 우리 일가다) 내가 고향에서 쓰라린 시절을 보낼 때 나를 특히 아껴주신 우각
할머니란 분이 계시던 집이다. 근년 초에 돌아가셨는데 한 가지 가슴 아픈 일은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라는 책에서 그 집을 배경으로 너무 터무니없는 얘기를 지어낸 바람에 혹시
라도 심려를 끼쳐드리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이 자리를 빌어 그 작품은 허구일 뿐 진실과는
멀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밝힘과 아울러 늦게나마 우각 할머니의 명복을 빈다. 부음을 들은 것은
돌아가신 지 사흘이나 지난 뒤 서울로 가는 기차 안이어서 장례식조차 참석하지 못한 것이 아직
도 죄스럽다.
집안에 들어가니 전에 우리 집처럼 드나들던 안채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그분의 한 분 아
드님은 625에 우러복하셔서 생사를 모르고 따님들만 넷이 있어 후사 문제로 약간의 논란이 있는
모양이었다. 남의 집안 문제라 간섭할 일은 아니지만 어떤 형태로든 원만한 해결을 보아 고향에
서 우각댁(牛角宅)이란 집이 없어지지 않기만을 빌 뿐이다. 최소한 다른 성씨에게 그 집이 넘어
가는 변괴만이라도 없기를.
그 밖에 몇 집을 들러 인사를 드리고, 장터 구경을 한 뒤 한 곳 모내기 하는 곳을 들러 막걸리
드어 사발을 덛어걸쳤다.
도시민 중심의 정책이 울분에 가까운 불만으로 그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이거는 뭐 사는게 아이고 그양 삐치는(가까스로 참아 나가는) 게라……
물론 과장이야 있겠지만, 내 눈에도 그들의 힘겨움은 군데군데서 드러나고 있었다.
그럭저럭 하다 보니 어느새 시계는 오후 4시를 넘기고 있었다. 돌아가 급히 써야 할 글이 있는
나로서는 서둘러야 할 시각이었다. 하지만 빠뜨릴 수 없는 곳이 개간지였다. 원래는 12대 조상의
큰 산소가 있는 산으로 그 땅을 개간하던 때의 얘기는 앞서 잠깐 한 적이 있다.
큰형님과 함께 지은 담집(흙담을 쌓아 지붕을 얹은 집)이 아직도 나직하게 서 있었다. 그때 기초
를 허술히 해서 한쪽으로 비스듬히 넘어가던 집이었는데 용케 지금까지 버틴 것이었다.
발둑에 올라서자 2만 평의 땅이 한 눈에 들어왔다. 나의 대지는 붉다…… ――그때까지도 한
시인 지망생이었던 큰형님이 그렇게 노래했던 그 황무지는 이제 옥토로 변해 과수원도 되고 고추
밭도 되어 있었다. 일꾼들이 식수통을 메고 뙤약볕 아래 오르내리던 일이며, 키만 높다랗던 호밀
밭을 베나가던 일이 아련히 떠올랐다. 콩 두 되를 뿌려 한 되 반밖에 거두지 못했던 기억도.
내가 돌아와 밤샘을 각오하면서도 더 이상 시간에 개의치 않게 된 것은 아마도 거기서 촉발된
미묘한 감정 때문이었다. 그때에 비하면 나는 흙으로부터, 그리고 건강한 노동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생명과 실질적으로 그 생명을 유지하는 생산으로부터 나는 얼마나 멀리 와 있는
가. 이제는 귀거래사조차도 얄팍한 흥이 되고 말았다…….
우리가 그곳을 떠난 것은 형님이 가져간 그물로 투망을 쳐 매운탕을 끓여 먹고 소주에 얼큰해진
뒤였다. 날이 저물고서야 겨우 도회에서 시간을 다투며 나를 기다리는 일감이 떠오른 것이었다.
어둑한 차창 밖을 내다보면서 비로소 나는 토머스 울프가 「그대 다시 고향에 못 가리」를 쓰고
다시 「천사의 고향」을 돌아보라란 글을 쓰게 된 심경을 이해할 것 같았다.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그곳이 차마 꿈인들 잊힐 리야……
제3부
영혼이 머물 집
젊은 날의 일기
…우리들의 상상이나 추측을 털고 그것 자체를 냉정히 살핀다면, 죽음처럼 고독 또한 반드시 고
통스런 것일 수만은 없다. 해방이며 충일이며 여러 가지 값진 정신활동의 가장 유용한 환경일 수
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고통이라 단정하고 겁내는 것은 순전히 우리들의 상상과 추측
에서 온 과장이나 왜곡 탓인 듯하다. 사실 얼마나 많은 위대한 영혼들이 그 고독 속에서 그들의
사상을 심화시키고 인식의 수준을 보다 높일 수 있었던가.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만이 인
간을 냉정하게 볼 수가 있고, 정직하게 미워할 수 있으며 진실로 사랑할 수 있다. 그런데도 너는
그 고독이 두려워 거리의 흥행사와도 흡사하게 천민들과의 무분별한 관계를 확대시켜 가고 있
다….
일기抄
서울1970년 1월 1일
모든 것이 다 끝나버린 것처럼 축 쳐지고 우울한 기분, 작취미성(昨醉未醒)의 흐릿한 머리로 약
간의 독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몇 페이지 읽었다. 이 지성(知性)으로 포만감에
빠진 로마인은 참으로 귀한 말을 내게 들려주었다.
책에 대한 갈망을 포기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오뇌가 없어지고, 쾌활하고 성실히, 그리고 마음
속으로부터 신(神)들에게 감사하며 죽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나의 앞날에 대해서 얘기하다(아직 歸省하지 않고 있던 다른 하숙생들과 했는듯――編者 ). 사
람들은 내 자유(이때 作家는 이미 大學中退를 결정하고 있었음――編者 )에 대해 모두가 비관적
견해이다. 출발하기도 전에 벌써 피로하다. 아아! 나는 또 어떤 미망에 사로잡힌 것일까.
퇴각하는 패장(敗將) 답게 비장감(悲壯感)으로, 그러나 어지러운 발자욱은 지우고, 갑주의 편린
마져 주워모은 후, 기차는 정연히, 약간은 피로해도 좋으니 침착히……돌아가자, 내 아성(牙城)
으로.
죽음이 멀지 않은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예감. 이 지독한 우울, 이 권태.
1월 3일
다시 한 번, 모든 것은 끝났다. 서울에서의 내 날들은 이제 다했다.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
가고……텅빈 하숙집.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지만, 아직도 크라라는 너무 많이 내 생활 속에 살아 있
다. 어쩌다 펴보는 지난 날의 일기장 갈피, 원고뭉치 속에 끼어있는 그녀의 주소 쪽지, 내가 띄
웠던, 그러나 이별에 즈음하여서는 악착같이 되찾고만 편지 몇 장, 미처 돌려주지 못한 작은 책
자(冊子)……내가 깜짝깜짝 놀랄 만큼 그녀는 자주 내 생활 속에, 그리고 망연한 사념 속에 나타
난다.
현명과 애착, 이 두 가지를 함께 지니기는 진실로 어려운 일이다. 이제 항시 열려 있는 내 마음
의 문으로도 결코 돌아올 것 같지 않은 그녀건만 내 마음은 아직도 어리석은 애착으로 시달리고
있다.
오, 진정으로 자유롭던 영혼, 선량하던 의지. 무엇인가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고 보답 받기를
원하지 않던 여자――나는 그녀를 어떻게 대했던가. 터무니없는 오만과 독단, 그리고 보상의 원
리에만 얽매인 속물 근성으로 끊임없이 상처주고, 이윽고는 나로부터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만들
었다. 그래서 이제 내게 남은 게 무어란 말인가. 참으로 구제받을 수 없는 자. 이 쓰디쓴 공허
감. 진실로 내게도 세계와 인생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건만, 그런대로 청춘의 축복도
있었다. Adieu! Pour tant Je t'aime.(안녕히,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뜻으로 쓴 듯――編者 )
고골리의 「외투」를 다시 읽었다. 여전히 감동, 감동. 아까끼아까끼예비치의 보잘 것 없는 생
애를 이 거장(巨匠)은 무한한 연민과 공감으로 보지 않을 수 없게 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격
찬――우리들은 모두 외투에서 나왔다――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이것이 문학이다.
자만에 빠진 주지주의(主知主義), 허영에 찬 의식의 흐름, 호들갑을 떠는 실존(實存), 그들은 모
두 헛된 바벨탑을 쌓아가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그들은 현대라는 세기가 마치 인류사의 한 이변
(異變)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벌리고 과장하면서, 오직 그들만이 선택된 인간인 것처럼 선량한 민
중으로부터, 대지와 생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허공에다 탑을 쌓고 있지만 징벌의 날은 멀지 않
았다. 자신의 기발한 상상력이나 엉뚱한 속단, 또는 온전히 허풍으로만 어우러진 그들만의 상형
문자(象形文字)를 평범한 민중들이 해독하지 못한다고 온갖 조롱과 야유를 퍼붓고 있지만, 기실
그들이야말로 지신들이 그토록 좋아한 부조리나 소외감·고독·허무 같은 것에 미쳐 죽거나 이윽
고는 무너져 내릴 그 바벨탑과 더불어 땅에 떨어져 묻히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아, 불행한 사람
들이여. 당신들은 지나친 앎을, 민감을 경계하여라. 자신의 감정을 과장하지 말고 정직하여라.
진실되고 단순하거라.
1월 4일
참으로 요란스러웠던 지난 한 해 때문에 나는 외롭다는 것에 무척 서툴러져 버렸다. 석보(石
保――作家의 고향)에서 새로 시작한 생활이 갑자기 두려워진다. 오늘처럼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 날들이――단순히 나 홀로 있다는 사실 때문에!――석보에서 계속된다면 정말로 어쩔 것인
가. 독서에도 무척 서툴러졌다. 흥미가 없는 것은 도대체가 손대기조차 싫다. 지난 날 그토록 지
식에 탐욕을 부리던 나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방종하고 나태하게 보낸 세월의 저주가 이제 이렇
게 나타난 것일까.
집에서는 여전히 소식이 없다(이때 작가는 집에서 올 송금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생활을 청산할――
編者 ). 마치 지난 일 년의 생활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듯, 그래서 내게 화를 내고나 있다는
듯.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
막을 내려라. 막을 내려라. 어릿광대짓은 끝났다. 마지막 잔까지 다 따르고 빈 잔을 쳐다보고
앉은 기분, 내 청춘의.
1월 12일
이번에 귀향하면 나는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혹사당해 온 내 육체를 가꾸지 않으면 안되겠다. 실
로 여지껏 내 육체는 정신의 횡포 아래 너무도 끔찍한 확대를 당해 왔다. 이 정도의 건강을 지켜
온 것은 신의 은총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 무절제한 술과 담배, 그 수많은 불면의 밤들. 이
제라도 정신차려 내 몸을 돌보지 않으면 뒷날 후회를 면치 못하리라. 미덥고 튼튼한 집을 내 영
혼에게 선사하자. 그리하여 그것으로 하여금 이 땅에서 필요할 때까지는 언제든 마음놓고 머무르
게 하자.
1월 16일
정동(貞洞)에 갔다왔다.
술 취해 지나가는 옛 여인의 집이여.
눈물 흐를까 고개 젖히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 선 슬픔이여.
언 문고리에 손길되어 머물다.
1월 18일
내가 이윽고 한 작가로 끝장을 보게 되로 말리라는 조짐은 일찍이 내 인생 도처에서 보여져 왔
다. 내게 재능이 있었던 것인지, 노력해서 그리된 것인지는 알수 없지만, 그 방면에서는 언제나
상당한 결과를 얻어내는 데 실패한 적이 없다. 내가 숙명적으로 한 작가가 되리라는 예감을 갖게
된 것은 실로 그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내가 작가가 되려는 것은 기른 신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극히 수동적인, 예감에의 복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야말로 능동적으로 나는 내 운명에
도전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나는 작가가 되어야겠다…….
이제 내게 다가오는 하루하루는 그 목표에 바쳐져야 한다. 당장은 내가 사법고시를 준비할 작정
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부끄러워 해서는 안된다. 한 권의 문학서적을 더 앍는 것에 못지 않게 그
것(사법시험)은 내 궁극적인 도달점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 또한 그리로 가는 한 우원(迂
遠)한 도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작가란 모든 것에 대해 알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작은 조물주이고, 그래서 한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전지(全知) 전능(全能)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나는 모든 것에 대해 알고 난 뒤에
내 얘기를 시작하리라.
내가 천부의 재능을 부여받지 못했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내가 위대하게 되지 못하리란 단정
으로 불안해 하거나 기죽을 필요도 없다. 다만 신앙하는 것이다. 경건하게 예배하는 것이다. 설
령 내가 찬란한 우주를 빚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한 송이 향기로운 꽃쯤이야 피울 수도 있지 않겠
는가. 그리고 그게 모든 걸 바쳐 얻은 것이라면 한 우주에 갈음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제 더는 회의해서는 안된다. 이미 이 오늘에 이른 이상 소설은 내 지상(至上)이며 문학은 내
종교가 되어야 한다. 나의 전부여야 한다. 이번 사법시험 준비도 이런한 바탕위에서 의미를 찾아
야 할 것이다. 우선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인간성의 정치적인 측면과 또 그것이 조직한 이 사회,
그리고 이 사회를 규율하는 법과 질서를 이해하는데 최선을 다하리라. 어쩔 수 없어 돌아온 것이
라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 시험에는 합격해야겠지만, 내게 남겨지는 더 큰 것은 뒷날
내 문학이 의지할 한 든든한 밑천이다.
그런 다음 나는 인류의 지나온 바 발자취와 문화란 고급한 형태의 정신적인 성취의 집적을 섭렵
할 것이고, 그동안 그들이 사유하고 탐색해낸 더 많은 진리에 내 정신을 바칠 것이다. 그리하여
때가 왔을때――드디어 내가 나름대로나마 세계와 인생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믿음이 설 때――
나는 그때껏 몰두했던 것을 훌훌히 털고 원래의 목표로 돌아가리라. 궁극으로 지향했던 내 자신
으로, 쓰고 살게 되리라는, 오, 쓰고 사랑하며 살게 되리라는 그 예감으로, 운명으로 돌아가리
라.
그때 후회하지 않도록, 아쉬움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라. 삶의 한 고비고비 설정되는 작은 목표
들이 무엇이건, 그것이 요구하는 지식들에 탐욕을 부려라. 개미처럼 모여들어라. 그것들이야말로
이윽고 네가 창조할 세계의 원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질과 양에 따라 창조되는 그 세계의
품위와 크기가 결정되는.
1월 19일
거의 열흘만에 하는 세수, 이것이 서울에서의 마지막 날들을 보내고 있는 내 상태다.
오후. 드디어 집에서 돈이 왔다. 나는 이제 서울을 떠난다. 새로운 날들로 출발한다.
1월 31일 석보(石保)
나는 찬란한 빛 아래 서 있다. 밝고 화려하고 생명에 찬.
사법시험에 필요한 모든 법학서적들을 마련했고 공부할 정자〔南嶽亭〕방도 깨끗이 치웠다. 내
일부터 법학이다. 몇 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당분간 법만이 나의 진리다.
2월 2일
나는 때때로 공상한다. 그것은 내가 체육가가 되어 있는 것이다. 투기건 구기건 육상이건 또는
아마추어건 프로건 상관없다. 그러한 나는 하루중 절반을 육체의 단련에 소모한다. 그리고 그 절
반은 건간하고 정직한 수면과 다른 모든 육체적인 일을 위해 바칠 것이다. 두뇌란 내 육체의 극
히 적은 부분을 차지한 한 기관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사유도 그것의 한 기능, 오직 그것은
육체를 위하여 쓰이는 역시 건강하고 정직하며 또 단순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현재의 나에게
는 얼마나 경이할까? 항상 하찮은 지식 나부랭이에 탐욕을 부리고, 사유가 조작한 무하한 가능성
때문에 능력과 욕망의 부조화로 괴로워하며, 그래서 낮의 대부분을 그러한 것에 바치고서도, 또
불면에 뜬 밤을 지새워야 하는 이 나에게 이러한 두뇌의 횡포 때문에 혹사당하는 내 가여운 육체
에게, 운동의 기쁨을 잊은 지 오래인 내 근육에게 흰 손에게.
나는 또 상상한다.
내가 전자물리학이나 다른 어떤 정밀화학 부문의 학자가 되어 있는 것을. 그래서 직경 수백만
분지 일 미리미터의 전자나 원자핵을 생각하느라고 나는 항상 바쁘고 소수 이하 네 단위의 천평
을 관찰하는데 내 눈은 피로하여야 하며 몇 옹그스트롬의 전력 측정에 신경질적이 되어야 한다.
그것도 또한 나에겐 경이일 것이다. 그리고 지구 구성물질의 전자와 원자핵 사이의 간격을 없애
면 지구는 기껏 직경 몇 백 미터의 구체에 지나지 않고 인간 또한 현미경적 존재로 축소되리라는
것 등이 막연한 지식이 아니고 실제 내게 필요한 지식이 된다면 나는 지금처럼 사물의 외관에 의
해서 현혹되지 않아도 되고, 보다 초연해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막연히 배후 세계의 가능
성에 의존해서 무엇이고 추상적이며 거대하고 무한한 것, 또는 영원이나 절대 같은 것의 추구에
이렇게 피곤하지 않고, 또 절망에 울지 않아도 되리라…….
2월 22일
나는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가. 며칠의 공부로 나는 벌써 나를 기다리고 있는 법학(法學)의 방대
함에 질려버렸다. 거기다가 성가신 병역문제――학교를 그만둘 때 왜 그 점은 생각 않았는지 모
르겠다――어쩌면 나는 내 삶에 또 다른 형태의 좌절을 보태려고 이 일을 시작한 것은 아닌지.
3월 3일
고독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나를 겁장이로 만들고 무익한 인간관계 속으로 끌어넣으며 바보와도
흡사한 관용을 함부로 베풀게 하는가. 정말이지 나는 너무 많은 인간을 알고 있고, 너무 쉽게 그
들과 야합했으며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새로운 인간을 탐낸다. 어차피 그들과 그들의
많고 적음은 나의 고독과는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들의 상상이나 추측을 털고 그것 자체를 냉정히 살핀다면, 즉음처럼 고독도 또한 반드시 고
통스런 것일 수만은 없다. 해방이며 충일이며 여러 가지 값진 정신활동의 가장 유용한 환경일 수
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고통이라고 단정하고 겁내는 것은 순전히 우리들의 상상과
추측에서 혼 과장이나 왜곡 탓인 듯하다. 사실 얼마나 많은 위대한 영혼들이 그 고독 속에서 그
들의 사상을 심화시키고 인식의 수준을 보다 높일 수 있었던가. 타아(他我)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고독의 효용은 두드러진다.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만이 인간을 냉정하게 볼 수가 있고, 정
직하게 미워할 수 있으며 진실로 사랑할 수 있다. 그런데도 너는 그 고독이 두려워 거리의 흥행
사와도 흡사하게 천민들과의 무분별한 관계를 확대시켜 가고 있다. 좀 낡긴 했지만 지금쯤은 저
광기어린 철인(哲人)의 말을 한 번 되씹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고독한 자는 그와 만나는 자에게 너무 빨리 손을 내미는 일이 있다. 천민들에게는 손을 내밀지
말아라. 다만 앞발만을 주어라. 더욱이 그 앞발에는 사나운 짐승의 발톱이 감추어져 있어야 한
다.
3월 12일
국제법이란 자연계의 약육강식과도 흡사한 국가간의 질서를 그럴듯한 학술용어와 알쏭달쏭한 논
리로 체계화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강국(强國)의 강요에 의해 이루어진 사건들의 집
적에 다름아닌 국제관행, 조리(條理)보다는 힘의 균형에 더 의지하는 조약, 그런 것들에서 현학
과 궤변을 털어버린다면 약육강식의 법칙 외에 무엇이 더 남겠는가.
제4부
단 장 ( 斷 章 )
젊음·神·사랑·예술·인간·이데올로기·고향――
제4부는 李文烈문학의 핵심에 접근하는 단장(斷章)의 모음집이다.
삶에 대한 통찰과 혜안, 번민과 고뇌가 함께 어우러져 숨쉬고 있는 이 부(部)는 가능하다면 조금
씩, 그리고 아주 느린 속도로 음미하면서 읽기를 권하고 싶다.
젊음
1
시계의 초침소리를 듣는 데 소홀하지 말아라. 지금 그 한 순간순간이 사라져 이제 다시는 너에
게 돌아올 곳 없는 곳으로 가버리고 있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해라. 한 번 흘러가버린 강물을 뒤
따라 잡을 수 없듯이 사람은 아무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날 수 없다.
2
흔히 나이가 그 기준이 되지만, 우리 삶의 어떤 부분을 가리켜 특히 그걸 꽃다운 시절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표현하는 수가 있다. 그러나 세상 일이 항상 그러하듯, 꽃답다는 것은 한 번 그늘지
고 시들기 시작하면 그만큼 더 처참하고 황폐하기 마련이다.
3
시인들이 흔히 노래해 온 것처럼 삶이 하나의 긴 여행이라면 그 구비구비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
람들 또한 길동무로 부를 수 있으리라. 그들 중에는 단 한번의 마주침으로 스쳐가버리는 사람도
있고, 또는 첫 만남의 서먹서먹함이 가시기도 전에 헤어져 종내에는 기억에서조차 사라져 버리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너무나 갈림길을 빨리 만나 가슴 속의 애틋한 연모를 미처 드러낼 겨를도
없이 잃어버리고 만 첫 사랑의 소녀나, 우리가 준비 없이 맞닥뜨린 삶의 비참과 공허에 시달릴
때 빛처럼 다가오던 말씀과 지혜의 스승들, 또는 거칠고 외진 세월의 길목에서 그 쓰라림과 외로
움을 함께 나눈 지난 날의 벗들처럼 그 어떤 시간의 파괴력으로부터도 살아남아 문득문득 그리움
으로 떠오르는 이들이 있다.
4
우리에게 가장 오래 남는 것은 행복한 날을 꾸몄던 보석이나 꽃다발이 아니라 괴로움의 날에 받
았던 상처의 흉터이다.
5
보다 확실하게 알기 위해 지금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릴 것. 더욱 큰 가치를 붙들기 위해이며
접근해 있는 모든 가치로부터 떠날 것. 미래의 더 큰 사랑을 위해 현재 자질구레한 애착에서 용
감히 벗어날 것.
6
배움이란 다소간 우리를 사려깊고 분별있게 만드는 법이지만, 또한 그 못지 않게 우리를 필요없
는 과민과 의심속에 살게 하는 것도 있다.
7
자기에게 끊임없는 성찰(省察)의 눈길을 던지는 것, 자신을 정신적인 무위와 혐오할 만한 둔감
속에 방치하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너는 지금 어떠한 일의 와중에 있으
며, 그 의미는 무엇이며 또 그러한 네가 현재에게 지불해야 할 것은 어떤 것들인가에 대해 항상
눈떠 있어야 한다.
일체가 무의미하다는 것, 혹은 우리 삶의 궁극은 허무일 뿐이라는 성급한 결론들의 비논리성에
유의하라. 근거 없는 나힐리즘은 조악한 감상주의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저급한 쾌락주의, 젊음의 일회성(一回性)에 대한 지나친 강조 따위, 일상적인 삶의 과정을 경멸
하도록 가르치거나 그것을 위한 성의와 노력을 포기하도록 권하는 모든 견해에 반역하라. 그것들
은 대개, 피상적 체험이나 주관적인 인식만으로도 사물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지난 날의 네
믿음처럼 자기류(自己流)의 사변(思辨)을 학문적으로 진술한 것에 불과한 것이므로, 또 너는 무
엇이건 지나간 것은 모두 가치있고 아름답게 만드는 기억의 과장을 경계하라. 지난 날들이 감미
로운 방랑으로 되살아나 너를 충동하게 하는 것은 네 삶을 떠돌이의 비참에 맡기는 것과 같다
.……
8
어떤 일에는 알맹이가 되는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이 있다. 전체를 보기 위해서는 그 돌을 모
두 보아야 하지망, 그것이 무분별하게 나열돼 있으면 종종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수가 있다. 또
어떤 일에는 일이 그렇게 되도록 만든 원인과 그런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원인으로 추정되는 요
소가 있다. 이것들도 정확히 구분해서 처리하지 않으면 그 일에 대한 논의는 다 맞으면서도 하나
도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자의에 의한 것과 타의에 의한 것도 처름부터 구분해 주는
것이 어떤 일의 인과관계를 명료하게 추적하는 데는 꼭 필요하다.
9
값싼 도취에 대한 갈망을 포기하라. 독한 술은 무엇보다도 네 기억력을 급속히 감퇴시키고, 원
활한 사고를 방해하며, 의지와 극기심을 현저하게 저하시킬 것이다.
무지하고 단순한 이웃에 대한 네 정신적인 우월을 인정하는데 인색하라. 그 터무니없는 우월감
은 너를 천박한 자기 만족에 빠뜨리고, 네 성장과 발전에 심각한 장애가 될 것이다…….
10
기대라든가 희망이란 말들과의 까닭 모를 혼동 때문에 환상을 품는다는 것은 종종 낙관적인 삶
의 태도로 오인되는 수가 있다.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그거야말로 오히려 철저하게 비관적인 태
도 가 아닐까? 무엇이든 아름답고 완전한 것, 가장 귀하고 값진 것은 현실 속에 있지 않다. 그것
이 우리가 환상에 매달리는 중요한 이유일 테니까.
11
무슨 일이든 계획을 세워 놓고 해본 사람이라면 언제나 시간이 모자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2
싸워라, 지금까지 너는 언제나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쳤다. 이번만은 싸워 얻어라.
13
어떠한 고통도 그것을 당하고 있는 순간은 고통이 아니다. 고통은 언젠 그것이 지나간 후에 기
억으로만 존재한다. 그렇다. 고통은 맞지 않는 구두와 같은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작더라고 일
단 우리의 발이 들어가기만 하면 점차로 그 괴로움은 잊혀지기 마련이다. 우리가 그 괴로움을 다
시 과장스럽게 느끼게 되는 것은 언제나 이미 그것을 벗어던진 후의 일이다. 사람이란 거의 무한
정하게 확대하고 착취할 수 있는 존재라는 모든 독재자들의 확신은 그런 상태에 대한 고찰에서
얻어진 것이나 아닐는지.
14
사람들으 흔히 가난을 뻔뻔스러움으로 잘못 보고 있지만, 실은 피할 도리가 없는 부끄러움이다.
다시 말해서, 없는 사람들이 가진 자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그들이 특히 뻔뻔해서가 아니라
어쩔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15
지금에 와서는 그리움으로 떠오를 때도 있지만 그 무렵의 내 하루는 거의 참담했다. 나는 토굴
같은 내 방에 홀로 누워 가벼운 읽을 거리와 얕은 잠과 우울한 몽상으로 긴긴 해를 보냈다. 그러
다가 해거름이 되면 골방을 나와 갯가의 갈대밭 사이에 난 둑길을 천천히 산보했다. 어느새 여름
이 깊어져서 볕이 뜨거운 대낮에는 나돌아다닐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매우 느린 걸음이어서 그 산
보가 끝날 때쯤은 완전히 해가 지고 나는 피어오르는 저녁 안개와 함께 돌아오곤 했다. 그 다음
은 괴롭고 긴 밤이었다. 바다가 가까운 탓인지 강바람 탓인지 그때의 여름밤은 그리 덥진 않았지
만, 일단 밤의 요기(妖氣)에 휩싸이고 나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낮 동안 무슨 축복처
럼 간간 찾아들던 잠도 밤이 되면 마치 낮의 선심이 화가 난다는 듯 무정하게 나를 외면했고 유
일한 위로였던 책도 어둠이 찾아들기 무섭게 깊은 침묵속으로 빠져들었다. 다만 낮의 우울한 몽
상만이 혹은 무성한 번민의 수풀로, 혹은 치열한 고뇌의 불길로 나의 밤을 지배할 뿐이다.
추억하기조차 가슴이 서늘한 그때의 풍경 중의 하나는 그런 불면의 밤 내가 늦도록 배회하던 갯
가의 둑길이다. 으스름한 달빛과 안개 자욱한 포구, 끝없이 출렁이는 갈대의 바다와 그 위를 스
쳐가는 바람소리. 이름 모를 새들의 구성진 울음소리…… 나는 그러한 것들 사이를 마치 몽유병
자처럼 늦도록 거닐었다. 그리고 그때 나를 지배하는 것은 어두운 방안에서의 번민과 고뇌 대신
울고 싶도록 철저한 외로움이었다.
16
결국 아리는 목적 없는 길을 홀로 걷게 숙명지워져 있다. 그 허망함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우
리는 수많은 신화를 지어내고 자진하여 미신에 젖어들지만 누구도 그런 숙명에서 벗어날 순 없
다. 아아, 좀더 일찍 그걸 깨달았다면 나는 지나쳐온 아무 곳에나 머물러 그 평범한 주민이 되었
을 것을――그리고 가엾은 육신이나 평안하게 길렀을 것을……
17
절망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치열한 정열이었으며 구원이었다.
18
잘 있거라. 아직은 현란한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이윽고는 똑같은 빛깔로만
떠오르게 될 시간들이여. 한때는 내 삶에 버금가는 소중함이었지만 이제는 끝모를 침묵과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야 할 기억들이여. 기쁠 수도 슬플 수도 없는 노래여.
神
1
하지만 신은 있다. 지금 이 순간도 저 태양이 분명한 실체로 불타고 있는 것처럼 그의 섭리도
실존의 숭고한 빛으로 이 무한한 시공(時工)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2
철학은 신을 살해했지만 그로 인해 스스로의 임종을 앞당긴 것은 모르고 있다. 문학이나 사회학
과 야합(野合)하거나 언어학이나 수학에 빌붙어 허세를 부리는 몇몇을 제외하면, 이 시대의 철학
은 기껏 이미 있는 것을 정리하고 분류하고 보존하는 늙은 사서(司書)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
다. 이제 우리는 머지않아 그들의 임종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3
선악의 관념이나 가치판단에 관여하지 않는 신(神), 먼저 있은 존재를 뒤에 온 말씀으로 속박하
지 않는 신, 우리의 모든 것을 용서하고 시인하는 신, 천국이나 지옥으로 땅 위의 삶을 간섭하지
않는 신, 복종과 경배를 원하지 않고 희생과 헌신을 강요하지 않는 신, 우리의 지혜와 이성을 신
뢰하며 우리를 온전히 자유케 하는 신――.
4
불교―불타(佛陀)는 그들의 신앙을 추상적인 범신론(汎神論)에서 위장된 무신론으로 바꾸었다.
해탈(解脫)이란 이름을 가진 욕구의 선택법. 천 개의 작은 욕망은 버렸으나 그 모든 것을 다 합
친 것보다 더 큰 욕망을 얻었다. 해탈을 향해 타오르는 그 치열한 욕망은 어쩔 것이랴. 만 개의
번뇌는 껐지만, 그걸 위해 타오르는 하나지만 만 개를 합친 것보다 더 세찬 번뇌의 불길은 어쩔
것이랴
5
너희는 나를 위해 경배하지 말라. 나를 위해 제단을 쌓지 말며, 나를 위해 의식과 예물을 바치
느라 너희 귀중한 재물과 노력을 허비하지 말라. 먼저 스스로를 구하라. 너희는 이웃을 사랑하
라. 내가 기뻐해서가 아니라 그러함으로써 네 이웃도 너를 사랑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지나
치게 많이 가짐을 구하지 말라. 많이 가짐이 악이어서가 아니라 그러함으로써 네 이웃이 가난해
지는 게 악이기 때문이다.
6
돌아가자, 헛된 해맴은 이것으로 넉넉하다. 이제는 자기 속으로 돌아가 침잠(沈潛)할 때이며,
새로운 개안(開眼)을 기다려 실체로서의 신과 마주할 때이다. 내가 신을 찾아 떠날 때가 아니라
신이나를 찾아올 때이며 뒤쫓을 때가 아니라 마중할 때이다.
신은 반드시 내 길고 애절한 부름에――지난 반생의 쉬임없는 추구에 응하실 것이다.
7
바라건대 신(神)이여 언제나 내가 깨어있게 하소서!
예술
1
진실로 예술적인 영혼은 아름다움에 대한 철저한 절망 위에 기초한다. 그가 위대한 것은 그가
아름다움을 창조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도전하고 피흘린 정신 때문
이다.
2
예술을 예술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가 도덕적인 요소란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3
시(詩)는 의식의 산물이고 한 시인의 추적은 그 의식의 추적일 수도 있다.
4
모든 일탈자가 다 시인은 아니다. 그러나 시인은 반드시 모두가 일탈자이다. 또 어떤 시인은 전
혀 일탈자의 특징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평범한 삶의 질서에 충실하고 그 기쁨을 웃고 그 슬픔
을 운다. 그러나 그 시인도 결국은 일탈자이다. 적어도 그 사람이 시인이라면 언어에서만이라도
반드시 일탈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언어는 실용의 질척한 대지를 벗어나서야 고귀한 시
(詩)의 천상으로 날아 오른다.
5
예술을 통한 구원이란 우리가 믿기 위해 지아낸 여러 가지 미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많은 사
람들이 신(神)을 보아서가 아니라 있기를 바라기 때문에 믿는 것처럼. 그것은 거룩한 환상이다.
6
예술은 인생보다 길지만, 길다는 것과 가치 없다는 것 사이에 어떤 필연성이 있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죄악이나 어리석음의 흔적 같은 것도 오래오래 살아남으니까.
거기다가 가치와 시간 사이에 어떤 필연성을 인정한다고 해도――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에
술이 인생보다 길다고 말할 때, 거기서의 인생이란 개체의 생존 기간을 말한 것이지, 전체로서의
면면한 삶의 흐름을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의 그 어떤 가치보다도 전체로서의 삶이 더 오
래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간을 척도로 삼는다고 해도 예술은 가장 큰 가치일 수 없다. 인
류가 절멸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잡고 있을 가치가 바로 예술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한, 예술
은 다만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가치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상위가치(上位價値)가 예상되는……
7
한 사나이가 미친 듯한 정열로 보리밭이며 해바라기를 그리고, 귀 없는 남자의 자화상(自 像)
을 그린 연후 정신병원에서 피스톨로 자신의 머리를 쏘았다는 것이나, 어떤 천재가 다섯 살때 작
곡을 하고 일곱 살에 연주여행을 떠났으며 마침내는 궁정악단의 악장(樂章)이 되어, 기름진 식사
로 나른해진 대공(大公)을 더 만족스런 잠에 빠지게 해주었다고 해도 그게 세계와 인생에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겠는가?
8
창수령(蒼水嶺), 해발 7백 미터――.
아아, 나는 아름다움의 실체를 보았다. 창수령을 넘는 동안의 세 시간을 나는 아마도 영원히 잊
지 못하리라. 세계의 어떤 지방 어느 봉우리에서도 나는 지금의 감동을 다시 느끼지는 못하리라.
우리가 상정할 수 있는 완성된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것을 나는 바로 거기서 보았다. 오, 그 아름
다워서 위대하고 아름다워서 숭고하고 아름다워서 신성하던 그 모든 것들……
그 눈 덮인 봉우리의 장려함, 푸르스름 하게 그림자진 골짜기의 신비를 나는 잊지 못한다. 무겁
게 쌓인 눈 때문에 가지가 찢겨버린 적송(赤松), 그 철저한 아름다움을 나는 잊지 못한다. 눈 녹
은 물로 햇살에 번쩍이던 참나무 줄기의 억세고 당당한 모습, 섬세한 가지 위에 핀 설화(雪花)로
면사포를 쓴 신부처럼 서 있던 낙엽송의 우아한 자태도 나는 잊지 못한다. 도전적이고 오만하던
노가주 나무조차도 얼마나 자그마하고 겸손하게 서 있던가.
수줍은 물푸레줄기며 떡갈등걸을 검은 망사 가리개처럼 덮고 있던 계곡의 칡넝쿨, 다래넝쿨, 그
리고 연약한 줄기 끝만 겨우 눈 밖으로 나와 있던 진달래와 하얀 속새꽃의 가련한 아름다움.
수십년 생의 싸리나무가 밀생한 등성이를 지날 때의 감격은 그대로 전율이었다. 희디희 눈을 바
탕으로선 잎진 싸리줄기의 검은 선(線), 누가 하양과 검정만으로 그 화려하면서도 천박하지 않고
고고하면서도 삭막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단 말인가.
하늘도 어느새 개어 태양은 그 어느 때보다 현란한 빛으로 그 모든 것을 비추고 있었다. 엷어서
오히려 맑고 깊던 그 겨울하늘. 멀리 보이는 태백의 준령조차도 일찍이 그들의 눈으로 유명했던
세계의 그 어떤 영봉(靈峰)보다 장엄하였다.
나르는 산새도 그곳을 거리고, 불어오는 바람조차 피해 가는 것 같았다. 오직 저 영원한 우주음
(宇宙音)과 완전한 정지 속을 나는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며 걸었다. 헐고 부르튼 발 때문
에 그 재의 태반을 맨발로 넘었지만 나는 거의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그만큼 나는 나를 둘러싼
장관(壯觀)에 압도되어 있었다.
고개를 다 내려왔을 때 나는 하마터면 울 뻔하였다. 환희, 이 환희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으리
라. 나는 아름다움의 실체를 보았다. 미학자들이 무어라고 말하든 나는 그것을 감지한 것이 아니
라 인식하였다.
아름다움은 모든 가치의 출발이며, 끝이었고, 모든 개념의 집체인 동시에 절대적 공허였다. 아
름다워서 진실할 수 있고 진실하여 아름다울 수 있다.
아름다워서 선할 수 있고, 선해서 아름다울 수 있다. 아름다워서 성스러울 수 있고 성스러워서
아름다울 수 있다……그러나 아름다움은 스스로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면서도 모든 가치
를 향해 열려 있고, 모든 개념을 부여하고 수용할 수 있는 것, 거기에 아름다움의 위대성이 있
다――.
이번의 출발은 오직 이 순간을 위해서 있었다.
9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환상이 반드시 깨어지게 되어 있고, 아름다움과 진실도 필경엔
한 토막의 고기보다 못하게 되어 있다.
10
민중이란 원래 많건 적건 통치기구에 대한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어서, 지배체제에 대
한 도전적인 비판이나 통치자에 대한 험구는 흔히 예술 주제의 인기 품목이 된다.
11
실험정신의 소중함은 더할 나위 없는 것이지만, 단순히 새로움의 추구가 범용한 재능을 은폐하
는 수단이거나 예술하는 천민(賤民)들의 자기 선전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은 견딜 수 없다.
12
글이 아름답다는 것과 비유를 많이 쓴다는 걸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은유법이나 의인법은
남발은 산문(散文)을 어색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13
글이 반드시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아름다움에 욕심부리지 말고, 하지만 흔하
지 않은 방식으로 써야 한다. 글이 지루하고 답답해지는 것은 대개 무언가 흔해빠진 방식을 답습
했기 때문이다. 문장의 구조든 어휘든 운율이든 서술방식이든……
14
같은 단어는 특별히 강조하기 위해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면 되도록 피하는 게 좋다. 사람을 궁
색하게 보이도록 한다.
15
준말, 대과거(大過去)를 자주 쓰면 글이 유치하거나 경박해 보인다. 난……했었다 식.
16
감탄사와 느낌표, 그리고 말없음표는 색깔로 치면 보라색쯤 될까. 너무 자주 쓰면 천박하게 보
인다.
17
시인이 일생 맛보게 되는 감격 중에서 가장 크고 오래 가는 것 중의 하나가 남의 입을 통해 자
신의 시를 처음으로 듣게 되는 순간의 그것일 것이다.
18
동양에서의 미적 성취, 이른바 예술은 어떤 의미로 보면 통상 경향적(傾向的)이었다. 애초부터
통치 수간의 일부로 출발한 그것은 그 뒤로 끝내 정치권력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때로는
학문적인 성취나 종교적 각성에 의해서까지도 침해를 입었다. 충성이나 지조 따위가 가장 흔한
주제가 되고, 문자향(文字香)이니 서권기(書卷氣)니 하는 말과 마찬가지로 도골선풍(道骨仙風)이
니 선미(禪味)니 하는 말이 일쑤 그 높은 품격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는 것이 그 예일 것이다.
19
서양에 있어서도 근세까지는 사정이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랜 기간 예술은 제왕이나 영주
(領主)들의 궁성을 꾸미거나 권력이며 부(富)에 기생하였고, 또는 신의 영광을 찬양하는데 바쳐
지기도 했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형성과 더불어 그들의 예술은 주체성을 획득하고 팔방미인격인
동양의 예술과는 다른 그 특유의 인간성을 승인받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예술을 강력한 인접가
치로부터 독립시키고, 예민한 감수성이나 풍부한 상상력은 같은 이른바 예술적 재능도 하나의 사
회적 가치로 가하게 된 것이다.
20
제 값어치로 홀로 우뚝한 시(詩). 치자(治者)에게 빌붙지 않아도 학문에 주눅이 들 필요도 없
다. 가진 자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되고 못 가진 자의 증오를 겁낼 필요도 없다. 옮음의 자로
써만 재려 해서도 안 되고 참의 저울로만 달려 해서도 안 된다. 호로 갖추었고, 홀로 넉넉하다.
21
시(詩)―스스로를 자유하게 하고 나아가서는 남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22
꽃이 임금을 위해 피고, 새가 스승의 은혜를 가려 울던가? 구름이 다스리는 자의 잘못에 따라
일고 비가 다스림 받는 자의 원망에 따라 내리던가? 노을이 의를 위하여 곱고 달이 예를 위하여
밝던가? 꽃지는 봄날의 쓸쓸함이 오직 나라 위한 근심에서이고 잎지는 가을밤의 서글픔은 오직
어버이를 애통히 여김에선가?
23
원래 큰 시를 오늘날 보는 것처럼 작게 줄인 것은 요순과 공맹을 이은 썩은 선비였다. 그로부터
수천년. 혹은 인(仁)으로 가두고 혹은 예(禮)로 얽죄고, 혹은 의(義)로 옭죄고 혹은 지(知)로 억
누르니 뒤에 온 사람이 어찌 시가 가졌던 그 원래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겠는가.
24
시는 도가 아니다. 도(道)도 틀림없이 만상의 원뜻을 보기는 하되 그걸 무언가 하나로 바꾸고자
한다. 그러나 시는 있는 그대로 놓아 두고 본다. 또 도는 궁극으로 이 세계를 뛰어 넘으려 하지
만 시는 남아 있어 이 세계와 하나가 되려 하는 그 무엇이다.
사랑
1
사랑을 사랑답게 하려면, 첫째 말을 절약하고 다음에는 우정적인 분위기가 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말의 역할이 지나치면 사랑은 관념적이 되고 반드시 피로와 혼란이 오게 되며――우정적인
분위기도 그 나름의 장점은 있지만 결국에는 사랑을 실속있게 만드는 연애감정을 해치게 된다.
2
사랑은 이간이 시(詩)란 표현양식을 찾아낸 이래 그 가장 흔한 주제였고, 애정 편력은 한 시인
의 전기(傳記)에서 종종 그 가장 정채(精彩) 있는 부분을 이룬다.
3
성적(性的)인 것에의 의지는 인간의 의지중 가장 치열한 것 중에 하나이며, 그것에 대한 보상
또한 인간을 가장 크게 격려할 수 있는 것 중에 하나이다.
4
사랑(또는 性)을 자동차의 운전에 비유한 사라 러딕의 말은 옳다. 자동차에 오르기 전에 우리는
여러 법규들의 정당함이나 자기 생명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한 번 운전석에 오르고
보면 우리는 어린애 같은 흥분과 쾌감에 그 모든 것을 종종 잊어버린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
랑에 빠지기 전에 우리는 부도덕한 사랑의 위험을 잘 알고, 그로 인해 우리 삶에 가해질 위해를
피하려는 결의에 차 있다. 그러나 한 번 사랑에 빠져 버리면 우리는 이내 비정한 쾌감과 잔인한
위기에 휘몰려 그 모든 것을 잊게 되고 마는 것이다.
5
어째서 모든 사랑 이야기는 결혼 아니면 죽음과 이별로 끝나는 것일까. 어째서 모든 사랑은 행
복하지 않으면 불행해지는가. 아름답지 않으면 추악해지는가.
6
여자와 장작불은 자꾸 쑤석대지 말아라. 연애는 깨지고 장작불은 꺼진다.
7
결혼은 어떤 삶에 대한 다른 삶의 개입이다. 따라서 그 결합은 어슷비슷한 두 개의 원이 만나는
것보다는 들쭉날쭉한 두 개의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것이 더 단단할 것이다. 나의 단점과 그의 장
점이 맞물리고 그의 결핍과 나의 풍요가 맞물리고, 또 그의 능력과 나의 무능이 맞물리고……특
히 아무런 사랑과 믿음의 축적 없이 중매란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결혼일수록.
8
여자에게 결혼이란 사랑의 무덤이라고 한 말은 어디까지가 맞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우정의 무
덤인 것은 확실하다.
9
지금까지와 같은 결혼형태는 앞으로의 사회와 맞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어쩌면 어느 사
회학자의 주장처럼 평생 두 번을 기본으로 하는 결혼형태가 실제로 행해질 것 같은 기분이다. 그
학자의 구상은 이렇다. 한 여자를 기준으로 보면 그녀의 첫 번째 결혼은 20대 초반에 20년 현상
의 남자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정도의 연령이면 삶을 즐길 경제적·정신적인 여유나 학식·
교양·원숙미는 물론 성적(性的)인 기교까지 젊은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기에 필요한 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 이십 년을 살다가 남자는 모든 것을 젊은 아내에게 넘겨주고
죽거나 양로원으로 가고, 그 사이 중년이 된 여자는 이번에는 20년 연하의 남자와 결혼한다. 이
때 여자는 처음 20년 연상의 남자가 그녀에게 해주었던 모든 것을 20년 연하의 남자에게 베푸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20년이 지나면 모든 것을 젊은 남편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양로원으로 가거
나 죽는다는 게 그 대강의 구상이다. 지나치게 도식적이긴 하지만, 반드시 한 엉뚱한 사회학자의
몽상으로만 볼 수는 없는 그 무엇이 있다…….
10
사랑과 성을 동일한 것으로 혼동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가장 불행한 미신인 것 같다. 프로
이트 같은 사람들의 과장과, 번식기가 아닌데도 사철 성을 즐기는 인간의 호색(好色)근성이 야
합하여 만들어낸 편의적 미신…… 아마도 그 강력한 미신에 대한 지성의 마지막 저항이 지드의
『좁은 문』일 것이다.
11
성 개방이란 우리가 힘들여 버리고 온 동물로의 길을 그 방면에서만은 되돌리려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그 주장을 가장 완벽하게 실천하고 있는 것은 동물이니까.
12
인간이란 자기가 기르고 있는 암캐나 암말을 위해서는 빌거나 기르거나 하여 가장 좋은 수캐나
수말을 장만하면서도, 남편의 자식을 낳기 위해서는, 가령 남편이 정신박약자이건 노쇠하건 또는
병들어 있는 데도, 그것이 남편의 신성한 권리인 양 여성들을 가정에 가둬놓고 감시하는 성 규범
에서는 악과 허영 이외에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이 인습은 열등한 양친은 열등한 자식을 낳고,
우수한 양친은 우수한 자식을 낳는다는 것과, 그 차이를 느끼는 최초의 사람이야말로 바로 자식
을 가지고 그 자식을 길러야 하는 사람이라는 그 두 가지 명백한 진리를 무시하는 것이다……
13
여인이여, 지금 여기서 그대를 기다리는 것은 득의와 패기에 찬 삼십대 남자가 아니라 삶에 지
친 그대의 동료이다. 그대가 오면 이제 나는 삶의 우수를 얘기하겠다. 우리가 일찍이 원했던 그
어떤 것을 얻더라도 끝내는 채울 수 없는 공허를 사람들은 그가 오래 원해 왔다는 이유만으로,
동료가 어쩌다 얻게 된 반짝이는 사금파리나 진기한 조개껍질 같은 것들이 그 동료에게 어떤 행
복이나 성취감을 주리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여인이여, 진실로 그런 것은 없다. 우리가 이 땅에서 애착했던 그 어떤 것을 잃더라도
본질로서의 삶이 지금보다 더 나바질 수는 없는 것처럼, 원했던 그 어떤 것들을 얻더라도 나아지
는 법 또한 없다…….
14
여인이여, 그대는 내가 왜 꽃을 사랑하는지 아는가, 꽃은 우리를 위해 피어나지 않더라도, 우리
는 그 아름다움에 감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꽃에게는 물론 자신의 생리, 자신의 꿈이 있을 테지
만, 그 존재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축복이다.
여인이여, 그대는 내 쓸쓸한 삶의 길섶에서 우연히 마주친 한 송이 꽃, 나는 그대 곁에서 상처
입고 지친 내 언어를 쉬게 하고 싶다. 스러져버릴 그대의 아름다움을 기억 속에 영원히 꽃피우고
싶다.
15
남자에게 거는 여자의 꿈은 크게 나눠 두 가지가 있다. 가장 흔한 건 신데렐라의 꿈. 삶의 맨
밑바닥에서 맨 꼭대기로 한 순간에 자신을 끌어올려줄 수 있는 남자를 기다리는 것. 백마의 기사
(騎士)니, 숲 속의 왕자니 하는 것들도 실은 그 변형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바로 온달의 꿈. 이
번에는 자기가 상대를 가장 밑바닥에서 맨 꼭대기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경
우는 드물지만 의식 속에서는 신데렐라의 꿈이나 다름없는 크기로 여자를 지배하는 꿈이다. 부성
(父性) 지향과 모성(母性) 회귀 또는 가학(加虐)과 피학(被虐)의 열정에 상응되는 꿈일 것이다.
16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영리한 여자의 매력이다. 그러나 때로는 자신이 빠질 함정까지
도 스스로 판다는 데 영리한 여자를 보는 우리 남자들의 불안이 있다. 남이 파놓은 함정에는 떨
어져도 쉽게 빠져 나올 수 있는 여자가 자신이 판 함정에서는 영영 나오지 못하는 수가 그래서
있다.
17
여자야말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전혀 비례하지 않는 예가 될 것이다. 즉 물, 공기 등은 그것
없으면 인간이 당장 살 수 없지만 값은 거의 없거나 없는 것과 비슷하게 싼 대신, 여자는 보석
따위와 마찬가지로 별 쓸모도 없이 값만 비싸다.
그걸 위해 돈과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이름을 더럽히고 몸을 망치고 심지어는 생명까지 비치
기도 한다.
18
사랑은 반드시 고해사(告解師)를 필요로 한다.
19
사랑의 본질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향한 것이다.
20
세상에 백치미(白痴美)란 게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정신적인 결함 또는 정신 그 자체의 공백 상
태에 대한 동정심을 바탕삼은 감정의 장난일 것이다.
21
눈이 오는 날 좋아하는 사람이 그리워지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연출하는 순백(純白)의, 그
리고 거의 완전한 아름다움 때문일 것이다. 그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즐기고 싶은 마
음이 그리움으로 솟고, 또 그 아름다움이 이내 스러질 것이란 것 때문에 그 그리움은 더 강렬해
지는 것이나 아닌지.
인간
1
인생은 아무 때나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2
인간은 한 왜소한 피사체 또는 지극히 순간적인 인식 주체에 불과하며, 그가 하는 창조란 것도
기껏해야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모사(模寫)일 뿐.
3
어떤 일에 쓰라린 경험을 한 사람은 자기와 비슷한 경우에 떨어진 사람을 유난히 잘 알아보는
법이다.
4
인간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식탁을 같이 한다. 그것도 단순한 평화 이상의 우호적인 분위기 속
에, 어쩌면 로마의 강력함이나 초기 기독교의 성공적인 전파는 그들의 공동식사에서 온 것인지도
모른다.
5
생물학자들에 따르면, 어떤 종류의 개미는 길을 가다가 자기 보다 야윈(배고픈) 동료를 만날 때
자기가 먹은 것을 토해 내어 동료를 먹인다고 한다. 무슨 도덕감에서라기보다는 본능에 가까운
것이겠지만,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그와 같이 본능에 가까운 의식이다.
나에게 사회의 평균치 이상 가는 혜택이 돌아왔을 때 그것이 혹시 다른 운수 나쁜 동료의 몫을
훔친 것이 아닌가를 먼저 의심해보는 것, 재산이든 권력이든 명예든 그것에 수반되는 것은 누릴
권리가 아니라 바르게 써야 할 의무라는 것을 당연하게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자신과
는 무관한 것 같아도 고통받는 동료가 있으면 자기가 그 원인이 되지 않았는가를 먼저 의심해보
고 당연히 함께 나누어야 할 짐으로 여길 수 있는 사회 일반의 의식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남의
아픔이 곧 내 아픔이 될 때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살이의 여러 아픔은 그만큼 적어질 것이다. 기
쁨은 나눌수록 커지고 슬픔은 나눌수록 적어지므로.
6
호랑이나 곰도 동족을 사냥하지는 않는다. 혹 그들은 서로 싸워도 상대의 생명까지 끊는 법은
없다. 그러나 이들 영악한 인간들은 가혹하게 동족을 살해하고, 살려두는 자도 죽는 것보다 못한
상태에 빠뜨린다.
7
쾌락이 인간에게 주는 자극은, 똑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본질적으로 비슷한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피상적인 관찰일는지는 몰라도, 극단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있는 인간과 극단의
쾌락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표정은 매우 닮아 있다. 이를테면, 분만의 고통에 빠져 있는 임산부의
표정과 정사(情事)에서의 절정감(絶頂感)을 보여주는 여인의 표정은 거의 구별하기 어려운데, 그
것은 인간의 표정이 단조로와서라기보다는 자극의 유사성 때문인 것으로 보여진다.
좀더 끔찍한 예로는 사형수 특히 교수형(絞首刑)에 처해진 사형수의 경우가 있다. 기록을 보면
교살(絞殺)된 사형수는 예외없이 사정(射精)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있다. 그게 쾌락과는 무관한
생리작용일 수도 있겠지만, 바로 목졸려 죽는 순간의 엄청난 성적(性的) 에너지의 분출을 노려
정사(情事) 도중의 상태를 목졸라 죽이는 습관이 있었다는 어떤 엽기적(獵奇的) 살인범에 대한
보도로 미뤄보면 반드시 그렇게만 볼 수도 없을 것이다.
8
고통은 일차적으로 인간의 육체를 향하고 있지만 필경은 정신적인 것이다. 육체적인 형벌을 면
하는 것이 정신적인 고통을 배가시킬까 두렵다.
9
침묵이란 때로 그 어떤 맹렬한 비난이나 질책보다 더 괴로울 수가 있다.
10
생각이란 언제나 순간적이다. 명상이라든가 묵상 또는 산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구체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건 아니다. 많은 부분은 그저 좋은 생각을 얻어내기 위한 환경의 조성일 뿐 실제
로 우리가 원했던 결론을 얻어내는 것은 결국 어떤 순간이다.
11
갈망은 항상 더 큰 갈망을 낳기 마련이다.
12
갈망이란 원래가 새로운 소유보다 한 번 소유했다 박탈된 것을 향할 때가 더 뜨겁고 세찬 법이
다.
13
남이 지운 집은 부당하면 벗어던질 수가 있다. 그러나 스스로 원해서 진 짐은 설령 그것이 부당
하더라도 던져버릴 수가 없는 법이다.
14
신뢰는 배신당하기 때문에 매력있는 것.
15
작은 쓰임은 언제나 뚜렷하지만 큰 쓰임은 반드시 그렇지가 않다. 송곳을 만드는 것은 무얼 뚫
기 위해서이고, 노끈을 꼬는 것은 무얼 묶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조화옹(造化翁)이 천지만물을
지어낸 까닭은 한마디로 쉽게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천지만물이 아무 쓸모없는 것인가.
16
여행처럼 이해 못할 신비도 없다. 모든 여행을 우리는 나름의 목적을 가지고 떠났지만 대개의
경우 그 목적은 길에 오르기 무섭게 여행 자체의 특별한 파스토에 밀려 원래의 의미를 잃고 만
다. 낯선 곳으로의 길 위에선 외로움은 물론 슬픔조차 감미롭고, 두려움과 근심도 상쾌하다.
17
장부 한 번 뜻을 세우면 오직 그 뜻을 향해 나아갈 일이다. 만약 세상이 받아주지 않으면 물러
서서 때를 기다릴 일이다. 기다려도 때가 오지 않으면 그대로 조용히 늙어 죽을 일이다.
18
예전에 알던 사람들, 특히 무명과 빈곤에 시달리던 시절을 가까이서 보아온 사람들을 만나는 것
은 언제나 하나의 곤혹이다.
19
봄날 산허리를 스쳐가는 구름 그늘처럼, 또는 여름날 소나기가 씻어간 들판처럼, 가을 계곡의
물처럼, 눈 그친 후에 트인 겨울 하늘처럼 유유하고 신선하고 말고, 고요하면서도 또한 권태롭고
쓸쓸하고 적막한 삶.
20
스물한 살의 젊은 사내가 내뿜은 야성이란 호전성(好戰性)이 아니면 욕정이기 십상이다.
21
사람을 쉽게 현혹하는 것은 언제나 사물의 본질이아니라 외양이다.
22
불안이란 종종 닥쳐올 위해(危害)가 불확정적일 때 더 심하게 과장되는 법이다. 사형대에 올라
가 죽음의 불안으로 비치는 사형수는 없다.
23
대안이 없는 비판은 통상 불평에 지나지 않는다.
24
유년의 일들은 언제나 돌연스럽다. 또 유년의 일들은 그 해석과 기억에도 그 시절의 단순성으로
왜곡된다. 세상이 모두 놀이터처럼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기서 벌어진 모든 일들도 그 무렵
에 특히 열중했던 놀이 또는 깊이 빠져 있던 관념과 연관되어 해석되고 기억될 뿐이다.
차차 자라가면서 그 모든 일들은 원인과 경과와 결말이 가지런해지고, 해석은 객관성을 회복하
고 기억은 왜곡에서 벗어나지만, 그러나 이미 그것은 우리의 유년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다만 인
상의 종합이며, 기억의 재조정이고, 세월에 부대끼어 닳아빠진 의식의 새로운 왜곡에 지나지 않
는다. 성숙 또는 논리란 이름의, 성년(成年)끼리 약속된 어떤 허구(虛構)에 바탕한.
25
그게 어떤 종류는 젊은 날에 이념을 품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실현을 서두는 것보다 변하지 않는 일이다. 어떠한 세대이건 기다리다 보면 그들의 세월은 온다.
그때까지 변하지 않으면 그들이 이념을 혁명이나 유혈없이 실현할 기회도 함께 온다. 20년 또는
30년이 걸릴지 모르지만――서둘렀다가 좌절되고 변질하는 것보다는 그것이 훨씬 낫다.
26
우정(友情)이란 사랑처럼 호들갑스럽거나 소모적이 아니며, 피붙이에 대한 정처럼 동물적이거나
눈멀지도 않은 그 특이한 형태의 교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그리 대단찮게 여겨지는 듯 보인가.
산업 사회가 새로이 설정한 여러 기능에 따라 만들어진 이런저런 집단에서 개별적인 선택 없이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동료 의식이 고색창연한 우정의 개념을 잠식해간 탓이리라.
27
저항을 포기한 영혼, 미움을 잃어버린 정신에게서 괴로움이 짜낼 수 있는 것은 슬픔의 정조(情
調)뿐이다.
28
정의의 소재가 어느 편에 있다는 걸 안다는 것과 내가 거기 가담해 함께 움직인다는 것은 다르
다. 행동한다는 것은 결과에 대한 책임을 수반하는 것이니까…….
29
여럿을 향해 뱉어지는 말은 그 순간 이미 내 것이 아니다 그 말의 참과 거짓, 옳고 그름이 온전
히 그들 듣는 이들의 주관적 판단에 맡겨지는 것뿐만 아니라 때로는 내 마음속의 진실까지도 그
들의 해석에 영향받고 강제된다. 나의 것은 오직 그 말에 따른 책임뿐이다. 모든 예측 불가능한
결과까지 포함한. 오오오, 말하기의 어려움이여…….
30
한 인간이 회개하는 데 꼭 긴 세월이 필요한 것은 아니며, 백정도 칼을 버리면 부처가 될 수 있
다고도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느닷없이 돌출하는 정의감이 미덥지 않다. 나는 지금도 갑작스레
개종자(改宗者)나 극적인 전향인사(轉向人士)는 믿지 못하고 있다. 특히 그들이 남 앞에 나서서
설쳐대면 설쳐댈수록.
31
인간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무언가 지킬 게 있는 법이다.
이데올로기, 其他
1
비판받아 보지 않고도 자명한 정의(正義)란 이 세상에 없다.
2
그 어떤 주의(主義)건,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화려한 선전과 이상의 겉치레를 하고 있건 그 본
질은 이기(利己)다. 집단이건 개인이건 주의란 그것을 주장하는 자의 이익에 봉사하게 되어 있
다.
3
용기 있는 사람들 혹은 단순한 사람들은 한쪽만을 선택해 보고 그쪽만을 이해한다. 하지만 세상
의 어떤 집단 어떤 주장도 온전히 선(善)할 수 없었던 것처럼 온전히 악(惡)하지는 않다. 거기서
종종 우리의 선택은 그 정도를 가늠하여 이루어지게 되지만, 보다 철저한 정신은 미덥잖은 그 정
도의 차이에 현혹되어 어느 한쪽에다 자기를 던지기를 거부한다. 이때 그 두 개의 상반된 집단이
나 주장의 원(圓)들 사이에 겹치는 부분이 넓으면 넓을수록 그들이 설 자리도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를 양분하고 있는 두 개의 원(圓)은 이제 거의 겹치는 부분이 없거나 없어져 가고 있는 중이
다.
4
물고기나 새의 눈은 한꺼번에 상반된 방향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사람의 눈은 고개
를 돌리거나 돌아서지 않는 한 언제나 한쪽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어쩌면 그런 감각기관의 구
조는 우리 의식의 일면성(一面性) 또는 편향성(偏向性)을 상징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
람은 언제나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이해하고 싶은 것만 이해한다…….
5
민주화(民主化)와 안정, 공평과 성장 또는 체제와 반체제――그 밖의 어떤 이름을 붙여봐도 만
족스럽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나는 차라리 그것을 오늘날의 사회상황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방향으로의 인식과 해석이라고 보고 싶다.
6
연역적 해석에서 변혁론자(變革論者)가 나오고 귀납적 해석에서 개량주의자(改良主義者)가 나오
는 것이지만, 역사의 신례는 아직 그 어느 한쪽만이 완전히 옳았다는 증명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
다.
7
자유란 환상이다. 우리들 중 극소수에게 열망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오히려 저들 다수를 지배하
는 것은 저열한 욕망이다. 어떤 강력한 힘에 복종하고 지배받으려는 욕망. 아마도 그렇게 함으로
써 자기들의 무력과 우둔을 잊고, 그 강력한 대상과 일체감을 느끼려는 것일 게다.
8
자유란 우리가 종종 속기 쉬운 환상에 불과하다. 우리가 안전한 나무에서 내려와 함께 모여 살
기 시작한 이래 진정한 자유란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언제나 열망의 형태로만 존재했다 왜냐하
면 모여 산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어떤 질서와 규율 밑에 있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우리가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착각하게 된 것은 그 질서와 규율이 동
물적인 혈연에 근거해 있었다는 점과 은밀하고 교묘한 통치기술 때문이었다. 당신들은 그 환상에
집착하기보단 오히려 그것들을 혐오해야 한다…….
9
극단한 개인주의 속에서는 자아가 탕진되고 말았던 것처럼 극단한 전체주의 속에서 자아가 함몰
해 버리는 비극도 우리는 보아왔다. 불교의 대승(大乘)과 소승(小乘)도 한 예는 될 것이다. 과연
어느 쪽이 온전히 옳고 어느 족이 온전히 그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10
어떤 사회든 가치의 선호(選好)야 있겠지만, 우리처럼 철저하게 수직적인 체계에 집어넣고 그
상위가치에만 몰려드는 사회도 드물 것이다. 합당할지는 몰라도, 이조(李朝) 엘리트들의 과거열
(科擧熱)이나, 오늘날의 부모들이 자식이 좀 똑똑하다 싶으면 무턱대고 법대나 의대로 몰아넣는
것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수직적 사고는 가치분화(價値分化)를 이루지 못한 전근대적 융합사회 내지 혼합사
회의 특징이다. 현대사회는 가치의 분화를 원칙적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일단 승인된 가
치는 모두 동등하며 그 관계는 수평적이다. 어떤 가치가 다른 가치의 상위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
은 전근대적 가치관의 월권일 따름이다. 다시 말해서, 현대적인 가치체계에는 가장 좋은 것(最
善)이란 있을 수가 없다. 모든 것은 다 좋고(善),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은 주관적으로
보다 좋게(次善) 여겼기 때문일 따름이다.
11
우리는 소시민(小市民) 사회의 교의(敎義)에 너무 깊이 젖어 들어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는
것들과의 차이에 너무 소홀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가령 일이라고 할지라도 오늘날은 쓰레기장의
인부가 쓰레기를 태우는 일과 학자의 연구나 예술가의 창조, 대통령의 서명이 모두가 똑같이 소
중하다는 결론에 아무런 의심 없이 동의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 교의는 모두의 삶을 똑같이 귀중
한 것으로 긍정해주는 고마운 역할도 하지만, 동시에 가치와 가치 사이의 상대적 차이를 부인함
으로써 자신의 왜소한 삶에 안주하도록 설교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혹 그런 교의는 현대의 산업사회가 자기보존을 위해 만들어낸 미신은 아닐까? 그 자체 수만 개
의 부품이 필요한 복잡한 기계같이 되어버린 사회가 자신의 원활한 가동을 위하여, 한 귀퉁이에
박혀 있는 나사못이나 윤활유나 도색용(塗色用)의 페인트까지도 엔진이나 프레임과 똑같이 필요
한 것이라고 떠벌여 대는 것이나 아닐까? 수천만 개의 나사못이나 수백 드럼의 윤활유보다는 엔
진이나 프레임이 훨씬 중요하다는 걸 속으로는 당연히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리하여 얼
마 안되는 기관부(機關部)와 같은 계층을 위해 수천 수만의 사람이 나사나 윤활유 같은 존재로
그들 삶을 낭비해 주기를 은근히 권유하는 것이나 아닐까.
12
역사상 모든 시대에서 소위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개탄하여 마지 않은 것
들 중의 하나는 자기의 시대가 너무 물질적이고 타락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곧잘
그것을 근거로 인류의 역사는 머지 않아 끝나 버릴 지고 모른다는 우려를 표명하곤 했다.
그러나 어쨌든 역사는 계속되고 인류는 진보를 거듭해 왔다. 우리의 시대도 많은 개탄과 우려의
대상이 돼 오기는 했지만 아직 절망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13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있어 학문은 모든 가치의 근원, 아니 총화였다. 그것이 과거를 통하면 권
력과 부귀가 되었고, 수양을 통해 인격과 합일하면 거의 종교적인 존숭(尊崇)까지도 획득할 수
있었다.
사람의 높고 낮음, 옳고 그름이 모두 그것에 죄우되었고 때로는 가짐과 못가짐조차 그것이 결정
했다. 가치가 분화되지 못한 사회를 명분과 윤리만으로 조직할 때 나타나는 가치체계의 한 전형
이었다.
14
무엇 때문이었건 일찍이 자신이 속했던 특권적인 신분에서 도태된 엘리트가 그 사회에 대응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그 하나는 자신을 밀어낸 체제 전반에 대해 적극적인 반역을 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회귀
본능에 자신의 모든 재능과 열정을 바치는 것이며, 나머지는 자학에 시달리다 서둘러 하위 계층
으로 편입돼 가는 것이다.
15
불행하게도 처음 뒤떨어진 자는 영원히 가진 자를 따라잡을 수 없게 되어 있다.
16
단 한 사람을 위해 수천 수백의 사람들이 피를 쏟고 땀흘리는 땅.
17
지천으로 쌓인 고기와 낟알 곁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 동료들과 산더미 같은 털가죽더미 속에
서 벌거벗은 채 떨고 있는 동료들, 한줌의 낟알을 위해 자기의 마지막 한 방울의 힘까지 짜내 이
미 가진 자를 더 많이 가지게 해주어야 하는 불행한 형제들과 한 토막의 고기를 위해 아무 곳에
서나 웃으며 다리를 벌려 주어야 하는 불행한 자매들.
18
불확실한 미래에 만 명을 구하게 되는 계획보다는 지금 당장 눈앞에서 고통받는 하나를 구해내
는편이 낫다.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그 전파와 호응에 힘입어 세계를 바꾸려는 것은 가진자의 각
성과 거기서 비롯된 자비심으로 세상의 상처들이 절로 치유되기를 기다리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세계의 개선이 지연되는 것은 앞서가는 철학과 논리를 행동이 허겁지겁 뒤따랐기 때문이다. 나는
오히려 그들더러 뒤따르라 하고 행동으로 앞서가는 쪽을 택하기를 희망한다. 행동의 아름다움은
작더라도 확실한 걸 얻어내는 데 있다…….
19
우리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인위적으로 조직되어선 안된다. 아무리 훌륭한 대의와 현명한 원리로
이루어지더라도 조직은 필경 그 조직을 꾸민 자 또는 원하는 자의 이익에 봉사하게 되어 있다.
또한 조직은 반드시 의사(意思)의 위임을 요구하며, 결정권의 집중을 가져온다. 그리고 거기서
한 수장(授長)이 태어나며, 처음 그는 동배(同輩) 중의 으뜸으로 출발할 것이지만 이윽고는 도전
할 수 없는 절대자로 우리들 위에 군림하게 된다.
20
법과 질서에 대한 죄의식이나 선천적인 나약함 탓도 있겠지만, 군중이란 원래가 이상한 정열에
휘말리면 성난 파도처럼 휩쓸어 갈 수도 있으나, 일단 각자의 얄팍한 타산과 실리(實利)가 그 정
열을 제어하게만 되면 가을 벌판의 가랑잎처럼 흩어져 가고 마는 것이다.
21
이 시대에는 이미 순순한 개인이란 존재할 수 없다. 어디를 가든 우리는 집단에 소속하게 되어
있고, 그 집단은 또 나름대로의 위계와 규율을 우리에게 강요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취직을 한
다는 것은 군대의 대대장이나 사단장이 전무나 사장으로 바뀌는 정도이다. 명칭은 감봉이나 징계
따위로 다르지만, 그곳에도 빳다와 기합같은 게 있다. 그리고 때로 그것은 우리가 군대에서 체험
하는 것보다 몇 배나 더 잔인하고 철저하다.
22
모든 병사는 군번과 함께 그 절망을 잠재의식 속에 지급받는다.
23
모든 것을 타아(他我)에 맡겨 버린 자아의 절망. 우리에게 존재를 부여하는 생명까지도 병사(兵
士)는 자기 것으로 가지고 있지 않다. 그가 가진 것은 철저한 무(無).
24
적을 볼 수 없다는 것――그 때문에 현대전의 잔학성이 있다.
항병(降兵)을 도살한 경우 그로 인해 천하를 잃었고 포로를 학대한 나치나 일제의 장군들은 전
범(戰犯)으로 처벌되었다. 그러나 포탄이나 미사일의 발사를 명한 현대전의 장군들에게는 아무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 전자는 적을 보았는데 비해 후자는 적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날아간 포
탄이나 미사일은 분명 항거의 의사나 능력을 묻지 않고 대량으로 적을 도살하였는데도.
25
이익도 크지만 투자와 위험도 큰 장사가 전쟁이다.
26
정치적 불만은 한 번 참지 못하고 폭발하게 되면 계속하여 참을 수 없게 되고 만다.
27
어둠은 요기(妖氣)다. 그것은 언제나 밝은 사유(思惟)와 논리를 방해하는 법이다. 우리의 감정
을 과정하거나 왜곡시켜…….
28
논리에 감정이 개입되면 그 논리는 끝이다.
29
사람이 필요 이상 법에 의지한다는 것은 간교해진다는 뜻이다.
30
언제나 한 발 늦는 것이 법(法)과 이성(理性)이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범인은 달아나고
감정은 제멋대로 일을 처리한 뒤인 것이다.
31
법은 정치로부터 객관화되어야 할 것이지만, 아직 지상에서 그런 법이 시행된 적은 없다. 그것
은 이상(理想)이다. 재판을 맡는 정의의 여신 의 눈을 가린 것은 희랍인의 예지였을 뿐 땅 위의
법은 언제나 눈을 부릅뜨고 재판당할 자의 색깔부터 살핀다.
32
법의 가장 크고 우선되는 목적은 그 법을 산출한 체제를 보호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나머지는
마로 그 대전제 아래서 부수적으로 추구될 따름이다.
33
형벌의 이론은 원시의 동해보복(同害報復)에서 오늘날의 교육형(敎育刑)까지 눈부신 발전을 거
듭했지만 현실은 언제나 이론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34
법학은 많은 천재를 삼킨 학문이고, 또 그들의 노력으로 상당히 정비되었지만, 불행히도 인간의
전형태를 포착할 수는 없다. 그것은 법학 자신의 책임이라기보다는 그의 주요한 도구인 언어(言
語) 탓이다. 아마 수많은 법학자들이 가장 고심하여 싸운 적(敵)은 언어의 불완전성이었을 것이
다.
35
가장 보수적인 외형을 하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진보적인 것이 관료이고, 가장 진보적인 외형
을 하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보수적인 것이 기자(記者)라고 한다.
관료는 강력한 통제력을 가진 상부층이 있지만 기자는 그게 없어 설령 상부가 진보적이 되더라
도 관료사회와 같은 파급효과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은 개개인의 진보적 성향에 의지
할 수밖에 없는데, 그건 또 비판정신이란 직업적 강박관념에 방해당한다. 비판이란 대개 기존관
념에 근거하고 따라서 또한 보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36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선거를 통해 나왔고 법관은 시험을 쳐서 자격을 얻었지만 언론은 자임
(自任)에 불과하다. 그 힘은 오직 스스로 설정한 책임과 사명을 성실하게 수행하는데서 나올 뿐
이다.
37
인간이란 예측할 수 없는 앞날에 대해 얼마나 나약하고 비논리적이 되는지!
38
인간이 적응하지 못하는 환경이 있을까. 인간이 감당해내지 못할 고통이 있을까!
39
세상을 움직이는 힘의 절반은 거짓과 광기라고 해야 될 것이다.
40
당신들의 양보와 포기는 가진 자들의 음모를 보다 용이하게 만들고 그 패거리의 힘을 더하는데
이바지한다. 하지만 언제나 기억하라. 내주기는 쉽지만 되찾기는 어렵다는 것을.
41
남의 아픔은 아픔이 아닌 시대!
42
유행(流行), 그것도 또 하나의 폭력이다.
43
이념이 합리적인 설득을 포기하며 남는 것은 폭력적인 파당(派黨)이다.
44
이념 그 자체는 인간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고안(考案)에 자나지 않고, 따라서 그것은 다른
여러 고안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위한 도구 또한 수단의 성격을 띤다. 그런데 그 이념을 위해
인간이 희생되거나 양보가 강요된다면 그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주객전도(主客顚倒)가 될 것인가,
목적이 수단을 위해 고통받고 학대당해야 한다면.
미래의 행복이 현재의 비참과 불행을 보상해 주리라는 약속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이미 종교가
수쳔년에 걸쳐 써먹은 낡은 속임수이다.
45
크건 작건 옳건 그르건 이데올로기라고 부를 수 있는 관념체계의 핵심은 바로 그 전망에 있다.
어떤 이데올로기든 그 힘은 전망의 실현 가능성에 비례하게 되어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실현 가능성이라기보다는 기만적인 분장술에 있다. 그리하여 당대인들을 현혹하기에 충분한 분식
(粉食)을 갖추게 되면 그 이데올로기는 곧 힘이 된다. 신화의 시대에는 신화에, 감성의 시대에는
감성에, 그리고 이성의 시대에는 이성에 걸맞는 분식.
46
당신들은 내 전망의 결여를 걱정하지만 나는 오히려 지나치게 무성한 당신들의 전망을 걱정한
다. 당신들은 내 무이념(無理念)을 의심쩍어 하지만 나는 또한 오히려 당신들의 이념의 과잉이
못 미덥다.
우리는 분열된 세계 제국(世界帝國)의 변경인(邊境人)이다. 이 두 세계 제국의 뿌리를 동서(東
西) 로마 제국의 분열에서 찾든, 너무 익은 서유럽 문명의 자기 분열로 보든, 우리는 오랫동안
그 제국의 판도(版圖) 밖에 있었다. 그러다가 이 세기에 와서 겨우 그 제국에 편입되었으나 이번
에는 단순한 주변이 아니라 변경이었다. 주변과 변경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하나는 그저 핵심에
서 멀리 떨어져 있을 뿐이지만, 다른 하나는 그 경계선 너머 또 다른 적대 세력 또는 세계 제국
이 존재해 있다는 뜻이다.
그런 변경에 제국이 가져올 것은 뻔하다. 그것이 변경의 확대를 위한 것이건, 유지를 위한 것이
건, 제국이 가장 힘주어 그 원주민에게 주입시키려는 것은 적대의 논리다. 결국 당신들이 요란하
게 떠드는 것도 따지고 보면 오늘날 아메리카와 소비에트로 표상되는 두 제국(帝國)의 적대 논리
내지 그 변형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그것이 당신들이 이념이라고 부르는 것의 정체다.
때로 당신들도 그 실상을 꿰뚫어봐 이번에는 이른바 제3세계를 빌어 온다. 그러나 내가 거기서
보는 것은 검은 피부나 갈색 피부를 빈 제국의 정신이다. 간혹 그것이 자기가 속한 제국에는 이
탈이거나 저항의 외양을 띠고 있어도 결국 상대방 제국의 변경 확장을 돕는 이념 장치로 기능할
뿐인. 소르본느에서 또는 옥스퍼드에서 공부한 아프리카 사상가 아무개씨(氏)며, 하버드에서 공
부한 중남미의 종속이론가 아무개씨며, 해방 신학자 아무개씨, 그들이 과연 검은 아프리카의 정
신이고 누런 아마존의 이념일까.
더군다나 일류의 정신은 앵무새처럼 되뇌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제국이 짓고 퍼뜨린 노래
는 다만 이류(二流)의 정신만이 기억과 지혜를 혼동하고 암송(暗誦)을 선각(先覺)과 착각하며,
즐겨 제국의 책상물림이 책임없이 얽어놓은 이념의 헌신적인 사도(使徒)를 자처한다…….
47
월북자나 부역자의 버림받은 자식들에게는 어느 정도 공통된 정신의 단계가 있다. 하나는 아버
지와 그의 이념에 대한 분노와 원망의 단계요, 다른 하나는 흥미와 동경의 단계다.
분노와 원망의 단계는 대개 그가 겪어야 했던 혹독한 성장환경에서 비롯된다. 육체는 밑바닥 삶
의 진창을 기고 정신은 끊임없는 좌절과 억압을 맛보면서 이념 그 자체보다는 그 이념이 자신에
게 끼친 결과에 속 깊은 원한을 품게 되는 것이다.
분노와 원망이 다분히 후천적(後天的)인 데 비해 흥미와 고안한 것인 만큼 그들이 빠져 있는 여
러 문제들에 가장 가까운 근사치의 답을 주리라는 따위 논리적인 추측의 도움도 받지만, 그보다
는 피의 동질성이 그 아버지가 소중하게 품고 죽어갔던 이념에 대해 호의어린 탐색의 눈길을 보
내게 하는 것이다.
그런 단계의 순서는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고, 어떤 때는 동시적(同時的)이기도 하다. 또 그런
단계들이 개인의 정신에 남기는 흔적도 여러 가지로 다르다. 어떤 이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원한
으로만 결정되고, 어떤 이에게는 아버지의 적(敵)에 대한 때늦은 복수감으로 자리잡으며, 드물게
는 객관성을 유지한 채 그들의 화해와 타협을 시도하기도 한다.
48
인간의 의식, 특히 정치적 사회적 의식은 어떻게 형성되고 자라나는 것일까.
학자들은 흔히 인간의 정치 의식, 특히 격렬하고 진보적인 의식의 바탕으로 유년기에 겪은 박탈
의 체험을 말한다. 원래 있었던 여러 생존의 필요 조건을 적극적으로 빼앗겨 본 체험뿐만 아니
라, 소극적인 결여의 인식도 한 인간의 의식을 역동적(力動的)으로 변형시켜 간다는 그 논의가
근거 있는 것이라면 나야말로 가장 풍부하게 가치 박탈을 체험하고 자란 정신이었다. 나는 빼앗
기고 빼앗기던 나머지 청소년의 꿈조차 일그러지게 된 아픔을 일생 기억속에 간직하고 살아야 했
다.
또 어떤 이들은 초자아(超自我)나 부성(父性)의 결여에서 우리들 일부가 종종 사회나 정치에 품
게 되는 어두운 열정과의 관련을 찾으려고도 한다. 그것이 극우(極右)이든 극좌(極左)이든 파괴
적인 충동을 정당화한 변혁의 논리를 창안하고 실천한 사람들의 성장 과정에서 흔히 보이는 그러
한 흠결(欠缺)에 착안한 듯하다.
49
한 생각의 틀로서 평범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은 일쑤 귀족주의나 선민의식이다. 가끔 우리 주
위에서 이런 형태의 인간들을 만나게 된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재능에 또한 평범하기 그지없는
처지면서도 스스로를 비범하다고 믿고 다른 사람의 평범함을 찾아주지 못하는 사람들.
대개는 어떤 형식으로든 몰락을 경험했거나 영광스러웠던 과거의 기억을 가진 경우가 많은
데――참으로 곤란한 존재들이다. 그들에게는 더불어 라는 개념이 없다. 몸도 마음도 평범하고,
또 평범한 사람들 속에 묻혀 살면서도 그들은 언제나 그 상태를 자신의 일시적인 전락이라고 단
정한다. 그래서 기억의 과장으로 터무니없이 엄청나진 과거 그 자체에 몰입하거나 그 때문에 평
범한 사람들보다 몇 배나 강렬해진 신분 상승의 욕구에 휘몰려 스스로를 망쳐버리고 만다. 열에
아홉, 결국 경멸해 마지않던 평범에조차 이르지 못하는 점에서 그들의 터무니 없는 귀족주의나
선민의식은 스스로를 상하게 하는 칼 밖에 되지 않는다…….
50
이성(理性)의 중재가 있고, 서로간에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판관은 많을수록 좋다. 그러나
금세 광란과도 같은 불안과 혼미에서 빠져나온 판관, 그것도 언제나 옳은 것은 자기 하나뿐이라
는 오랜 사유 습관에 젖어 있는 판관이 많다는 것은 판관이 없다는 것과 같다. 판관도 없이 열
사람이 열 가지 주장을 하고 백 사람이 백 가지 길을 고집하게 되면, 남는 것은 다만 피투성이
싸움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승리의 추구뿐――이렇게 현대사(現代史)의 고뇌와 시련은 시작
되었다.
51
민주――인간이 찾아낸 가장 완벽한 정치적 이상(理想).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똑같이 그 말을
쓰고 있지만 아직은 둘 다 비어 있는 곳이 많은…….
52
너희는 먼저 지워라. 부정해라. 진정시켜라. 그것이 어떠한 이념 어떠한 사상이건 언제까지고
교묘한 논리와 현란한 수식으로 민중을 현혹하도록 놓아 두지 마라. 모든 이데올로기에 거역하
고, 그 찬란한 약속 뒤에 감추어진 독이빨과 날카로운 발톱을 경계하여라. 그 대의(大義)가 아무
리 휘황하더라도, 그걸 위해 죽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한껏 비웃고 경멸하여라. 하나의 이념, 하
나의 사상에 대한 신념과 열정이 부질없음을 깨우쳐주고, 그 위험천만한 분기(奮起)를 야유하여
라. 몸과 마음이 성한 사람 가운데서 단 한 사람이라도 반대자가 있거나 그로 인해 불이익을 받
을 사람이 있다면 모든 이데올로기, 모든 사상은 지워지고 부인되어야 한다.
집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너희는 너희를 자기 이름 아래 끌어들이려는 모든 집단에 반역
하여라. 넓게는 인민(人民)이나 민중으로부터, 좁게는 무산자(無産者)와 중산층, 지지세력, 반대
파 따위 그 어떤 이름으로도 너를 묶으려드는 자들을 거부하여라. 특히 그 집단의 범위가 넓으면
넓을수록, 예상되는 잠재력이 크면 클수록 너희는 더욱 단호해야 한다.
아직 집단의식(이를테면 민중의식 같은 것)이 형성되지 않았는데도 그 이익을 위해 헌신하겠다
는 자가 있으면 그 자를 경계하여라. 그 자는 아첨하는 자이다.
의사의식(擬似意識)을 조작하고 퍼뜨리는 자는 의심하여라. 그 자는 너희를 이용하려는 자이다.
조직하려는 자는 미워하여라. 그 자는 너희에게서 빼앗으려는 자이다.
동원하려 하는 자는 더욱 미워하여라. 그 자는 이윽고 너희 위에 군림하려는 자이다.
우리 중에 단 한사람이라도 빠진 집단을 조직하려 하고 더욱이 거기에다 어떤 우월을 인정케 하
려는 자가 있다면 형법의 모든 죄목이 그 자의 기소장(起訴狀)에 기입돼야 한다.
53
혁명의 이튿날 아침에 사람들은 언제나 허망한 기분에 젖어 깨닫곤 한다. 얻은 것은 말(言語)
뿐이며 뒤엎은 것은 신조(信條)와 인물뿐이었음을.
고향
1
아아, 아버지, 아버지.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사진조차 본 적이 없는 그 막연한 추상, 그러나
집안 구석구석 살아서 떠돌며 끊임없이 재난과 불행의 먹구름을 몰고 오던 두렵고 음산한 망령,
내 삶의 부하(負荷)였으며 알 수 없는 원죄(原罪)를 내 파리한 영혼에 덮씌우던 악몽, 깊은 밤
선잠에서 깨어나 듣던 어머님의 애절한 흐느낌과 몽롱한 내 유년 곳곳에서 한과도 같은 그리움을
자아내던 이였으되 또한 듣기만 해도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소스라쳤던 이름의 주인…….
2
오늘날 한학(漢學)이라고 뭉뚱그려 말해지는 그 시대의 학문은 백과사전인 종합 학문이었다. 자
연과학이 들어있는가 하면 철학이 들어있고, 문학이 있는가 하면 역사가 있었다. 정치학 사회학
이 들어있고 윤리학 미학이 들어 있었으며, 오늘날의 모든 분과(分科)가 한 이름 아래 묶여 있었
다.
3
역사상 한 집단, 또는 한 민족의 문화는 대중 일반의 공통된 수준이 아니라 소수의 엘리트의 정
신적 성취로 대표되어 있다. 양반은 그런 우리 민족의 엘리트였으며, 그 정신은 바로 우리 문화
의 정화(精華)였다.
4
양반정신은 그것이 우리 민족의 보편적인 성향으로 발전될 수만 있다면 그 어느 것보다도 훌륭
한 민족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학문에 대한 존중, 예술에 대한 사랑과 이해, 엄격한 도덕률,
청빈과 지조, 매운 얼 그리고 자존심과 긍지――그런 것들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5
우리들의 옛 도덕도 옛 학문과 운명을 같이 했다. 자식의 고기를 삶아 아비를 봉양한 효자, 손
가락을 잘라 시어머니의 위급을 구한 효부, 순사한 열녀, 한때 그 어떤 황금의 비석보다 찬란히
빛났던 이들의 행적은 잊혀지고, 대신 아비를 치지 않으면 될 수 있는 효자와 시아버지를 쫓아내
지만 않으면 될 수 있는 효자와 시아버지를 쫓아내지만 않으면 될 수 있는 효부와 성 다른 아이
만 낳지 않으면 될 수 있는 열녀의 세상이 되었다.
나라에 대한 충성이나 친구간의 신의는 거대한 이기속에 매몰되었으며, 남녀 유별의 옛 율법도
깨어졌다. 공공연한 염문이 나돌고 거리에서 희롱하는 남녀가 생기는가 하면 처녀들은 아무도 젖
을 싸매지 않고, 부끄럼 없이 종아리를 드러냈으며 조심성 없이 소리내어 웃었다.
6
의무는 반대급부가 없을수록 지켜야 할 가치가 있으며, 예의 범절은 거추장스럽고 까다로와서
오히려 소중하다는 것을 아는 종손, 물질적인 결핍이나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자랑스런 조상들
의 정신적 육체적 면모가 자기 몸에 체현되어 있음을 깨달아 잊지 않는 종손, 사람은 저마다의
격을 가지고 태어나며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걸 잃는 것은 바로 삶 자체를 잃는 것과 같다
는 것을 알고 그걸 지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고통과 가난이라도 묵묵히 감수할 수 있는 종손.
7
칼에는 군자의 칼과 소인의 칼이 있다. 소인의 칼은 무쇠를 수없이 달구어 벼린 날카로운 물건
이요, 군자의 칼은 마음 속의 어진 덕이다. 그러나 소인의 칼은 열 사람을 베기도 힘들지만 군자
의 덕은 천하만민을 굴복시키고도 오히려 힘이 남는다.
8
이 땅에서 가장 값지고 귀한 것은 항상 밖으로부터 들어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학문이나
사상에서도 적용되어 이 땅에서 최고의 석학이나 가장 존경받는 사상가는 항상 외국의 것을 가장
먼저 그리고 정확하게 습득한 이들이었다.
따라서 외래의 것은 무조건 먼저 받아들이는 쪽이 엄청난 이익을 가져온다는 관념이 형성되어
그것은 대외의존성향(對外依存性向)과는 또 다른 종류의 미신(迷信)으로 자라갔다.
9
오늘날의 젊은 세대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는 읽으면서도 사서삼경은 낡았다고 읽
지 않고, 보들레르에게는 감탄하면서도 이하(李賀)를 아는 이는 드물다. 니이체에게는 심취하면
서도 장자를 이해하려 들지는 않고, 로버트 오웬은 알아도 허자(許子)는 낯설어 한다. 그러나 진
정으로 우리가 세워야 할 문화와 유형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전통에 깊이 뿌리내린 동양적인
것과 새롭고 활기찬 서구적인 것의 조화에 있지, 어느 한 편에 대한 일방적인 배척과 다른 편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종이나 몰입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문화적인 사대주의의 부활이라는
비난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나치리 만치 자주 중국의 고전들을 인용하였다. 서구인들이 그
리이스·로마 문명에서 자기들 전통의 뿌리를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동북아문화권(東
北亞文化圈)에서 찾는 것을 부끄러워 해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10
오, 그 할아버지들. 우리들 옛 정신의 권화, 은성(殷盛)했던 시절의 흰 수염 드리운 수호부(守
護符).
춘삼월 꽃 그늘에서 통음(痛飮)에 젖으시고, 잎지는 정자에서 율(律) 지으셨다. 유묵(儒墨)을
논하실 땐 인간에 계셨지만 노장(老莊)을 설하실 땐 무위(無爲)에 노니셨다.
당신들의 성성한 백발은 우주에 대한 심원한 이해와 통찰을 감추고 있었으며, 골 깊은 주름과
형형한 눈빛에는 생에 대한 참다운 예지가 가득 고여 있었다.
지켜야 할 것에 엄격하셨고, 노(怒)해야 할 곳에 거침이 없으셨다. 한 번 노성을 발하시면 마름
하늘에서 벽력이 울렸으며 높지 않은 어깨에도 구름이 넘실거렸다.
그런 당신들을 우리는 모두 존경하였고, 그 말씀에 순종했다. 아침에 일어나 절하며 뵙고, 거리
에서 만나면 두 손 모았다. 주무실 때 절하며 물러나고, 길은 멀리서부터 읍(揖)하며 비켜섰다.
그러나 이제 그런 당신들은 모두 사라지셨다.
제5부
성(性)에 관련된 몇 생각
삶을 사랑하는 여성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