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아, 통일이여 ! )
연성길의 아이들은 12살 남자애와 9살 여자애였다
사전에 연성길에게 단단히 교욱을 받았는지 아이들 답지 않게 산길도 잘 걸으며
부지런히 따라왔다
그러나 비로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이 땅은 단군이 백두산 신시 (申市)에 나라를 세운 이래로 처음 민족끼리 갈라져서
함부로 내왕할 수 없는 동토의 왕국이었으니까
아이들 때문에 2시간을 걷고 10분 휴식하며 산을 타고 있었지만 아이들은 지친 티를
내지 않았다
그런 아이들이 측은해서 비로는 마음이 쓰려왔다 남한 땅의 아이들은 풍족하게 살지만
북한 땅 아이들은 피골이 상접한 얼굴이었다
"여기서 잠시 쉽시다"
어깨에 맨 배낭을 내려놓으며 심마니 요원이 한 마디 하자 연성길이 아이들에게 물병을 주며
긴 호흡을 몰아쉬었다
"아이들이 제법 잘 따라오는군요"
" 네. 애들도 알고 있디요. 여기서는 살 수가 없고 남한으로 가야 산다는 것을 말이디요"
"김정일은 왜 자신의 최측근인 연형묵을 처형한 것인가요?"
"삼촌의 거듭된 개방정책 만이 살길이란 말에 김정일도 수긍하는 쪽으로 가고 있었는데
김일철 군 총참모장의 되도 않는 모함으로 삼촌은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이디요"
"되도 않는 모함이라면?"
"개방으로 나가면 삼촌이 인민들의 우상으로 떠올라서 김정일이 축출될 수 있다는 소리에
김정일은 불안감을 느꼈을 겁메다 그리고는 개방정책 보다는 핵폭탄을 개발하는 것만이
조선인민공화국이 사는 길이라는 꼬임에 김정일은 결국 핵을 선택한 것으로 보입메다"
"안타까운 일이군요 핵 개발 보다는 개방으로 가는 길이 더 통일에 가까운 길일텐데"
"길티요. 그러나 군은 자신들의 기득권 때문에 개방정책을 외면하고 핵을 고수한 것이라요
김정일이도 작은 북한 땅에서 그나마 왕처럼 사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을 했겠디요"
숲 속에 흐르는 물에 물병을 채운 비로와 심마니 요원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늘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빗방울이 쏱아질 것만 같은 날씨였다
아니나다를까. 빗줄기가 한 두방울 씩 떨어지더니 얼마 안가서 굵은 빗방울로 떨어지고
있었다
"비에 옷이 다 젖기 전에 작은 동굴 같은 곳을 찾아야 겠습메다"
아이들을 추스르는 연성길 목소리에 비로는 큰 나무들 사이로 앞장 서서 걸어가며 비를 피할 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그 때 위쪽에서 부산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며 곧 서너명의 건장한 물체가 보였다
비로는 긴장했다
" 아니. 뭐하는 동무들이기에 비가 쏱아지는 산길을 오름메? "
연성길이 앞으로 나서며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약초배낭 한 개가 떨어진 것 같아서 찾아보려 다시 올라가는 중입메다 아재들도 약초꾼이됴?"
"그렇슴메다. 근데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는 판에 아이들까정 데리고 올라감메?"
"오늘은 수지가 좋았던지 황제더덕 200년짜리도 캐고 제법 값나가는 약초들을 솔찮히 캐쌌는데
그 가방을 잃어버렸디요 그래서 찾아야 합메다"
"길티요? 그러면 얼렁 찾아봐야 겠디요. 저 오른쪽 능선으로 약 100여 미터 가면 동굴이 하나 있으니
거서 쉬면 되겄디요"
"아, 기래요? 구맙수다래 아재 동무들. 조심해서 내려가드래요"
약초꾼들이 알려준 동굴에 당도한 비로는 손목시계를 꺼내 보았다
"하필이면 비가 내리다니...........제 시간에 당도하기 힘들겠는데요"
"비가 내리므로 발길이 더디다는 건 장재근 요원님도 인지하실 거니까 크게 염려는 아니지만
아까 내려간 약초꾼들이 자꾸 걸리는군"
심마니 요원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하자 비로와 연성길은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지요?
아까 그 약초꾼들 가방을 보았네. 약초꾼들이 하루 왼종일 산을 타면서 약초를 캤을텐데
가방이 텅 빈 것처럼 가벼워 보이더군"
역시 요원의 눈썰미는 다르구나 생각한 비로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그자들은 약초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확실히는 모르지만 가벼워 보이는 그 가방이 자꾸만 신경이 쓰이네"
연성길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저도 그런 느낌을 받았습메다. 산을 탄 사람의 행색치고는 옷이 제법 깨끗해 보였습죠"
"그러면 혹시........."
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했던지 심마니 요원은 가방을 다시 둘러메며 소리죽여 말했다
"비를 맞더라도 즉시 떠나야 겟습니다. 연성길 씨는 아이들을 잘 챙기며 따라오세요"
빗방을은 더 굵어지진 않았다 빗줄기도 아까보단 약해진 듯 보였다
그러나 아이들이 이 빗줄기를 헤치고 잘 나아갈지 걱정스러워진 비로는 뒤쪽으로 쳐져서
아이들을 챙겨주고 있었다
춤추는 소년도 여자 아이 손을 꼭 잡아주고 함께 걸었다
땅거미가 몰려오고 있었다 어두워서 걷기가 불편해진 비로 일행은 동굴같은 곳을 찾아보기
위해 사방을 두리번 거렸다
요행히도 다시 작은 동굴을 발견한 비로 일행은 동굴에서 하룻밤 머물기로 했다
동굴에서 삶은 감자로 간단히 허기를 때운 일행은 모닥불을 피웠다
"이번에 연성길 씨가 건네준 서책과 가림토는 보물보다 더 귀한 물건이라지?"
심마니 요원의 굵은 목소리에 비로는 싱긋 웃었다
" 서책은 친일 매국노들 명단이 들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가림토 문자는 잘만 연구하면
세계의 문자와 언어를 하나로 통일되게 만들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심마니 요원과 연성길이 비로의 말을 듣자 입을 쩌억 벌렸다
"그정도인가? 굉장하구먼"
"14억의 중국 인구가 사용하는 한문도 실상은 우리 동이족 사람이 만들었다는 증거가 있으니
가림토는 한문보다 더 쉽게 이해하도록 배우고 쓸 수 있는 문자라고 합니다 따라서 세계의
글자와 언어를 하나로 통일할 수 있다는 말은 허황된 것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역시, 우리 한국인들 머리가 비상하다니까"
셀죽 웃으며 말하는 소년의 익살맞은 표정에 비로가 싱긋 웃었다
" 그 좋은 머리로 사기나 치고 다니니까 문제지"
"글쎄 말이우. 머리가 너무 좋은 것도 문제인가?"
그때 심마니 요원이 연성길을 보고 말했다
"성길씨는 대학에서 무엇을 전공했다고요?"
"김일성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 했습메다"
"학사인가요?
"러시아 모스크바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마쳤습메다"
"그러면 한국에서 포항공대 쪽이나 제철로 가면 되겟군요,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고맙습니다. 김씨 일가에게 속은 걸 생각하면 ........"
연성길이 아이들 얼굴을 쓰다듬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씨 일가에게 지금도 속으면서 실상을 모른채로 살아가는 북한 주민들의 참혹한 모습이
떠올라서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날이 밝자 일행은 서둘렀다
어제 내린 비때문에 까먹은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연성길도 이쯤부터 힘든 내색을 하는
아이들을 재촉하고 다독이면서 부지런히 뒤따르고 있었다
두 시간을 걷고 십분 휴식을 하며 해가 중천에 다다를 무렵 몇 개 남은 감자로 마지막 점심을
먹으려는 데 뒤쪽에서 묵직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자 낌새가 이상함을 느낀 심마니 요원이
잠시 뒤쪽을 살펴보러 내려가더니 다급히 올라오면서 배낭을 메고 뛰라고 말했다
비로 일행은 반사적으로 손에 든 감자를 팽개치고 배낭을 둘러메고 앞쪽으로 뛰었다
"요원님 무슨 일입니까?"
"어제 만났던 약초꾼들일세 손에 무기가 들려있었네"
"그러면....."
"정보부 소속의 인민군들이겠지"
"우릴 쫒아온 것이군요"
"그럴테지. 비가 내리는 데 산으로 올라가는 우리들이 수상해 보였겠지"
그 때 뒤쪽에서 탕탕 하는 총소리가 들려왔다
연성길이 사색이 된 얼굴로 양쪽에서 아이들 손을 잡고 필사적으로 뛰었다
춤추는 소년과 비로도 긴장된 얼굴로 필사적으로 뛰었다
"요원님 모두 몇명입니까?"
"네 명일세"
"원산 시가지까지는 몇 시간 남았을까요?"
"세 시간이면 충분하겠네"
"그렇다면 부지런히 가십시오 저 놈들은 제가 유인하겟습니다"
"무슨 소린가. 함께 가야해"
"걱정 말고 가십시오. 저를 믿으세요"
그렇게 말한 비로가 몸을 돌려 옆 쪽으로 내달렸다
소년이 두 눈을 크게 떴지만 연성길의 막내딸 손을 잡고 비로가 말한대로 앞만 바라보며 뛰었다
산길을 뛴다는 것은 속도가 날 수 없었다 그것은 북한 약초꾼들도 마찬가지다
옆쪽 길로 뛴 비로는 커다란 바위 뒤에 멈춰 서서 허리춤의 표창을 꺼내 들었다
그리곤 다가오는 약초꾼 중에 한 명의 목을 겨냥하고 지체없이 표창을 날렸다
한 놈이 쓰러지는 게 보였다
쓰러진 동료를 바라본 약초꾼이 놀라는 얼굴로 동료를 바라보다 비로가 있는 쪽을 바라본 순간,
그 놈도 목을 부여잡고 매가리 없이 쓰러지는 게 보였다
남은 두 놈이 연성길 일행쪽과 비로를 향해 권총을 난사하고 있었다
비로는 여기저기 나무와 바위 사이를 옮겨다니다 가슴을 부여잡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두 놈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사정권에 들어서자 비로는 잽싸게 몸을 일으키고 연속으로 표창 두 개를 날렸다
두 눈을 크게 뜬 네 개의 눈동자가 서로를 바라보더니 목을 움켜쥐고 고꾸라지고 있었다
약초꾼 네 명이 모두 죽은 것을 확인한 비로는 일행이 뛰어간 쪽으로 향했다
연성길이 총에 맞았는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약초꾼들은 처리했습니다. 이런...성길씨가 맞았군요"
"허리와 등에 두 방 맞았네. 피를 너무 흘리니 가망이....."
연성길은 가쁜 숨을 몰라쉬더니 비로를 보며 말했다
" 우리 아이들을 부탁합메다. 자유 대한민국 땅에서 교욱 받으며 행복하게 해주십쇼.
그래야 제가 편히 눈감을 것 같습메다"
비로가 연성길의 손을 꼭 잡고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맹세하지요. 제가 아이들 후견인이 되어서 끝까지 보살피지요"
"고맙습메다..고맙습......메........."
연성길이 더이상 움직이지 않자 아이들이 아바지를 부르며 애처롭게 울고 있었다
총소리가 연달아서 났기에 한시라도 지체할 수 없기에 비로와 소년은 아이들 손을 잡고
원산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무사히 장재근 요원이 기다리는 배에 오르고 배가 출발하자 긴장이 풀린 비로 일행은
자리에 주저앉아 긴 숨을 토해놓았다
"비로군. 수고했네. 비록 연성길은 아깝게 갔지만 서책과 가림토 그리고 혈육을 남겼으니
값어치 있는 죽음으로 평가 받을걸세"
"요원님. 우리는 언제까지 같은 민족끼리 총을 겨누고 죽고 죽이는 상잔을 벌여야 합니까"
"통일의 그 날은 반드시 올걸세. 비극이 세세년년 이어지리라곤 생각하지 않네"
"그랬으면 좋겠군요. 저 아이들의 미래가 더없이 밝아진다면 저는 다시 북한 땅에 가라고
해도 또 갈겁니다"
갈매기들이 배를 뒤따르며 기룩끼룩 울고 있었다
아이들도 조금은 진정이 되었는지 소년의 손을 양쪽에서 꼭 잡은 채 저 멀리 남쪽 땅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아이들 뒷모습을 바라본 비로는 두 주먹을 움켜쥐고는 낮게 속삭였다
'너희들이 다 크면 통일된 조국에서 맘껏 뛰놀며 하고 싶은 것은 다 하며 살게 되는 나라를
물려주마'
비로는 눈시울을 붉힌 채. 꼭짓점 하나 없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조용히 천부경을 암송했다
그리곤 스승의 얼굴을 떠올리며 깊은 심연의 한 곳으로 가라앉는 자신의 몸을 느꼈다
일시무시일...일종무종일...........!!
첫댓글 가을은 추수의 계절이라......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은 몸인지라 소설 연재가 많이 늦었네요
15부로 양산군자는 종결하고 뒤이어서 약초꾼들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소설을
올리겟습니다
앞으로도 많이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_()_